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돌로 만드는 신전[1번째]
나의 일생이 하나님의 뜻대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습
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서 "너도 쓸모가 있으니 이런 데 와서 일
해라" 그렇게 사역을 주셨다면 자부심을 갖겠지요. 그런데 암만 생
각해도 그럴 것 같지는 않고, 내가 뒤늦게 "하나님 한번 봐주세요, 내
가 이런 일을 할게요"라고 하면서 기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데, 그러다
보면 접시도 깨뜨리고 물도 엎지르고 하지 않겠습니까? 평화로운 잔
치에 초대 받지 않는 사람이 공연히 부산을 떨며 자리를 어지럽히지
나 않을까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그럼 나는 왜 칠십이 훨씬 넘어 이제야 여기에 왔느냐?
하나님 처럼 사람을 잘 쓰시는 분이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그냥
은 쓸모가 없다. 그러니까 평생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깨달은 것을
얘기하면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너는
좀 늦게 써먹자 하는 뜻인 것 같습니다. 『구운몽』이 바로 그런 얘기
지요. 불교가 뭡니까? 속세를 떠난 정적주의[靜寂主義]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에 대해 회의를 품고 현세적인 삶에 관심을 두었던 성진은
그가 희구한 대로 꿈속에서 양소유가 되어 관가에 나가 벼슬을 하며
팔선녀를 아내로 두고 유교적 사대부의 삶을 마음껏 즐기며 그 덕목
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김니다.
그러나 노년에 비취궁에 앉아서 문득 문무기예[文武技藝], 모든 현세
의 욕망이 죽음 앞에선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본래의 불
교의 수행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지요.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서양의 파우스트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고 학문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 끝에 자살을 하려고 하지요. 그때 악마가 나타나 그
의 노예가 되어 넓은 세계, 파우스트가 모르고 경험하지 못한 쾌락의
현실 세계를 맛보게 해주겠다고 제의를 합니다.
그리고는 파우스트의 입에서 '아름다운 순간이여 멈춰라' 는 말이
나오게 되면 영혼을 달라고 내기를 겁니다. 악마를 통해서 그는 이
성적으로 도달할 수 없었던 세속의 쾌락적 경험을 하고 악의 극한까
지 체험하면서 역시 그곳에서도 그는 지고한 삶을 목적을 찾지 못합
니다. 파우스트는 경건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범적인 삶
을 살았던 것도 아니고 또 자기 내부의 유혹과 싸워 이긴 것도 아니지
만 종국에는 악마에게 빠앗길 뻔한 영혼을 사랑과 힘에 의해서 되찾아
구제됩니다.
|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잠언 19장 11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