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외안산으로 火氣 넘치는 관악산
‘日’자 경복궁 양 옆에 해태로 불기운 막아… 자하동·신림 등 예로부터 풍광 뛰어난 듯
관악산 능선이 첩첩산중으로 물결 치는 듯하다. 제일 뒤 기상관측소 탑이 정상 연주대이다.
관악산冠岳山(629m) 연주대의 모습은 가히 절경이고 장관이다. 그 우뚝 솟은 기암절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가본 사람은 안다. 그렇다고 높은 산도 아니다. 불과 600m대의 산이 이 정도 불같이 내뿜는 장관은 한반도 여느 산에서 쉽게 볼 수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높지 않은 산에도 불구하고 경기 5악의 하나로 평가받아왔다. 풍수가들은 “산이 무조건 높다고 장땡이 아니고 낮아도 깊고 험하면 명산이다”고 말한다.
경기 5악은 관악산에 이어 화악산(1,468.3m), 운악산(934.7m), 감악산(675m), 그리고 산 전체가 북한산과 같이 화강암으로 이뤄져 기암괴석의 절경으로 유명한 개성의 진산 송악산(488m)을 말한다. 관악산은 경기 5악 중에 남한에서 가장 낮다. 하지만 빼어난 절경은 낮은 고도를 충분히 상쇄하고 남는다. 예로부터 선비들이 관악산의 험하고 깊은 골짜기가 만든 계곡의 절경을 유람하거나 빼어난 산세를 노래한 시들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관악이란 지명 자체가 우뚝 솟은 기암절벽의 형세에서 유래했다. 정상이 마치 갓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의미다. 갓을 쓴 선비들이 갓같이 생긴 바위를 찾아 유람을 즐긴 것이다. 조선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관악산의 아침 기운을 읊은 시 ‘관악조람冠岳朝嵐’을 남겼다.
관악산 사당능선은 가끔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코스도 나온다.
‘산악의 형세가 하늘 높이 솟아서는/ 그 위에 우람하게 갓을 쓰고 있구나./ 산허리 푸른 기운 은은히 서렸는데/ 녹음과 합해져서 한 덩이가 되었네.’
산 이름의 유래에 대한 설명과 아침 기운이 서서히 확산하는 기운을 느끼고 있는 분위기이다. 성호는 시와 함께 유람하면서 그 절경을 노래한 <유관악산기遊冠岳山記> 기행문도 전한다.
관악산 정상 육봉능선이 칼바위 같이 길게 뻗어 있다. 기상관측소가 우뚝 솟아 있다.
정상은 조선 후기까지 영주대로 불려
‘2월 아무 날에 삼각산에서 방향을 돌려 관악산에 들어갔다. 불성암에 이르러 노승과 이야기하는데, 산승山僧이 말하기를 “관악산은 영주대靈珠臺가 실로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산의 승경이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습니다. 그 다음 가는 것은 자하동紫霞洞인데, 자하동이라고 이름 붙인 동이 네 군데 있습니다. 불성암에서 남쪽 아래에 있는 것을 남자하라고 하고, 남쪽에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들어간 것을 서자하라고 하는데 모두 특별히 칭할 만한 점이 없습니다. 영주대 북쪽에 있는 북자하는 자못 맑고 깨끗하지만 그래도 동자하의 기이한 경관만은 못하니 거기에는 못도 있고, 폭포도 있어서 영주대의 다음이 됩니다. 그 외에도 절이나 봉우리 등 여러 볼거리가 있습니다” 고하였다. 나는 곧 해질녘에 서암에 올라 일몰을 보고 그대로 암자에서 잤다. (후략)’
원래 자하동은 개성 송악산 아래 빼어난 경관을 말한다. 이후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장소는 어김없이 개성 자하동 명칭을 빌려 사용했다. 관악산의 자하동도 그렇고,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의 자하문도 거기서 따온 것이다. 관악산은 네 개의 자하동뿐만 아니라 신림이라는 지명도 아름다운 경관 때문에 유래했다. 따라서 관악산 일대는 예로부터 빼어난 풍광으로 유명했던 듯하다. 조선 후기의 문신 서영보(1759~1816)의 시문집 <죽석관유집> 제3책 ‘유자하동기遊紫霞洞記’에 자세한 설명이 소개된다.
‘관악산과 검지산黔芝山 사이에 수석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 있으니 바로 신림新林이고, 신림에서 가장 그윽하면서도 더욱 경치가 좋은 곳이 자하동이다. 두 산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이 모여서 신림동에서 호리병 주둥이로 나오듯이 흘러나와, 강태사의 서원 앞에서 굴절하여 남쪽으로 흘러든다. 물길을 따라 점차 동쪽으로 몇 리를 가면 작은 봉우리가 수풀 위로 보일락 말락 하는데, 이것이 국사봉이다. 그 아래로 수목이 울창하고 인가가 은은히 보이는데, 아름드리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에 이로당二老堂의 옛터가 있다. 이곳이 신씨의 자하동 별업이다. (후략)’
관악산 연주대의 명물인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룬다. 그 위 절묘한 위치에 암자가 있다.
관악산의 빼어난 경관을 읊은 성호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연주대가 아닌 영주대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좌선하던 신비스런 봉우리라고 해서 명명됐다. 하지만 현재 관악산 정상 안내문에는 ‘의상대사가 관악사를 창건하고 연주봉에 암자를 세웠기에 의상대라 하였으나 지금은 연주대로 불린다’고 적혀 있다. 출처도 없는 다른 내용의 설명이다. 의상대사의 자취는 삼성산 삼막사에도 전한다. 삼막사의 기원이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677년 삼성산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이 세 고승을 지칭해서 삼성산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다른 설은 불가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의 교주인 아미타불과 그 왼쪽에 있는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있는 대세지보살을 삼성이라 부르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영주대의 기원은 의상이 수도했던 신비스런 봉우리라 해서 명명됐지만 조선시대 들어 연주대戀主臺로 바뀐다. 지명유래에 대한 설도 몇 가지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고려의 유신들이 망국의 설움을 달래려 개성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유래가 지배적이다. 또 세종의 형들인 양녕과 효령대군이 왕위 계승에서 밀려나자 이곳에 입산해 경복궁을 바라보며 국운상승을 기원했다는 설도 있다. 세조가 치병하면서 이곳에서 기도했다고 해서 명명됐다는 설도 전한다. 세조 관련 내용은 우의정을 지낸 허목(1595~1682)의 <기언별집>기행편에 소개된다.
관악산은 고지도 초기부터 현재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16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람도>에 관악산이 뚜렷이 표기돼 있다.
‘(1678년 4월 17일) 관악산을 유람했다. 서자하 수마제須摩題로부터 불성을 지나 영주대에 올랐다. 영주대란 것은 우리 광성光聖(세조를 지칭)이 예불하던 곳인데, 관악산 꼭대기로 바다의 조수를 바라보면 연燕, 제齊의 바다까지 아득히 보인다. 동자하 아래 금수굴을 내려가니, 골洞은 붉은 색깔이다. (후략)’
이 같은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까지 영주대로 불렸으나 조선 들어서는 영주대와 연주대를 혼용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설로는 조선 들어서 연주대로 바뀌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 후기에도 영주대로 사용한 기록이 계속 등장한다. 허목과 성호의 생존연대를 보면 알 수 있다. 1656년에 편찬한 전국 지리지인 <동국여지지>과천현 산천편에서도 이와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동여비고>에도 관악산이 나온다.
조선 초기부터 연주대로 불렸다는 설은 가짜
‘관악산은 현 서쪽 5리에 있다. 진산이다. 봉우리가 높고 험하며 기세가 우뚝 솟아 빼어나니, 곧 한양 도성에서 바라보이는 산이다. 산의 정상을 영주대라고 하는데, 바위가 당우처럼 빙 둘러 있다. 그 아래는 거의 천 길 낭떠러지이니 부여잡고 올라가면 정신이 아찔하다.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한데, 북쪽으로 경성을 돌아보고 서쪽으로 발해를 바라보니 참으로 절경이다.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행차하여 올라가 보았고, 매양 날씨가 가물면 관리를 보내 비 오기를 빌도록 했다.’
이와 같이 영주대와 연주대를 혼용해서 사용하다가 어느 순간 연주대로 정착된 듯하다.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조선 초기에 연주대로 바뀌어 사용했다는 내용은 확실히 잘못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후의 문헌 기록에 영주대라고 숱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관악산 연주대의 기운 넘치는 형세는 조선시대 한양 도읍을 정하는 데 한 방향의 지침이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까지 풍수가 입지적 조건에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점을 고려하면 관악산은 분명 풍수적으로 매우 뛰어난 명산으로 확인된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고려사〉에 소개된다.
관악산 정상 비석.
‘고려 김위제가 상서하여 이르기를 “삼각산 남쪽은 오덕을 갖춘 땅입니다. 오덕이란 중앙에는 면악面岳(남산)이 있어 둥근 형상이 되니 토덕이요, 북쪽에는 감악이 있어 굽은 형상이 되니 수덕이요, 남쪽에는 관악산이 뾰족하게 솟아 있으니 화덕이요, 동쪽에는 양주 남행산이 곧은 형상으로 있으니 목덕이요, 서쪽에는 수주의 북악이 있어 모난 형상이니 금덕으로 수도를 세우기에 합당합니다”라고 했다.’
이른바 서울의 외사산外四山으로 일찌감치 남쪽의 화산으로 평가받은 듯하다. 풍수적 관점에서 남산이 한양의 안산案山이고, 관악산은 한양의 조산祖山 또는 외안산外案山으로 본다. 산봉우리가 불과 같아 화산火山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이 산이 바라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어 그 불을 누르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을 넣어서 불의 기운을 누르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 해태를 만들어 놓았다고 전한다. 이에 대한 기록도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시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48권 이목구심서편에 나온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는 글자 그대로 귀로 들은 것, 눈으로 본 것, 입으로 말한 것, 마음으로 생각한 것 등을 적은 글이다.
‘영해부에서 땅불이 타오르고, 또한 만 섬의 기름을 쌓아놓았는데 불이 나고, 팔인八人(불을 가리킴. 火의 파자)을 꿈꾸었는데 불이 나고, 곰이 보였는데 불이 나고, 필방畢方이 오면 불이 나고, 회록回祿이 나오면 불이 난다. 관악산에는 화봉火峯이 있는데 그래서 경복궁에 불이 났고, 곰이 변한 천사가 오므로 평양에 불이 났다 한다. (후략)’
관악산 정상 연주대 바로 아래 있는 연주암. 등산객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그래서 관악산권역의 삼성산 정상 부위에 조그만 저수지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광화문 양쪽에 해태상을 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용이 불을 삼키고 물로 끄고, 그래도 경복궁으로 오는 넘치는 화기를 해태가 막았다는 내용이다. 오행과 오방, 오덕 등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풍수에서 한양 도읍의 중요한 한쪽 변수의 산이 바로 관악산인 것이다.
관악산 사당능선에서 연주대 방향으로 가면 통천문이 나온다.
속리산에서 출발한 한남정맥의 끝줄기
관악산이 한양의 외안산 중에 하나지만 한강 이북의 산과는 완전 다른 줄기다. 이른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때문이다. 산은 스스로 강을 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서울 주변 한강 이북의 산줄기는 한북정맥이지만 관악산은 속리산에서 뻗기 시작한 한남정맥의 한 봉우리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1736~1806)이 쓴 조선의 사서 <연려실기술>에 자세하게 소개된다.
‘속리산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다가 북으로 달려 거질화령巨叱火嶺이 되고, 달천을 끼고 동쪽으로 꺾어져 서북쪽으로 가다가 삼생산三生山·두타산이 되며 죽산 경계에 이르러 칠장산이 된다. 칠장산으로부터 한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오다가 흩어져서 한남의 여러 산이 되고, 양지陽智를 따라 남·동·북쪽으로 가다가 여주의 영릉이 되고, 용인으로부터 곧장 북으로 뻗은 것은 남한산성이 된다. 광교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서 화성이 되고, 북으로 뻗어 청계산·관악산이 되며, 서쪽으로 뻗어 수리산·소래산이 되고, 통진의 문수산에 이르러 바다를 건너서 강화부가 된다. (후략)’
과천향교가 관악산 등산 출발지점이다.
산줄기의 흐름을 자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산경표>에서도 한남금북정맥에서 칠현산에서 갈라져 나와 광교산 등을 거쳐 청계산~관악산~수도산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소개된다.
이와 같이 관악산은 한양 도읍의 외안산으로 풍수적으로 중요한 산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왕이 등극할 때마다 때로는 오악으로, 때로는 기우제를 지내는 산으로, 때로는 풍수적 명산으로 곳곳에 등장한다. 한양 도읍의 내사산이 조선시대 들어 명산반열에 오른 반면 관악산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자주 거론된다. 산이 험해서 도적이 자주 출몰했다거나, 몽골의 침입으로 관악산 고개를 방어선으로 했다는 내용 등이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관악산 지명은 관악산이 소개되는 시기부터 산의 형세가 갓과 같이 생겨 관악산으로 명명된 듯하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고지도에서 시종일관 관악산으로 표기돼 있다.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지도>에 표시된 관악산.
관악산 생태는 수도권의 수많은 등산객이 찾는데도 불구하고 나쁜 편은 아닌 듯하다. 우리나라 특산식물이 총 11종 있고, 희귀식물은 4종이 서식한다. 족제비, 오소리, 너구리 등 야생동물이 누비고, 천연기념물 소쩍새와 오색딱따구리 등 조류도 41종이 둥지를 틀어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곤충들이 먹이사슬을 이뤄 서식하고 있다.
관악산 등산로는 수많은 샛길이 있어 정확히 파악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과천에서 접근하는 대표적인 등산로는 ▲과천향교에서 정상 연주대까지 약 3.5km로 2시간가량 소요된다. ▲중소기업청에서 문원폭포를 거쳐 연주대까지 약 4km로 2시간30분가량 소요된다. ▲과천교회에서 연주대까지는 약 5km로 3시간가량 소요 예상. ▲용마골 삼거리 소공원에서는 가장 멀다. 약 6km에 3시간 30분가량 소요.
서울에서 등산하는 코스는 사당과 서울대에서 출발하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서울대에서는 무너미고개를 거쳐 연주대로 올라간다. 약 6km에 3시간 30분가량 소요. ▲사당에서 출발하는 코스가 가장 길다. 약 7km에 4시간가량 소요.
관악산은 한남정맥의 한 봉우리로 <산경표>에 소개되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2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청구전도>.
출처 월간산 글·사진 박정원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