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강론

성 금요일 -넘겨주다

작성자본당신부|작성시간24.03.29|조회수37 목록 댓글 4

오늘 수난복음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때 넘겨주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리스어로는 paradidonai, 라틴어로는 tradere라고 합니다.

 

오늘 수난복음인 요한복음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공관복음에서는 게세마니에서 핏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세 번째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되었다. 시간이 되어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 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마르 14,41-42).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물건처럼 넘겨지셨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도 예수님을 이미 수석 사제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마태 10,4 참조).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똑같은 단어가 유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넘겨주신 tradidit illum)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 8,32).

 

그래서 넘겨주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이 단어로 이 세상에서의 예수님 삶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첫 번째 부분은 능동적인 행동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주도권을 갖고 계셨습니다. 말씀하셨으며 선포하셨고 치유하셨으며 여행도 다니셨습니다.

 

그러나 넘겨지자마자, 어떤 일에서든 철저히 수동적인 분이 되셨습니다. 대제관과 빌라도 앞에 끌려가셨고, 매질을 당하셨으며, 십자가를 지고 끝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전부다 수동태 동사만 난무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수난과 죽음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30)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는 하고 싶었던 모든 일을 원 없이 다 했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에는 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에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 나에게 행해지도록 허락했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능동적으로 허용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다림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남이 나에게 행동하도록 기다리는 것, 이것이 수난의 신비이며, 더 나아가 죽음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의지,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아드님을 통해서 고집이 센 우리에 대한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남의 손에 넘겨지시고 목숨을 바친 것은, 죄 많은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에 불타는 예수님은 사랑 안에 당신을 봉헌하셨습니다. 사랑할 적에 누구나 바보가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밖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적에 누구나 장님이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적에 누구나 귀먹어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 목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보요, 장님이요, 귀먹어리가 되셨습니다. 그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에 우리는 이 전례를 통하여 수동적으로 다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심장이 이미 사랑해버린...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이십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상민미카엘 | 작성시간 24.03.29 “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나에게 행해져야 하는 일이 나에게 행해지도록 허락했다”... 아멘...
  • 작성자박은순아녜스 | 작성시간 24.03.29 아멘🙏🏻
  • 작성자최미숙 미카엘라 | 작성시간 24.03.30 아멘!

    사랑에 불타는 예수님은 사랑 안에 당신을 봉헌하셨습니다.
  • 작성자신혜원 글라라 | 작성시간 24.04.02 이미 사랑해버린 어쩔수 없는 사랑...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