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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책의 바다

지젝 읽기의 어려움 : <향락의 전이> 읽기

작성자로쟈|작성시간02.12.26|조회수380 목록 댓글 0
.. 지젝의 <향락의 전이>(The Metastases of Enjoyment, Verso, 1994)를 다시 읽는다. 지젝은 한나 아렌트와 함께 올 한해 내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저자이다. 나는 보통 관심을 갖게 되는 저자의 경우에는 절반 이상의 책을 일단 모으면서 읽어나간다. 지젝의 경우에는 <삐딱하기 보기>(시각과 언어)가 먼저 영화 전공자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킨 뒤에도 별로 주목하지 않았더랬는데,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가 나온 이후로 그의 책 대부분을 구입하거나 복사해 두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읽게 된 계기는 SS님 덕분에 <향락의 전이>를 들춰보게 되면서부터이다.

물론 그래봐야,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만을 다 읽었을 뿐이고 나머지 책들은 부분적으로만 읽었다. 그 결과 지젝 입문서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가장 인상깊게 읽은 <향락의 전이>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가 실제적인 분석에 해당하는 <삐딱하게 보기>보다 이론 지향적인 내 취향에 맞는다. <향락의 전이>을 다시 집어들게 된 것은 나로선 지젝의 입지를 다시 확인하고, 보다 확실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런 사정으로 이전에 3/4쯤 읽은 책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마이클 라이언의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론>과 같이 읽기 때문에 더디게 읽는 편이지만, <향락의 전이>는 여전히 읽을 만하다(참고로, 라이언의 책은 절판됐지만 평민사에서 나온 번역이 비록 오역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신문화사판보다 더 낫다. 전자는 국문과 교수들이 번역하고, 더 나중에 나온 후자는 영문과 교수가 번역했는데, 번역은 영어를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올리도록 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번역이다. 개역판까지 나온 우리말 번역서는 말 그대로 개판에 가깝다. 이미 초판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지적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10,000원이나 정가를 올리고서 하드커버로 다시 나온 개역판 역시 번역은 수준 이하이다(물론 나는 이 책을 사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초판에서 문제가 됐던 영화명들을 대부분 바로 잡은 것 이외에는(물론 '시라노'를 '키라노'라 옮기고, '록산느'를 '로잔느'라고 옮긴 건 고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유고의 감독 '쿠스투리차'를 '쿤스투리카'라고 한 것도. 가관인 것은 옆에다가 Kunsturica라고 병기해 놓은 것. 오역이 모자라서 작명까지 하는 것인지?) 내용 교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내가 읽은 1장 등에서 내용이 제대로 고쳐진 대목은 딱 한군데였다).

때문에 일반 독자가 이 '교양서'를 읽어낼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이 경우 "이 역서가 이미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사람들이 그의 글쓰기를 즐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확인해 주기를 바라고, 처음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독자들에게는 지젝과의 꾸준하고 의미있는 지적 의사소통이 시작되기를 기대한다."(11쪽)는 역자의 바람은 정치코미디에 가깝다. 지젝의 작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 역서는 짜증만을 불러일으키며, 처음으로 그에게 가다가는 독자들에겐 애꿎은 고역만을 선사한다. 한국의 출판계와 지식사회에선 어째서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벌어지는지 정말 궁금하다...

"독자들의 '너그러운' 다시 읽기를 권하는 바이다."라는 역자의 부탁을 좀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면, 사실 지젝 읽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겠거니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 또한 '지젝 읽기의 어려움'이란 제목을 이 글에 달았다. 그리고 앞으로 이 자리를 통해서 얼마간의 기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향락의 전이>의 6개 장과 부록(자가-인터뷰)을 다시 읽어나갈 계획이다. 그것이 나로선 내가 좋아하는 저자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좀더 많은 이들이 지젝 읽기에 동참해서 그를 즐길 수 있었으면 싶다.

나는 버소판의 원서와 우리말 번역서(인간사랑)을 동시에 다룰 텐데, 가급적 역서의 잘못들을 지적하면서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정리하는 방식으로 이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돼 있는데, 각 부는 각각 3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1부의 제목은 원인(Cause)이고, 2부의 제목은 여성(Woman)이다. 나는 매번 한장씩을 다루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먼저, 1부 1장은 '억압적 탈승화의 교착상태'(The Deadlock of 'Repressive Desublimation')이란 제목으로 돼 있다. 이 장의 핵심은 바로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다. 지젝은 이 장에서 세 개의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그 세 개의 텍스트는 (1)야코비의 <사회적 건망증> (2)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3)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이다.

여기선 이 세 가지 텍스트에 대해서만 잠시 언급하고, 본문의 내용은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겠다. 먼저 야코비의 <사회적 건망증>. 야코비라고 번역된 미국의 이 지성사가는 러셀 자코비(Russel Jacoby; 1945- )이다. 나는 Jacoby란 이름이 어떻게 표기되어야 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의 번역서 두 권은 각각 자코비와 제이코비라고 번역하고 있고, <향락의 전이>의 역자는 야코비라고 옮겼다. 이런 탓에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도 동일 저자로 나오지 않는다. 그의 책으로 번역된 것은 우선 <사회적 건망증Social Amnesia, 1975>(원탑문화, 1992)으로, 저명한 좌파 사회비평가이자 <나르시시즘의 문화>(문학과지성사, 1989)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래쉬(Lash)가 소개의 글을 썼다. 그 글에서 래쉬는 젊은 자코비를 역시 지성사가인 <의식과 사회>(홍성사, 1981)의 저자 스튜어트 휴즈보다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비교적 얇은(본문 163쪽) 이 책은 내 방 어느 구석엔가 처박혀 있는데, 도저히 찾지를 못하여 도서관에서 대출을 했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역자인 심리학과 교수조차도 이 책의 의의에 대해서 잘 모르고 번역했다는 점. 프로이트 수정주의자들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역자 머리말에서 그는 "현대의 역동적 사회의 발전과 변천을 다루는데 있어서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항상 참신하고 첨예하게 학문적 위치를 굳혀 나가지 못하는 데서 수정이론의 등장을 보게 된다"고 적고 있는데, 적어도 지젝이 인용한 자코비의 문단에 기대면, 저자는 프로이트 심리학의 부정성/비판성이 수정주의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거세되는가, 망각되는가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당연히 역자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는데, 따로 원서를 찾을 수도 없기에 그냥 참조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향락의 전이>보다는 읽을 만하다는 것. 자코비의 다른 책으론 <유토피아의 종말>(모색, 2000)이 번역돼 있는데, 이 책 역시 내용은 훌륭하지만 우리말 번역과 편제가 형편없다. 인터넷 서점에 올렸던 서평을 여기에 옮겨보면 이렇다.

한동안 '역사의 종말'이란 주제와 의식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적이 있었다. 이젠 그마저 뜸해진 듯하다. 이미 일상화되어 버린 것일까? 그러던 차에 나온 <유토피아의 종말>은 우리가 이대로 주저앉기엔 뭔가 허전하지 않은가, 하고 다그치는 듯하여 반갑다. 이 반가움의 절반은 물론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이다. 명망있는 지식인들이 고상한 담론들로 치장하며 다문화 사회니, 다원주의 사회니 떠들어 대지만, 현대사회가 어디 그런가, 우리 사회가 어디 그런가? 자본의 패권적인 논리만이 상업주의 언론과 문화산업과 결탁하여 온갖 호사로운 쓰레기들만은 펼쳐놓고 있는 것이 소위, 역사-이후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인 듯하다. 저자는 그런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늘어놓기 보다는 지식인들의 무책임과 무기력을 질타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이 시원한 대목이 여러 곳 있다. 한편으로 너무 소략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주제와 '적의'에 걸맞는 만만찮은 부피의 책이 씌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번역서의 편제도 아쉬움을 남긴다. 주석과 참고문헌이 몽땅 빠져 있고, 인명 표기에서도 몇 가지 어색한 부분이 있다. 정성이 부족한 듯하다. 같은 저자의 <사회적 건망증>도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자, 다시 지젝으로 돌아오면, 지젝이 1장에서 제일 처음 검토하고 있는 책이 자코비/야코비의 <사회적 건망증>이기에 가급적이면 이 책을 같이 읽는 게 좋겠다(물론 책은 이미 절판됐기에 어려운 일이긴 하다). 사실 <향락의 전이>의 역자가 이 번역서라도 참조했더라면(원서는 그에게 별로 도움이 못됐을 것이다) 오역의 일부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개량주의'로 번역한 Revisionism이란 말도 심리학에선 '수정주의'로 옮긴다는 상식쯤은 터득했을 것이기에.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프로이트 독해이다. 지젝은 특별히 아도르노의 프로이트 읽기를 다룬다. 1장의 가장 긴 인용문(번역서 43-4쪽)이 바로 아도르노의 글("Freudian Theory and the Pattern of Fascist Propaganda" in <The Culture Industry>)이다. 사실 아도르노는 읽기가 어렵다. 그의 <계몽의 변증법>도 나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그의 책은 영역본도 난삽하다). 하지만, 그의 문화산업론은 그나마 읽기 쉬운 텍스트에 속한다. 문제는 우리말 번역이 아직 없다는 점(내가 아는 한 그렇다. 혹시 보신 분은 리플을 달아주시기 바란다). 나는 할수없이 그의 영역된 <문화산업론>을 훑어보기로 했다(참고로 인터넷상에서도 이 영역 텍스트의 일부는 구해볼 수 있다).

끝으로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고려원, 1996). 현재는 구하기 어려운 책인데, 번역도 그다지 미덥지가 못하다. 역자는 철학과 교수인데,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도 하버마스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하버마스에 대해서 요란하게들 떠들지만, 정작 그의 두 주저인 <인식과 관심>과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우리말로 읽을 수가 없다. 전자는 번역이 한동안 오역/악역의 대명사로 통했던 책이고, 후자는 <소통행위이론1>(의암, 1995)으로 절반만 나온 채 소식두절인 책이다. 하버마스 전공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이러한 현실은 좀 개탄스럽다. 전공자들의 관심은 철학이 아니라 '학위'와 '자리'에 있을 뿐인 것인지.

어쨌거나 지젝을 읽기 위해선, 이 세 저자/텍스트를 우회해야 한다. 적어도 그 문맥을 파악하고 읽어야 한다. 책읽기의 '향락'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닌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지젝 읽기는 다음 번부터 시작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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