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는 용에 올라타샤...순창 용궐산
이번 여행의 해시태그는 ‘잔도’였다. 잔도란 바위에 강력한 철심을 심고 난간과 데크를 깔아 만든 인공 산책로를 말한다. 아찔한 절벽 옆면을 걷기 때문에 잔도를 걸으며 징징 우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흔해 빠진 게 잔도이지만 한국에서 규모가 큰 잔도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산악 지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순창의 용궐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잔도 등산이 가능한 곳이다. 생긴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갔다.
▶잔도 걷는 마음이 이렇게 편해
‘궐’ 자는 으리으리한 집에만 붙여주는 글자다. 용이 사는 어마어마한 산의 이름이 용궐산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엄청난 용궐산에 접근하지 않았다는 ‘썰’도 있다. 이름이 주는 무게 때문인지 사람 발길이 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용궐산 아랫동네에는 사람들 발자취가 언제나 이어졌다.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예뻐지는 강, 섬진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용궐산에 잔도가 생긴 것은 순창군청의 발상이었다. 중국에서 한창 유행 중인 잔도가 여행자들의 산, 숲 유입에 어떤 효과를 주는지 탐구하고 현장에 가서 관찰해 본 결과 용궐산에 잔도를 설치하면 군민은 물론 광주, 전주, 남원 등 주변 도시 사람들, 더 나아가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또한 잔도 설치에만 머물지 않고 용궐산의 시간과 함께 이어져 내려오는 용과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이 일대를 시민의 휴식처, 그러니까 용의 품에서 쉬고 노는 힐링숲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용궐산을 찾은 날은 평일이었다. 초겨울 날씨는 쾌청했다. 잔도 소문이 나면서 등산객이 많아졌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평일에는 한가하겠다는 생각은 오판이었다. 주차장은 거의 만차였고 능선으로 오르는 잔도에도 등산객들의 모습이 이어지고 있었다. 관리하는 분에게 물어보니 오늘은 약과란다. 주말이 되면 공식 주차장은 물론 도로 갓길까지 자동차로 가득하고 잔도는 줄지어 걸어야 할 정도라고 한다. 그나마 오늘은 평일이라 이 정도라는 말을 뒤로 하고 용궐산 잔도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용궐산 잔도의 공식명칭은 ‘용궐산 하늘길’이다. 하늘길은 데크 계단을 타고 꽤 높은 곳까지 오르자 본격 시작되었다. 오르막 계단과 일자 데크길을 포함해서 총 길이 약 540m의 하늘길은 멀리서 바라볼 때의 아찔함과 달리 오감을 편안하게 해 주는 길이었다. 어떤 글을 보면 살벌한 수직 바위라고 표현했지만 약간 부풀림이 있다. 진짜 수직이었다면 쫄깃한 맛이 있었을 텐데, 수직이라고 우길 정도는 되었다. 거대한 화강암에 붙어 있는 데크지만 중력이 준 약간의 경사가 느껴질 정도이고 해발도 높지 않다. 게다가 오른쪽 아래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강 건너로 벌동산, 불암산 등의 모습도 한눈에 잡혀 자연의 품 안에 쏙 들어온 느낌이다. 특히 이곳을 흐르는 섬진강은 강폭이 비교적 좁고 바위도 집중되어 있어서 하산 후 꼭 들려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잔도는 오직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뜨문뜨문 전망대가 있어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하늘길과 수평을 이루는 또 다른 하늘, 산, 구름들의 풍경을 볼 수 있고, 고개를 아래도 내리면 꽤 아찔하게 느껴지는 산아랫마을의 풍경도 감상할 수 있다. 전망대에 아예 배낭을 풀고 주저앉아 풍경을 감상하며 간식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하늘길과 붙어있는 바위 벽에는 대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선인들의 휘호들이 석각 형태의 작품으로 새겨져 있기도 했다. 이것은 글자인가 그림인가! 추사 김정희가 일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썼다는 ‘계산무진’의 서체를 보면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계산무진이란 원래 안동 출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계산 김수근에게 추사가 써 준 글이다. ‘김수근에게 다 함이란 없다’라는 극찬의 작문이 용궐산 용의 옆구리에 새겨지면서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관점으로 바뀌었다는 게 신비롭다. 안중근의 글씨 ‘제일강산’도 눈에 확 들어왔다. 안중근은 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체포되어 1910년 3월26일 사망할 때까지 여순감옥에 있었는데, 그때 안중근은 꽤 많은 휘호 작업을 했다. 제일강산도 그 작품 중 하나이다. 이 밖에도 의미와 서체가 멋들어진 작품들이 몇 점 더 있는데, 그렇다면 용궐산 하늘길은 서각의 길을 겸한 것일까? 환경을 생각하면 다소 찜찜한 면도 있지만 목적과 작품과 규모, 예술성만 갖춘다면 무조건 나쁘게만 볼 일도 아니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우리가 높은 곳에 오르는 이유
한 시간 남짓 되었을까? 하늘길이 끝나고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조금 오르자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새로 지은 것 같다. 이름은 비룡정, 용이 나는 정자다. 산세를 놓고 보면 용의 눈 부위쯤에 위치하고 있다. 용의 눈에서 내려다 보이는 세상은 더욱 광활하고 아름다웠다. 하늘길 전망대에서 본 것과 또 다른 감흥이 온다. 비룡정을 지나도 산길은 이어진다. 용궐산의 정상인 해발 646m 지점, 용굴, 용알바위, 귀룡정 등으로 이어진다. 용굴은 바로 이곳 용궐산에서 태어난 새끼 용들이 살았다는 전설의 동굴이고, 용알 바위는 용의 알을 닮은 바위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귀룡정은 거북이가 물로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정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비룡정을 내려와 섬진강으로 들어갔다. 이곳 섬진강 자락에서 유명한 곳은 요강바위이다.
요강바위는 사람이 쏙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는, 둥근 항아리 모양의 바위이다. 생긴 게 요강을 닮아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말이 대세이지만, 마을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니, 사실은 바위 가운데에 있는 홈 밑바닥이 여성의 성기를 닮았고, 그 형상에 효험이 있어서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치성을 드리면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고 했다. 생김새가 요강과 먼 것도 아니고, 생명과 관련된 스토리가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물이긴 하다. 역시 요강바위를 찾는 여행자들은 많았다. 이곳에는 신묘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바위가 무슨 신박한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현상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데, 근처에 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간혹 바위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그 속에 살포시 돌 하나를 올리는 사람도 있다. 생명의 잉태를 돕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인 여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모두의 기분이 좋아진 것은 아닐까, 멋대로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강바위가 있는 이곳은 섬진강이다. 섬진강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평화의 젖줄이라 사람들의 기분이 어린이처럼 맑아지나 보다.
섬진강의 옛이름은 모래내였다. 모래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도 많았고 지금도 많다. 이곳은 유난히 두꺼비가 많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옛날 사람들은 섬진강변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섬진강 하구를 침략했을 때 섬진강에서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한꺼번에 울어 젖혔다고 한다. 시골에서 두꺼비 우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안다. 정신을 완전히 빼버리고도 남을 정도다. 그런데 수십만 마리라니! 그쯤 되면 시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공포 수준이었겠지. 그래서 왜구는 방향을 틀어버렸고, 그 이야기가 떠돌면서 이 강의 이름도 두꺼비 ‘섬’ 자에 나루 ‘진’ 자를 써서 섬진강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섬진강은 어느 구간을 가든 모래와 물과 숲이 어우러져 있어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전라북도 진안군 깊은 숲속 데미샘에서 솟은 샘물이 전라도 지역을 이리 구불, 저리 구불 흐른다. 이것이 260여 줄기의 크고 작은 하천들을 끌어당겨 212.3km를 흘러 광양만에서 남해를 만나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다. 강은 어디에 있어도 아름답지만 산 아래에 있는 강은 유난히 문학적 풍경을 그려낸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용궐산에는 오르지 않아도 그 아래 섬진강에는 모여들어 걷고, 천렵에 빠지고, 풍덩거리고, 세월이 깎아낸 조약돌들을 주우며 자기 세계에 빠져들곤 한 것이다.
▷단촐한 시골밥상 ‘장구목’
섬진강 요강바위에서 나오다 장구목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간판에 써 있는 치유농가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래도 배가 고파 전화를 해 보았다. 시골 인심에 기대 본 것이다. 벨이 열 번쯤 울리자 전화를 받은 사장님이 문을 열어주셨다. 자연밥상과 쌍화차, 들꽃차, 핸드 드립커피가 메뉴의 전부였다. 시골 맛집이 그렇다. 오늘 있는 재료에 시골 양념 버무려 먹는 것이다. 자연밥상이라고 꼭 식재가 일정한 것도 아니다. 제철에 나오는 음식 재료를 주인장이 솜씨 좋게 지지고 볶아 밥상 위에 올리는 것이다. 그날은 갑자기 들이닥친 덕분에 자연밥상은 꿈도 못 꾸고 바로 된다는 도토리묵밥을 먹었다. 도토리묵을 깔고 육수를 부은 뒤 버섯, 호박, 나물, 양념김 등 여러 가지 제철 음식을 넣어 주었다. 맛이 슴슴한 게 딱 온순한 시골 맛이었다. 반찬은 장아찌 두어 가지와 샐러드 한 접시가 나온다.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인데, 남편은 잠시 외출했고, 아내 사장님은 자신의 30년 넘은 용궐산 살림 이야기를 풀어 준다. 도시에 살다 젊은 시절에 이주해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아온 시간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유유상종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일인가 보다. 요즘 남편은 식당도 식당이지만 척추측만증, 통증, 디스크, 협착증 등 신체 밸런스 잡아주는 자연의학에 푹 빠져 산다고 했다. 시골에서의 삶이 만만한 일은 아니지만, 물 맑고 햇살 따사롭고 오래된 친구들이 한 마을에서 인사하며 살아가니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으랴. 밥 먹고 차 마시며 몸은 두툼해졌지만 마음은 가벼워졌다. 장구목의 자연밥상을 제대로 맛보고 싶다면 미리 전화 한 통 넣어 형편을 알아보고 찾아가는 게 좋을 듯 하다.
위치 전북 순창군 동계면 장군목길 706-4
운영 시간 11:00~19:00
▶어떻게 그런 상상을 했대? 아찔한 미녀도 ‘채계산’
순창은 지리산과 내장산에서 밀려온 봉우리들이 즐비한 곳이다. 한국에 산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만 용궐산 정상에서 실감했던 그대로 순창 역시 봉우리로 빼곡한 곳이다. 그런데 채계산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확실히 남 다르다. 채계산을 찾은 이유는 출렁다리 때문이었다. 높이가 최고 90m이고 다리 길이만 270m에 이른다. 전국에 널린 게 출렁다리이지만 모두가 자기만의 자랑거리를 갖고 있는데, 채계산 출렁다리는 역시 높이와 길이, 그리고 출렁다리가 칼능선을 걷는 등산로의 연장선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요강바위 옆 장구목에서 열심히 달려왔지만 시간은 이미 밤 언저리에 다가가 있었다. 문 닫기 20분 전, 숨이 터져라 계단을 뛰어 올라 간신히 출렁다리 앞에 설 수 있었다. 오호! 출렁다리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적성면 평야지대와 섬진강, 그리고 넘어가는 붉은 해의 모습이 온몸을 뜨겁게 만들어 주었다. 최소한 30초는 정지된 상태로 서 있었는데, 눈 앞에 펼쳐진 순창의 해질녘 풍경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 것이다. 반대편 출입구 쪽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말한다. “저쪽 문이 닫혔어요, 빨리 다녀 오세요~” 다리를 달리다시피 건너갔다 되돌아 나왔다. 관리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 출입문을 닫는다. 센서가 달린 IT 시설이었다.
숨가쁘게 다녀와 다음 능선을 향해 다시 산길을 걸었다. 높은 곳에서 출렁다리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보다, 섬진강과 그 주변의 너른 들판, 그리고 고만고만하게 솟아 있는 수많은 봉우리들과 검붉은 색으로 물든 서쪽 하늘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밤이 쌓이고 있는 적성강(적성면을 흐르는 섬진강을 이곳 사람들은 적성강이라고 부르더라)의 수표면은 검은 빛으로 반짝이고 작은 마을에서 보내는, 여기 사람이 살고있다,는 불빛은 안온함과 함께 묘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뒤로 끝없이 솟아 있는 고만고만한 산들. 세상에, 체계산 앞 적성강 건너에는 산도 많아라. 중고산, 양림산, 달방멀댕이산, 유춤산, 정금산, 거등산, 낭림산, 대동산, 장덕산, 건지산, 백호산, 바랑산, 갈광산, 솔매산, 쉰산, 백정산, 원통산, 박산 등은 높아야 400m 남짓, 대부분 100m 좀 더 되는 어여쁘고 편안한 뒷동산들이었다. 저런 곳에 살면 산책하긴 참 좋겠네, 살짝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채계산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몇 가지 이야기가 있다. 책을 쌓아놓은 모습이라며 책여산, 달빛에 빛나는 산이라 화산 등이 그것이다. 그중 남도 문학적인 시선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 역시 채계산의 이름이 되어 버린 그 장면을 그리고 있다. 얘기인즉슨 적성강변 임동의 매미터에서 바라본 산의 모습이다. 그곳에서 채계산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면 비녀를 꽂은 여인이 비스듬이 누워 달을 보며 창을 읊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인다는 게 그 이야기이다. 예향 남도, 섬진강, 달빛, 400m 남짓한 산세 등을 하늘에서 내려다 본들, 땅에서 올려다 본들, 언덕에서 손 흔들며 아는 척을 하든, 어느 한 자락 어여쁘지 않는 장면이 있을까. 이토록 아름다운 채계산을 두어 시간 남짓 보고 깜깜한 길을 달려 떠나야 했던 그날이 두고두고 아쉽다.
[출처 매일경제 글 이영근 사진 안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