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사로가 정말 나병환자(癩病患者)였을까?
02. 건강하신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집에 가서 유숙했단 말인가?
03. 나사로의 나병(癩病)을 주님께서 고쳐 주지지 않았다는 말인가?
04.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도 나병(癩病)은 그대로 있었단 말인가?
05. 베다니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과연 창녀(娼女)였단 말인가?
06. 마리아가 창녀(娼女) 생활을 계속(繼續)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07. 마리아가 가져온 그 비싼 향유(香油)는 어떻게 구했다는 말인가?
08.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는 여전(如前)히 가난하게 살았을까?
09. 예수님께서 과연 마리아의 창녀생활을 두고 아무 말씀도 안 하셨을까?
10. 마리아의 창녀 생활은 과연 그때까지 지속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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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로 알고 있는데 이는 성경을 정밀하게 보지 못한 사람들의 경솔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댄 브라운 같은 사람이 쓴 [다비치 코드]가 6천 만권씩이나 팔려 나가게 된 것이나, 그러한 엉터리 책을 읽고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일도 사실은 교회사 성경을 성실하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지도 않았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오해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것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둘째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었습니다.
창녀로 볼 수 있는 죄 많은 여인은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였습니다.
셋째 막달라 마리아는 나이가 상당히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을 뒷바라지를 하면서 섬겼던
여러 여인들이 이름이 나올 때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 사람들의 관습은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이름을 앞에 기록합니다.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거의 같은 나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어머니뻘이나 되는 고령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댄 브라운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3 류 코메디도 못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재력이 있는 중년이었고 아마도 과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한 때 일곱 귀신이 들어가서 폐인이 될 뻔했는데
그녀를 억압하던 일곱 귀신을 예수님께서 좇아내어 주심으로
정상으로 회복되어 그 날부터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의 삼년 사역에 들어간 경비 중 상당부분을 막달라 마리아가 담당했고 세베대의 부인 즉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이 일부분을 담당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3절)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라는 여인은 젊은 여인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헤롯이 자기의 내탕고를 맡을 청지기를 풋내기 젊은이를 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나이 50 이 덜된 사람이 헤롯 왕의 청지기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안나 역시 나이가 대체로 50 대였을 것이고 당시 상당한 신분에 있었던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의 이름보다 앞에 거명 되는 막달라 마리아의 나이도 최소한 50 대 여인이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맏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로 언급되는 이유는 AD. 590 년 성경도 제대로 일지 못하면서 초대 교황이 되었던 그레고리우스 1세가 교황이 되었던 다음 해 즉 591년 부활절 설교를 하면서 누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마리아를 베다니 마리아인 줄 모르고 그녀를 창녀이며 막달라 마리아라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자세하게 살펴 본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마리아는 베다니의 마리아 즉 나사로의 누이동생이었고
그 장소는 베다니의 나사로 집 가까이에 살고 있었던 바리새인 시몬이라는 문둥병 환자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질병을 고쳐 주셨는가?
베다니(벧-아니)라는 동네는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가난하고 소외된 마을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불가촉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는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그 동네의 이름도 "벧-아니" 즉 베다니 , "슬픔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병든 나사로 역시 나병환자였다는 것이 전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환자들이 격리되어 집단적으로 살아가는 마을을 [성 나자로 마을]로 부르게 되는 것도 베다니의 나사로가 나병을 앓는 환자였다는데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마르다였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와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아무리 궁금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와 오래 전부터 사귀어 왔으며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는 당연히 나사로의 집을 찾았으며 당연히 그의 여동생들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으며 힘들고 외로운 가정을 찾아 주시는 고마운 분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요 11:1-2)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요 11:5-6)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께서 그 마을 즉 베다니 마을에 가신 것은 한두 번이 아니고 거의 해 마다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늘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 들르시곤 하셨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질병을 고쳐 주셨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죽을 때까지도 결코 그의 병을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에야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과 함께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픔에 잠겨 있는 베다니 마을을 다시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난다고 했던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왔을 때 그의 나병이 나았다는 아무런 기사가 없습니다.
만약 그가 다시 살아났을 때 그의 몸에 있었던 나병이 치유 되었다면 이에 대하여 감격하고 감사하는 단 몇 줄의 기사라도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나병을 고쳐주셨다면 모든 베다니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 몰려 왔을 것이고 아마 베다니 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나병을 다 치유해 주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베다니 마을에서 어떤 환자를 고쳐 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이라고 모든 병을 다 고쳐 주신다고 하면, 어떤 성도에게 병이 낫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지 않으시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을 진실하게 믿고 섬기는 수많은 사람들의 질병이 치유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게 자신에 있는 질병 때문에 세 번씩이나 기도했지만
주님께서는 바울의 질병을 끝내 고쳐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 정말 신실한 목사님들 중에도 중병에 걸려서 끝내 회복되지 않고 어렵게 살아야 할 유족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2. 마리아는 창녀였는가 ?
성경에는 마리아가 창녀라고 기록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집 이웃에 사는 바리새인 문둥이 시몬이
이 마리아를 죄인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50)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하마르톨로스 에스틴)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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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7:38)죄인 = 하마르톨로스 에스틴 ;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인칭, 단수) 여기서 말하는 하마르톨로스는 형용사로서 죄인이라는 뜻이고 헬라어 [에스틴]이란 말은 [에이미] 동사의 (직설법, 현재, 능동태, 3인칭, 단수)입니다.
과거 한 때의 죄인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現在)도 능동적(能動的)인 죄인(罪人)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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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자주 출입하는 것을 그 이웃에 사는 바리새인 시몬라는 사람이 자연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때 앓던 병으로 죽어 장사까지 지냈던 나사로를 능력으로 살려 내신 사건이 있은 후로부터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서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평소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시몬은 혹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면 무슨 은혜를 받을 수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꺼림이 없이 그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시몬의 이웃에 살고 있었던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그 자리에 나타나서 예수님께 다가가 예수님의 머리에 한 방울을 떨어뜨린 후 나머지 향유는 한꺼번에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있었습니다.
(요 11:1-2)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복음서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댄 브라운은 복음서를 읽지 않고
무슨책을 읽었는지가 매우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복음서의 어떤 부분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발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간단합니다.
처음에 한 방울은 머리에 붓고 나머지는 발에 부었던 것으로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막 14: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눅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부었느니라
(요 12:1-3)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나병환자가 아니라면 베다니 문둥이 시몬과 한 동네 즉 베다니에 살았을 이유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격리되어서 살아가는 슬픈 집들의 마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마을에 사는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거리끼지 않으시고 찾아 가셔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고 그 동네에서 유하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와의 처음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성경에 언급이 없어서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해 마다 명절 때면 예루살렘에 올라오시고 그 가난한 집에 가셔서 나사로를 만났습니다.
자연히 마르다와 마리아도 예수님을 오라버니의 친구분으로 맞이하곤 했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무슨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는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그 여인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고 다만 [한 여인] 혹은 [어떤 여인]으로 이름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공관복음이 기록될 당시까지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실명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께서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는 세월이 흘러서 이미 주후 90년대가 되었고 그 때는 나사로의 가족들이 다 세상을 떠난 후였기 때문에 그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라고 실명을 밝혀 놓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잘 아는 바리새인 문둥이 시몬은 그들의 이웃에 살면서 나사로의 가정사를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고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죄가 일반적인 허물 같으면 바리새인 문둥이 시몬이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시몬의 집에서 취한 마리아의 행동은 정상적인 여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었습니다,.
히브리 처녀들이면 14세 이상이 되면 머리카락을 남정네들이 보는 것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얼굴만 내어 놓고 머리카락은 완전히 수건으로 덮어 가리우게 되어 있습니다.
14세가 된 후로는 그 머리카락을 첫 날 밤에 신랑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4명 이상의 남자들과 여러 여인들이 함께 있는 공식적인 잔치 자리에서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한 방을 떨어뜨린 후에 나머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버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있는 모습은 예사로운 행동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지나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여인의 돌출행위를 못마땅해 하였고 그 집 주인 즉 시몬은 순간 후회를 할 정도였습니다.
저렇게 죄 많은 여인이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을 뿌리치지 않고 있는 저 사람이 예언자란 말인가?
내가 예언자도 아닌 사람을 위해서 괜한 자리를 마련하고 경비만 허비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여인을 향하여 노골적으로 화를 내었습니다.
300 데나리온(장정 1년 품삯) 이상에 팔아서 많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을 그런식으로 허비하느냐고 그 혹독하게 마리아를 질책하다시피 했습니다.
사실 가룟 유다의 이 말 속에는 그렇게 못마땅한 행동을 하는 마리아를 말리지 않으시는 예수님까지도 싸잡아서 불평하는 마음이 간접적으로 묻어나는 언사였습니다.
한편 요한은 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가룟 유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함께 한 남자들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마리아의 이러한 처신을 결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예수님께서 한 말씀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 26:12-13)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막 14: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요 12:7)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사실을 따지자면 마리아가 주님의 죽음을 알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변호하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장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받아 두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사랑한 그 사랑을 우리는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녀의 사랑을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열 두 제자는 물론이요 주님께서 세상에 계셨던 그 짧은 생애 동안에
아무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그렇게 많이 사랑한 일은 없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다 초월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때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이 각일각 다가오고 있어서
주님의 마음이 심히 고민되었던 때였습니다.
일순간이나마 마리아의 그렇게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 주님의 마음이
다소간 위로가 되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마리아가 창녀로서 살아가는 것을 두고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처녀의 몸으로서 몸을 팔아서 살아간다는 것이 잘 못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마리아 가정에 무슨 복을 주셔서 생활대책을 세워주셨다는 아무런 흔적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집을 찾아오실 때마다 마리아의 양심을 자극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죽음을 며칠 앞두고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녀가 어떤 사람으로 사랑했는지 그녀의 사랑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고 다 헤아릴수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어떤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했는지는 주님과 마리아만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사랑을 받으셨고 또 많은 죄가 사해졌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눅 7 : 48~50)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그리고 며칠 안 되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부활 사건이 있었고 그 후로는 마리아의 가족들의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후에 그들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구브로(키프로스)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가 없지만 나사로의 무덤이 키프로스에 있습니다.
성경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어떻게 다시 죽었는지 상세한 기록이 없으나 전승에 따르면 키프로스에 와서 전도하다가 순교하여 키프로스의 라나카에 묻혔다고 합니다.
나사로가 잠든 무덤의 석관에는 '친구 나사로가 잠들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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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댄 브라운이 엉뚱한 이론을 만들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하기야 우리 한국의 찬송가에까지 그런 실수를 할 정도로 성경을 잘 모르니까 우리가 댄 브라운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찬송가 346 장에 보면 꼭 오해하기 좋게 되어 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바친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다니 마리아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간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계실 때
예수님의 시신 즉 미이라에 바르기 위하여 준비했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인지 베다니 마리아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쓴 책이
그렇게 팔리고 또 그런 것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고 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 목사들이 그 동안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다빈치 코드라는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면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을 보면 서방 기독교인들이 성경과 역사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시험하고 증명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 책을 읽어 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무지함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쫓겨난 일곱 귀신들이 쫓겨난 것이 억울 하니까 댄 브라운에게 들어가 그 해괴 망칙한 소설을 쓰게 하여 어설픈 기독교인들은 농락하면서 온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