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고 폰 호프만스탈, 『호프만스탈』중<찬도스 경의 편지>, 곽복록옮김, 2001년, 지식공작소
후고 폰 호프만스탈(1874-1929)의 작품이 모아진 『호프만스탈』을 읽었다. 이 중 <바보와 죽음>에서 나는 호프만스탈의 글과 소리에 감동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사유능력이 있다. 뭔가를 알려고도 한다. 알 수 없지만, 알지 못하면서 굳이 알려고 하는 인간이다. 심지어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나 자신의 주변을 알려고 하고, 자신이 놓여진 세상의 개념이나 그저 존재하는 개념을 알려한다. 이것은 죽음이 보기에는 참 이상하다. 이런 죽음과 바보인 인간에 대한 생각이 잘 보여지는 아주 짧고 단순한 운문극이다. <바보와 죽음>에서 죽음이 하는 말을 한 번 옮겨본다. 바보로 보이는 인간지만, 인간이란 이런 게 아닐까?
'인간이란 정말로 불가사의한 존재야.
해명할 수 없는 것을 해명하고
한 번도 글자로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고
뒤엉켜 있는 것을 풀어 한데 묶고
급기야는 영원한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아내고야 만다.'(193-194쪽)
더불어 <찬도스 경의 편지>에서 찬도스 경이 느끼듯, 충만한 감정상태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그럼 이제<찬도스 경의 편지>에 대해서 잠깐 얘기해본다.
편지글, 수기에 대해서는 언제든 선호하는 편이다. 이유는 작품을 쓴 저자와 독자의 관계가 아닌, 좀더 내밀한 관계가 되는 듯 착각하게 하는 형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찬도스 경의 편지>도 친구라 말하는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보내는 1603년 8월 22일자 편지다. 이 편지는 '문학활동을 완전히 포기한 것에 대한 자기변명의 글'(116쪽)이다. 물론 허구적 편지글이다. 그럼에도 그 상황속에서 믿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사실 믿는 과정에서야, 감동이 되지 않을까? 읽는 한켠에서 이미 허구인데 뭘, 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 작품은 수작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찬도스경의 편지>에 대해서, '20세기 문학의 성격을 독일 문학사상 처음으로 규정한 산문'으로 소개해놓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20세기 문학의 성격은 무엇인가를 누구나 의문하게 될 것이다. 과연 무엇일까? 이미 감상보다는, 표현력에 치중하게될 문학을 이미 인식하게 된 것일까? 작품에서 찬도스 경의 입을 빌린다면, 글(말)이란 어떤 상황에 처한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한다.
내용으로 들어가 본다. 찬도스 경은 누구인가? 지금 26살로, 19살에 이미 세간에 이름을 얻는 작가로 볼 수 있는 이미다. 찬도스 경은 2년동안 아무런 저작물이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이제까지의 소식없음에 대한 선물로 '무소식의 보상으로' 저작이 나오지 않을까라는 편지글을 보낸 친구에게 보내는 자기변의 편지다. 스스로 말하는 저자인 찬도스경이다.
'내가 아직도 당신의 소중한 편지를 받아 마땅한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모를 지경입니다. 정말로 26세의 이 사람이 19세에 벌써 「새로운 파리스 」, 「다프네의 꿈 」, 「축혼가 」와 같은 화려한 말에 들뜬 목동극을 -여왕 폐하와 참으로 너그럽게 점잖으신 몇몇 귀족들이 아직도 마음속에 담고 있는 이 연극들을-막힘없이 써 내려간 사람일까요.'(116쪽)
스스로 회의하고 있다. 자신이 어떻게 그처럼 작품을 썼는지, 지금의 찬도스 경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과거 찬도스 경은 이것저것 계획을 세워 다음 작품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냐고 질문하고 있다.
'이것저것 계획을 세우는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118쪽)
찬도스 경 스스로 말하는 지금 증상이다.
'나의 증상은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뭔가 다른 것과 관련해서 생각하거나 말을 하는 능력을 완전히 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선 고상한 것이든 일반적인 것이든 어떤 화제를 차분하게 말할 때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술술 말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점점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신', '영혼', 그리고 '육체'라는 말을 입밖에 내는 것조차도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불쾌해집니다.'(121쪽)
찬도스 경은 말을 읽어버렸다. 작가가 말을 잃다니, 그렇다면 당연히 말을 잃은 이유를 찾아볼 것이다.
'나의 정신은 이런 대화에 나오는 일들을 무서울 만큼 가까운 데에서 보도록 강요했습니다. 마치 이전에 확대경으로 손가락 피부를 보았을때 도랑과 우묵한곳에 있는 평지와 비슷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 이제 인간과 그 행동이 확대되어 보였던 것입니다. 이제 와서는 이것들을 무엇이든 단순화해 버리는 습관적인 눈초리로 포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분으로, 부분은 또 다른 부분으로 해체되어, 이제는 하나의 개념으로 포괄해 낼 수 있는 것은 없었ㅅ브니다. 하나하나의 말들은 나의 주위를 떠돌며 얽히고 설켜 눈이 되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에, 나 또한 그것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쉬지 않고 선회하는 소용돌이이며, 들여다보면 현기증 일어나고, 그것을 뚫고 지나가면 그 앞은 허무일 뿐입니다.'(122쪽)
그에게 보이는 현상이나, 생각은 결코 그 자리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돌고돌고돌고,흐르고흐르고흐르고가 된 상태다. 말이란, 글이란 표현이다. 순간이든 오랫동안이든간에 결정된 판단이다. 그런데 찬도스경은 결정할 수 없다. 슬픈 연민의 상황을 보면, 그 슬픔을 표현해야만 할테지만, 슬픔에 빠지고 더 빠지고 더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다. 그 스스로는 이런 소용돌이에 빠진 상황에서 벗어나보려고도 했다. 그리하여 찾은 사람이 세네카와 키케로였다. '제한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한 개념이 산출하는 조화에 힘입어 건강해지길 원했습니다.'(123쪽) 고전으로 돌아가 찾아보려고 했던, '제한과 질서와 조화'라는 건강의 개념이, 그에게는 도달할 수 없음을 인식할 뿐이었다. 그들의 개념에 이르려고 하였으니, 거기에 이르지도 못했다.
'거기에는 개념끼리의 관계만 있을 뿐, 내 사고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개인적인 요소들은 그 윤무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무섭기만 한 고독감에 가위눌려 마치 눈이 없는 입상만이 나란히 서 있는 뜰 안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밖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123쪽)
질서와 조화를 찾아보려는 노력 이후로도, 그는 끊임없이 흘러갔다.
' 정신도 사고도 없는 나날이 흘러가고 있습니다.'(123쪽)
어느날이었다. 예전처럼 아무런 생각없이 지하저장고에 들끓는 쥐를 퇴치하라고 명령을 내린 그였는데, 이번 경우는 특별해진다. 쥐가 다만 쥐만이 아니게 된다. 그에게 쥐는 그가 이제껏 알고 있었던 아비와 자식이라는 정념에 포획되는 감성에 함몰되는 쥐가 된것이다. 어린 쥐의 죽음을 봐야하는 어미쥐의 아픔을 목격하게 되어, 그 이상 그리고 더 깊이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연민인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것은 연민 이상인 동시에 연민 이하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무서울 만큼의 깊은 상관 관계이며, 이런 것들의 생물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삶과 죽음, 꿈과 각성, 이것들을 꿰뚫고 지나가는 유동체가 순간적으로 이들 생물 속으로-어디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흘러 들어간 감각입니다. 이런 것이 연민이라는 것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사고 결합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125-126쪽)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제껏 무심하게 흘려보냈던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예전과 달리 무심하게 지나칠 수가 없다. 심지어 낭만적 환상의 꽃인 밤하늘의 별빛보다도, '혼자 불타는 목동의 모닥불'(128쪽)을 볼 때 더욱 황홀하다. 정원사가 놔두고 간 물뿌리개, 이것들과 그림자를 이루는 물, 물 위를 헤엄치는 한마리의 소금쟁이등, '보잘것 없는 것들의 묶음이 저 무한한 것을 현존하게 하여 나를 감동에 떨게 만듭니다.'(126쪽)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과거 그가 아름다움으로 인정했던 것들이 더이상 아름다움의 극치가 아니다. 그러니 그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느끼는 사소하고 보잘것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도 없다. 이유는 다만 빠져있기 때문이다. 글이나 말이란 벗어나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어떤 경계를 이미 짓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판단하지 않음(판단할 수 없음)에 빠진 찬도스 경은 더이상 어떤 표현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제 편지는 절정에 이른다. 이따금 찬도스경은 자신을 웅변가 크라수스와 비교해본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정원에 곰치 한마리를 키웠는데, 그 곰치에 대한 사랑이 도가 지나쳤다. 어느날 물고기가 죽는다. 그러자 다른 원로원이 물고기의 죽음에 우는 크라수스를 비난하며 바보로 취급한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말한다.
"당신은 당신의 첫번째 부인과 두번째 부인이 죽었을 때에도 하지 않았던 일을 나는 물고기가 죽었을 때 했을 뿐입니다."(128-129쪽)
느낄 수 없는 문학에서 느낌을 얘기하고 있다. 울 수 있는 그 크라수스가 찬도스경에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편지를 쓰는 찬도스경에는 어떤 상황을 설명하고 말로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바보스러운 짓으로 생각된다. '이따금 밤중에 이 크라수스의 모습이 가시처럼 나의 뇌수에 꽂혀,그 주위가 온통 곪아 쑤시면서 아파옵니다. 그럴 때면 나 자신도 들끓고, 거품이 일고 끓어 불티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전체로서는 일종의 열병 같은 사고이지만 이것은 말보다 더 직접적이고 유동적이며, 불길처럼 타오르는 소재를 가진 사고입니다. 이것 역시 같은 소용돌이임에는 틀림없지만 말의 소용돌이처럼 받침 없는 나락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나자신의 내부로, 아주 깊은 안식 속으로 이르는 거처럼 생각됩니다.'(129쪽)
그럼에도 작가(호프만스탈)는 그것을 표현한다. 바보스럽지 않은가하고, 한편 의문하겠지만, 그것이 또한 인간 아니겠는가?
찬도스 경은 마음속에 닫혀있는 말을 장황하게 친구 프랜시스 베이컨에게 건네며 편지를 끝내려고 한다. 찬도스 경의 책이 '무소식의 보상으로'(130쪽) 건네지는 일이, 이제는 없을 거라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친구 프랜시스 경 당신의 호의는 고맙지만, 찬도스 경은 더 이상 그것을 말할(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현실적 고통을 사실로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찬도스 경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뭔가?
''특별한 이유란, 결국 사물을 쓸 뿐만 아니라 생각하기 위해 나에게 부여된 말은 라틴어나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도 아니고 단어 하나조차 모르는 언어이며, 말 못하는 사물의 언어, 어쩌면 무덤 속에서도 본 적이 없는 심문자 앞에서 책임지고 대답할 때 사용할는지 모를 그런 말이기 때문입니다.'(130쪽)
찬도스 경이 쓴 편지글로 말(글)의 한계를 회의하게 하는, 1901년 작품이다. 찬도스 경은 분명 가공의 인물이다. 찬도스 경을 통해서 작품을 쓴다는 게 무엇일까를 생각해보게 한다. 작가란 느끼지만 느낌에서만 멈춰서도 안 되고, 거기에 빠져 소용돌이쳐서만도 안 되는, 느끼는 그것을 표현하여 공감하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자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