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解品(신해품) 第四
4 게송으로 다시 설하다
(3) 부처님의 은혜를 찬탄하다
세존의 크신 은혜 희유한 일이며
저희들을 사랑하사 교화하여 이익을 주신 일을 한량없는 세월엔들
누가 능히 갚을 수 있겠습니까?
수족(手足)이 되어 받들고 머리 숙여 예경(禮敬)하며
온갖 것을 공양할지라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머리에 이고 받들거나 두 어깨에 업고 다니기를
항하사의 겁 동안에 정성을 다해 공양하며 훌륭한 음식이며 한량없는 보배 의복과
비단 보료와 이부자리와 갖가지 탕약으로 받들며
우두(牛頭) 전단(栴檀) 좋은 향과 가지각색 보배로써 높은 탑을 세워 놓고
훌륭한 옷을 벗어 땅에 깔아 이러한 온갖 일로 공양하기를
항하사 겁 동안 해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참 아주 이 순간에 와서 이들이 이런 큰 깨달음을 얻고
거기에 대한 그 은혜를 이렇게 찬탄하지요.
전법송에 언젠가 소개했지요.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經塵劫)
신위상좌변삼천(身爲狀座변三千)
약불전법도중생(若不傳法度衆生)
필경무능보은자(畢竟無能報恩者)”
그런 게송을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만,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수억 만 년 세월을 지낸다 하더라도,
또 다른 한 가지로는 내 몸이 이 지구 만하게 되어 가지고
부처님이 그 위에서 앉고 눕고 서고 설법하시고 하는
그런 평상의 역할을 해서 부처님께 헌신한다 하더라도,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서 중생들을 제도하지 못한다면
필경에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그랬지요.
가사정대경진겁(假使頂戴經塵劫).
그것을 그대로 시로서 표현한 거지요.
또 신위상좌변삼천(身爲狀座변三千).
이런 것도 이 속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은혜를 아주 최상의 표현으로서 찬탄합니다.
모든 부처님은 희유하시며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생각할 수 없으며
크고 크신 신통이시며 무루(無漏) 무위(無爲)하여 모든 법의 왕이시니
용렬한 저희들을 위해 이런 일을 참으시고
상(相)에 집착한 범부들에게 알맞게 말씀하십니다.
상에 집착한 범부들, 범부들은 무조건 상에 집착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지요.
어떤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전혀 배운 바도 없고 느끼는 바도 없고,
누구로부터 존재의 실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이런 것들은 일차적인 관점이고,
거기서 한 눈을 뜨고 본다면 이 모든 존재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환영으로 보인다든지, 아니면 아예 없는 것으로 보인다든지
텅 비어서 공한 것으로 보인다든지 하는 그런 눈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존재에 대한 전문가지요.
존재의 원리에 대한 전문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컵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도자기로 만든 컵인데 그 도자기에 대해서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이렇게 하나 마시는 컵 정도로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그 도자기에 전문가는 아! 저것은 이조 백자인데?
이렇게 얼른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그 순박함과 그 뛰어난 색상이라든지
그 아주 빼어난 모양새라든지 이런 것들을 전문가가 보면
비전문가의 눈하고는 전혀 달리 봅니다.
그와 같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이것은
부처님의 안목을 배우고 부처님의 안목을 빌어서 세상과 인생을 좀 바로 보자.
좀 제대로 보자는 그런 의미로 우리 불교 공부의 의미를 정리할 수가 있는데,
그 부처님의 안목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에 대한 모든 인생과
우주의 존재에 대한 전문가적 안목이지요.
전문가적 안목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도자기의 전문가의 안목이라면
그 도자기를 전혀 아마추어 안목하고 달리 보듯이 그렇게 보이거든요.
꿰뚫어 보입니다.
그렇듯 이 불교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인생과 우주의 존재에 대한 전문가적인 안목을 키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라도 공부를 많이 해 놓으니까
아주 전문가적인 안목이 나오거든요.
누가 이렇게 병이 났다, 아니면 돌아 가셨다, 그러면
“아! 인생은 무상한 거야 의례히 생자필멸 회자정리야.” 이런 표현을 한다고요.
그것이 전문가적 안목이거든요.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이 그 일에 당하면 또 그것이 안 된다는 말이예요.
그러나 우리는 전문가인 부처님으로부터,
또는 깨달은 조사스님 들로부터 자꾸 그런 전문적인 안목에서 설명해 놓은 것을
많이 들어 가지고 아주 근사하고 엇비슷하게
어떤 인생에 문제라든지 이런 것을 말한다고요.
말은 번드르 하지요.
그래도 우리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중에서
한쪽으로라도 자꾸 이렇게 전문가적 안목을 키워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치는 순간이 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저 열심히 전문가의 설명을 자꾸 듣고 보고 사유하고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행이고 최선의 방법이지요.
그러다 보면 결국 전문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라는 것을 이렇게 비유를 들어서 말씀 드렸는데
우리는 그렇게 알고 공부를 하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설명도 상에 집착한 범부들에게 알맞게 말씀하셨습니다.
워낙 전문가시니까 그 근기에 맞춰서 적당하게 말씀하셨다는 거지요.
부처님은 모든 법에 자유자재 하시어 중생들의 모든 욕락들을 속속들이 아시고
그들의 뜻과 힘에 알맞게 맞추시어 한량없는 비유로서 법을 설하십니다.
중생들의 세상 선근(善근)을 심은 것에 성숙(成熟)하고 미숙(未熟)함을
낱낱이 살피시며 갖가지로 헤아리고 분별하여 아시고서
일불승(一佛乘)을 나누어서 삼승법(三乘法)을 설하십니다.
이것이 법화경의 종지면서 또 결론이지요.
한 품이 끝나면서 하신 말씀이 일불승을 나누어서 거기에서 삼승을 설하십니다.
내가 늘 말씀 드리지만 성문 연각 보살 어디 삼승 뿐입니까?
삼백승도 되고 삼만승도 되고, 다종다양한 우리의 삶의 양상들을
이렇게 삼승으로 쓰고 있다. 나는 그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에 신해품에 ‘사대성문이 믿고 이해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려고 하는 최상의 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눈을 떴다’
라고 하는 그런 내용이면서 또 여기에는 ‘궁자의 비유’도 나오고
또 성문들의 그 동안 자기들의 공부와 오늘날에 있어서,
부처님의 본의를 비로소 깨닫게 된 그런 경위와 과정들
이런 것들을 아주 솔직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살계 이야기와 법화경 신해품 여기까지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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