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다시 읽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넬리, 나타샤, 스미트씨, 이흐메네프의 모욕과 용서받기 어려운 고백(얘기)을 듣고 있노라면, 왜 사람은 이렇게 어리석을까를 생각하면서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를 의문하게 된다. 알면서도 서로 상처주고 모욕을 주고, 몰라서도 상처주고 모욕을 주고, 모욕과 상처와 용서에 있어 끝을 결정지을 수도 없으면서 말이다. 넬리는 자신의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서, 그걸 거부하며 끝내 아버지를 저주한다. 어머니가 발코프스키에게 전하라는 편지를 부적처럼 간직한 채, 돌아가신 어머니의 발코프스키를 향한 저주가 지속되게 한다. 스미트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저주한다고 말하지만, 손녀 넬리를 거절하지는 못한다. 딸의 애완견 아조르까의 죽음에서 함께 죽어버리기까지 한다.
왜 인간은 이래야 하는걸까? 도대체 왜 인간은 이러는걸까? 왜 당위에 거부하는 것일까? 의무에 반항하는 것일까? 거부하고 반항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욕망과 의무는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자리하는가? 광기와 흥분은 또? 사랑이 뭐고, 욕망은 뭐고, 부정은 뭐고, 자식이 뭐고, 삶이 뭘까?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아닌 채 경과시키는 것일까? 왜 거기에서, 딱 거기서, 정지시켜버리는 것일까? 용서할 수 있으면 용서하면 될터인데, 그걸 왜 몸과 마음에 새긴 채, 우울과 광기를 가슴에 안고 가는걸까? 왜 그럴까? 왜 풀고 잊어주면 안 되는걸까? 왜 인간은 알면서 모욕당하고, 스스로 모욕 속으로 들어가는걸까? 왜 인간은 그럴줄 알면서도 맞서는걸까?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반항해도, 올라가도, 부정해도, 저주한다해도,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면서도. 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면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읽으며, 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며 감동하는가를 생각하게 됐다. 이유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바라 보는 인간이지만,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함께 살고 있거나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경제논리에 휩쓸린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읽혀지지 않을까? 그 사람들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한 사람들, 분신으로서의 사람,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 고아, 남편과 정부의 사이에 있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 질투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죽음의 집에 수감된 사람들, 도박에 빠진 사람들, 죄와 벌을 스스로 판단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광기에 홀린 사람들, 無에 홀린 사람들, 바라만 봐도 슬퍼지는 사람들, 백치 같은 사람들, 심판 받는 사람들, 그리고 주변에 흔히 존재하는 사람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 등등 무관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 관한 관심에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으며 공감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중 가장 마음 아픈 작품으로, 나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말한다. 넬리와 넬리 엄마, 나타샤, 이흐메네프, 스미트씨의 고백(얘기)을 들었을 때, 약한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모욕과 저주와 사랑의 존재이유 때문이다. 너무 약한 그들, 아직은 덜 빠진(홀린) 그들때문이다. 정신(목숨)을 놓을버릴 수 있음에도 그들이 붙잡고 있는 감상(저주) 때문이다.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상처받은 사람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약하다. 연약한 사람들이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변화 가능성이 보이는 인물들이라는 데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후기로 갈수록 무한과 가능성을 얘기하기 위해 더욱 견고하게 홀린 이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상처받은 사람들>에서 등장하는 발코프스키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삶을 고정되지 않은 이들이다. 넬리의 고통스런 고백에 이흐메네프 노인이 변하지 않던가? 아조르카의 죽음에 사그라지는 스미트노인 아니던가? 아버지의 저주에 흥분된 넬리의 엄마가 아니던가? 발코프스키의 계략에 넘어가 카짜에게로 사랑이 옮겨가버리지 않던가? 알료샤의 변화를 감지하면서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타샤가 아니던가? 나타샤에 대한 사랑으로도 다만 지켜보는 길밖에 없는 바냐 아니던가?
이처럼 이들은 발코프스키의 조정에 그저 모욕 당하는 유약한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애잔해진다.
작품은 이후 장편소설의 테두리를 이루는 4부로 구성돼있다. 얘기의 겉을 보면, 소설은 한편의 소설로 명성은 얻었으나 여전히 가난한 소설가 바냐라는 화자가 글을 쓰기 위해 방을 얻기 시작하면서, 결국 소설을 탈고하기까지의 1년간의 현재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보여지는 얘기이다.
얘기의 속은 이렇다. 그가 화자가 되어, 또는 작중인물이 되어 엮어지는 <상처받은 사람들>은 원제인 멸시당하고 모욕받는 사람들에 합당하게 발코프스키에게 멸시당하고 모욕당한 사람들의 얘기로도 볼 수 있다. 발코프스키발 모욕이나, 그 모욕은 아버지가 하나뿐인 사랑하는 딸에게로, 딸이 한없이 사랑하는 아버지에게로 , 사랑에 의해 스스로 모욕당하는 나탸샤에게로, 어리지만 이미 모욕을 체험한 넬리에게도 증식된다.
그런데 <상처받은 사람들>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사건이 만들어지게 하는 자로 본다면 발코프스키로, 관찰자로 한다면 바냐로, 당한자(희생양)로 한다면 나타샤와 넬리로 할 수 있다. 소설적 서사는 발생하게 한 발코프스키에 의해 생성됐고, 극적 갈등은 넬리와 나타샤에 의해 해소된다. 그래서 나는 발코프스키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안고 죽은 넬리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싶다. 물론 넬리를 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허약하다. 그럼에도 넬리와의 만남에서 1부가 완성되고, 넬리의 죽음을 에필로그로 한 저자의 의도를 본다면, 넬리가 주인공이지 않을까?
그러나 누구를 주인공이라고 하는가 보다는 화자 바냐, 매개자 발코프스키, 처해진 자 넬리와 나타샤, 이렇게 세 구도를 살려 읽는 게 더욱 감동적으로 소설을 읽는 방법이 될 듯하다.
1부는 기이한 노인의 죽음을 직면과 그 죽음후 글을 쓸 방을 구하게 된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쓴 후 어느정도 인정을 얻게 된 가난한 작가인 바냐(이반 페트로비치)가 소설의 화자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적 평가에 있어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던 벨린스키도 B라는 이름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바냐가 글을 쓰기 위해 방을 구하면서부터, 결국 소설을 탈고한 상황에서 장편소설 <상처받는 사람들>은 끝난다. <상처받은 사람들> 은 작가가 화자 혹은 주인공이 되어 사건이 개입되는 상황, 스미트 노인을 알게 되고, 그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넬리를 알게 되고, 나타샤를 다시 만나 더욱 사랑하게 되고, 발코프스키 공작의 위선과 악을 알게(듣게) 되고, 넬리의 고통을 알게 되고, 넬리를 통해 이흐메네프 노인과 나타샤의 화해가 있게 되고, 넬리의 죽음을 관찰하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화자이면서도 관찰자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이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바냐가 있다.
그러나 나타샤와의 사랑, 나타샤의 알료샤에 대한 사랑, 아버지에 대한 배반, 넬리의 멸시당하는 광기와 사랑의 삶에 직접적으로 개입되는 관찰자가 아닌 등장인물 바냐에 의해 소설적 힘은 배가된다. 결국 이 줄기를 통해 작중 인물들의 모욕(멸시), 그리고 저주 혹은 용서를 우린 체험하게 된다.
이 작품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적이 있다는'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의미를 새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된다. 유독 외투에 관해 얘기거리의 제공이 많은 작품이다.
추위에 외투는 입었다는 넬리의 말에서 알몸으로 거리를 배회하다가 한적한 곳에서 만난 사람앞에서 외투를 순간 벗어젖히는 프랑스의 광인까지, 외투에 대해 좀더 생각하게 한다. 가난하고 멸시당한 삶이어도 외투를 걸치는 낭만주의자 넬리나 넬리 엄마, 바냐, 나타샤, 이흐메네프가 있다면, 때론 명분(지위, 당위)을 벗어버리듯 외투를 벗어 타인에게 모욕을 주는 발코프스키의 대비를 통해 낭만의 고통을 얘기하고 있다. 1840년대 낭만주의자 도스토예프스키가 바냐의 모습으로 재현돼있다.
'빵이냐, 외투냐? '
미학적 평가를 받을만한 작품은 못된다고 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에 내리는 모출스키의 평가는 다음이다.
"'본래적 선'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광경은 비극적이다. 사랑,동정, 이타 정신은 이웃을 돕지 못한다. 선은 악을 지배하지 못한다. 소설 끝에서 이흐메네프 일가는 산산조각난 삶으로, 나타시야는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치닫게 된다. 이반 페트로비치는 병원에서 마지막 나날을 보내고 넬리는 관 속에 누워 있다. 그러나 배신자 알료사는 카짜와 행복을 누리고, 악당인 공작은 신수 좋게 장가들 준비를 한다. 악의 완전한 승리이다. 왜 그런가? 휴머니즘적 선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그 해결은 바로 비극 소설 속에 들어 있었다."(304쪽, 모출스키,<도스토예프스키>)
비극 소설 속에서의 삶의 의문 제기, 죄인들의 삶을 눈으로 직접보고 경험한 시베리아의 유형생활 수 쓴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부터 시작한 종교적 비극이라고 역시 말하고 있다.
"인간 본래적인 무죄성을 옹호하는 인본주의적인 거짓에 맞서 원죄를 주장하는 종교적 진리가 대립된다. 유토피아적인 목가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종결된다. 이제 종교적 비극이 시작되었다."(307쪽, 모츨스키, <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는 말에 공감이 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통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각인되는 단어는 '용서'였다. 배신으로부터 발생된 우울증에서도 그걸 극복하는 데 용서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용서란 사랑 속에 포함된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났지만, 아버지를 가난에 빠지게 했지만 그게 과연 스미트씨가 딸을 용서하지 못할 일이더냐. 사랑하는 알료샤를 따라 집안의 갈등과 반대를 뿌리치고 집을 나가 모욕당한 나타샤를 용서할 수도 있지 않더냐. 사랑하는 알료샤가 떠날 줄 알면서도 카짜와 같이 가게하는 나탸샤에게 알료샤는 용서해야할 존재인가? 아니지 않은가? 사랑하는 존재가 아닌가? 이는 바냐가 넬리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네가 지금 아프고 낙담해 있는 줄 알면서도, 나는 두려움에 떨며 눈물 짓고 있는 너를 홀로 남겨 두어야만 하겠다. 얘야! 나를 용서하렴. 여기 또 다른 사랑스럽고 용서받지 못한 존재, 불행하고 모욕당하고 버려진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 다오.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어."(259쪽)
용서보다는 큰 사랑을 교훈적으로 깨닫게 된 책이다. 사랑하는 그들은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다. 사랑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한다.
끝으로 이 작품을 통해 1년동안의 모욕과 용서를 거친 후, 바냐가 나타샤의 눈을 통해 읽게 되는 속엣말, "<우리는 함께 영원히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532쪽)처럼 인간인 과연 행복을 지향하는 것일까,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를 의문해본다.
'그게 행복인줄 안다고 해서, 과연 그 길로만 가지더냐? 그 길로 가기보다는, 혹은 가면서도 왜 그렇게 가야하느냐고 의문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
도스토예프스키, <상처받은 사람들 (원제:멸시당하고 모욕받은 사람들)>, 윤우섭옮김,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