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들과의 해외여행이 칭다오에 이어 몽골까지 벌써 네 번째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이렇게 자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서로에 대한 그리움이 그만큼 큰 모양이다.
이번 여행이 성사된 데에는 두 스폰서의 역할이 컸다. 여행 경비 일부와 공동경비를 지원하겠는 제안이 계기가 되었다. 이 두 분은 늘 남과 더불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실천하며, 동기들에게도 훈훈한 정을 전해 주는 천사 같은 분들이다.
기대와 설렘을 안고 3박 5일의 몽골 여행길에 올랐다. 새벽에 도착해 호텔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나니 하루가 금세 지나가 버렸다.
둘째 날에는 울란바토르를 출발해 고르히·테렐지 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은 몽골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초원에는 논밭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곳곳에 하얀 게르가 자리 잡고 있었고, 말과 소, 낙타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이들만의 낙원 같았다.
어릴 적 고향 뒷동산에서 친구들과 뒹굴며 대나무 활을 만들어 놀던 추억도 떠올랐다. 요즘 노년의 놀이터가 된 파크골프장도 생각났다.
논밭하나 보이지 않는 이곳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살까 궁금해 가이드에게 물었다. 그는 몽골 사람들은 주로 다섯 가지 가축을 기르며 육식 위주의 생활을 한다고 설명했다.
칭기즈칸 기마상은 규모부터 압도적이었다. 내부에 전시된 거대한 기마용 장화는 무려 소가죽 250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광활한 초원은 보는 이마저 용맹스러운 기운이 들게 했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답게 쌀쌀했다. 수시로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냇물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날씨가 자주 바뀌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가 그리워졌다.
몽골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17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부산시 정도인 350만명 수준이라고 한다. 인구밀도가 얼마나 낮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넓어서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들겠지만, 활용하기 어려운 땅이 많다 보니 우리 금수강산의 소중함이 새삼 느껴졌다.
우리는 테렐지 국립공원아래 게르 숙소에 배정 받아 이틀 동안 머물렀다. 밖에서 볼 때와 달리 내부는 제법 편리했다. 침대와 수세식 화장실, 샤워시설까지 갖추고 있었지만“물이 부족하니 절약해야 한다.”는 안내를 들으니 집 생각이 절로 났다.
선택 관광으로 몽골 전통공연도 관람했다. 기마민족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몽골 특유의 흐미와 마두금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돌무지를 세 바퀴 돌면 복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나라 성황당과 비슷함 샤머니즘 문화도 느낄 수 있었다.
공연 중에는 우리 민요 아리랑도 연주되었다. 고려시대 몽골과의 교류 속에서 우리의 노래가 전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묘한 감회가 들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역시 밤에 있었다.
학창 시절에는 여학생과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던 남학생들이 이제는 나이를 먹었다고 부끄럼도 잊은 채 농담을 주고받았다.
여학생들도 질세라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이어갔다. 부처님도 웃으실 만큼 모두가 배를 잡고 웃었다.
한 친구는 너무 많이 웃어서 턱이 아파 딱딱한 음식을 씹기 힘들다고 했다. 여행 와서 병을 얻어가는 것 아니냐며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셋째 날에는 전통의상을 입고 독수리와 매를 팔위에 올려놓은 채 기념사진을 찍었다. 어색하면서도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승마 체험도 했다. 제주도 말에 비하면 다소 작은 말이었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안전을 위해 먼 거리를 달리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체험이었다.
저녁에는 캠프파이어를 하며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 오래 만에 느껴보는 낭만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자이승 승전탑에 올라 울란바토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몽골 인구의 절반이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하니 광활한 국토에 비해 사람은 참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태준 선생 기념고원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독립 운동가였던 선생의 정신이 지금도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내관광 중 한 동창이 지갑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가이드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행히 신속하게 카드 사용을 정지시키며 큰 해는 막을 수 있었다. 모두가 자기 일처럼 나서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공항으로 이동해 짐을 챙기던 중 한 친구가 여행가방을 숙소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가이드는 퇴근도 미룬 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또 다른 친구는 휴대전화를 잃어버렸지만 다행히 기사가 찾아 주었다.
돌이켜보면 칭다오 여행 때는 없던 일들이 이번에는 유난히 많았다. 세월이 이기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나이 탓이라고 웃으며 넘기고 싶다. 그러나 앞으로는 더 꼼꼼해야겠다는 교훈도 얻었다.
노년에 동창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흔한 기회가 아니다. 그런데 벌써 다음 여행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고, 개집 같은 집도 제집이 최고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도 동창들과 함께하는 여행의 즐거움만큼은 그 어떤 불편함도 잊게 만든다.
정말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노년에 시작한 동창들과의 여행이 바로 그런 것 같다.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또 만나고 싶고, 또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