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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퓨전 독서

실재의 함성 : 지젝, <그들은...> 2판 서문 읽기(4)

작성자K|작성시간05.01.06|조회수186 목록 댓글 0
 

“출세를 하고 싶으냐? 연애를 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이마와 볼을 밝혀라”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외계 비행선이 세계 주요 도시의 하늘을 덮는다. 지구 연합군이 아닌, 미군은 그들을 선제공격하기 위해 전투기를 출동시켜 미사일 쏴 보지만, 그 외계인들이 고안한 특수한 방어막을 뚫지 못한다. 곧이어 중대 결정이 내려진다. 핵무기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조차 그 방어막을 뚫지 못한다. 이어서 아니나 다를까. 미국의 주요 건물(흰 집, 고층 빌딩)들이 외계 비행선에서 쏘아진 레이저 빔을 맞고 스러진다. 그러나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 알고 보니 NASA는 미 대통령조차 모르게 과거에 외계 비행선이 지구에 찾아왔었고, 그 비행선을 전리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한 암호 해독가는 그 비행선을 가지고 방어막을 제거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찾아내고 그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그 비행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 외계 비행선들을 선두 지휘하는 중앙 시스템에 그 바이러스를 심고 다시 지구로 돌아온다. 그 사이에 미국 대통령은 전투비행사로 돌변하고, 미국의 시민들조차 전투비행사로 돌변해 워싱턴을 덮고 있던 외계 비행선을 격파한다. 이 시나리오의 제목이 바로 영화 「Independence Day」이다. 나의 유아적인 질문은 이렇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커다란 외계 비행선은 30개가 넘고, 세계 주요도시를 점거했는데, 미국이 제거한 것은 단 한 개의 비행선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다면 나머지 비행선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독자적으로 결정, 실행할 수 있는가? 또 하나, 그 날이 어떻게 새롭게 독립을 선언한 날이 될 수 있을까? 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지젝의 말마따나 ‘축자적’으로 읽어야 한다. 즉 미국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도래할 미국의 독립이란 바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독립에 대한 열망-와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미국은 실제로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해 영국과 한국 등 타국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독립을 하고 싶다는 것. 자국을 공격하는 악의 축들에게  유엔의 승인 없이도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독립을 하고 싶다는 것. 솔직히 그것이 누구건 자국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다른 국가가 멸망하건 아사하건 개의치 않고 독립을 선언할 정도로,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외교에 의존하지 않을 정도로 지구상의 모든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고 싶다는 것.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서 미국 대통령은 물론 전 시민이 위급한 상황에서는 전투군인으로 호환이 가능할 정도로 애국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미국이 실제로 바라는 것은 이와 정반대의 효과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즉 그 독립선언은 범접할 수 없는 神적인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Independence의 어원은 미국 미주리 주에 위치한 서부의 도시로서 서부 개척의 출발 지점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미국의 독립 선언이란 살육과 점령의 개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헤겔식의 대립물의 동일성을 정확히 예증하는 것이 아닌가? 미국의 독립은 약소국의 반-독립, 즉 식민주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이 바라는 것을 데리다는 자신의「독립 선언들」에서 다음과 같이 비꼴 수 있었다. 참고로 여기서 ‘제퍼슨’은 미국 독립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 사람이다.


여러분은 나보다 먼저 다음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잘려나간(mutilation. 이 단어는 내가 쓴 게 아니다) 제퍼슨을 위로하려고 했다. 그는 제퍼슨에게 모자 장수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에 모자 장수the hatter는 자기 가게의 간판enseigne/sign-board으로 모자 그림 아래 “모자 장수인 존 톰슨이 모자를 만들어 현찰로 팝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간판을 생각해봤다. 한 친구가 그에게 ‘모자 장수’라는 말을 빼라고 조언했다. “모자를 만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굳이 이 말이 들어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친구는 “모자를 만든다”는 말을 지우라고 충고했는데, 왜냐하면 모자를 사려는 사람들은 모자만 마음에 들면 만든 사람이 누구든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이 ‘삭제deletion’는 특히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이는 생산자의 식별/서명signante 표시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세 번째 친구―지우라고 부추기는 것은 항상 친구들이다―는 ‘현찰로’라는 말을 생략하도록 권유했는데, 왜냐하면 당시에는 ‘현금cash’으로 거래하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다음 같은 식으로 “모자를 팝니다”라는 말을 없애버리라고 했다. 천치가 아닌 다음에야 모자들을 거저 준다거나 누가 버렸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간판에는 모자 그림과 함께 모자 모양의 도상 아래 존 톰슨이라는 고유 이름만 남게 되었다. 다른 아무것도 없이. 우산 아래, 심지어 신발 아래 고유 이름이 들어가 있는 다른 장사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 『법의 힘』,「독립 선언들」, 진태원譯, 문지(2004), 181쪽


  이 우스운 이야기는 미국의 독립 선언이란 초안 작성자가 거세되어 있어도, 그의 고유명이 그 선언에 기입되어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국가가 정초되는 것, 나아가 국가의 독립 선언이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고유명으로 서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대표자의 부재, 그로서 신만이 서명했던 게 되어야하는 독립 선언을 말한다. 데리다가 신이야말로 가장 고유한 이름이라고 하는 이유는 신은 호환과 대체의 금지를 말하기 때문이다. 조지 부시의 수사학이 종교적 색채를 띠는 이유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예상할 수 있는 공박들에 단순히 빠져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다, 신적인 영역을 참칭함으로서 모든 공박들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연 그것은 바로 신의 이름이다. 따라서 미국의 독립 선언에 새겨진 초자아의 명령은 선언들에게 대한 원초적인 질문들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되돌리는 분석가의 담론 그 자체이다. 지젝이 법에 대해 서술할 때, 법이 절대금지가 아닌 중화된 상대적인 게임으로 읽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동일한 논리를 따라, 초자아의 금지 명령은―법의 명확한 금지(“너는 죽여서는 안 된다. 너는 훔쳐서는 안 된다...”)와 대조적으로―본질적으로 중도무이된 “너는 해서는 안돼!Yon shall not!”이다.―무엇을? 이 간극이 초자아의 심연을 열어놓는다. 너 스스로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너는 언제나 선험적인 어떤(알 수 없는)금지를 어기고 있다고 의심받는 불가능한 위치에 놓여진다. 보다 정확히, 초자아는 모든 규정적인 계율을  두 개의 상보적이면서 비대칭적인 부분으로 쪼갠다.―가령, “살인하지 말라”는 형식적인―비규정적인 “너는 해서는 안 돼!”와 외설적인 직접적 명령 “죽여!”로 쪼개진다. 그래서 이 과정에는 “너는 해선 안 돼!”“나는 하지 않을 거야. 근데 뭘? 나는 나에게 요구된 게 뭔지 몰라. 뭘 원하는 거지?Che Vuoi?” “너는 해서는 안 돼!”“뭔지도 모르는데 뭘 하라는 압력을 받으니, 무엇에 관한 것인지도 모르고 죄의식을 느껴야 하다니 정말 미칠 것만 같아. 그래 그냥 터뜨리는 거야. 죽일거야!”라는 대화가 숨어 있다. 그래서 살인은 알 수 없는 초자아의 추상적 금지에 대한 필사적인 응답이다(『그들은』84쪽)>

  『이데올로기』에서 ‘케 보이Che Vuoi’는 라캉의 완성된 그래프 바로 전 단계에 위치한다. 즉 상징적 동일성의 지배 속에서 작동하는 상상적 동일성과 상징적 동일성의 상호 매커니즘은 필히 하나의 간극과 얼룩을 남기는 데 그것이 바로 ‘케 보이?’이다(당신은 나에게 그것을 말하지만,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겨냥하는 것인가요?). <주체는 항상 다른 이들에게 그를 대표하는 어떤 기표에 고정되고 밀착되어 있는데, 그는 이런 고정을 통해서 상징적인 위임을 맡게 되고 상징적인 관계의 상호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어떤 자리를 얻게 된다. 그런데 요점은 바로 이러한 위임이 궁극적으로는 항상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그것의 속성은 수행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체의 실제 속성과 능력에 대한 참조를 통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위임을 떠맡는 주체는 자동적으로 타자의 질문인 ‘케 보이?’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주체는 오직 히스테리적인 질문으로밖에 대답할 수가 없다(『이데올로기』198쪽)>는 것이다.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욕망의 그래프가 완성이 되면, ‘케 보이?’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이는 대상이 타자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 타자 자신도 ‘그것을 가질 수 없으며’최종적인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타자 자신도 장애물에 의해 가로막혀 있으며 따라서 욕망한다는 사실을, 타자의 욕망도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체가 체험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이데올로기』214쪽)>는 것이다. 즉 ‘케 보이?’의 히스테리적인 물음/대답은 상대방의 욕망의 수준에도 가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좀 지난 한 이동통신 CF 광고에서 “아버지 제가 누구예요?”라는 질문에 “나도 몰라!”라고 대답-가장 진실한 대답-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최신 화장품 광고를 보면, “성공하고 싶으냐? 그럼 이마를 밝혀라!” “연애하고 싶으냐? 그럼 볼을 밝혀라!”라는 주장에는 이미 그 답이 주어져 있다. 즉 “이마를 밝히면 성공을 할 수 있나요?”“볼을 밝히면 연애를 할 수 있나요?”라는 주체의 질문에 대한 답을 광고의 제작자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대답은 오로지 하나; “진짜 알고 싶다면‘다나한’(단아한)을 당장 사라!”물론 그 제품에는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답 대신 우유 빛의 크림만 들어있을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 독립 선언문의 진정성이나 한국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일반적인 질문들을 통해 돌아오는 것은 첫 번째 “나에게 원하는 게 뭐냐?”는 되돌아오는 초자아의 역-질문이자, “나도 잘 몰라 이 자식아!”라는 초자아의 무기력함이다. 그리고 이 질문과 대답 사이에 하나의 얼룩; “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을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표어가 아무 것도 아닌 한에서 부유하고 있다.


실재의 함성


  이렇게 대타자와 주체의 실재, 그 이면에는 <폭력적인 탈피를 통해 실재의 중핵을 분리해 내려는 정화와 달리 공제는 공백, 즉 모든 한정된 내용의 소거(“공제”)에서 출발하여 공백과 그 대리자로 기능하는 원소 사이의 차이를 수립한다(『그들은』99-100쪽)>는 분리되는 양태가 있다. 여기서부터 지젝이 『이데올로기』에서 논구하려던 민주주의에 대한 유보적인 접근이 철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이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근거를 좀 살펴보자. 우리가 흔희 알고 있는 의자차지하기-게임을 떠올려보자. 게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의자의 수보다 사람의 수가 더 많아야 한다. 즉 게임은 의자를 차지하지 못하고 탈락되는 ‘한’ 주체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화는 무엇일까? 그리고 공제는? 공제부터 보자. 의자차지하기 게임에서 탈락된 주체는 특정한 집합(게임)에 속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지 않는 “정원 외”원소를 말한다. 다시 말해 게임은 공제로부터 도출된다. 그래서 정원 외 원소는 Zero가 아니라 One하나로 셈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게임이 계속 진행되기 위해서는 “사태는 정상으로 되돌아와야”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원 외 원소는 셈에 넣어지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요소가 빠지면, 의자가 다시 하나 줄어드는 식으로 다시 공백은 보편성의 대리자로 출현하는 개별자들을 작동시킨다. 다시 공제는 민주주의의 장 내에서 보편적 대리자로 기능할 수 있다. 즉 정원 외 원소는 어떠한 고정된 자리도 없이 스스로 배제된 자로서 그들은 스스로를 대리자로, 전체 사회의 대표자로 자임할 수 있는 정치,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지젝의 물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즉 <매우 설득력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런 손쉬운 방법을 거부해야 한다. 왜? 민주주의는 다수의 정치적 주체들이 권력을 두고 자유롭게 경쟁하는 형식적 체계로 수립되는 순간 어떤 선택지에 대해서는 “비-민주적인 것”으로 배제해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와 같은 배제, 즉 누가 이 민주주의적 선택지에 포함되고 누가 배제될지에 대한 초석적 결정은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나는 지금 메타-언어의 역설로 형식-논리학적 유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의 통찰이 여전히 타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 포함/배제는 근본적인 사회적 적대(“계급투쟁”)에 의해 중층 결정되고,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민주주의적 경쟁의 형식으로 온전히 번역될 수 없다(『그들은』103쪽)>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계급투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라클라우Ernesto Laclau와 무페Chantel Mouffe식으로 말하면, 이 “정원 외”원소는 우리가 차이difference에서 적대antagonism로 이행할 때 출현(『그들은』101)>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정화와 공제를 일으키는 최소한의 차이는 민주주의 형식이 갖는 집합 외의 정원에 원소일 뿐, 변별적 자질과 특수한 차이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 외 원소들의 ‘자유주의적 경쟁’의 형식인 선거는 순수한 차이를 표상하지만, 단지 형식주의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차이는 적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요컨대, 지젝이 민주주의를 ‘사유 재산’에 의존해서만 작동하는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의 교훈을 따를 때, 보다 더 정식화된다. 즉 <민주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격과 관련하여 도입된 용어를 사용하면―그것의 “부대 비용”에 있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생산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권가권력의 한 형태라는 사실 말이다(『그들은』103쪽)> 그래서 라캉-지젝의 실재의 두 양태인 정화와 공제는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공제는 정화가 실패한 뒤에만 따라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충분히 민주주의적이지 않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형식(선거를 통해 “평화로운 방법”으로 사회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환영) 자체가 충분히 사회 혁명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차이를 순수한 차이로 번역하는 데 실패한 민주주의 형식과 그것을 적대적 차이로서 최소한의 차이로 정치에 기입하려는 레닌의 공제의 정치의 형태를 띤 정화의 정치의 반복을 주장하는 지젝의 논의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자, 이제 이 지루한 독후감을 정리해보자. 라캉-지젝에게 있어 실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태양을 직접 조우했을 때, 눈이 머는 인간존재의 한계 체험인가? 역시 선글라스를 다시 착용해야 한다는 우리의 허위성에 대한 통찰인가? 그럼으로써 그러한 근원적 진리의 무효성과 궁극적 진실이란 그 공허한 체험 속에서 얻는 한 가닥의 충격적인 깨달음뿐이라는 것인가? 여기까지가 내가 지금까지 지젝을 읽을 때, 갖는 한계 체험이라는 것을 고백하자. 그러나 이건 독자인 나 자신의 한계일 따름이다. 지젝이 바디우의 ‘실재’가 사후적으로 진리를 강제적 채워야할 공백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실재의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건 다시 실재를 깐 데 또 까는 체험의 출발 지점으로 우리를 되돌리는 것은 아닐까? 바디우의 제자 부르노 보스틸스는 바디우의 실재의 간극을 메우는 진리가 ‘일반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인 양’이라고 말한다. 이를 놓칠 지젝이 아니다. 지젝은 그러한 “마치...것인 양as if(『그들은』107쪽)”을 <새로운 진리를 현재 상황의 존재론적 질서로 오해하고 즉각적으로 적용하고 스탈린주의적 재난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만 새로운 진리가 마치 적용 가능한 것인 양만 하면(『그들은』107-108쪽)>되냐며 되묻는다. 즉 그러한 ‘마치...것인 양’이라는 전제 자체가 실재에 대한 불가분의 잔여물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의 간극을 사후적 진리로 메울 수 있는 것인 양(결과인 양), 행동할 것인가? 실재를 하나의 연쇄로 회전시킬 것인가? 라는 두 개의 임계점과 만나게 한다.

 

칸트와 바디우에게는 공히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이렇게 해서 존재의 순수한 복수성과 그것이 복수적인 세계 속에 나타남 사이의 간극이 발생하는가? 어떻게 존재가 스스로에게 나타나는가? “레닌주의”적으로 말하면, 문제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세계 저변에 어떤 또 다른 현실이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 반대이다.―어떻게 전적으로 완결된 실재 세계에서 실재의 요소들이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간극이 열리는가? 하나의 상태 속에 순수한 복수성이 재―현되어야 할 필요는 무엇인가? 보스틸스가 어떤 상황적 상태는 “공허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강제된 방어기제”라고 쓴 것에 대해 우리는 순진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런 방어의 필요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왜 우리는 그냥 공허에 거주하지 못하는가? 순수하게 복수적인 존재 안에 이미 어떤 긴장/적대가 작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점을 간과함으로써 바디우는 그의 가장 강력한 맞수인 들뢰즈에 너무 많이 가까워진 게 아닐까? 또한, 순수하게 무차별적인 존재의 복수성과 반대되는 갈등적 존재상태의 복수성도 존재한다. 즉, 사건은 상태들의 틈새에서 발생한다.―따라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이슈는 상태들의 갈등적 공존이 지닌 성격이다.(『그들은』109-110쪽)


  따라서, 이제부터 국면은 실재에 진리(명명될 수는 없는)를 강제할 것인가(파국을 억지로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것인가)? 실재와의 조우가 열어놓은 간극, 틈새를 하나의 출발점으로 삼고 인식을 전환시킬 것인가? 같은 것이 되어간다. 이것은 다시, 명명할 수 없는 신비주의자의 담론으로서의 바디우냐, 이전의 혼돈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주인담론-대학담론으로서의 라캉이냐. 라는 식으로 변형된다. 즉 바디우의 명명할 수 없는 진리의 강제는 “불가분의 잔여물”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젝이 실재의 결과를 순수한 차이로서 즉 순수한 외관으로서 추가하며 하나의 운동성을 가지고 새로운 질서로 변모시키는 라캉의 손을 들어주는 이유이며, 이 이유는 곧바로 이 책의 본문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실재를 더 이상 즐기려고만 하지 않는 한에서 그것을 온전히 대면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건 그렇고 다 읽고 던져진 사건 개요서는 5초 후면 폭발할 것이다.


추기


  현대의 가축 관리 시스템은 가축에게만 잔인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것이 바로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 극대화 시키는 자본주의는 착취당하는 대상과 그 착취를 관리하는 노동자를 이중으로 착취하는데, 그것은 가축의 생명을 담보로 착취를 정당화할 때 더 그렇다. 다시 현대의 가축 관리 시스템은 가축에게 음악을 틀어줌으로서 그들의 정서를 안정화시킨다. 내가 아는 농장에는 오후 3시가 되면, 트로트나 클래식을 틀어 주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그곳에 방문해 있을 때, 그곳의 새끼 돼지들은 전문 용어로 “댄스 병(계속 춤을 추다가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못하고 죽는 병)”에 걸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많은 돼지들은 흘러나오는 트로트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나로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삽겹살이나 족발이 되어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지 못하고 사늘하고 캄캄한 시멘트 구조물 안에 암매장된 그 수많은 돼지들에게 이 독후감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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