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자선조직협회의 활동
1. 자선기관의 난립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18세기 후반은 박애주의적인 감정과 실천이 증가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에 뿌리를 둔 자선은 빅토리아시대의 자선사업으로 이어져, 19세기 중기에는 많은 자선단체들이 결성되었다. 빅토리아 중기에는 상업혁명이 쌓아 올린 경제적인 부의 짙은 그늘이었던 이스트엔드를 중심으로 하여 빈곤의 구제, 구걸의 억제, 빈민에의 방문 등을 목적으로 하는 많은 자선단체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180년의 혹한은 많은 옥외노동을 불가능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한편에서는 피구제빈민이 4만 명이나 증가하였지만, 구빈법의 구제를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 많은 노동자들은 구제신청을 거부하고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으며 동사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를 계기로 하여 자선기관의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한 통계에 의하면 1861년 기준으로 런던에 640개의 자선단체가 있었는데, 그중 279개는 1800~1850년에, 144개는 1850~1860년에 창립되었다. 그 자선사업에 지출되는 규모도 엄청나서 연간 수입이 250만 파운드로 추계되었으나, 그것은 과소평가되었다는 지적이 많을 정도이다. 이 수치는 공적인 구빈법에 의한 지출을 상회하는 규모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들은, 공적인 구빈당국과의 협력이나 연대는 물론, 각 자선단체들 사이에도 지역이나 활동내용에 있어서 협력과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분별한 자선이 자선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덕적인 타락을 유발한다거나 자원이 낭비되는 등의 많은 문제를 노출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1867년 이스트엔드의 그린 신부(Rev. John R. Green)가 기고한 글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스트엔드 지여의 대다수의 성직자들은 이제 빈곤담당 공무원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엄청난 돈이 모금되어 성직자들에게 의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또는 지역방문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분되고 있다. 하지만 지역방문자들의 9/10는 여성들인데, 이 여성들 대다수는 모금된 돈의 합리적인 배분에는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이스트엔드 지역에는 100여 개에 이르는 서로 다른 기관들이 동일한 대상자들을 위해 구제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서로간의 조화나 협력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다른 기관이 어떤 활동을 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도 없는 실정이다. 이로 인해 구걸과 관련된 기만행위가 극에 달하고 있으며, 거지도 크게 늘어 결과적으로는 수치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뻔뻔한 구걸문화가 판을 치게 되었다(Saturday Review, 1867.12.28일자, Schweinitz, 2001 : 248에서 재인용)’
2. 자선조직협회의 형성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선기관들이 서로 협력하고 정보를 교환하여 활동을 조직적으로 행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자선기관의 조직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자선조직협회이다.
물론 자선조직협회가 만들어진 정확한 기원을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자선조직협회의 적극적 활동가이자 이론가였던 보잔켓(C. B. P. Bosanquet)는 자선조직이 필요한 배경으로써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들고 있다. 즉, 구빈법당국과 자선기관들간의 협력관계의 결여, 각 자선기관의 종교(종파)적 특성에 의한 협력의 결여, 개인의 자선활동에 필요한 정보의 부족, 이로 인하여 구제의 중복과 낭비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자선의 동기도 약화되어 불충분하고 무책임한 자선활동이 이루어지고 효과적인 자선의 동기도 약화되어 불충분하고 무책임한 자선활동이 이루어지고 곤궁자를 자립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자선의 재원이 소실되었던 것 등이다(C. B. P. Bosanqued, 1914 : Chap.1), 로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 많은 요리사가 요리를 망친 격이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1869년 4월에 ‘자선구제의 조직화와 구걸방지를 위한 협회(The Society for Organizing Chanitable Relief and Repressing Mendicity)'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자선조직협회(Charity Organization Society : 이하 COS라 칭함)로 개칭되었다.
COS의 지침에 나타난 COS의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방법,
첫째, 자선기관과 구빈법, 그리고 자선기관들 사이의 협력을 통하여
둘째, 적절한 조사와 모든 사례들에게 알맞은 조치를 보장함으로써, 그리고
셋째, 구걸을 방지함으로써, 빈민의 생활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Loch, 1892 : 50). 즉, 우선 다수의 난립된 자선기관들의 통합과 조정을 통하여 자선의 중복을 방지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빈곤한 사람들의 상황을 가능한 한 깊이 있게 조사하여 원조가 필요하다고 판명된 사람에게는 충분한 원조를 제공하여 자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자선가들이 자선기관들의 통합에 협력적이지 않았고 빈민들은 빈민들대로 생활실태조사에 협력적이지 않았던 관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하나의 자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그쳤다. 다만, 이 활동은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서 그것이 현대의 사회사업 특히 케이스워크의 기초가 되었다.
3. 사상적 기원 : 찰머스의 실험
찰머스(Thomas Chalmers)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목사였는데, 그가 교구에서 지역주민들의 빈곤에 대처하여 행한 사업이 COS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Young & Ashton, 1963 : Chap. 4).
그는 빈곤의 원인은 개인에게 있으며 그러므로 개인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문제의 해결은 없다고 생각하고, 독자적인 방법으로 교구 주민의 빈곤해소 사업을 행하였다. 그 방법이란 교회가 위치한 전 교구민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그들의 인격에 변화를 주는 방법이었다. 그는 빈곤한 사람들로 하여금 빈곤에서 탈출시켜 줄 수 있는 잠재성의 원천은 첫째는 자신들의 생활습관과 경제상황이고, 둘째는 친지들의 친절함이며, 셋째는 부자들이 빈자들에게 가지는 연민의 정이라고 하여 본인의 결심, 친지들의 지원, 그리고 보다 부유한 자들의 원조에 의해 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실펀에 옮겨서 적어도 자신의 교구에서는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홀로 내버려두게 되면, 첫째, 그들은 현재 수많은 자선의 대상이 되고 있는 궁핍함의 대부분을 스스로 예방하게 될 것이며, 둘째, 그들 친지들 중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노인들을 개인적으로 돌보게 되고 이렇게 돌보는 것은 각기 개별적인 관계 속에서 작동하므로 궁핍을 상당 정도로 감소시킬 수 있게 될 것이며, 셋째, 그러한 궁핍의 감소는 부자로부터 빈자에게로의 관대함의 이전에 의해 더욱더 가속화될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반적인 관찰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허점을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에 의한 내부적인 자선에 의해 메워짐으로써 궁핍의 제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완성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Schweinitz, 2001 : 189에서 재인용)’.
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빈곤의 사회환경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완전히 간과한 편향되고 더 이상 원시적일 수 없을 정도의 관점이지만, 찰머스를 비롯한 몇몇의 개인적인 역량과 비교적 조직화된 사업방식에 의해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었다. 보잔케는 찰머스의 실험을 자세히 검토한 후 “이 시스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충분히 검증된 무급의 방문원을 채용하여 특히 신규의 케이스에 대해서는 심도있는 조사를 행하고, 자긍심과 이웃의 원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라고 평가하며, 우리들이 배워야 할 것은 그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찰머스의 실험이 COS의 기원이라는 것은 COS 그 자체의 접근방식이 어떠할 것인가를 잘 시사해 주고 있다.
4. 이념과 빈곤관
COS는 빈민의 상황에 관한 적절한 조사라고 하는 용어를 항시 표방하고 이었지만, 부루스도 지적하였듯이, COS가 정작 그 조사의 대상에서 철저하게 제외시켰던 것은 ‘빈곤을 발생시키는 사회적인 요인’들에 관한 조사였다. 후일 빈곤과 실업문제를 조사하고 그 해결을 모색하기 위한 1905~1909년 왕립구빈위원회가 결성되자, COS는 이 위원회가 행해야 할 조사의 범위는 가능한 한 한정되어야 한다고 논평하고, 그 조사의 목적에 빈곤의 원인의 발견이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게 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COS의 방법과 이념은 협회 고유의 것이기 보다는 빅토리아시대 중산계급의 대다수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당시의 관념은 빈곤한 사람들도 근면, 자조, 검약이라고 하는 미덕을 행하면 빈곤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빈곤의 원인은 빈민의 성격이나 생활방식에 있다고 간주되었다. 즉, 게으름이나 음주 등 무책임한 행동의 결과가 빈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빈곤구제의 핵심은 사회개혁이 아니라 빈민의 변화에 있다는 것이 COS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남편과 함께 COS의 중요한 지도자였던 보잔케 부인(Helen Bosanquet)은 “성격이라는 것은 경제상황을 결정해 주는 원인의 하나이다. 만약 당신들이 한 사람의 남자 혹은 여자를 이전보다 정직하고 진실하며 유능하게 a만든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사회적인 서비스를 제공받을 기회도 그만큼 증가 한다”고 말하고 있다. COS의 상징적 인물었던 로크(C. S. Loch)가 “자조로써 해결할 수 없는 빈곤은 없다”고 말한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는 “빈곤의 원인이 부도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이야말로 부도덕의 원인이다”라고 말했던 웹 부처의 빈곤관과 비교하면 너무나 판이한 관점이다.
5. 조직기구
COS의 조직은 중앙협의회(the Council)와 그 산하의 다수의 지구위원회(District Committee)로 지직되었다. 협회가 결성되면서 중앙협의회는 지구위원회 구성의 지침을 다음과 간이 명시하였다.
① 지구위원회의 각 지구는 구빈법의 행정상의 지구와 가능한 한 일치시킬 것
② 지구위원회는 중앙협의회에 대표자를 가질 것
③ 중앙협의회가 공표한 계획에 의해 지시된 운영의 일반 원칙은 지구위원회가 받아들일 것
이 지구위원회는 결국 40개의 지구에서 결성되었는데, 그것은 런던의 교구연합(Union)이나 교구에 맞추어서 결성된 것이었다. 런던에는 1881년 기준으로 30개의 교구연합 혹은 교구가 있었는데, 교구간의 인구격차가 심했다. 당시 런던의 인구는 3,815,704명이었는데, 그 중 11개는 인구 10만명 이하, 11개는 15만명 이상이었다. 가장 인구가 적은 곳은 33,582명(Strand Union), 가장 많은 곳은 282,865명(Parish of Islington)이었다(Loch, 1892 : 37). 그러므로 인구가 많은 교구에는 두 개 이상의 COS 지구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대도시 지역은 지역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크기 때문에, 지구위원회 역시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다라 재정상황에 격차가 많았다. 이 경우 부유한 지구위원회는 취약한 위원회에 재정적인 원조를 하기도 하고 유능한 위원들을 파견하여 활동을 원조함으로써 각 지구위원회간의 협력도 이루어졌다.
각 지구위원회에는 빈민의 가정을 가가호호 방문하여 COS가 제공하는 급여나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를 판정하고 대인적인 원조를 행하기 위한 방문원이 소속되어 있었으나 실제에 있어서 그 방문원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방문지도를 전문으로 하여 활동하고 있던 자선단체들과 협력하게 되었다.
6. 자선조직화의 시도와 실패
COS 창설의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자선기관의 조직화였다. COS 발족 후 중앙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였던 리치필드경(Lord Lichfield)은 1872년 협회 연설에서 COS의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즉, “협회는 런던 각 지구의 자선단체가 그 지구 내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일하는 다른 기관에 관한 정확하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우리의 목적은 처음부터 어떤 구제를 제공하기 위한 협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모든 자선기관들이 모두 함께 협력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자선단체들이 바라는 것은 효과적이고 유익한 구제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COS, The C. O. Reporter, March 27, 1872 ; 高野史郞, 1984 : 180에서 재인용)
조직화를 위한 활동은 각 지구위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는데, 지구위원회(St. Marylebone District Committee)에서 밝힌 자선조직의 구체적인 목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즉, “조직화란 동일의 목적을 가지고 지금가지 많든 적든 독립하여 활동하여 온 모든 조직들을 상호 관련을 가진 활동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통일된 목표란 빈민에 대해 올바른 구제를 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독립된 활동을 하고 있는 주체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즉,
① 국가의 구제를 운영하는 구빈법,
② 법정에서 독지가의 후원을 얻어서 임시적인 원조를 행하는 치안판사,
③ 교회자선을 행하는 종교단체,
④ 특정 케이스에 대하여 원조를 행하는 박애단체, 그리고
⑤ 개인적으로 행해지는 사적 원조“.(COS, 1882 ; 高野史郞, 1984 : 170에서 재인용)
그러나 이러한 COS의 본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하고 COS는 또 하나의 자선기관의 성격에 머무르게 된다. 빈민의 분류와 생활상황의 조사 등의 활동이 현대의 사회사업의 기원을 이룬다고 하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지만, 진작 자선의 조직화라고 하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만 다른 자선기관의 비협조, 인력의 부족 등이 지적되고 있다.
7. 수급자격의 규정 : 도덕적, 자의적 기준
로크는 만약 어떤 사람이 원조를 받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었다면, 구빈법에 의한 원조를 받는 것보다는 자선기관의 원조를 받는 것이 당사자에게 훨씬 해악이 적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이었다. 역시 구빈법에 의한 원조는 공식적으로는 작업당의 입소를 전제로 하였기 때문이고, 선거권의 박탈 등 ‘포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COS의 구제를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COS는 나름대로 자신들이 원조할 수 있는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준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설정된 것이었다. 만약 그 기준에 의해 부적격자로 판명되면 구빈법에 의한 원조를 받도록 유도하거나 다른 원조기관에 의뢰하거나 하였다.
COS가 활용하였던 케이스의 선정기준은 구제의 가치가 있는 빈민(the deserving poor)과 구제의 가치가 없는 빈민(the undeserving poor)이라고 하는 두 개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이 개념의 내용은 명확하지 않고, 실제로 각각의 지구위원회에서는 그에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었다. 구제의 가치가 있는 빈민이란, 선량한 성격(선량한 성격(good character), 종경받을 만한(respectable), 근검 절약하는(thrift), 의존적이지 않는(independent), 자활의지가 있는(self supporting) 등의 표현이 가능한 인물인데, 이러한 평가는 당해 지역사회의 신뢰할 만한 사람(목사, 집주인, 고용주 등)으로부터의 증언을 필요로 하였다. 다만 COS는 이러한 개념이 과거에 있어서 그러했다는 것에 판단기준을 둘 것이 아니라, 이러한 조건이 장래에 당사자의 빈곤의 예방과 치료에 유효하게 작용하는가 아닌가라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구제의 가치가 없는 빈민이란, 일반적으로는 ‘사기 혹은 효과적인 원조를 불가능하게 할 것 같은 제멋대로의 행동(misconduct)의 증거가 있는 자’로 규정되어 있는데 나쁜 품성(bad character), 근검할 줄 모르는(unthrift), 비양심적인(unscruplous), 음주벽(drunkness), 의존적(dependent) 등의 속성이었다(COS, Deserving Cases, 1875, Undeserving Cases, 1882, 高野史郞, 1984 : 293-296에서 재인용).
8. 공사(公私)역할분담
로크는 COS의 자선구제활동과정에서 얻은 결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Loch, 1892 : 34-36).
① 살아가는 과정에서 구제를 받아야 할 우연한 사고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도 저렇게 하면 되겠다 하고 기대하게 되는 방식의 원조방법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방식으로 구제가 이루어진다면 포퍼리즘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② 단지 살아남기 위하여, 구제 불능인 사람이 구제를 요청한 경우에도 원조는 이루어져야 한다. 그가 성인이라면, 비록 그들이 싫어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기는 하지만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시설(작업장)이 존재한다. 그 성인들의 자녀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들이 다시 그들의 부모와 같은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생계유지와 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들은 가능한 한 엄격한 규율 속에서 유지되는 것이 지역사회의 이익에 부합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거의 확실하게도 더 많은 사람들이 국가구제를 신청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민간기관인 COS가 공적 구제기구인 구빈법에 의한 구제와 어떤 방식으로 그 대상자를 분담할 것인가가 암시되어 있다. 즉, COS의 입장에서 원조의 가치가 있는 자는 COS가 담당하고 구제의 가치가 없는 자는 구빈법이 담당하도록 상정되었던 것이다. 구빈법과의 협력 및 역할분담체계는 1869년 당시 구빈행정기구였던 구빈청장관이었던 고센(G. S. Goschen)이 런던의 각 구빈위원회에 보낸 업무지시, 소위 고센지침(The Minute for the Relief to the Poor in the Metropolitan, 1869. 11. 22.)에 의해 촉진되었다. 즉, 이 지침에는 공적 조직인 각 구빈위원회가 사적인 자선기관과 적절한 협력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에는 구빈위원회가 원외구호를 받는 사람의 이름, 금액, 주소 리스트를 주 1회 발생하여 자선기관에 통보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COS는 ‘모든 케이스에 대한 조사’를 기치로 내걸었으나, 모든 케이스의 등록제도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른 자선기관의 협력을 얻지 못해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공적기구인 각 지역의 구빈법위원회와는 자신들이 원조를 제공하고 있는 대상자의 명단을 서로 교환하는 정보 제공 내지 업무협력관계를 맺게 되었다. 여기서 구제 리스트를 교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협력활동은 장차 공사 사회복지관계의 모델이 되었다.
9. 인도주의(Humanitarianism)
COS를 결성하고 주도적인 활동을 한 지도자들은 신흥 자본가들이었다. 이들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가장 큰 이익을 본 계층이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가 개인의 활동에 가했던 모든 속박을 해제하고 -예를 들면 거주지 이동 제한을 철폐하고 -개인의 창의와 노력이 마음껏 발휘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 준 사회, 즉 개인에 대한 국가의 아무런 속박이 없는 사회, 국가의 임무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밤에 도둑을 지키는 일에만 한정하고 국민생활에 대해서 아무런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른바 ‘야경국가’의 세상은 자신의 성공을 가져다 준 더없이 좋은 사회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사회에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하고, 그것이 대량의 빈곤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엄연히 산업혁명을 통하여 가장 손해를 많이 본 도시빈민층이 이스트엔드로 대표되는 지역에 큰 규모로 존재하고 있음을 현시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국가가 사회의 모순을 인정하고 대대적인 빈곤정책의 전환을 행하는 것에는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이 부의 축적을 이루게 해 준 사회원리의 기반을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회에서 소외된 빈민의 문제에 대해서는,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가장 이익을 많이 본 계층인 신흥자본가 자신들이 축적한 부의 일부를 빈곤구제에 사용함으로써 그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고, 또 그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자선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조(思潮)를 인도주의(Humanitarianism)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성을 부정하는 억압구조로부터의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휴머니즘(Humanism)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10. 옥타비아 힐의 주택사업
COS의 지도자들로서는 보잔켓 부처, 로크, 옥타비아 힐(Octavia Hill)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중 실천에 직접 뛰어든 지도자로서 특히 주택사업에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잇는 옥타비아 힐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녀는 당시의 사회지도층 인사였던 사우스우드 스미스의 손녀로도 유명하다.
옥타비아 힐은 인내심 강한 사회사업가이자 COS의 일반적인 성격에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가장 비COS적인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녀의 주택개선사업은 한편으로는 사상적인 한계를 가진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으나, 주택개선사업을 전개해가는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서나 주택개선사업을 보다 큰 사회운동으로 발전시켜 가고자 하는 열정에 있어서나 매우 교훈적인 대목이 많기 때문에 특기할 가치가 있다. 옥타비아는 일찍부터 빈민이나 노동자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5세 이전에 이미 리스킨(John Ruskin)의 저작을 읽고 심취해 있었으며 협동조합운동에 직접 참가하여 봉제노동자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노동자들의 주거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대도시 이주자는 증가하는 반면에 주택은 부족하였고 그 과정에서 지주나 주택 소유자들은 극도의 이기주의로 일관하여 노동자들이나 빈민들의 주거사정은 극도로 열악하였다.
그녀는 러스킨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서 1865년 세 채의 주택을 구입하고 깨끗이 수리한 다음 도시빈민들에게 빌려줌으로써 한편에서는 재산을 보전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집을 빌린 빈민들의 독립심과 자존심을 조장한다는 방법으로 주택개선사업에 나섰다. 그녀는 집다운 집에서 살아가는 경험이 없다면 노동자의 도덕심이 형성되지도 못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관심은 주택이라기보다는 거주자의 생활태도였던 것이다. 그녀는 노동자에게 낮은 집세로 한 채에 6개 정도 있는 방을 빌려 주고 대신 그 조건으로 집세를 정해진 정확한 날짜에 내도록 요구하였다. 입주자들이 정해진 날짜에 집세를 내야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면 그것이 주거환경개선을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집을 수리한 이후 곧 파손되는 일도 다반사였고 다툼도 자주 일어났으나 옥타비아는 인내를 가지고 추진하여 마침내 주거환경은 개선되었다. 경찰도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지역이었으나 집세를 담은 가방을 들고 다녀도 한 번도 강탈당하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러스킨은 이 일에 드는 비용을 옥타비아에게 지원하면서 이익을 내도록 요구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본의 증식을 위해서 때문이 아니라 그 정도의 낮은 집세로도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건전한 주택사업자들이 이 일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일의 성공을 기반으로 하여 옥타비아는 도시에 놀이할 공간, 산택할 장소, 하루 종일 상쾌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기 위한 소위 오픈 스페이스운동을 발전시켜 갔다. 그녀는 COS의 일반적인 인사들의 생각과는 달리 주택사업에는 대규모의 국가 정책이 개입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이러한 비COS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은 주택문제가 곧 토지문제와 연계되어 있음을 주택개선사업을 통하여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1. COS의 한계와 비판
COS의 활동에 대한 비판은 한때 COS의 멤버였으나 후일 그와 결별하고 인보관운동에 헌신한 바네트(Samuel Barnett)목사가 1895년 COS 중앙협의회에서 행한 연설이자 비판이었던 『COS에의 우정어린 비판(A Friendly Criticism of the Charity Organization Society)』(1895.7.15.)이라는 문건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것은 역시 한때 몸담았던 단체에 대한 비판이어서 비판이라고는 하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비판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COS는 극도의 개인주의적인 빈곤관에 입각하여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이 시기는 이미 선거권이 확대되고 실업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운동보다는 사회주의적인 운동에 점차 관심이 옮겨가던 시기였으며, 이러한 동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이론가와 운동가의 세력도 증가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들의 눈으로 본다면, 여러 자선기관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단체였던 COS가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은 당연하다. 미국의 한 자선사업가는 COS가 행한 활동들에 관한 기록들은 ‘진지하게 열심히 읽어 낼 인내심이 없을 만큼’이라고 한탄하였고(Bruce, 1968 : 181), 이스트엔드에서 구빈법 폐지를 위하여 일생을 싸우며 보냈던 란즈베리(Lansbery)는 COS를 ‘야만적(brutal)'이라고 표현하였다.
II. 페비안협회의 사상과 웹 부처
1. 페비안협회의 형성과 사상
1) 페비안의 유래
페비안협회는 1884년 소수의 지식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통하여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단체였다. 페비안(Fabian)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로마의 장군 파비우스(Fabius)가 카르타고 전쟁에서 한니발의 대군과 싸웠을 대, 급전을 피하고 꾸물거려서 로마시민이 그를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호기를 포착해서 한니발을 격퇴하고 로마를 구했다고 하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명칭에 페비안주의의 이념이 점진적 사회개혁이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페비안협회의 로고는 거북이인데 그것은 서두르지 않고 그리고 쉬지도 않고 사회개혁을 추진한다는 의미이다. 협회의 명칭을 제안하였던 포드모어(Frank Podmore)가 인용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니발에 대항해서 싸웠을 때 로마시민의 빗발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파비우스가 취했던 행동과 같이, 우리도 호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기회가 온다면 전력을 기울여 격렬히 싸워야 한다. 파비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이 헛수고로 되고 아무런 결실도 가져오지 못하므로.(Pease, 1918 : 38)
당시에는 직접적인 사회주의 운동이 득세하던 시기였는데, 이러한 온건한 페비안협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 비판의 근거로서 또한 파비우스의 행동을 들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당시의 비판자들은 로마역사를 보면 파비우스가 전력을 기울여 한니발과 싸운 적이 없었고 한니발이 자멸해서 전쟁에서 이겼다고 지적하였다. 즉, 좋은 기회를 포착할 때까지 기다려서 사회개혁을 이루려고 하는 시도는 결국 그 대상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개혁을 이루려는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지적인데, 그러나 페비안협회의 사상은 협회설립 당시부터 확립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설립 이후 서서히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 페이비안 협회의 사상
페비안협회의 사상은 페비안주의(Fabianism) 혹은 페비안 사회주의(fabian Socialism)로 불린다. 페비안 사회주의의 요체는 1889년 소위 6인의 논객에 의해 발표된 『페비안 사회주의 논집(fabian Essays in Socialism)』(1889)에 농축되어 있는데, 그 핵심적인 것은 점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시드니 웹은 사회개혁이 추진되기 위한 조건으로서 다음의 4가지를 들고 있다(Shaw ed., 1889 : 35-36).
① 민주적일 것. 그리하여 국민 대다수의 승인이 얻어지는 것일 것. 그리고 국민이 그 사회개혁에 대하여 대응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 것.
② 점진주의적일 것. 그리하여 그 진보의 속도가 아무리 빠른 것이라 하더라도 사회혼란을 야기시키지는 않는 것일 것.
③ 대중에게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닐 것. 그리하여 그들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볼 때, 타락한 것이 아니어야 할 것.
④ 그 어떤 개혁도 입헌적이고 평화적인 것이어야 할 것.
그는 이런 방법에 의해서만이 사회의 전통을 사회발전에 응용시킬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렇게 한다면 사회진보는 비록 서서히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실패는 있을 수 없다(Sidney Webb, 1890 : 10)고 간주하였는데 시드니의 이런 입장은 곧 페비안협의의 핵심적 사상이었다. 이처럼 사회개혁의 과정을 혁명적인 것이 아닌 진화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던 페비안협회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의회주의를 견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따라서 페비안협회와 생각을 달리하는 정치집단이나 사회단체 그리고 개인들에 대한 입장은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동조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페비안협회의 전략으로서 유명한 ‘침투(permeation)와 설득(persuasion)'은 자신들의 사회개혁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상대방이 누구든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설득의 대상이 된다는 유연하고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잘 나타내 주는 대목이다.
3) 페비안협회의 영향력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자료를 사회에 제시하는 것은 폐비안협회의 중요한 노선이었다. 따라서 페비안협회는 빈곤, 실업 등의 사회문제의 정확한 실상을 알리기 위하여 많은 인쇄물을 발간하였는데 그러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에 의하여 그 영향력도 증대되었다. 그것의 기여 내지 영향으로 평가되는 것은 1894년의 런던대학 정경학부(London School of Economics : LSE)의 설립, 런던의회 개혁, 산업국유화, 국영의료서비스의 구축, 구빈법 개혁 등이다. 페비안협회가 복지국가형성에 미친 영향을 논하는 것은 어려운 주제이지만(Robson, 1944 : 8) 그 영향력의 크기를 의심하는 논자들은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의 총선에서 승리하여 성립한 노동당정부는 포괄적인 사회보장제도, 완전고용정책의 유지 등을 통하여 복지국가체제를 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당은 동 선거에서 384의석을 확보하여 보수당 216석을 제치고 다수당이 되었다. 일찍이 노동당의 브레인은 페비안협회, 그 심장은 독립노동당, 그리고 몸체는 노동조합이라고 일컬어지듯이 노동당의 사회개혁정책에 이론을 제공하고 또한 그 주역을 맡아 온 것이 페비안협회였다. 1945년 노동당정부에 미친 페비안협회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다음의 평가를 보면 알 수 잇을 것이다. 즉, “1945년 노동당정부의 정신적 지주는 바로 페비안주의였다. 그 정부는 페비안주의자의 총리대신, 페비안주의자 각료 9명, 그리고 노동당의원중 절대다수가 페비안협회의 회원이었다.”(Lee and Raban, 1988 : 39-40)
2. 웹 부처
1) 비아트리스 웹
페비안협회의 초기 인물 중에는 피스(Edward Pease), 브랜드(Hubert Bland), 월리스(Graham Wallas), 올리비어(Sidney Olivier), 쇼오(George Bemard Shaw) 등의 유명인사들이 있었으나 대표적인 인물은 역시 웹 부처(Sidney and Beatrice Webb)였다. 비아트리스 웹(Beatrice Webb : 1858-1943)은 철도자본가 포터(Richard Potter)가의 1남 9녀 중 8녀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은 병고에 시달렸다. 부친의 친구였던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1876년 이후 런던 사교계에 진출하였고 1880년대 초에는 COS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COS에 대한 회의로 멀어지고 1880년대 말에는 사촌형부였던 부스(Charles Booth)의 빈곤조사에 참여하여 조사결과를 독자적으로 발표하면서 새로운 사회관을 확립하였다. 그녀가 자신의 일기에서 “드디어 나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1890년 2월 1일의 일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극히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위 ‘긍정하는 자아와 부정하는 자아(the Ego which affirms and the Ego which denies)'는 그녀의 정신적인 고뇌를 대표하는 말이 되어 있다. 즉, 본능에 의해 혹은 무의식적인 정신과정의 결과로써 행동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가 추구해야 할 방침이나 가져야 할 의견에 관해서 자문자답해서 논하는 습관을 생애를 통하여 가졌다. 특히 그녀는 이러한 과정을 주로 자신의 일기를 통하여 고뇌하고 표현하였다. 그녀가 평생을 걸쳐 Tm고 있었던 일기는 방대한 양으로 대부분이 출간되어 있는데, 이 일기에는 그녀와 남편, 그리고 페비안협회가 행한 활동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녀의 일기는 중요한 자료가 되어 있다.
2) 시드니 웹
시드니 웹(Sidney James Webb : 1859-1947)은 런던에서 부인용품 소매점을 경영하던 어머니와 회계사 일을 하면서 공공의 일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활동하던 하던 아버지 사이에 태어나 서민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사립중산계급학교 이후 독일, 스위스에 유학하여 독일어, 프랑스어를 습득하였고 1878년 문관시험, 그리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이후 1891년까지 식민성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1885년 페비안협회가 결성된 1년 후 협회에 가입하였지만 페비안협회의 가장 대표적인 논객이 되었다. 실제로 그는 ‘추상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작은 단체였던 페비안협회를 실천적인 사회이념을 가진 강력한 지식인 단체로 성장시키는 것에 가장 결정적으로 공헌한 인물’(Cole, 1954 : 107)이었고, ‘페비안주의의 진정한 개척자’(Fraser, 234 : 1930)였다.
3) 파트너십 : 1+1=11
비아트리스와 시드니가 첫 상봉을 한 것은 1890년의 일이었고 비아트리스는 시드니의 소개로 같은 해 페비안협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시드니의 열렬한 구애를 비아트리스가 끝내 받아들여서 1892년 결혼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저술활동과 자신의 이념을 제도화하기 위하여 정치가들과 접촉하고 설득하는 일에 평생을 보냈다. 비아트리스는 연간 1천 파운드의 소득을 보장받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드니는 공직을 모두 그만두고 오로지 저술과 침투의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파트너십의 주도권은 시드니에게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이 두 사람의 역량을 크게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1+1=11이라는 유명한 말을 이들의 결혼이 가진 시너지 효과를 잘 표현하고 있다.
결혼 후 약 30년간에 걸친 그들의 정열적인 활동은 연구와 실천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연구에 있어서는 노동조합에 관한 연구 구빈법의 역사에 관한 방대한 저서와 소수파 보고서를 들 수 있다. 웹 부처의 부빈법에 관한 방대한 연구서들은 구빈법 연구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만년에는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매료되어 자본주의의 해악과 소비에트체제를 찬양하는 연구서들도 집필하였다.
사회개혁을 위한 실천활동으로서는 우선 런던대학 경제학부(London School of Economics : 후일 정경학부로 개편)의 창설을 들 수 있다. 페비안협회원이었던 허친슨(Henry Hutchinson)이 1894년 시드니 웹에게 기부한 거액의 유산을, 경제적 지식의 보급, 사회주의 선전의 수단, 사회주의의 이념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이행시킬 수 있는 인물을 양성하는 데에 사용한다는 목적으로 이 대학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이 대학의 설립목적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본 대학의 목적은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사회문제의 연구를 촉진하고 정책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인물의 훈련을 행함으로써 사회의 개량에 공헌하는 데에 있다.”
두 번째의 실천 영역은 영국의 교육개혁을 위한 활동이었다. 당시에는 교육전담중앙기구가 설립되어 있지 않았고 교육법도 초등교육에만 적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를 위한 활동에 웹 부처는 주로 보수당 의원들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실천 활동이 구빈법 철폐를 위한 활동이었다.
4) 영국 노동당과 만년
기존의 정당에 대한 침투 혹은 설득을 통하여 사회개혁을 이루기 위한 웹 부처의 노력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좌절 이후 웹 부처는 세계일주 여행(1911. 6.~1912. 4) 이후 사회주의 정당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노동자 정당의 정치세력화에 노력하였다.
노동당은 1900년 노동대표위원회를 전신으로 하여 1906년 결성되었는데 1906년 총선에서는 50명의 후보 중 29석을 얻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18년 노팅검대회에서 노동당은 사회주의정책을 약속하는 정당임을 선언하였다. 그 강령인 ‘노동당과 새로운 사회질서(Labour and the New Social Order)'는 시드니 웹이 작성한 것이었다. 1922, 1923년의 총선에서는 노동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고 시드니 웹은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두 차례 입각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깊은 실망을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문명으로서 소비에트체제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맥도날드(R. McDonald)의 거국일치내각을 둘러싼 노동당의 내분과 정치적 패배를 맛보았고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불황이 개선되지 않았다. 또한 독일에서는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여 국제적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도 컸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경제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파산하였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사회질서를 모색하기 위하여 1932년 이후 두 번의 소비에트 방문을 통하여 소비에트체제를 새로운 문명으로 찬양하게 된다. 하지만 웹 부처가 소비에트체제가 새로운 문명이라고 평하면서 내세웠던 특징들 -생산수단의 공유에 의한 착취의 폐지, 사회적 소비를 위한 계획적 생산, 사회적 평등의 실현과 보편주의, 지도력을 발휘하는 공산당의 존재, 과학의 숭배 등- 은 너무나 낙관적인 견해였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지적이다.
만년에 그들은 페스필드 코너(Passifield Comer)에 은거하면서 장수하였다. 사망 후 1947년 웹 부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erminster Abbey)에 안장되었다.
3. 페비안협회의 구빈법 개혁론
페비안협회의 침투전략이란 어떤 문제에 대한 개선을 대중에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관리나 지식인들이 그 문제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하도록 설득하고 사실에 근거한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페비안협회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구빈법 개혁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협회 창설 이후 왕립위원회의 설치까지 페비안협회가 발간한 구빈법의 개혁 내지 폐지문제를 다룬 소책자는 다음과 같다.
☞ Sidney Webb, Facts for Londoners, Fabian Tract No. 8, 1989,
☞ Sidney Webb, English Progress toward Social Democracy, No. 15, 1890,
☞ Sicney Webb, The Reform of the Poor Law, No. 17, 1890,
☞ S. W. Group, Questions for Poor Law Guardians, No. 20, 1890,
☞ Fred Wheeler, A Plea for Poor Law Reform, No. 44, 1893,
☞ J. F. Oakeshott, The Humanizing of the Poor Law, No. 54, 1891,
☞ Sidney Webb, The London Vestries, No. 60, 1894,
☞ Sidney Webb. Twentieth Century Polities A Policy of National Efficiency, No. 108, 1901,
☞ H. T. Hulmes, Reform of Reformatories and Inibrstrial School, No. 111, 1902,
☞ Edward Pease, The Abolition of Poor Law Guardians, No. 126, 1986(The New Heptarchy Series No. 5)
이러한 책자들은 모두가 빈민을 구제하고 빈곤을 해소한다고 하는 그 기원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인도주의적 제도이나, 운영에 있어서는 엄격하고 또한 굴욕적인 까닭에, 빈민으로 하여금 그것에 의한 구제보다도 오히려 어떤 때는 차라리 아사를 선택하게 하는 구빈법의 개혁의 필요성을 논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지는 소수파 보고서의 논지로 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