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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연폭포(2016.07.19 )

작성자귀산 조명래|작성시간16.07.19|조회수337 목록 댓글 0

세찬 물소리 석종 울림 같아…뙤약볕 내리쬐도 한기 내뿜는 ‘비밀의 폭포’

<2> 명연폭포 2016.07.19         

팔공산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이 명연폭포다.<br> 폭포가 장대하고 폭포를 둘러싼 계곡이 깊은데다 햇살이 들지않아 한여름 무더위에도 소름이 돋는다.<br> 팔공산의 폭포 중 웅장하고 경관이 멋진 폭포로는 명연폭포가 첫손 꼽힌다.<br>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 팔공산의 별천지다.<br>
팔공산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이 명연폭포다. 
폭포가 장대하고 폭포를 둘러싼 계곡이 깊은데다 햇살이 들지않아 한여름 무더위에도 소름이 돋는다.
팔공산의 폭포 중 웅장하고 경관이 멋진 폭포로는 명연폭포가 첫손 꼽힌다.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아 팔공산의 별천지다. 

팔공산에서 가장 양기가 강한 곳이 소년대라면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은 울소와 울소폭포다.

물소리가 돌로 만든 종소리처럼 우는 연못이라 해서 울소 또는 한자말로 명연(鳴淵)이라 하고 이 울소에 떨어지는 폭포를 옛부터 울소폭포,또는 명연폭포라 불러왔다.
폭포가 하도 장대하고 폭포를 둘러싼 계곡이 깊어 햇살이 들지못하는 통에 온통 폭포의 비말과 바위벽의 이끼, 폭포 떨어지는 소리에 한여름 무더위에도 소름이 돋는다.

팔공산에는 여러 폭포들이 있지만 웅장하고 경관이 멋진 폭포로는 울소폭포를 첫 손 꼽는다.
이 울소폭포는 그늘에 묻혀있어 여름철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폭포로는 이 보다 더 나은 곳은 없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비경이지만 정작 이곳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팔공산의 별천지라 하겠고 숨겨진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조선조 때는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이어져 풍류를 즐기며 시문을 남겼다.

이런 시문과 소문을 통해 팔공산에 ‘명연(鳴淵)’이란 폭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당최 어딘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수소문 해봐도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엣 문헌을 보고 찾기로 했다. 

나와(羅窩) 김여행(金礪行ㆍ1790~1859)이 ‘가산산성 남문 밖에서 비스듬히 7리 정도 내려간 동쪽에는 명연(鳴淵)이란 한 굽이가 있는데 실로 이곳은 하늘이 숨겨둔 기이하고 절묘한 승지(南門外從一斜經七里而東得鳴淵一曲此實天藏奇絶之勝也)’라고 했다.
강초(江樵) 구연해(具然海ㆍ1836~1895)는 법성동 뒤에는 경치가 좋은 명연(鳴淵)이 있었다(法聖洞洞後有鳴淵之勝)’고도 했다. 

가산산성 남문에서 비스듬히 7리 내려간 동쪽 지점과 법성동은 지금의 법성삼거리 일대로 짐작된다. 
법성삼거리는 한티재와 파계사, 그리고 송림사로 갈라지는 길목이다.
가산산성 진남문에서 약2.4㎞ 정도 동남쪽으로 떨어졌고 팔공산에서 ‘법성(法聖)’이란 지명은 이곳이 유일하다. 
법성동은 기성리 중앙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 있었던 법성사(法聖寺)에서 유래하며 지금도 절터에는 보물 제51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 한 기가 서있다.

가산산성과 연결된 대현(大峴), 즉 한티재는 ‘경상도지리지(1425년)’에 기록된 부계와 팔거(칠곡)를 잇는 팔공산에서 오래된 큰 재이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대곡(大谷)’이라 적었는데 이는 우리말로 한티골이란 뜻이고 명연의 상류다.
여기서 발원한 물줄기가 법성동과 송림사를 지나 동명저수지로 흘러간다.

한티골은 1815년 을해 박해 이후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마을을 이루었고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면서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 대구 인근의 신자들이 한티로 피난 왔고, 1868년에는 37명이 순교한 천주교의 성지다. 
지금은 동명면 득명리와 부계면 남산리를 연결하는 한티로가 개설된 이후 고개 정상을 한티재라 부른다. 
팔공산 한티재는 2006년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의 하나다.

구연해(具然海)는 명연에 대해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백석(白石)이 골짜기의 반석을 이루고 있고, 길이 험하여 600~700보를 겨우 올라가니 산에 돌이 갈라져서 생긴 둥근 구멍(穴)이 있었다 마치 대나무 물통(竹筒)과 비슷하고 그 구멍 가운데 유리(琉璃)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려 절묘하였다.
아래위로 못이 있는데 크기는 사방 6~7장이고 깊이는 1장(丈)정도’라고 했다.

어렵사리 발견한 명연폭포는 법성삼거리에서 1㎞ 남짓 떨어져 있었다.
구연해(具然海)가 명연을 찾았을 당시 길이 험했던 것처럼, 지금 역시 사람들에게 잊혀진지 오래돼 길다운 길이 없었다. 
법성삼거리에서 한티재나 대구방향으로 가지 말고 마을 안길로 바로 직진해서 오른쪽 계곡을 따라 가다 앞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 사유지에 막혀 더 이상 자동차로 갈 수가 없다.
여기서 축대를 쌓아 만든 시냇가 옆의 밭둑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물가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나타난다. 
물가를 따라 골짜기로 약 200m 정도 올라가면 바위벼랑이 병풍처럼 펼쳐져있고 한 굽이를 돌아가면 갈라진 골짜기 틈새에 보석처럼 숨겨진 폭포가 하늘에서 동아줄을 내린 것같은 신비한 자태를 보여준다. 

명연폭포 위쪽에 있는 촛불암 계곡. 좌우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수백m 이어져 마치 U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br> 벼랑에 나있는 바위구멍에는 촛불과 녹아내린 촛농이 있는 등 무속의 흔적이 경관을 해치고 있다.<br>
명연폭포 위쪽에 있는 촛불암 계곡. 좌우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수백m 이어져 마치 U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벼랑에 나있는 바위구멍에는 촛불과 녹아내린 촛농이 있는 등 무속의 흔적이 경관을 해치고 있다.

명연폭포 위에 위치한 폭포. 소와 바위가 일품이다.<br>
명연폭포 위에 위치한 폭포. 소와 바위가 일품이다. 


명연폭포는 팔공산에서 치산계곡에 있는 공산폭포 다음으로 장대한 폭포다.
얼핏 보아도 10m가 넘어 보이고 범종의 한쪽 모서리를 잘라낸 것 같은 모양이다.
왼쪽에는 바위 모양이 범종에 새겨진 불상처럼 모습이 완연하다.
폭포가 범종을 닮았으니 그 소리 또한 범종처럼 크게 울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폭포 안은 둥글게 깊이 파여 있고 오른쪽 산줄기가 앞을 가려 하루 종일 햇볕구경을 할 수 없다.
바위에는 푸른 이끼가 카펫처럼 촘촘히 덮여있다. 
폭포 바로 위에 또 하나의 폭포가 있었다. 
예전에는 벼랑 샛길로 다녔으나 지금은 쳐다보기만 해도 겁이 난다.
한참을 돌아 올라가니 폭포 위에 보를 막아 물길을 돌린 수로에는 물소리만 요란하다.
사람이 다닌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잡초와 잡목이 우거졌지만 그런대로 다닐 만은 하다.
수로를 외나무다리 건너듯 조심해서 조금 걸어가니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구멍철판으로 수로를 덮어놓아 다니기가 한결 수월하다. 
위의 폭포는 아래 폭포의 축소판이다. 
높이는 4~5m 정도에 둥글게 파여 있어 명연폭포 전체 경관은 마치 식당에서 어린아이가 앉는 다리긴 의자와 많이 닮았다. 
좌우에 벼랑이 팔짱을 끼고 있는 형국이지만 하늘이 활짝 열려 있어 바위는 햇살에 하얗게 드러나 푸른 이끼가 촘촘한 아래의 큰 폭포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일부 기록에는 울소골. 작은 울소, 큰 울소 등 소(沼)와 관련된 이름이 나와있다.
울소골의 상류는 한티골이 된다’고 한다. 
큰 울소가 명연으로 보이지만 작은 울소는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1869년(고종 6년) 4월 명연을 찾은 구연해(具然海)는 ‘경상감사 김양순(金陽淳)이 이곳을 유람하고 제명(題名)을 남겼다’고 했다. 
1832년(순조 32년)에 경상감사로 부임한 김양순(金陽淳)이 가산산성을 순시하던 길에 명연을 들렀던 모양이다. 
김양순의 제명을 찾기 위해 폭포 일대를 샅샅이 살폈으나 사방이 푸른 이끼로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촛불암 위쪽 계곡에는 나무가 울창해 햇빛이 들지 않는다.<br> 한낮에도 소름이 돋을 만큼 시원하다.<br>
촛불암 위쪽 계곡에는 나무가 울창해 햇빛이 들지 않는다. 
한낮에도 소름이 돋을 만큼 시원하다. 

명연 위쪽의 물길에는 어떤 곳이 있는지 궁금하다. 
폭포 위쪽의 물길은 잡초가 무성하고 길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길을 찾았다. 
법성삼거리에서 대구방향으로 600m정도 가다보면 왼쪽에 ‘기성전원마을’을 알리는 안내석이 있다. 
‘기성전원마을’을 지나면 우거진 소나무 숲이 상쾌하다. 
솔숲사이에 왼쪽으로 난 오솔길 입구에는 ‘촛불암’이라 적힌 작은 안내판이 서있다.
오솔길을 따라 골짜기로 내려가니 벼랑 아래에 지은 허름한 가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삼척의 덕풍계곡 용소골을 축소한 것같은 아름답고 웅혼한 골짜기가 펼쳐진다.
좌우에 깎아 지른 듯한 절벽이 수백 미터에 이어져 마치 U자 모양을 하고 있다.
협곡의 너비는 10m 내외로 벼랑 한 곁으로 한사람이 다닐만한 좁은 길이 나있다.
벼랑에 나있는 바위구멍에는 상자가 몇 군데 놓여있다. 
상자 안에 불 켜진 촛불과 녹아내린 촛농의 흔적이 적잖게 눈에 거슬린다.
한티골의 물줄기가 와폭(臥瀑)과 직폭을 다듬었고 소(沼)를 만들기도 했다.
길이와 깊이가 다른 폭포와 소가 세차례나 반복해서 이어진다.
비스듬한 와폭은 미끄럼 타기에 어울리고 그리 깊지 않은 소는 아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협곡 위에는 나무가 울창해 햇빛이 들지 않는다. 
한낮임에도 소름 돋을 만큼 시원해서 더위 쫓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이런 별천지에 붙여진 이름이 없을 것 같지않다. 
여기가 기록에 나오는 작은 울소가 아닐까?  

조병선(1873~1956)도 자주 명연폭포를 찾았다.<br> 조병선이 살았던 심원정. 송림사와 마주한 곳에 있다.<br>
조병선(1873~1956)도 자주 명연폭포를 찾았다. 
조병선이 살았던 심원정. 송림사와 마주한 곳에 있다. 

언제부터 이곳을 명연이라 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구연해(具然海)는 ‘흐르는 물소리가 몹시 크고 시끄러워 그 소리가 석종(石鐘)소리와 같다하여 예로부터 명연(鳴淵)’이라 했다고 전한다. 
오재(悟齋) 하동기(夏東箕ㆍ1870~1933)는 ‘도옹이 언제 명연이라 했는가(陶翁題品昔何年)’라는 시구를 남겨 도암(陶庵) 이재가 붙인 이름이라고도 했다.
이재가 1733년(54세)에 설악산과 금강산을 유람했고 1736년(57세)에 영남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하동기(夏東箕)와 서찬규(徐贊奎) 등이 이재의 ‘법성동운(法聖洞韻)’을 차운한 시를 지었던 것으로 보아 이재가 팔공산 명연을 다녀갔음이 분명하다.
이재가 법성동을 방문하면서 금강산의 명연과 비슷하다하여 이곳을 명연이라 했을 개연성이 높다. 
이렇게 명연은 기묘한 경관으로 많은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중에는 송림사와 바로 마주한 곳에 심원정(心遠亭)을 짓고 살았던 기헌(奇軒) 조병선(曺秉善ㆍ1873~1956)도 자주 명연을 찾아와 벗들과 즐기면서 여러 수의 시를 남겼다.


晩赴群招更整襟 / 모임에 늦게 와서 옷깃 바로잡으니,  
鳴淵水石載淸音 / 울소의 물과 돌이 맑은소리 실었네.  
谷風乍冷吹醒面 / 골짝바람 시원하게 얼굴에 살짝 불고,
山日孤懸返入林 / 산위에 걸린 해는 숲으로 들어가네.  
愧我無酬投木果 / 수작 못해 부끄러워 모과를 던지니,  
知君有意抱瑤琴 / 그대는 뜻을 알고 거문고를 안았네.  
世間碧終爲病 / 세간의 푸른 체증 끝내 병이 되어서,  
抵死誰憐保此心 / 죽은들 이 마음을 가련하다 여길까.



글=홍종흠 팔공산 문화포럼고문
     조명래 팔공산문화포럼 학술이사
사진=강위원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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