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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기관차) 책장

에밀 시오랑 <절망의 끝에서>, <독설의 팡세>

작성자폭주기관차|작성시간05.04.12|조회수633 목록 댓글 4


'아니다!', '아닐까?'로 회의하는 때가 있다.
그런 때, <팡세>를 뒤적이기도 한다. <독설의 팡세>라는 제목에서, 에일 시오랑을 접한다. 에밀 시오랑은 1911년 루마니아 라시나리에서 태어났고, 1995년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절망의 끝에서>나 <독설의 팡세>에는 죽음(자살), 슬픔, 절망, 무의미, 심연, 시간에 관한 아포리즘이 담겨있다. 부슈레슈티 철학과에 입학한 17세의 에밀 시오랑은 불면증과 자살에 대한 유혹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그는 이 불면증을 놀라운 인식의 수단으로 변모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그당시 물결이었을 니체나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에밀 시오랑은, 베르그송에 관한 논문으로 최우수성적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아카데믹한 철학에 대한 불신으로 에세이적 글쓰기로 나아간다. 그의 글쓰기는 <절망의 끝에서>(1834년)를 시작으로 <패자들의 애독서>(1940년집필, 1993년 불어로 출판)는 모국어 루마니아어로, 그후<해체의 개설>(1949년)부터는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고 한다. <독설의 팡세>(1952년), <존재의 유혹>(1956년), <해체의 개설>(독어본,1965년), <사악한 조물주>(1969년), <태어난다는 것의 불편함에 대하여>(1973년), <자아분열>(1979년), <고백과 저주>(1987년), <사고의 황혼>, <환상의 서>(1992년) 등의 저서가 있다. 대중적인 인기(호응)는 1970년대 이후에서야 가능했다고 한다. 그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과 저서로, 학창시절에는 쇼펜하우어, 니체, 짐멜, 칸트, 피히테, 헤겔, 후설등의 독일철학자들과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체홉등의 작품등이 있었고, 교사시절에는 프랑스 모랄리스트, 스페인 신비주의자들의 작품을 비롯하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다고 한다.
"우리시대의 유쾌한 절망의 대가 "라고 불리우는 에밀 시오랑의 <독설의 팡세>와 <절망의 끝에서>를 읽고서, 무의미, 부정(아니다), 견딤, 삶 을 생각하게 된다.

삶으로 내 던져진 존재라는 걸 부정하지 않는 이유로 이런 무의미, 부조리, 인내, 갈망에 과한 사유는 나를 울린다. 혼돈에 허우적거리는 나, 혼돈일 것도 없는 혼돈 속에서 분열되는 무늬만 악한 이를 생각하게 된다. 역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어찌 이리 약한가? 날이 흐리다. 좁혀진 시야에, 오늘도, 암흑의 심연으로?...그렇다고 시오랑처럼 치열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절망의 끝에 서기보다는, 모국어를 버리기보다는, 망명보다는, 최면(망각)과 진정제의 위력을 벌써 알고 있지 않은가? 우울의 심연보다는 우울의 번짐(퍼짐)을 벌써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벌써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은가?

에밀 시오랑의 고뇌와 절망은 존재(자)에의 고뇌이고 절망이다. 어둠의 심연이다. 오직 자신(의 심연), 오직 인간에 우위를 둔 사유방식이다. 이 심연을 두고서, 이유도 모른 채 내던져진 생이지만, 그저 저버릴 수는 없을 듯하다. 정신병자와 예언자의 차이를 ' 회의하는가'의 유무로 구분한다. 회의, 부정, 저항의 정신을 망각할 수는 없을 듯하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종을 사랑하는 동물도, 다른 무엇이 되고싶은 동물도 가능하다고 본다. 생명체에 필수적인, 아니, 어찌할 수 없는 혼합(혼돈)에의 갈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점이, 동물은 동물 외의 것이 될 수 없는 반면 인간은 비인간, 다시 말해 인간 외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데 있다면 - 그렇다면 나는 비인간이다."(102쪽, <절망의 끝에서>)
"존재 속으로 유배된 동물인 인간의 비극은, 주어진 삶의 여건이나 가치에 만족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동물에게는 존재확인만이 전부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존재함이란 의문부호이다. 이 의문 부호는 결정적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얻지 못할 테니까. 존재함은 아무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159쪽,<절망의 끝에서>)

에밀 시오랑을 읽으면서 휩쓸리는, 말에 홀리는 나는 시오랑의 독설에 저항하게 된다. 무의미를 얘기하는데도, 파닥거림(떨림)이 전해진다. 논리의 향연이 아닌 직관과 독설의 언어로 구성된 에밀 시오랑 정수를 읽을 때, 독설과 역설의 추이를 생각해보면서 읽는다. 왜 그러한 사유가 나왔을까, 그 사유로부터 뭘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작가인 당신은? 독자인 나는? 주변 사람들은? 세상은? 늘 그대로란 말인가? 읽으며 저항하는 이 방식은 '독설의 폭력'에 대한 내 방식의 저항이다. 이는 시오랑이 니체나, 랭보에 대해 얘기하는 무관심한 독설에 대한 사유와도 연관지을 수 있다. 알면서 쓰는 자, 알면서 읽는 자이다. 사유에 관한 책을 읽을 때 따스함과 관조(지혜)로 위로받는 경우가 있는 반면, 독설과도 같은 아포리즘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이게(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니체, 마르셀 프루스트, 보들레르 혹은 랭보가 유행의 변화에도 살아남은 것은 그들의 무관심한 잔인성, 신들린듯한 해부기술, 풍부한 독설에 기인한 것이다. 어떤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그 속에 존재하는 폭력성이다. 근거 없는 단언일까? 복음서, 그 그지없이 공격적이며 독살스러운 책이 누리고 있는 권위를 생각해보라."(19쪽,<독설의 팡세>)
무의미를 말하는 이의 무의미할 수도 있는 글이다. 부정에서 따라오는 무의미와 진리부재에 관한 글이다. 에밀 시오랑의 책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독설의 폭력에 독자는 휘둘린다. 허나 논리(이성)의 버팀목으로 지지되지 않은, 한 사람의 직관으로서의 생철학은 어렵지 않게 부정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을 위한 읽기를 하라는 것은 아니다. 독설의 측면이 있는 만큼, 언어의 폭력성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지함에도, 독자는 언어에 휩쓸린다.
그러나? 그리고?
*

죽음 앞의 존재인 인간이기에 죽음(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오늘날(?) 보도지면을 통해 자주 마주해야하는 '자살'이다. 자살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시오랑의 사유가 있다. 길지만 전문을 옮겨본다.

*
[자살의 의미]

" 자살을 삶의 긍정이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은 비겁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용기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들의 무력함을 변명해주리라 여기는 온갖 종류의 이유를 만들어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살하는 데에는 의지나 이성적인 결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자살에 예정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결정 요인들이 있을 뿐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병리학적으로 죽음에 이끌리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그 성향에 의식적으로 저항하긴 하지만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은 지극히 불안정하여 어떠한 이성적인 차원의 동기로도 확고하게 뿌리를 낼지 못한다. 세상에 무가치하고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만으로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은둔하다가 외롭게 자살한 옛 현인들의 예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은 아주 조금 남아 있는 삶의 조각을 청산하고, 일체의 존재한다는 기쁨과 유혹을 제거하기 위해 자살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죽음이나 다른 번민스러운 문체들을 장시간 성찰하는 것은 삶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고통은 이미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만 작용한다.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결코 외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내적이고 유기적인 불안정 때문이다. 같은 사건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무관심하고, 어떤 사람들은 충격을 받으며, 어떤 사람들은 자살한다. 자살의 강박 관념에 이르려면 숱한 번민과 괴로움이 있어야 하고, 삶을 불길한 흥분이나 현기증, 비극적인 소용돌이로만 만들어버리는 격렬한 정신적인 분열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자살이 삶에 대한 긍정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자살이 실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국 삶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랐기 때문이라는 뜻이 된다. 얼마나 잘못된 추론인가! - 마치 자살한 사람이 죽기 전에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듯, 야망도 희망도 고통도 절망도 느끼지 않았다는 듯! 자살에서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느낌은 일시적인 변덕이 아니라 몸서리쳐지는 내적 비극에서 온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삶의 긍정이라고 그래도 우기겠는가? 더욱이 자살의 서열을 정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유의 숭고함이나 천박함에 따라 자살을 분류하고자 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유를 따지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제거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충격적이지 않은가? 사랑 때문에 자살한 것을 비웃는 사람들을 나는 아주 경멸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실현될 수 없는 사랑이란 자신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채워지지 않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욕구는 존재의 분열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내가 경탄해 마지 않는 인간들의 범주는 둘뿐이다. 어떤 순간에도 미칠 수 있는 사람들과 매순간 자살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또 그중에 두 번째 범주의 사람들만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는데, 그들만이 강한 정열과 큰 변화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만족하면서, 순간순간의 확신 속에서 긍정적인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나는 존경할 수밖에 없다. 이면의 현실과 끊임없는 접촉을 유지하는 사람들만이 내게 진실로 감동을 준다.
왜 나는 자살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내게는 삶만큼 죽음도 혐오스러우니까. 나는 내가 왜 이 지상에 존재하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지금 우주를 놀라게 할 울부짖음을 토하고 싶은 절박한 욕구를 느낀다. 전에 없던 포효가 내 안에서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그 포효가 터져나와 세상을 뒤덮어버리지 않고, 나를 무 속에 삼켜버리지 않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이 역사 속에 존재했던 가장 끔찍한 존재, 불꽃과 어둠으로 가득 차 넘치는 참담한 짐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무한히 수축하고 팽창하며, 죽으면서 동시에 성장하고, 무에 대한 희망과 모든 것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흥분하며, 향기와 독약을 들이켜고, 사랑과 증오로 불타오르며, 빛과 암흑으로 압살된, 그로테스크한 미소를 짓는 야수다. 나를 상징하는 것은 빛의 죽음이며 죽음의 불꽃이다. 내 속의 짧은 번득임은 꺼져 천둥과 번개로 다시 태어난다. 내게서 타오르고 있는 것은 암흑인가?"(80-82쪽,<절망의 끝에서>)

이어서 [슬픔에 대하여] 중 일부를 옮겨본다. 에밀 시오랑의 책들은 읽을 때의 마음상태에 따라 와닿는 사유가 다를 듯하다. '인간 조건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냉소와 허무의 지성', 분열되는 듯한 (괴로운) 책읽기었다. 그럼에도 간간히 뒤적여볼 책이다.
"지나치게 소비된 열정 뒤에는 돌이킬 수 없다는 감정, 강도 높은 허탈감이 각인된, 체념과 상실감만이 남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한 뒤 슬퍼지는 것은 얻었다기보다는 잃었다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슬픔은 삶이 탕진될 때마다 생긴다. 손실의 정도에 따라 슬픔의 강도는 높아진다. 그러므로 가장 큰 슬픔을 주는 것은 죽음의 감정이다. "(62쪽,<절망의 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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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 <절망의 끝에서> , 김정숙옮김, 강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 김정숙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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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로쟈 | 작성시간 05.03.03 '시오랑의 모든 책'이죠.^^ 그러니 이 책도 조만간 구해야겠습니다. 러시아어로는 3권쯤 산 거 같은데(그게 눈에 띈 전부였지만), 분량으로는 5-6권 정도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의 테마는 '눈물과 성자'입니다. 그리고 물론 '눈물의 일반이론'...
  • 작성자폭주기관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3.04 시오랑을 읽으며 저는 긍정과 부정의 이율배반을 경험했습니다. 진리의 부재,무의미, 기다림에 관해 부정으로 긍정하는 저를 봅니다. '눈물과 성자'[눈물의 일반이론]를 얘기하시니, 들을 수 있는 날이 올까를 의문해보니다...^^저는 요즘 짬짬이 도스토스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읽고 있습니다.<가난한 사람들>로부터
  • 작성자폭주기관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3.04 끊임없이 눈물나는 세상을 때론 우스꽝스럽게, 때론 홀리게 쓴 도스토예프스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넘어가야할까? 빼놓았던 단편, 중편들을 읽고 있는데, 장편을 읽는 데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차원이 크다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그렇다고 그에 대해서 뭘 쓰겠다는 것은 아니구요.^^
  • 작성자폭주기관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3.04 (편지와 문학의 연계성, 알 수 없음, 분열, 열정, 낯섦(우스움),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는 이의 슬픔(눈물), 공백에 삼켜질 수도 있는 이성(합리주의), 페테르부르크(러시아), 지구(세계), 무한, 아이들...)/그나저나, '모스크바 인상에 대한 서울 메모'는 없나요?^^(넘치는 질문입니다. 양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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