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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책 **

[이달의 책]사르트르 <구토>

작성자폭주기관차|작성시간05.02.08|조회수584 목록 댓글 0



장-폴 사르트르, <구토>, 방곤옮김, 문예출판사, 1999년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는, '작가가 다루는 것은 의미이다.'(17쪽,<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라고 말한다. '말에 언어적 통일성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의미밖에 없다. 의미가 없어지면 말들은 소리와 펜의 흔적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말 것'(19쪽,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라고 말한다. 얼마전 읽은 셀린느도, 사르트르의 <구토>도 공히 존재와 언어로 연결된다. 의미에 제시하는 데는 사르트르가, 작품을 읽는 동안의 견디기 힘들정도의 과도한 열정-왜 그러는가? 이럴 수밖에 없다(?)...-에 있어서는 셀린느가 앞섬을 알 수 있다. 언제 읽었던가 싶은 사르트의 <구토>를 다시 읽는다. 과거로 돌아갸야만 할 것 같다. '머지않아 사랑하는 그대는 내가 없어 외로우리'라는 노랫말처럼, 외로워 그리워할 시간은 아니었다. 다만 거기 있었으나, 잊혀진 시간이었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카뮈를 읽었을 그때. 너무도 까마득하게 먼 날들이다. 언젠가 카페에서 읽은 글에서, 오에 겐자부로가 과거를 회고하면서 젊은날 사르트르를 읽었는데, 나이 들어 까뮈를 읽어보니 까뮈를 그때 읽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젊은날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나는 어떤가... 실존과 부조리에서. 텅빔, 공허, 아무것도 아님, 그러나 여전히 행위는 있는 존재의 무無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 마주해야할 상황에서의 주어진 불안과 고통이 있었다. <구토>를 통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관한 사유체계를 받아들인다. 존재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 다만 거기 있을 뿐이다.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재현할 수는 없다. 차라리 과거의 인물보다는 실재의 인물이 존재로서 재현된다. 사르트르에게서 구토란, 바람, 엎질러진 잉크, 조약돌, 나무 뿌리 등에서 끄나풀이 되어 연상되는 실존에 대한 글쓰기이다. 실존(존재감)에 때론 감당하기 힘든 구토를 경험한다. 그 존재감의 구토는 말/글로 표현된다.

작품이란, 의도와 의미와 자유를 지향하는 불안하면서도 고독한 존재인 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무엇이 된다. 작품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글쓰기란 하나의 기도(企圖, Project)다, 작가란 작품을 통해 뭔가 기획(투사)하고 참여하고 의미를 부여해야한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글쓰기란 하나의 기도(企圖)이다. '(49쪽,<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글은 언제나 완전할 수는 없다. 어떤 산문작가의 글에서도 말은 언제나 부족하거나, 넘친다. 모자라고 넘치는 말은 어떤 울림이 된다. 모자라고 넘치는 말이지만, 문장은 위험한 도박이지만, 말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울림이 있다. 그리고 글은 쓰고 있는 자신을 위한 것도, 독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특별히 누구를 위하지 않은 작품은 읽는 행위가 계속되는 동안만 존재한다. 문학은 팽이처럼, 움직이는 동안, 읽는동안만 존재한다. <구토>을 통해 여기와 저기의 간격, 지금과 그때의 차이를, 기억과 말을 통해 제시해준다.
' 문학이라는 사물은 야릇한 팽이 같은 것이어서, 오직 움직임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을 출현(出現)시키기 위해서는 읽기라고 부르는 구체적 행위가 필요하고,그것은 읽기의 행위가 계속되는 동안에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 이외의 경우에는 종이 위헤 박힌 검은 흔적이 있을 뿐이다.'(61쪽,<문학이란 무엇인가>)
글을 쓴다는 것에서, 쓰는 동안 작가 또한 자신을 만날 뿐이다. "자신의 앎,자신의 의지, 자신의 기도"로 오직 자신 자신을 만난다. 그에게 사물이란 미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쓴 것 마저, 읽는다해도 미칠 수 없는 거기에 있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마주치는 것은 순전히 자기 자신이지만, 작품이란 작가와 독자의 결합으로 탄생하게 된다. '예술은 타인을 위해서만, 그리고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64쪽, <문학이란 무엇인가>)으로 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작중 인물에 대해 느끼고 따라서 생명을 주는 반발심이나 우정의 복합감정을 지니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낱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작품을 읽다보면, 작중인물이 살아 있는 유기체로 느끼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작가의 경험을 통해 글을 쓰여지고, 독자의 경험으로 통해 작품은 읽혀진다. 작품이란 다만 읽는 동안만 생명력을 지닌채로 존재한다. 독자란 과연 누구인가? 독자와 함께 참여하는 쓰기/읽기인데, 참여하는/의식하는 독자란, 바로 동시대인이여야 한다.
'1947년에 있어서 작가의 상황이란 어떤 것이며, 그의 독자는 누구이며, 그의 신화는 무엇이며, 작가는 무엇에 관해서 쓸 수 있고 쓰기를 바라고 또 써야 하는 것인가?'(214쪽,<문학이란 무엇인가>)

얘기하기전, 옛것을 생각하다가 뒤적여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실린 지향(志向)[Project]에 대해 옮겨본다.
'사람은 이끼나 부패물이나 꽃양배추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관적으로 자기의 삶을 이어나가는 하나의 지향적 존재이다. 이 지향 이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고 하나의 뚜렷한 그 무엇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되고자 지향한 그것이다. 되고자 원하는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지(義志)라고 보통 우리가 부르는 것은 의식적 결정이어서 우리들 대다수에게 있어서 그것은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 뒤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정당에 가입하기를 바랄 수 있고, 책을 한 권 쓰고 결혼하기를 바랄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소위 의지라도 불리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자연적인 선택의 표시에 불과하다.'(15쪽,<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방곤옮김, 문예출판사)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는, 실존주의, 주체, 참여, 행위, 불안과 책임, 고독, 무신론, 모든 가치의 근거로서의 자유, 휴머니즘을얘기하는데, 그 중 인간의 지향성과 모든 타인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실존주의 첫걸음, 불안과 병행하는 고독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운이 남는다. 휴머니즘에 대해 '인간은 부단히 자기 밖에 있는 것이며 자기 밖으로 스스로를 투사(投射)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더 좋은 목적을 추구함으로써이다. 그처럼 사람은 자기 이상의 것을 행하는 것이며 그러한 초월에 비추어서만 인간은 사물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초월의 한복판, 즉 중심에 있다. 인간의 우주, 즉 인간의 주체성의 우주 이상의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없다.'(50쪽,<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문예출판사)는 부분에 대해서, 의구심이 많이 남지만, 지향차원에서, 참여차원에서 생각해두고 넘어간다.

이제 <구토>에 대해서 얘기해 본다.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이 말이 남는다. 내용이야 다들 알테다. 앙투안 로캉탱이란 실재의 인물이, 역사 속 과거인물 롤르봉씨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그에 대해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부빌에 3년간 머물던 (그)때의 얘기다. 년/월/일을, 때로 요일을, 때론 밤낮을 기록하며, 그때의 사유를 구현하는 글이다. 앙투안 로캉탱의 일기라며, 그에 대해서 원서 발행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기록은 앙투안 로캉탱의 서류 속에서 발견되엇다. 우리는 그것을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고 발표한다.'(9쪽)그러면서 '중앙 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의 여행을 끝마친 다음 드 롤르봉 후작에 관한 역사 연구를 완성하고자 3년째 부빌에 체류'(9쪽)하고 있었음을 발행인은 서언에 밝힌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술통 미라보와 그의 친구들>, 406쪽, 주 2 샹피올 판(版), 1906년'의 주(註)를 다시 읽었다. '(32쪽)는 표현이 있다. 처음으로 롤르봉씨를 알게 된 게 바로 제르맹 베르제의 책의 주에서였다. 그 글을 통해, 롤르봉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이 있는 부빌(시립도서관)에 정착하여 글을 쓰고 있다. 그 몇줄이 왜 매혹적인지를 읽고 있는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로캉탱은 그 몇 줄의 주를 좋아했다. 다음이 그 주다.
'드 롤르봉 씨는 몹시 추남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그를 '나의 친애하는 원숭이'라고 즐겨 불렀다. 그럼에도 그는 왕궁의 모든 부인들을 소유했다. 그것은 추남 부아즈농처럼 어릿광대 짓을 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자력(磁力)이었다. 그 자력은 그의 아름다운 피정복자를 정욕의 가장 나쁜 과격 행위로 이끌어가는 자력이었다. 그는 모의를 하고, 콜리에 사건에서는 다소 수상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술통이란 별명이 붙은 미라보, 네르시아와 자주 교제를 한 후에 1790년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는 러시아에 모습을 나타내고 파벨 1세의 암살 사건에 약간 가담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가장 먼 나라들인 인도, 중국, 터키......등지를 여행했다. 그는 무역도 하고, 음모도 꾸미고, 스파이 노릇도 했다. 1813년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16년에 권력을 잡았다. 그는 앙굴엠(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딸-옮긴이) 공작 부인의 유일한 심복이었다. 변덕스럽고, 게다가 어렸을 때의 무시무시한 추억을 결코 잊지 못하는 그 부인도 롤르봉 씨를 보면 마음이 가라앉아서 미소를 짖는 것이었다. 왕궁은 그 부인의 기분에 따라 흐렸다 개었다 하곤 했다. 1820년 3월, 그는 대단히 아름다운 열여섯살 난 드 로크로르 양과 결혼했다. 드 롤르봉 씨는 70세였다. 그는 권세의 절정에 있었으며, 생애 최고의 순간을 누리고 있었다. 7개월 후에 그는 반역죄로 고발을 당하고는 붙잡혀, 지하 감옥에 갇혀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5년간에 걸친 감옥살이 끝에 사망했다.'(31-32쪽)
로캉탱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 이 주註로부터 그는 실제 존재했던 과거 인물로부터 현재적 글쓰기로 그를 표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인물이다. 이미 사망한 그가 거기(책속/과거)에 있다 해도, 그는 과거의 그가 아니라 실재의 그가 된다. 결코 여기에 구현할 수는 없다.

나는 <구토>를 '존재/무 시간/공간'에 대한 사르트르의 탐구서로 읽는다. 오랫동안 여행으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했던 앙투안은, 지금이 아닌 과거로 이동하여, 과거가 아닌 지금을 쓰려고 한다. 그러나, 존재란 현존인 상황에서만 존재일 뿐, 지나버린 경우는 실존이라 말할 수 없다. 과거 롤르봉을 글을 통해 재현한다고 하면, 그것 롤르봉이 아니라, 실재의 롤르봉일 뿐이다. 이런 생각은 나중 부빌을 떠나는 앙투안의 결심 중, 글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해서, 한권의 소설로 결론짓게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을 단어와 단어를 종이조각을 줍는 행위처럼, 천과 천을 조각조작 이어붙이는 것처럼 생각한다. 자료와 자료, 생각과 생각, 사연과 사연을 이어 붙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어 의미가 되는 무엇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좌절의 문앞에 있다. 인간 롤르봉이 책을 쓰는 일 보다 재미있었는데, 이제 (어느 순간) 그 인간에 대해 흥미가 없었져 버린 걸 인식한다. 롤르봉의 기록이 실린 註로부터 그가 쓴 역사적 기록들은, 사실 가설일 뿐이지 않은가. 증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역사적 인물보다, 소설적 인물이 더 진실해 보이지 않은가로 그는 멈춰 서 있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 간혹 음악에 구토가 멎는 체험을 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를 가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그리고는 실재는 책 밖에 없지 않을까를 의문한다. 물론 책으로부터의 실재의 세계에 살고 있는 휴머니스트 독서광의 '아무것도 아닌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책 또한 실재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이제껏 10년동안 유럽으로,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돌아다녔던 것, 그것은 정작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삶이란,' 배경이 바뀌고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가 나가고, 그뿐이다. 결코 출발이라는 게 없다. 나날이 아무런 운율도 이유도 없이 나날에 덮친다. 그것은 끊임없고 단조로운 덧셈'(81쪽)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덧셈이다. 삶이란 인간이 살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 삶을 얘기할 때는 모든 것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듯 얘기한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변화이다. 그 증거로, 사람은 정말 이야기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치 정말 이야기가 있기나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은 한 방향에서 생기고 우리는 그것을 그 반대 방향으로 얘기'(82쪽)한다.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 삶을 얘기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듯이, 마차 무슨 일이 있기나 한 것처럼 얘기를 한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시간의 흐름은 어떤가? 일기가 발견된 뒤를 먼저 얘기하고, 도시를 떠나는 시점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그리고 도시를 떠나려는 시점에서, 작품은 끝난다. 시간의 구성은 부빌이라는 곳에서의 로캉탱의 사건(?)의 기록의 발견에 관해서, 기록의 완결시점에서, 과거로 돌아가 시간순으로 얘기하다가, 부빌을 떠나는 시점에서 끝난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를 보여주는 일기의 기록들이다. 한 사람이 어떤 목적(지향성)- 롤르봉씨에 관한 글을 쓰자-을 가지고, 부빌에 왔다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서 떠나는 상황에서 종결하고 있다. 그 다음은 그럼 어떻게 될까? 이제는 일기 쓰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러니 이미 지나간 일들을 쓰는 일기를 더이상은 계집애들처럼 쓰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벌써 과거가 되어 기록된 현재라고 생각하는 과거인 지금)의 생각이다. 이 생각 또한 롤르봉에 대해 쓰자고 부빌에 온 것처럼, 이제는 그게 아니라며 떠나는 것처럼, 어느 순간 바뀔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지금의 확실한 지지점이 될 수도,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이렇듯, 지나왔다고 착각하는 거기의 일들이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실존의 여기 뿐이다. 인간이란 현존으로만 존재할 뿐이란 걸 일깨워준다. 거기에 로캉탱이 있었고, 누군가 그 로캉탱의 기록을 발견했고, 로캉탱을 따라 한 사람의 경험들이 지나갈 뿐이다.

로캉탱은 일기(글쓰기)를 통해 질문하고 수긍한다. 그리고 또 질문한다. 나는 무엇인가? 시간은 뭔가? 내가 느끼고 보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가 존재를 재현(체현)할 수 있는가?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단지 소설의 주인공처럼 행복할 뿐 아닌가? 나는 고독하다. 나는 걷는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랑했던 안니가 있다. 안니로부터 파리에서 만나지는 편지가 온다. 파리에 간다. 안니를 지금도 여전히 과거(현재)의 나를 사랑한다. 그러나 변했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난다.변화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 게으름으로 보고 있기도 한다. 오랜만에 누군가가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정말 변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고, 변한 것을 다만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쓰려고 했던 롤르봉의 역사를 쓰는 것에 대해 회의한다. 자신의 과거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가, ' 타인의 과거를 구제할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을까?'(181쪽)라며. 대견스럽게 혼잣말을 했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과거와 현재의 고찰에 대해 스스로 견뎌내지도 못한다. 종이위에 쓴 글씨들을 보며, 자신이 쓴 글씨이지만, 그것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글씨를 쓴 것이 내가 맞을까. 말을 뱉는다. 언제나 이르거나 늦은 어느 때처럼, 글을 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늦게 안다. 늦었다를 말하는 것, 할 수 없다는 걸 말하는 것, 그 말에 구속되는 상황속으로 삶은 진행한다.
자신이 쓴 글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고, 독자가 요구하는 생각이 아니고, 어쩌면 실재의 인물 롤르봉의 생각이지 않을까를 이렇게 쓴 게 작품 속 롤르봉이라고 말하는데...'너무 늦었다'(183쪽). 언제나 늦은 앎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고도 말할 수는 없다. 작가와 작중 인물과, 독자의 협조에 관한 사르트르의 생각이 잘 녹아있는 구절이다. 자신이 현존애 대해 인식한다. 그걸 말로 표현하려고 한다. 생각과 존재 속에 말이 끝없이 흘러나온다. 끝낼 수도 없는 말이. 생각과 말들의 끝없음이다. 생각하면 과연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무엇의 본질(실체)는 무엇인가? 실체가 우선인가, 본질이 우선인가?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글을 쓴다. 생각한다. 생각을 멈출수가 없다. 내가 과거 살았던 롤르봉을 결코 글을 통해 살게 할 수 없음을 인식한다.

작품을 통해 상황속에서 번뇌하는 로캉탱이 보여지는데, 그건 끝없는 말을 통해서다. 그가써야하는 말을 통해서다. 존재와 죽음으로부터 재생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도 담고 있는데, 그건 사실 시작일뿐 아닐까?...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언제나 시작하지 않는 상황만인가? 끝이란 다른 시작일 뿐이다. 그뿐이다.

역사 속의 롤르봉에 관한 글을 쓸 수 없다는 좌절/실패을 인식하고, 로캉탱은 부빌을 떠난다. 물론 또다른 시작-한권의 책, 한권의 소설-을 안고서 말이다. 독서광이 도서관에서 당하는 수치스러울 상황에 대해 로캉탱은 어찌 대처하는가? 곧 뭔가 일을 벌어질 것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서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당한 처사에 고통스러워하는 독서광이 안타깝다. 떠나는 시점에서도 독서광에 대해서 걱정한다. 그러나 로캉탱은 떠난다. 떠나는 로캉탱은 어느 날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받아들일 것이라며, 그때가 반드시 있으리라,를 생각한다. 절대로 논문을 쓰지 않고,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332쪽)을 생각한다. 최종적인 생각은, '(~)ㄹ 것이다.'
'내일 부빌에는 비가 올 것이다.'(332쪽)
이렇듯, 하나가 안 될 때는 어김없이 다른 무엇을 새롭게 지향하는 (~)할 존재인 인간과 조건이 되어 내릴 비를 연관짓고 있다. 현재, 과거, 미래를 말하며 로캉탱의 일기는 일단 마무리된다. 과거 머물렀던 부빌에, 자신과 상관없을 것이 분명해보이는 비가 내일 올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록을 끝낸다. 지향하는 존재이지만, 앞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지향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쓴다/산다. 왜 쓰는가에 대한 이유란 게 다만 쓰고 있을 뿐이라 할지라도. 쓰며 살고, 읽으며 살고, 어떤 상황에 처해서(개입되어서) 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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