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달 하버마스의 이 책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를 읽을 계획이 없었다. 주저도 아직 읽지 않은, 아니 사실은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뭘 말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그런데 난 하지 않아도 될 관여를 하게 되었다. 하지 않아도 될 관여로 인해, 일말의 책임(?)에서 책을 읽는다. 왜 이달의 선정자가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라고 말한 이유를, 나이 지긋한 세계적인 석학 하버마스에게 말한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가, 책을 읽고 난 뒤의 감상이다. 만약 하버마스가 이론 전개한 ‘소통적 합리성‘으로 글을 쓴 게 이렇게 설득되기 어렵다면, 그 이론이란 게 얼마나 나약한가? 그걸 알았다로 감상을 말한다면 책을 너무 쉽게 읽은 것인가? 규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나 역시도 설득되지 않은 책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에세이는 매우 혼란스럽게 엉킨 직관들을 좀더 투명하게 만들어보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하나의 시도다. 이 시도가 반쯤이라도 성공했다고는 나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또한 좀더 설득력 있는 다른 분석도 알지 못한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현상은 우리가 원래부터 그렇게 있는 [그런] 자연과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부여한 유기적 장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55-56쪽)
책은 도덕이 아닌 윤리의 문제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다 올바른 이 될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인류에 대한 실패에서 시작한 에세이다.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으려던 이유 또한 우생학 비판을 한다 할지다도 인간이 과연 가지 않더냐에 대한 회의가 있어서이다. 실패, 거기에서 읽지 않으려는데, 실패로부터, 읽게 된다. 누구나 그럴까? 인간의 가는 길, 좋은 길로 올바르게 합의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런데 여기에 물을 것이다. 과연 누구랑 무엇을 왜 어떤 목적으로 합의하느냐를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론세계와 실천장인 삶과의 차이란 게 있는 게 아닐까? 올바른 소리라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해야할 소리라는 걸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렇게 올바르게 얘기되는 대로 살아지더냐를 묻게 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를 알기 어려운 판국에 정도/제길만을 안다고 해서 올바른 삶이 살아지더냐, 아니 그것은 누구도 아는 길이지 않은가 하는 관점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노학자 스스로 절반은 실패한 에세이라는 말을 하는 이 에세이가 무엇을 말하가를 먼저 생각해본다. 들어본다. 앞으로 전개할 논변에 대해서 말한 것을, 조금은 길지만 옮겨본다. 옮길 내용이 이 책은 자유주의적 우생학 비판에 관해 다룬다.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는 도덕적 존재라는 자기이해에 대해 우리의 신체적 실존의 유전적 토대가 조작불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물음이 내가 유전공학의 통제 필요를 둘러싼 현재의 토론에 접근할 때 가지고 있는 관점이다(Ⅰ). 낙태 논쟁에서 알려진 논변들은 내 생각에 [철로의 방향을 조정하는] 전철기(轉轍機)를 잘못 설정했다. 조작되지 않은 유전적 소질을 가질 권리는 임신중절의 규제와는 다른 주제다 (Ⅱ). 유전자조작은 인류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건드리는데, 여기서 유(類 )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기 이해는 또한 우리의 법 및 도덕 이해를 위한 논의맥락도 형성한다(Ⅲ). ‘성장한 것’과 ‘만들어진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익숙한 구분에 대한 생명공학의 경계허물기가 우리의 지금까지의 인류 전체와 연관된 윤리적 자기이해에 어떤 변화를 일이키는지의 문제(Ⅳ), 그리고 그러 경계허물기가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된 인격체의 자기이해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Ⅴ)가 나에게는 특별한 관심거리다. 자신의 유전적 상태를 우생학적으로 프로그램했다는 데 대한 인식이 개인의 자율적 삶의 영위를 제한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들 사이의 근복적으로 대칭적 관계를 허물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리는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Ⅵ). 배아를 마구 소모하는 연구와 ‘착상전 유전자 검사’(PID)는 강력한 반발을 사고 있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자유주의적 우생학의 위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Ⅶ).(56-57쪽)
이처럼,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우생학 비판‘이다. 줄기세포 연구, 착상전 유전자 검사(Pramplantationsdiagnostik:PID), 소모적 배아연구, 유전자지도 조작에 대해서 과연 얼마큼 허용해야 하는가? 과연 자유주의적 우생학이 올바른가에 대한 비판이다. 왜 그것이 비판이 되느냐는. 유전자 조작이 된 후의 인간은 자기도구화가 되고, 인간 종에 대한 경계의 불분명함으로 혼란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책을 읽는 독자, 누가 그걸 모를까요, 라고 말한다. 이렇듯 시작부터 실패를 감수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더불어 인간이 과연 그렇게 ’옳음을 위해 합의하여 나아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게 이 책에 대해 삐딱하게 보게한다. 그건 또 읽는 이를 힘들게 한다.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데 대해.
하버마스를 읽는데, 문득 내가 간혹 듣는 나에 대한 비판이 생각났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되는 걸 어쩌란 말예요?“ 이런 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그런 맥락인지 모르겠다. 그걸 모르냐고요, 제발 엇나가(려)는 절 좀 설득시켜주세요..,이런 반문이. 인류 기술의 발전에 도대체 누가 그걸 멈출 수 있었느냐를 물어본다면 말이다...그러나 학문하는 태도는 이것이 아닐 것이다. 나를 좀 설득시켜주세요 보다는, 그의 방향으로 혹은 그에 대해서 내가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하버마스를 읽고나니, 그 생각이 더 강렬해진다...
기술의 진보에 있어 인간이 멈췄는가를 질문해보자. 볼프강 다엘레(Wolfgang van den Daele)의 표현, 인간이라는 자연의 도덕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어떤 것도 기술을 멈추지는 못했다.
"예방주사를 도입하고 심장이나 뇌에 대해 최초로 수술을 시도했을 때부터, 그리고 장기이식이나 인공장기는 물론이고 유전자 치료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혹시 의학적 목적 때문에라도 이제 더 이상 인간을 기술화하여 대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는 그런 경계에 도달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토론 중 그 어느 것도 기술을 멈추지는 못했다.“(60쪽)
그렇다면 유전자 조작에 의한 인간의 탄생, 어쩔 것인가? 어찌됐든, 막지 못할 것이다로 답이 나온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우생학 비판에 대한 가장 주된 논변은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그 경계란 “자신의 삶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윤리적 근본 물음에 대해 ‘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Selbstseinkönnen) ” (32쪽) 이라고 말한 키에르케고르의 탈형이상학적 개념이 늘 그 기준이다. 그 기준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게, 하버마스가 자유주의적 우생학을 비판하는 핵심 논점이다.
“유전정보를 변화시키는 우생학적 간섭이 우리의 도덕 경험의 전체구조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은 강한 주장이다. 그 주장은 유전공학이 몇몇 관점에서 도덕적 판단과 행위의 전제를 건드리는 실천적 문제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데 대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우연과 자유로운 결정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행위하고 자신의 실존을 염려하는 인격체 전체의 자기이해를 건드린다. ”(64-65 쪽)
유전자 조작으로 같은 인간에서 다른 인간종[인류]이 된다는 것으로 봐도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누구라도 질문할 것이다. 과연 누구나 칸트가 생각하던 것처럼, 아렌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인류 전체의 진보‘로서의 인류종이라고 생각하는가의 문제다.
다음으로 다루는 게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인데, 낙태시 낙태된 태아의 처리문제에서, 우린 이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브레멘 주에서 일어난 장례법이 그것인데, 임신중절에 의해 낙태된 태아를 윤리적 쓰레기로 처리될 것이 아니라 공원묘지에서 익명으로 매장되어야 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우리도 한번 생각해보자. 낙태된 아이가 어떻게 다루어질지 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어디까지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규정하는가의 문제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역으로 유전자 조작되어 태아나게 된, 태어나기 위해 준비되는 존재에 대해서도 역시 해당될 문제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윤리와 도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정의로운 모듬살이에 관한 문제를 ‘도덕적’이라고 부른다. 서로 갈등에 빠질 수도 있는 행위하는 인격체들에게 그와 같은 문제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규범적 규제 필요와 관련하여 제기된다. 그와 같은 갈등은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들 각자의 이해관계에 대해 평등하게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는 이성적 기대가 가능하다. 반면에 만약 갈등 상황을 서술하고 기준이 될 규범을 정당화하는 것이 이미 선호되는 삶의 양식이나 실존적인 자기이해, 그러니까 한 개인이나 특정 시민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해석체계에 의존하게 되면, 합리적 수용가능성에 대한 그와 같은 기대는 성립할 수 없다. 그와 같은 배경적 갈등은 ‘윤리적’ 문제를 건드린다.”(79쪽)
위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버마스가 말하는 ‘도덕적’과 ‘윤리적’에 대해 들어본다. 하버마스는 이를 이렇게 구분한다고 한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올바른 삶에 대한 학설”로서 이해하는 윤리학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전통 속에서 끌어낸 성공하거나 실패한 삶에 관한 특정한 관점들에 기초한 ‘윤리적’ 입장들”이 있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도덕적 관점’은 모든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평등하게 존중하고 모든 사람들에 대해 똑같이 좋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으로부터만 획득될 수 있다”고 옮긴이는 전한다. 성공하거나 실패한 삶에 관한 특정한 관점들에 기초한 (최소한의 도덕으로서의) 윤리라면, 평등한 삶과 모두에게 좋은 삶에 대한 판단으로서 획득된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그래서 우린 늘 도덕이 아닌 윤리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게 된다.
하버마스의 우생학 비판은 사실상 복잡하지 않다. 반복되는 주된 논점은 인간의 몸(유전자)에 대한 우생학적 간섭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자유와 평등의 도덕적 주체가 되는 인간 조건을(경계를) 허무는 것이라 한다. 기존의 같은 인간종에서 이제는 유전자 조작에 의한 다른 종의 생성이라고 볼 수 있을까?... 자연발생된 자신에서 부분 선택된 자신이라는 데서,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끌어내온 “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이 될 수 없다는 게 요점이다. 원래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 자신인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누구나 생각할 문제가 일자로서 자신에 대해 조화로운 자와 그렇지 못하는 자의 차이란 게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키에르케고르를 통해 말하듯, 나이면서도 나를 벗어나려는 나,를 직면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 또한 자기 자신으로 있고자 함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 그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니면 더 수준 낫게 절망적으로 하나의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 아니면 가장 수준 낮게는 자기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37쪽)
그렇지만 이게 다 “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으로 있을 수 없게 한 게 바로 유전자 조작이고 말이다. 자신, 태내 있었을 때 나올지 모를지에 대한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개체이지만, 그 개체는 이미 ‘자신으로 있음 수 있음‘으로서의 존재이지 않은가를 말하고 있다. 이는 나아가 자신이 자연으로부터 만들어진 존재인가, 자연으로부터 성장한 존재인가를 두고서 또 얘기하는데...자연으로 만들어진 것이건, 성장한 것인 것을 역시나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글을 읽으며 설사 만들어진 존재라할지라도 주체라고 생각하기 어렵지 않은가를 의문해보면, 여기에서 또 다른 길은 다른 데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유전자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미래 세대란 혹, 과거사람들에 의해 생성되고 발육된 노예가 아닌가의 관점도 얘기하고 있다. 한스 요나스의 다음 물음에서 전한다.
“그러나 그 힘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누구 또는 그 무엇을 위한 힘인가? 명백히 그 힘은 미래 세대에 대한 현 세대 사람들의 힘이다. 미래 세대는 오늘날의 계획자의 선행 결정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대상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권력의 이면은 미래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91 쪽)
그로부터 유전공학과 자연지배가 결국 자신의 자연 파괴로 이어진다는 요나스의 의견을 말한다. 그러면서 하버마스가 말하는 바는 다음이다.
“자유주의적 우생학은 경우에 따라서는 성장한 것과 만들어진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사이의 인지된 경계 허물기가 프로그램된 인격체의 자율적 살의 영위와 도덕적 자기이해에 대해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물음을 제기해야만 한다. 어쨌거나 우리가 해당 인격체 자신의 관점을 취하지 않고서는 어떤 규범적 평가를 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98 쪽)
이어 나아가는 게 인간의 도구화 금지, 이며 출생률(?아마도 탄생성natality), 그리고 자신으로 있음“을 얘기한다. 우생학적 프로그래밍된 주체의 도적적 감정이 어떤 혼란을 겪는지에 대해서, 안드레아스 쿨만이 말한 것 전한다.
“당연히 부모들은 이미 언제나 자신들의 자식들이 어떻게 되어야 할지에 대해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자식들이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실존을 가능케 한 것이 조립부품을 만들 듯 하는 그런 발상임을 알게 된다면, 문제는 다르다.“(99쪽)
이렇다면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단절, 즉 인류의 종말만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게 하버마스의 견해다. 그로부터 성장한 것과 만들어진 것 사이의 경계 허물기가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사례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나의 유전자의 조합을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내 삶에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누가 벌써부터 알 것인가? ‘몸으로 있음’의 관점이 유전적으로 만들어진 ‘신체를 가짐’에 대해 우선한다는 것이 뒤바뀌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체험된 ‘몸으로 있음’의 참여적 관점은 단지 잠시 잠시만 (자기) 관찰자의 외적 관점으로 전이될 뿐이다. 만들어진 존재인 내가 때때로 우선한다는 게 대한 앎이 자기소외적 효과를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왜 우리는 ‘그래서 뭐가 잘못되었지?’ 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그런 사실에 익숙해 질 수 없단 말인가?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이 우리의 지구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세계상을 깨뜨리면서 덧붙여주었던 나르시시즘에 대한 상처를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우리 세계상의 세 번째 탈중심화--몸과 생명을 생명공학에 종속시키는 일--를 아마도 좀더 큰 여유를 가지고 따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100-101쪽)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아직 게놈 조작에 의한 인류가 탄생한 것은 아니니까, 미래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위 문장에서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라는 게, 하버마스가 우생학을 비판하는 근거다. 인격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다뤄야만 한다가 그 근거다. 1인칭 인격체가 2인칭 인격체를 대할 때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이어 유전자조작된 인간이라 할지라도, 행위에 있어서는 프로그램된 게 아니라 탄생성이라는 걸 말하는 하버마스인데, 이 탄생성에 있어서도, 행위자가 프로그래머의 낯선의도를 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지 않겠는가 라는 관점이다.
이제 우생학의 도덕적 한계를 들어가본다.
“민주사회에서는 모든 시민들은 자신의 개인적 삶의 계획을 ‘최선의 역량에 따라’ 추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지닌다. 실패할 수도 있는 인생을 최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와 같은 윤리적 자유의 공간은 또한 유전적으로 제약된 능력과 성향과 속성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유기적 출발조건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윤리적 자유의 관점에서 볼 때, 프로그램된 인격체는 일단 자연적으로 출생한 사람과 결코 다르지 않은 상황 속에 있다. 그러나 바람직한 속성과 성향에 대한 우생학적 프로그래밍은, 그것이 해당 인격체에게 일정한 삶의 계획을 강요하고, 어쨌거나 자신의 삶의 선택의 자유를 특별하게 제약하는 한,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110쪽)
이러한 말로 시작한 글은 유전자 조작에 의해 탄생한 인류는 결국 도구적 인간이 되지 않느냐는 데서 끝으로 간다. 미래의 인간이 현 인류의 자기도구화여서 되겠는가의 비판적 관점이 그것이다. 프로그램된 인류란, 대꾸할 수 없음이 된다는 것이다.
“특질을 변형하는 유전공학적 간섭의 실천에 대한 전망은, 그런 간섭이 의사와 환자, 부모와 자식 사이의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적 관계의 한계를 넘어서고 유전적 자기변형과 더불어 우리의 규범적으로 구조화된 삶의 형식을 허물어 버릴 것이기 때문에, 매우 우려스럽다.”(119쪽)
“도구적으로 실현된 의도에서는 말을 듣는 사람인 프로그램된 해당 인격체가 대꾸하면서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그런 상대로서의 표현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와 같은 사물화하는 행위가 우리들의 ‘자신으로 있을 수 있음’과 우리의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그렇게 할지 하는 물음은 우리를 우려스럽게 한다.”(125 쪽)
에세이 형식으로 왜 자유주의적 우생학에 관한 하버마스의 비판을 따라가봤다. 왜 비판할 수밖에 없는가를 말하는 하버마스를.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과연 인류가 같은 인류인가의 문제, 같아 보이지만 다르지 않은가의 문제, 같다는 게 결국 권력의 위계질서가 필연적으로 생기지 않은가의 문제, 차이야말로 각 계급의 생존이 아닌가의 문제등의 문제에 대한 이견이 있다. 또한 세계화가 과연 누구에게 이로운가? 중심과 소통이 누구에게 이로운가? 왜 인간은 소통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남은 문제는 있다. 그에 대한 답을 감으로만 잡을 수 없다. 앞으로 더 하버마스의 글에 관심을 가져야만 겨우 알 것이다. 나는 다만 한 사람이 왜 그렇게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를 막연히 이해하게 됐고, 하버마스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막연히 알 뿐이다. 이 책을 마무리짓는 다음 끝문장을 통해 하버마스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그의 진의라 생각하며. 모두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위한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자기의 임의대로 규정해버리는 그 인간은, 그 다른 인간과의 다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 다른 인간에게는 우리 똑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평등한 자유를 빼앗아 버려야만 하지 않겠는가?" (175쪽)
위르겐 하버마스,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자유주의적 우생학 비판>, 장은주 옮김, 나남,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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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아이온 작성시간 06.06.25 우리는 우리가 제기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진리주장들의 구속력의 자장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지요. 이 과정에서 어떤 단독적인 참여자도 인간으로서 유적인 자기 이해의 과정과 구조를 통제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위에서 맑스가 이러한 유적 존재로서 자기 이해를 우리의 의식의 차원에서 얘기했다면, 하버마스는 줄곧 언어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어는 결코 사적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얘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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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아이온 작성시간 06.06.25 이 책은 1999년 “die Zeit”에 기고된 슬로터다이크의 하버마스에 대한 신랄한 공개서한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서 써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서한에서 슬로터다이크는 하버마스가 비열하게 자신을 등뒤에서 공격하고 있다 된소리를 했다죠? 20여년전 “냉소적 이성 비판”으로 유럽철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슬로터다이크, 특히 그는 자신의 대표작, <Sphaere I, II, III> (1998-2004)이 불문으로 번역이 되어 나왔을 만큼 프랑스에서 각광을 받고 있더군요. 지젝 역시 슬로터다이크를 반기는 것 같구요. 이러한 맥락에서 하버마스의 책은 읽힐 필요가 있다보며 시종일관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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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폭주기관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6.06.26 흉보는 것 아닌 줄 잘 아시면서...^^고마움이 몇 줄 꼬리말 안에 담겨있습니다. ^^이 책이야말로 읽혀져야 할 텍스트가 아닌가 하는 아이온님의 견해 잘 읽었습니다. 사유/얘기/관심이란 문을 열다보면, 말/표현할 수 있다면,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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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남시 작성시간 06.06.25 아이온님의 정리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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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아이온 작성시간 06.06.26 저의 하찮은 정리에 읽을거리가 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저 역시 김남시님 글을 통해서 먆은 것을 깨치면서도 일일이 말씀 못드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