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형제 승열이와 팔목이
동네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며 저수지에서 썰매를 타다가 얼음이 깨졌다.
승열이가 빠져 얇은 얼음판에 두 팔을 걸친 채 사색이 돼 달달 떨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도망쳐 둑으로 올라가 발만 동동 구르는데,
팔목이가 논두렁에서 허수아비를 뽑아 얼음이 깨질세라 헤엄치듯 기어서 승열이에게
다가가 그를 건져올렸다.
그때 기별을 받은 승열이네 식구들과 하인들이 달려와 기절한 승열이를 업고
집으로 내달렸다.
그것이 인연이 돼 산비탈 초가삼간에서 입에 풀칠하며 목숨을 이어가던 팔목이와
절름발이 그의 아버지, 벙어리 엄마는
천석꾼 부자인 승열이네 집으로 들어와 아버지는 행랑아범이 되고 엄마는 찬모가 됐다.
승열이 아버지의 주선으로 열두 살 승열이와 열한 살 팔목이는 의형제를 맺었다.
승열이와 팔목이는 함께 서당에 다녔지만 둘 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개구쟁이 짓에만 앞장섰다.
팔목이 열여섯 살 때, 승열이네 집 집사가 됐다.
집사였던 승열이의 외사촌이 치부책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쳐 팔목이가
후임으로 치부책을 건네받은 것이다.
천석꾼 부잣집 외동아들 승열이의 혼례식이 고을이 떠들썩하게 치러지고 나서
이듬해 팔목이에게도 혼처가 생겼다.
소작농 오 생원의 얌전한 둘째 딸과 팔목이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
허나 혼례를 치를 형편이 못 됐다.
혼례식이야 냉수 한 그릇 떠놓고 올린다 해도 행랑채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살 수는 없는 법.
어느날 밤, 승열이와 팔목이는 장터에서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오다가 동네
어귀 주막에서 또 술을 마셨다.
팔목이가 조심스럽게 승열이에게 방 한 칸 세 얻을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자
승열이가 대뜸 한다는 말이 이랬다.
“맨입으로?”
“그럼 어떻게 할까?”
팔목이가 물었더니 승열이 입에서 도저히 믿지 못할 말이 나왔다.
“방 한 칸 세 얻을 게 아니라 아예 집을 사 줄게.
그 대신 나에게 초야권(初夜權)을 줘.”
팔목이는 집을 사 준다는 데 놀라고 연이어 초야권이라는 말에 뒤통수를
찍힌 듯 멍해졌다.
“초야권이라니?”
“첫날 밤, 네 색시를 내가 데리고 자겠단 말이야.”
팔목이는 사흘을 곰곰이 생각했다.
섭섭하고 화가 치밀었다.
이런 생각도 했다.
‘좋다.
기회를 봐서 네 색시도 무사하지 않을 게야.’
팔목이는 받아들였다.
저잣거리에 아담한 집을 장만하고 집 문서를 받아들었을 땐 온 세상이 자신의
것처럼 가슴이 부풀어올랐지만,
초야권을 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불덩이가 됐다.
팔목이의 혼례식 날, 신랑은 찌푸리고 엉뚱하게도 승열이가 싱글벙글했다.
늦은 밤, 술이 떡이 된 신랑 팔목이는 주막 객방에서 쓰러지고 승열이가
남몰래 신방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팔목이는 몰래 집을 팔았다.
새색시를 친정으로 보냈더니 장모가 팔목이를 불렀다.
긴 한숨을 토하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내 딸에게 무슨 결함이라도 있는가?
첫날밤엔 신부 옷고름도 풀지 않고 책만 보더니.”
팔목이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승열이가 장난을 쳤구나.’
신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이 바로 첫날밤이 됐다.
이튿날 팔목이는 요 위의 붉은 핏자국을 보고 희색이 만면해 신부 손을 잡고
고향을 등졌다.
단봇짐 속에는 집 판 돈이 들어 있었다.
십 년하고도 몇 년이 더 흐른 어느 날.
제물포의 거부 박 대인집 대문 앞에 구겨진 갓을 쓰고 꾀죄죄한 도포를 입은
파락호가 박 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하인의 전갈을 받은 박 대인이 펄쩍 뛰며 버선발로 대문까지 뛰어나갔다.
“이게 누구요, 승열이 형 아닌가!”
“박팔목이!”
두 사람은 끌어안고 팔짝팔짝 뛰었다.
승열이는 부모상을 치르고 나서 노름판에 빠져 그 많던 살림 다 날리고
남은 재산 요리조리 팔아치우다가
이제는 끼니 걱정까지 하게 돼 소문의 끈을 잡고 머나먼 제물포로
팔목이를 찾아온 것이다.
둘은 날마다 요릿집으로, 기생집으로 주지육림 속에 빠져 옛날을
그리며 떠들고 웃었다.
보름만에 “승열이 형, 이제 집으로 가시오.”라며 팔목이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승열이가 작별인사를 하고 제물포를 떠나 부지런히 걷다가 주머니를 열어보니
“애게~.” 엽전 백 냥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노잣돈밖에 안되는 것이다.
승열이가 구시렁거렸다.
“기생집에 뿌린 돈, 나를 주지.”
터덜터덜 걸어 집에 왔더니 웬 곡소리가 요란했다.
“여, 여, 여보, 어제 당신이 객사했다고 관을 보내왔어요.”
아이들이 승열이 도포자락에 매달렸다.
관을 열었더니 돈이 끝없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