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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와 도스토예프스키

작성자kundera|작성시간02.09.18|조회수512 목록 댓글 0

1. 게오르그 루카치, <도스토예프스키>, 이항재 옮김, <<도스토예프스키 연구>>, 르네 웰렉 편, 열린책들, 1987
2. 게오르그 루카치, <도스토예프스키>, <<변혁기 러시아의 리얼리즘 문학>>, 조정환 옮김, 동녘, 1986
(1은 르네 웰렉이 영역한 것을 중역한 것이고, 2는 독어 원본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다. 한데, 원문에서 직접 번역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번역이라는 보장은 없는 것 같다. 이 두 번역은 몇몇 부분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여, 이 글에선 두 번역본을 모두 참조 인용시 좀더 낫다고 생각되는 번역을 인용한다)

1.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루카치에 대한 수많은 오해 중 하나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와의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들의 관계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라는 다소 멋드러진 언사와 "도스토예프스키와 황금시대"라는 주제로 표현된다. 도스토예프스키 숭배자들은 이 같은 루카치의 언급을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여기며, 어떤 글에서든 이것을 처음 또는 끝에 인용한다. 한데, 이런 장식으로서 <도스또예프스키와 루카치의 관계>는 과연 어디까지 정당한 것일까?  
 먼저 <소설의 이론>의 마지막 서술에 주목하자. 그는 분명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그의 소설에서 보여지고 있는 세계는 현실적 싸움에서 괴리된 직관으로 투사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카치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세계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19세기의 낭만주의 또는 그에 대한 낭만적 반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라고 말한 것이다. 한데, 이것은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우린 <소설의 이론>에서 루카치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서술을 이해함에 있어, 톨스토이에 대한 언급과 반드시 연관시켜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면, 일견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의 이론>이 가진 최종목적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톨스토이가 종점이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소설의 유형을 크게 3가지로 나누었는데, 추상적 이상주의, 환멸적 낭만주의, 교양소설이 그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교양소설이 중심이 되어 그 양 옆에 이상주의가 낭만주의가 선 형국이다. 이런 분류 속에서 톨스토이의 위치는 사뭇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왜냐면, 그의 소설은 이 세 가지를 다 포함은 물론,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바로 이것을 '서사시로의 초월적 경향'으로 보고, 이것이 사실상 19세기 낭만주의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여긴 것이다. "톨스토이 소설- 플로베르의 바로크적 변형으로 한층 더 상승된 환멸소설"
 루카치는 톨스토이의 "자연" 개념이 서구 유럽에선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언급하고, 여기서 자연이란 "제 2자연"에 대한 전면부정의 형태를 띤 유토피아적 이념에서 나온다고 본다. 한데, 소설이란 장르에선 이런 유토피아의 실현이 애당초 불가능한 형태임으로, 여기서 발생하는 충돌이 "톨스토이적 요소들"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순간적으로만 체험할 수 있는 자연이다. 톨스토이에게 있어 유토피아는 관습을 완전히 폐기한 자연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 뿐, 그것을 톨스토이 사상으로 여기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중요한 것은 다음이다. 톨스토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자연은 순간적일 뿐, 지속적이지 않기에 결코 현실적이지 못하다. 해서 루카치는 가장 톨스토이적 인물인 레빈을 "현실성을 띤 인물이라기보다는 경계선상에 서있는 미학적 개념"(<소설의 이론>, 172쪽)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를 쉽게 좀더 쉽게 말하자면, 톨스토이는 관념적(개념적) 인간을 탄생시킨 것이다.

2. 종착점에서 반환점으로
 루카치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쓴 글은 단 한편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글로, 황금시대에 대한 언급이 있는 논문이다. 한데, 막상 읽어보면 그리 대단한 글처럼 여겨지지 않는데, 왜 그렇게 자주 언급되는지 의아해 하기 쉽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면, 이 글에서 논의되는 도스토예프스키 해석은 오늘날 완전히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
 루카치는 우선 라스꼴리니꼬프란 인물의 중요성을 베르테르의 등장만큼 높이 평가하는데, 그것은 라스꼴리니꼬프적 인간이 가진 '문제 제기'의 성격 때문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발자크의 후계자로 평가하지만, 곧 그만이 갖는 독특함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 독특함이란 "구체적 행위에서 사고실험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루카치는 파우스트, 빌헬름 마이스터도 나름대로의 문제를 갖고 있었지만, 그 자신이 문제가 되진 못했다고 지적하고, 오직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러서야 사고시험이란 "관념" 아래에서 스스로를 문제화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허나, 이로 인해 행동과 영혼이 갖게 된 불일치는 결국 희극에 대한 강한 공포를 드러내며, 이런 개인주의의 강렬함은 결코 확고한 지반을 발견할 수 없지만, 이로 인해 고독한 인간 비극의 가장 순수한 표현만은 획득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여기서 우린 그의 카프카에 대한 박약한 평가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루카치는 카프카에 대한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만, 토마스 만과 비교해 카프카적 경향이 갖고 있는 위험을 지나치게 염려했다. 이와 비교했을 땐 도스토예프스키 역시 그의 비판 대상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한데, 묘하게도 그는 시종 긍정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심지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이렇게 하여 도스토예프스키 인물들의 세계는 그의 정치적 이상을 하나의 혼돈 속으로 해체시킨다. 그러나 이 혼돈 그 자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이다. 즉, 이러한 혼돈은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거짓되고 왜곡된 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인 것이다. (1: 253쪽)

 왜 그는 이 같은 평가를 카프카나 프루스트에겐 내리지 않았던 것일까?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도스토예프스키적 인물이 가지고 있는 이득 없는 강렬한 관념투쟁에서 황금시대(유토피아)에의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황금시대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 톨스토이 소설의 중심에 위치한 것으로 불가능성 자체, 자연이 아닐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톨스토이에게 있어 이 황금시대가 잠시 나타났다 살아지는 미학적 개념에 불과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그것은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더욱 요청되어지는 그 무엇이다. 여기서 우린 기묘한 역설과 부딪치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의 정의를 수긍할 때이다. 관념은 그것이 철저히 파괴됨으로 그 진정성을 확인 받을 수 있는데, 그 관념의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것을 극복할 확률은 높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의미하는 것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의 이론>에서 한 언급을 완전히 뒤집는 말이다. 다시 말해,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는 게 아니라, 오직 소설가인 도스토예프스키만이 의미 있게 된 것이다.

 이따금, 다소 종종 정치적 저널리스트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누르고 승리한다. (...) 그러나 매우 종종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인용자) 인물들은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그들 자신의 삶을 최후까지, 즉 그들의 타고난 본성의 극단적인 결과로까지 몰고 간다. 그들의 발전의 변증법, 즉 그들의 이념적 투쟁은 저널리스트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의식적으로 설정한 목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을 취한다. 올바로 제기된 시적(문학적) 문제는 작가의 정치적 의도와 사회적 답안을 누르고 승리한다.(1:251쪽)
  
 루카치는 도스토예프스키적 인물의 성격을 다음과 같은 문구로 이해한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간이역에 서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역에서 기차의 발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 역은 물론 고향의 역이 아니고 기차는 필시 지나가 버리는 기차이다. (...) 기차 한 대가 역을 떠났지만 그는 이제 다음 기차를 기다린다. 역은 항상 역으로 남아 있고 그래서 그것은 임시적인 것일 뿐이다. (2:134쪽)

 즉,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인간은 미래란 예감이 준 긴장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이다.  해서, 그는 선험적(과거)으로 존재하는 미적 형식을 추구한 톨스토이와 달리 지극히 현대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린 이 차이를 분명히 해보자. 유토피아는 항상 현재의 이상을 투영한 과거로 존재한다. 해서, 톨스토이에게 있어 자연이란 관습(제2자연)에 대한 전면적 거부, 그리고 과거로의 회귀의 형태를 띠고 있다. (물론, 전적으로 그렇다고 속단할 순 없지만)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에겐 과거란 잉여공간은 완전히 부재 한다. 그에게 있어 유토피아란 오로지 미래로부터 오는 메시지인 것이다. 이런 차이점이 도스토예프스키로 하여금 역사-소설가적 성향을 가진 톨스토이와 달리, 현대 자본주의의 대도시에 눈을 돌리게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우린 <소설의 이론>에서 이야기된 소설의 종착점(또는 새로운 경향)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종착점은 톨스토이다. 다만,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로 인해 그 종착점을 반환점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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