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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작성자폭주기관차|작성시간03.08.02|조회수765 목록 댓글 0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김철자옮김, 학원사, 1988년

토마스 만을 이제껏 읽어오면서 이토록 작가가 안타까운 마음을 작정하고 일부러 드러내놓은 작품을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이는 곧 읽고 있는 독자인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내 조국 독일에 대해, 사랑하는 내 친구의 얘기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읽고 나서의 감상이 이렇다면, 그후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작가와 작품, 작중 인물의 거리두기의 실패가 아닌가? 그렇다. 내겐 분명 그렇게 온다. 독일 정신과 파우스트를 1ㆍ2차 대전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지어 광기의 독일정신만을 표현했다. 바로 그것, 그자체는 표현이 됐을까? 이제껏 토마스 만의 작품에 있어 보여지는 저 만큼의 의도된 거리를 스스로 없앤 느낌 때문이다. 화자의 현재 자리를 떼어놓으면, 천재적 한 예술가의 삶이 보여진다. 삶의 고뇌로부터 철학을 경유하고, 신학을 경유하여, 음악에 몸과 마음을 뻬앗길 수 밖에 없음이 보여진다. 그런데 여기에서 독일과 음악의 마성적 연결에 난 작정한 의도로 인해 부조화를 느끼는 것이다. 물론 의도적인 화자와 주인공의 만남이란 것을 안다. 여기에서 토마스 만은 다음 작품 <선택된 인간>으로 넘어가면, 다시 예전 <요셉과 그 형제들>에서 처럼 시간을 인정하는 낙천적인 얘기꾼으로 멀리 떨어져 찾아온다. 모래시계와 윤회의 고리 차이라 생각한다. 음악가의 삶을 다룬 만큼, 작품의 템포와 강도 역시 같이 맞춰가며 보여주고 있다. 주된 내용으로는 음악가의 삶이지만, 그가 정작 말하고자하는 것은 바로 독일인이 지닌, 음악 정신의 불멸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왜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을 쓰고자했는가? 배경은 이렇다. 독일의 전설인 파우스트에 대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총체인 괴테의 <파우스트>에 대해서, 독일 정신이란 바로 음악의 정신인데, 잘못 그려놓았다는 의지가 기본 바탕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한국괴테협회의 <파우스트 연구>에 이렇게 표현해놓고 있다.

<파우스트가 독일의 영혼의 대표라면 그는 마땅이 음악적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추상적이며 신비적 - 즉 음악적인 것이 독일인의 세계에 대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음악적이라는 단어는 신비적이며 마적인 요소를 지닌 예술의 추상적 표현이다. 적절하고 명랑한 성격을 지닌 아폴로적 예술에 대립되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음악도 선적이고 조소적인 면이 있을 수 있으며, 회화나 조각품에도 유동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만이 여기서 음악적이라고 말할 때는 독일적인 기본 자세로서 그 유동성ㆍ 신비성ㆍ 관념성ㆍ 낭만성 등 요컨대 <깊이>에 있어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음악 가운데서도 수평성 Horizontale과 수직성 Vertikale의 두 가지 성질을 구별하여, 전자는 주로 프랑스적인 명랑하고 경쾌한 음악으로, 그리고 후자는 주로 독일적인 주관성의 음악으로 규정하였다. 다시 말하면 독일적인 특색은 멜로디에서보다 화성 Harmonie에서, 성악의 재주에서보다 기악의 작곡에서, 그리고 가요적, 음악적인 것보다 음악에 있어서 정신적 학문적인 <깊이>에서 발로되는 것이다.
전통과 미신에 뿌리 박혀 있는 중세의 독일적 심정은 항상 이와 같은 음악성과 신비성. 다시 말하면 마성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토마스 만은 주장한다. [257쪽, 괴테학회, 파우스트연구>]

이렇게 이 작품은 파우스트의 새로운 이미지 생성과 함께,음악성의 독일정신을 지닌 파우스트를 창조하여 독일에 대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있다. 그 누군가는 가장 먼저는 독일 국민이 되는 것이다. 한테 아마 이런 국민을 향한 소설이 그리 호응이 있었을까? 이런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망명자인 작가의 현상황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 한 인물로 보여지는 아드리안 레버퀴인이라는 인물에 관해서는 나중 얘기하겠지만, 한 사람의 음악가의 얘기라기보다는, 신화화하는 음악성의 독일예찬은 아닐까하는 추측을 해보게 된다. 이미 나찌즘의 손아래 휘둘리는 독일에서 망명하여 미국 시민권을 얻은 사람으로, 비록 나치즘에서 혼자 벗어났지만, 본래의 독일정신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있는 독일인라는 것을 독일 거주 국민들에게 고하는 듯 하는, 한 사람의 독일인으로서 전체 국민에게 속죄의 마음을 보여주는 부채감을 털어내는 작품으로 보여진다. 토마스 만의 작품의 가장 큰 장점으로 생각하는 균형감각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작품과 비교해, 불멸의 작품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작품 안에서 인간적인 작가의 마음을 보여주는 말,


나는 고통스러울 이만큼 의미 심장한 한 인간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 끊임없이 불안을 안겨 주었던 그의 삶을 그렸다. 이러한 신의가 어쩌면 내가 겁에 질려 조국의 죄악으로부터 달아난 것에 대해 책임을 져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하 287쪽)

신비의 세계에 빠진 악마성과 광기를 지닌 천재적인 음악가 아드리안 레버퀴인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철학박사인 짜이트블롬의 눈으로 보여주고 있다. 1943년 광분의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는 2차대전의 상황을 천재의 광기와 함께 나찌쯤의 광기와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시기는 이제 독일은 패전국이 될 것이 자명해지는 때이고, 이 작품을 출간한 시기는 1947년이다. 이미 패전국이 된 그의 조국,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조국에 대해 그가 사랑하는 친구와 나란한 관계로 옆에 놓고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광기와 악마성에 휩싸였다는 착란 상태의 음악가의 삶과 광분의 미친 세계대전을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그 치열하고 미친 현실은 바로 작가가 글을 쓰고 있는 당시인데, 작중 화자는한 사람의 인물로 보여지기는 조그 미약하다. 다만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 왜 그처럼 나찌즘에 휩싸여 함께 미쳐야했는가에 대한 반성과 울분인 것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이 작품을 통해 소설쓰기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소설가 토마스 만을 만남에는 두말할 여지가 없다. 내가 만일 독일인이었다면, 아마 이 작품을 보고서, 왜 선량한 다수의 독일인들이 나찌즘에 휘둘린 사람들로 인해 전 세계를 향해 속죄해야하는가에 대한 울분으로 눈물지었을 것 같다. 여기에서 작년에 읽었던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가 생각난다. 역사적 사실 앞에 가해자인 독일인의 모습, 남아있는 가해국의 국민의 모습이 살펴지는 것이다.


균형감각
토마스 만을 작품을 읽으면 먼저 생각하는 것이 대립의 균형감각과 아이러니로 생각한다. 이 작품 역시 등장하는 인물들, 작중 음악가의 삶 속에서 보여지는 인물들 모두 온전히 홀로 보여지는 것이 아닌, 대립적인 인물들로 보여진다. 친구 관계인 제레누스 짜이트블롬과 아드리안 레버퀴인의 모습도 역시 친화력을 지닌채 옆에서 지켜보는 인문주의적 철학자의 모습인 화자와 광기의 천재적인 음악가의 서로 살펴주고 아껴주고 지켜주는, 그러면서도 다른이에게 눈돌리는 것에 대해 질투와 사랑을 함께 느끼는 그런 대립이 있다. 그리고 그의 주변 친구들의 모습의 보여짐에도 역시 항상 누구와 누구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레버퀴인이 머무르는 집의 딸들의 모습도 역시 언니 이녜스와 동생 클라리사로 각기 대립하여 보여주고, 아드리안의 부모님도 역시 나비도감을 보여주는 사색가이며 명상가인 아버지의 모습과 소박한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해내는 감각적인 어머니의 모습, 김나지움시절의 선생의 피아노 선생님인 벤델 크레츠시마아르를 통해 보여지는 세익스피어와 베토벤의 두 갈래의 지지대의 모습, 대학시절의 스승들의 모습 역시 팽팽한 대립으로 보여진다. 통장이와 종지기의 딸과의 악마에 홀린 성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교묘한 이중성이라 말하는 실렙푸스와 모래시계, 콤파스, 저울, 다면체, 그리고 뒤러의 그림 <멜랑콜리>에 나타난 마방진의 그림이 있는 방에서 아침 커피를 마시는 쿰프 교수의 모습 역시 그렇다. 쿰프교수는 무게있는 교수로써 학문에 대해 자신만의 고유한 독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가식없고 훌륭한 古독일어로 표현하는 인물로 보여진다. 고전문학과 철학에서 괴테와 실러의 작품에 정통한 젊은 시절로부터, 어느날 복음을 전도한 다마스커스의 체험으로 인해 신에의 건전한 신뢰와 기쁨 속에서 그이 본분을 다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독일어로 재현해보려는 교수였다.

대학시절 만나게 된 지인들, 뤼디게 실트크납과 바이올린 연주가인 루디 시베르트페거의 모습 역시 바로 대립하여 보여주지는 않지만 시간을 거슬러 각기의 평행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같은 눈동자의 통하는 사람으로 끝까지 서로 존재를 했었던 사람이라면, 한 사람은 어느 순간 화자만의 독특한 호칭이었던 너의 호칭까지 이른 사람이다. 그 친밀한 사람에게서 그는 배반의 모습을 마주하기도 한다. 거기에 대립의 가장 큰 지점인 따뜻하고 인간적인 열정의 삶, 바로 사랑이 충만한 삶과 악마와의 계약의 상황에서 보여지는 냉정함, 서늘함이 같이 또 각기 보여진다. '그'라 표현되는 악마와의 만남에서 그가 가장 확연하게 느끼는 감정은 바로 냉기인 것이다.

웃음과 편두통
여기에서 웃음이란, 서로 얘기하며 함께 하하 호호하는 교감의 웃음이 아닌 달리 도망갈 구실의 다른 웃음이다. 아드리안에게 다른 이들과 유달리 보여지는 모습은 바로 뜬끔없는 웃음과 그를 어디곤 찾아다니는 편두통이다. 먼저, 웃음에 대해 화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머가 아니다. 유머란 말은, 그것을 그에게 적용하기에는, 너무 미적지근하고 온건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툭 하면 웃음보를 터뜨리는 그의 버릇은 일종의 도피를 위한 한 방편, 즉 그의 비상한 재능의 산물인, 생활의 긴장을 다소 호방하게, 나로서는 썩 마음에 들지도 편안하지도 않게 해소시키는 방편으로 보인다. (상 116쪽) 그가 꺼낸 우스꽝스러운 얘기에 대한 그의 감수성, 걸핏하면 어처구니 없이 눈물을 찔끔거려가면서 웃어버리는 그의 모습에서 바로 화자는 악마성의 일면을 말하고자 한다. 그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이 <<신국神國>>에서 태어날때 웃는 유일한 인물인 조로아스터의 아버지인 햄은 바로 악마의 도움으로 가능했을 거라는 얘기를 보더라도, 화자가 만난 근접하기 어려운 아드리안의 악마성을 웃음과 연관짓는 것이다. 기만적인 웃음, 악마적인 성향, 일상에서 벗어나는 웃음인 것이다.

편두통으로 들어가보면, 편두통을 앓고 있는 아드리안을 보는 화자의 견해를 먼저 들어본다.
당시에 그는 매우 고통받고 있었다. 그의 병이 주는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지만, 그는 마치 벌겋게 달군 핀셋으로 꼬집히는 듯한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생명은 밑바닥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고, 그는 그것을 하루하루 질질 끌듯이 연장해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식이 요법을 해도 감당키 어려운 위장장해가 거센 두통과 더불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여러 날 계속되는 이런 증세는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이내 주기적으로 재발하곤 했다. 발작이 한번 지나가면 몇 시간씩, 더러는 며칠씩 계속되는 구토 때문에 위장은 텅 삐어 있어야만 했으며, 그는 계속해서 빛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축 늘어져 버렸다. 정말 인간으로서 차마 겪지 못할 비참한 고통이었다.(하 92-93쪽)

여기에 나중 아드리안을 찾아온 '그'와 얘기하는 병과 고통에 대해 들어본다.

' 병이란 무엇이고 건강이란 뭐란 말인가?(상 291쪽)'의 '그'의 질문과 답변이 있다. 광기와 병에 대해 어떤 친구가 미쳐서 황홀경에 도취해서 노트의 여백에다가 '하늘에 오른 듯 기쁘다! 내 정신이 아닌 것 같다! 이 새롭고 위대한 기쁨이여! 착상의 광희여!(상 291-292쪽)"라고 표현에서 그것은 일반인은 어떻게 해도 체험할 수 없는 미친 광인만의 고통에서 비롯된 쾌락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바로 아드리안의 물려받은 편두통과 연관된다.물론 지금은 매독에 감염되기도 했다. '어린 인어 아가씨의 칼로 도려 내는 듯한 그 고통의 발단인 두통을 자넨 그 분한테서도 물려받지 않았나.....(상 291쪽)'으로 말하며 두통과 에스메달다로부터 받은 매독성 뇌막염이 살금살금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창녀 에스메랄다로부터 전염된 것이지만 아드리안의 매독과 광기에 이러한 삼투압으로 말하고 있다. 괴짜인 예술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듯한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이 건강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에게는 자신만의 환상과 광기에 맞먹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 고통으로부터 광기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잠입함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이러한 편두통과 함께 하는 예술가적 기질은 종말론에 합당한 작품을 창작하다가, 어느 순간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흘러내렸다는 말을 한 채 그의 지상의 시계는 끝나게 된다. 아드리안은 '그' 가 데려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육체는 존재하나 아이의 무구한 상태로 되는 것이다. 영혼의 헌납에 대한 현재인 것이다.


2차대전으로 인해 만나는 독일인과 유대인
현재의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2차대전의 가해국 독일과 피해국민의 대표자 유대인에 대해 그들을 모두 동일선상의 민족들이라는 것에 대해 현재의 시점에서도, 얘기 안의 시점에서도 자꾸만 반복되고 있다. 음악 중개인인 유대인 사울 피델베르크의 말을 통해 유대인과 독일인의 근친성을 말하고 있다.

음악 중개인인 우리한테 민족 정신 따위는 박해를 부채질하는 모모한 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국제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적인 것을 위합니다. 세상에는 우리처럼 독일적인 민족은 또 없습니다. 지상에서 독일 정신과 유태 정신이 해야 할 역할의 근친성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일목 요연한 유추입니까! 우리는 비슷한 증오와 경멸과 따돌림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비슷한 처지의 이방 민족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사람들은 민족주의의 시대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실은 두 개의 민족주의가 있는 것입니다. 독일과 유태의 그것 말입니다. (중략) 독일인들은 유태인이 독일적인 것을 위하는 일을 유태인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주의 , 오만, 우월감, 편입과 균등화에 대한 증오, 세상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어울려 유대를 갖기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불행을 자초할지도 모릅니다. (하 170쪽)


여기에서도 일부러 음악 중개상으로 존재하는 유대인과 유럽에서이 이방인 독일인에 대해서 말하고자함이다. 1차대전의 발발전부터 전쟁의 암운에 대해 미리 얘기하고, 2차대전의 상황은 직접적으로 화자와 주인공의 체험은 없지만 미리, 예견된 유대민족과 독일민족의 충돌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관계가 곧 전부야 (상 70쪽)
음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학문인 신학으로 접근하다가 나중 결국 음악으로 길을 돌리는 이유에 대해서 잠재된 생각이란 바로, 표현 불가능의 애매성으로 얘기한 부분이 있는데, 여기에서 언젠가 얼핏 읽었던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과 잠까 연관지었다. 화음과 조바꿈에 대해서 얘기하는 부분을 한번 옮겨본다.

"관계가 곧 전부야, 그리고 그 관계에 보다 자세한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명칭은 '애매성'이라는 거야" 그 애매성이라는 단어의 뜻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어느 음조에도 속하지 않는 일련의 화음들을 들려 주어 내게 실제로 가르쳐 주었다. 즉 사 장조 안에서 올림 바 음이 되는 바 음이 빠질 경우에 다 장조와 사 장조 사이의 애매한 화음이 울린다는 것을, 그리고 바 장조 안에서는 내림 나 음이 되는 나 음이 빠질 경우에 그것이 다 장조인지 아니면 바 장조인지 분간하기 힘들다는것을.(상 70쪽)
여기에서 바로 음악이란 애매하다는 것으로 얘기하고 있다. 이러한 신기한 사라지는 애매성의 관계만이 남는 표현의 인식에서 그는 당황스런 갑자기 끝낼 수 밖에 없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의 모습에 관해 얘기해주는 피아노 선생님의 영향아래 천재적이라는 것과 독창적이라는 것의 급격한 직면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가 음악을 선택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근접한 이유라고 생각되어 길지만 옮겨본다.

위대함이란 사실은 한층더 낯익은 것이거든. 말해봐, 위대함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위대함과 눈과 눈을 마주 보며 서 있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라는 걸 날 발견했어. 그것은 담력을 시험하는 일이야. 도대체 그 시선을 견뎌 낼 수 있을까? 그것을 견뎌 낼 수 없을 거야. 거기에 좌우되게 되거든. 너에게 말하지만, 난 점점 더 인정하고 싶어져, 음악에는 확실히 특이한 게 있다는 걸 말이야. 최고의 에너지의 표명이지. 결코 추상적인 게 아니면서도 대상이 없어. 순수속에서도 맑은 천공(天空) 가운데서 드러나는 에너지야. 도대체 세상의 어디에서 또 그런 것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우리 독일인은 철학에서 '그 자체(an sich)' 라는 어법을 빌어 와서는 매일 그 말을 사용하지. 그렇다고 형이상학을 많이 생각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런데 이게 바로 그런것이야. 그런 음악이야말로 에너지 그 자체, 에너지 바로 그것이거든. 그렇지만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렇단 말이야. 그것은 거의 신(神)의 정의(定義)에 각까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봐. 신의 모상(模象)이지.(상 108쪽)

다시 음악에 대한 생각 하나를 옮겨본다.

질서를 부여하면서 파악하고 음악의 마적인 본성을 인간의 이성 안에서 녹여 보자는 얘기 말이야.(242쪽)

그럼, 여기에서 잠깐 아드리안의 삶을 살펴본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소심하고 사색적인 아버지와 소박한 어머니의 틈에서 자라나, 숙부집에서 교육을 받다가 우연하게 발견한 하모늄으로 음악에 눈을 뜨게 돼서 피아노를 배운다. 그에게 음악을 가르쳐준 피아노 선생님의 역활은 지대하다. 그리고 김나지움에서의 인문분야에 대한 관심에서 히브리어를 배워 나중 할레에서 가장 고귀한 학문이라는 신학을 공부한다. 그렇게 신학을 전공하다가, 현실적인 신학과 이상의 괴리감에 '그 자체'라 생각하는 음악으로 가게 된다. 그 음악의 행로에서 천재적인 그의 능력은 인정되나, 돌발과 광기, 그리고 종말론적인 작곡에 청중은 이해하는자와 이해하지 못하는 자로 나뉜다. 그러다가 결국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모래시계의 종말 인식으로 24년간 인어아가씨의 고통에 가까운 편두통에 시달리다가, <파우스트 박사의 비탄>이라는 곡을 발표하려고 그가 알고있는 사람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이제는 시간이 다 됐다고 '그'가 데리러 왔다는 말을 하고서 무구의 상태로 돌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차가운 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 사람들을 한번 말해보면,
먼저 욕망의 헤태로 에스메랄다의 역활을 하는 창녀, 그리고 그가 사랑한 마리 고도라는 여인이 있는데, 그녀는 그가 바이올린 음악까지 작곡해주고, 너라는 호칭으로 대하는 관계인 루디와 사랑하는 관계가 된다. 그리고 그가 결국 '그'가 말한 '너는 사랑하면 안돼'에 다시한번 세차게 느껴야만 했던 것은 바로 그의 여동생의 아름다운 아이 5살짜리 네포무크였다. 스스로 발음이 잘 안 되어 에코라 말하던 그는 홍역과 백일해의 후유증으로 죽게 된다. 그가 결정적으로 사랑하면 안되는 자신, 뜨거워지면 안되는 자신에 대해 확인하는 사건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빼앗김으로인해 지칭되는 '그'와의 계약을 재인식하는 것이다.

착란적 광기 그리고 미신
쌀쌀한 과묵함과 거만한 수줍음으로 뭉쳐진 인격인 아드리안이 주인공인 이 작품은 이러한 질서 안의 혼돈과 같이 신성 안의 마성까지 보여진다. 이 작품도 역시 토마스 만의 작품에서 자꾸만 반복한다고 생각되는 선택된 인간을 표현하는 작가에 대한 견해에는 변함없이 작용한다. 이 작품안에서도 역시 운명론적인 그의 발언이 등장한다. 그를 보여주는 데 자꾸만 반복하는 모래시계와 음악의 화성이론의 대위법, 반복적인 음악의 구성에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통해 본 헤테라 에스메랄다라는 나비의 이름을 붙여진 코가 납작한 창녀의 이름에서 (h e a e es)를 자꾸만 반복하여 작곡하는 것이다. 이렇게 숫자적인 미신적 믿음을 보여주는 토마스 만은 13장에서 보여지는 실렙푸스의 중세 얘기를 통해서 아드리안의 불능의 미래에 대해서도 말한다. 거기에 <요셉과 그 형제들>, <선택된 인간>에서도 보여지는 역시 숫자적인 믿음에 의한 반복이 조금 보여진다. 멜랑콜리의 마방진와 중국의 마방진 거기에 유한에 대해 모래시계를 연관짓는 것에서 미지와 유한과 숫자를 함께놓는 것 같다.

얘기꾼, 토마스 만
뭐니뭐니해도 토마스 만의 작품을 보며, 감탄하는 것은 독자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는 그의 능력이다. 이 작품은 서두에도 말했듯이 사랑하는 독일과 <파우스트>로 부터 시작한 음악적인 기질의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퀴인의 삶을 보여준다.

"독일인으로 태어나면 독일의 운명과 독일의 죄과를 짊어져야 한다."- 토마스 만의 걍연 <독일과 독일인들> 중에서

이렇듯 이 작품은 망명 독일인 토마스만의 죄악으로부터 도피한 자기참회하는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들어있고, 거기에 재미있는 삽화는 니체의 삶이 알게모르게 투영되어있다는 것이다. 헤태라 에스메랄다의 창녀얘기가 쾰른의 사창가 경험과 그의 질병증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제껏 있어왔던 작품들에 대해 패러디에 대해 말한 부분이있다.

일찍부터 저는 어찌 된 셈인지 신비스럽고 인상적인 광경만 보면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것에 대한 과도한 감수성으로부터 신학으로 도망쳤습니다. 신학은 킬킬거리는 것을 진정시켜 주리라는 희망에서 말입니다. - 그런데 알고 보니 거기에도 엄청나게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무더기로 있더군요. 어째서 거의 모든 것들이 저한테는 그의 독특한 패러디로 보이는 것일까요? 어째서 거의 모든, 아니 모든 예술의 방법과 관습이 오늘날에는 오직 패러디에만 쓸모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일까요? (상173쪽)

패러디가 난무하고 창조는 전무해져가는 지금은 현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토마스 만 역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얘기꾼 토마스 만이 일부러 인용하는 작가들의 모습이 보여진다. 읽고나서 <소설의 곡예사>라는 책을 살펴보니, 그곳에 전범이라며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토마스 만은 또한 니체 전범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여기에 항상 다른 전범들과 다른 문학적 인용들을 접목시켰는데, 이런 전범들은 레버퀸 인물의 종합적인 성격을 분명히 해줄 뿐 아니라, 동시에 그처럼 풍부하게 표현되는 니체의 출현을 통하여 예컨대 셰익스피어 드라마들, 차이코프스키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아도르노의 예술 문화 비판적인 진술들, 루터 연설 등등과 연결되는 관점들을 열어준다. 토마스 만 자신은 그의 작품을 "매우 험난하고 불경스러운 한 에술가 생애의 이야기로 가장된 내가 사는 시대의 소설"[(158쪽),<소설의 곡예사>,문학과 지성사]로 표현해놓고 있다. 그렇다. 이 작품은 토마스 만이 산 시대의 소설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오늘날 독일은 악마한테 휘감긴 채 한쪽 눈은 손으로 가리우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소름끼치는 광경을 응시하면서 절망에서 절망으로 고꾸라지고 있다. 어느 날에야 이 심연의 밑바닥에 다다를 수 있을까? 언제 이 최후의 소망이 없는 곳에서부터 믿음을 능가하는 기적이, 희망의 빛이 떠오를 것인가? 한 고독한 사내는 두 손을 모으고 이렇게 말한다. 내 친구, 내 조국, 그대들의 불쌍한 영혼에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소서!(하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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