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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교육계 피해

2. 북촌 초등학교

작성자제주큰동산|작성시간13.02.06|조회수417 목록 댓글 0

 

2. 북촌 초등학교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인명피해가 많았던 북촌리에서는 해방 후에 항일독립운동가 출신들이 주도한 인민위원회(위원장 김태림)와 청년동맹(위원장 김완배) 등이 조직되었고, 조천면당 조직부장인 이양근24), 관음사 전투를 지휘했던 무장대 간부 김완식25) 이 있었으며, 도여맹위원장을 역임한 김진선․김이완 등 여성활동가26) 도 배출되는 등, 4․3 발발 무렵에는 좌파계열에서 ‘민주부락’이라고 불렀던 마을이었다.27)

 

  북촌리는 1947년 8월 13일 마을 안에서 총격을 가하던 경찰관에게 뭇매를 가한 소위 8․13사건을 계기로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5․10선거도 보이콧했다. 그러나 4․3 발발 이후 6월 16일의 포구사건 이전까지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28) 1948년 6월 16일에 북촌 포구에 피항한 배를 조사하던 중 승선했던 경찰관 2명을 살해하고 동승한 13명을 감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농업중학교 4학년 김덕선과 연평초등학교 지을 목재를 구하러 제주시로 가던 우도리장 김응석 등이 무장대에 의해 선흘곶 동굴에 감금되었다가 일주일만에 경찰에 구출되었다.29)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지면서 북촌리 청년들은 수배를 받아 일찍부터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1948년 11,12월 경에는 초등학생들도 수신호를 배워 빗개를 서 경찰과 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30)  49년 1월 17일 오전 11시쯤 2개 소대의 무장군인들이 공비들과 내통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북촌마을을 포위 300여 동의 가옥을 불태우고 주민 1천여 명을 북촌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차례로 인근 밭으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뒤늦게 도착한 상급 지휘관의 중지 명령으로 일단 끝났지만 다음 날 함덕으로 소개한 주민 일부가 다시 희생되어 이틀 사이에 북촌리민 4백여 명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31)

 

  북촌초등학교는 1918년 설립된 창흥사숙을 바탕으로 북촌리 1212번지에서 1943년 6월 10일 조천동공립국민학교로 개교되어 제1대 교장으로 양두혁이 부임하였고, 해방 후 1945년 9월 1일 북촌공립국민학교로 되었다.32)  4․3으로 인한 북촌교의 피해 상황을 “1949년 2월 10일 전소되어 폐교" 33), 혹은 “1949년 2월 20일 전소되어 폐교”34) 라고 기록한 문헌들이 있다. 그런데 북촌교에서 펴낸 자료에는 전소 여부를 말하지 않고 그 피해 유형을 “1949년 2월 10일 폐교”35) 되었다 라고 기록하였다.

 

  제주4․3연구소는 증언채록 과정에서 북촌리 대학살 이후 군인들이 민보단을 동원하여 북촌교 건물을 조금씩 뜯어다가 화목(火木)으로 쓰고 그 중 쓸만한 기둥 같은 것은 함덕 대한청년단 사무실과 어느 개인집을 짓는데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36)  이와 같은 사실은 이갑도37) 와 이기우38) 등 북촌 주민과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북촌교 건물이 토벌대에 의해 뜯기게 된 것도 북촌리 대학살 이후 북촌리에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인 1949년 1월 말경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홍순식(작고)이 1949년 1월 경 함덕 대대본부에서 신성회관을 해체하기 시작했다는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39) 신성회관과 북촌교의 해체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북촌교가 제주4․3에서 전소되었다고 한 「조천읍지」(1991)․「제주교육사」(1979)․「제주교육사」(1999)의 기록들은 정정되어야 할 것 같다.

 

  건물이 철거될 당시 북촌교는 1943년에 개교할 때와 마찬가지로 현 위치인 조천읍 북촌리 1212 번지에 자리잡고 있었고, 당시 학교 규모는 <그림 1>의 평면도처럼 목조기와의 본관 7개 교실(교무실 포함, 교무실 가운데 위치), 본관 뒤쪽(북)에 관사겸 숙직실 1동과 변소 1동이 있었고, 본관에서 관사까지는 비가림 장치로 이어져 있었다. 또 교실들은 25평 정도 크기였고, 교문은 남쪽 울타리 중앙에 있었으며, 후문은 현재 위치에 정식 문이 아닌 돌담을 일부 쌓지 않은 형태였다. 학교 부지는 대략 3,000평이었으나, 후에 일주도로가 확장되고, 동쪽 울타리 쪽으로 마을 진입로가 확장되면서 약 200평 정도가 줄어 들었다고 한다.40)

 

  4․3 당시 목조기와의 학교 건물의 대략적인 모습은 초창기 기성회 임원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인 <그림 4>를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갑도․이기우는 4․3으로 북촌교는 7개 교실 일체가 뜯겨나갔다고 하였다. 최근 북촌초등학교총동창회에서는 북촌초등 60년사를 발간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데 총동창회 윤성식 총무로부터 입수한 1949년 당시 재학생 명단에 의하면 6학년이 67명, 5학년이 54명, 4학년이 59명, 3학년이 35명이었다.

 

  윤총무는 총동창회에서 파악한 4․3에서 희생된 학생들로 1949년 당시 6학년 김운룡․이양언, 5학년 김문철윤상석․ 이복환, 4학년 문인생․ 백대경․ 이덕환․ 고부자․ 문용녀․이복란 등이라고 전해 주었다. 그런데 「제주도4․3피해조사보고서-수정․보완판」(1997)에서 이들 중 김문철41), 문인생42), 백대경43), 윤상석44), 이덕환45)의 이름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49년의 재학생 명단과 「제주도4․3피해조사보고서-수정․보완판」(1997)에 신고된 명단을 확인한 결과, 당시 6학년 오병순46)윤춘자47), 5학년 이근호48), 3학년 윤경자49) 등이 4․3으로 희생된 북촌교 학생들이었다.

 

  「북촌초등 60년사」 집필을 책임지고 있는 북촌교 출신 황요범(현 신촌교 교무부장)이 장윤승(당시 북촌교 6학년), 김석보(당시 북촌교 5학년), 이기원(당시 북촌교 6학년), 윤두경(당시 북촌교 6학년) 등과의 대담을 통해 파악한 4․3 당시 교직원 명단은 교장 문덕순, 교사 김성택․이항원․이재인․이송림․김정희․이덕삼, 주사 강남수 등이었다. 황요범 선생은 이 증언자들에게서 이송림 교사는 4․3 때 끌려가서 희생되었고, 이재인 교사는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증언을 채록하였다. 이밖에도 당시 북촌교에서 강사로 근무하고 있던 이근수․이항식 선생도 4․3으로 사망하였고, 조천중학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북촌리 김원종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었다.50)  또한 1960년 국회 진상 조사 때 올린 피해 신고에 당시 제주중학교 교사였던 북촌리 출신 이맹복이 제주경찰서에 끌려간 후 행방불명 된 것으로 되어 있다. 51)

 

  결국 북촌교는 4․3으로 인해 폐교되었고, 학생들은 주로 함덕교에서 수학하다가 1950년 7월 4일 함덕초등학교 북촌분교장이 문을 열면서 <그림 2>의 백구돌 도갓집에서 학생들을 공부시키다가 도갓집 자리에 <그림 3>의 신성회관을 건립하고는 1, 2, 3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2회 졸업 기념 사진 <그림 5> 참고). 그러다가 1955년에 현 위치로 옮겨오면서 <그림 6>의 석조 기와 3개 교실을 건축하였다.

 

     

북촌 초등학교

 

∙위치 : 북촌리 1212 번지

∙대지 : 약 3,000여 평

∙건축 재료 : 목조 기와

 

<그림 1> 철거 전 학교 평면도

 

 

 

<그림 2> 백구돌 도갓집 상상도(부철규의 고증에 의해 황요범 그림)

 

 <그림 3> 신성회관 상상도(부철규의 고증에 의해 황요범 그림)

 

<그림 4> 1943년 개교 당시 기성회 임원들(목조 기와의 본관 건물을  배경으로 촬영)

 

<그림 5> 제2회 졸업생(1955.3.19 졸업)과 신성회관

 

<그림 6> 복구 후의 북촌초등학교

 

 

24) 제주4․3 연구소, 「4․3 장정 3」, 1990, p.38.

25)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③」, 도서출판 전예원, 1995, p.94.

26) 제주4․3 연구소, 「4․3 장정 4」, 1991, p.42.

27) 제민일보 4․3취재반(1995), 앞의 책(③), p.93.

28) 제민일보 4․3취재반(1995), 앞의 책(③), p.93.

29) 제민일보 4․3취재반(1995), 앞의 책(③), pp.93~96.

30) 신수교(증언 당시 61세, 북촌리, 당시 북촌교 2학년)의 증언 : 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 다④」, 도서출판 전예원, 1997, p.437에서 인용.

31) 제민일보 4․3취재반(1994), 앞의 책(②), p.96.

32) 제주도교육청(1999), 앞의 책, p.279.

33) 김민규, 「조천읍지」, 1991, pp.319~320.

34) 제주도교육위원회, 「제주교육사」, 1979, p.219 ; 제주도교육청(1999), 앞의 책, p.279.

35) 북촌국민학교, 「북촌향토지」, 제주:성심인쇄사, 1987, p.30.

36) 제주4․3 연구소(1990), 앞의 책(3), p.39.

37) 1935년생, 북촌리, 당시 북촌교 5학년.

38) 1932년생, 북촌리.

39) 제주4․3 연구소, 「4․3 장정 2」, 1990, p.45.

40) 이갑도(1935년생) / 이기우(1932년생).

41) 당시 11세, 사망일자 1948년 12월 19일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69.

42) 당시 12세, 사망일자 1948년 12월 19일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75.

43) 당시 12세, 사망일자 1948년 12월 19일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76.

44) 당시 12세, 사망일자 1948년 12월 19일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78.

45) 당시 13세, 사망일자 1948년 12월 19일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81.

46) 여, 당시 15세, 사망일자 1948년 12월 19일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78.

47) 여, 당시 15세, 사망일자 1948년 12월 19일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80.

48) 당시 18세, 사망일자 1948년 12월 19일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80.

49) 여, 당시 9세, 사망일자 1948년 12월 19일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78.

50) 이갑도(1935년생) / 이기우(1932년생).

51) 제민일보 4․3취재반(1995), 앞의 책(③), p.375 ; 제주도의회 4․3 특별위원회(1997), 앞의 책, p.382.

 

 

사진과 글 : 북촌초등학교, 제주큰동산, 2013.02.06, 제주 서귀포시 보목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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