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실재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정해경 옮김,《당대비평》17호, 2001년 겨울. 영어 원문은 "http://www.lacan.com/desertsymf.htm"에서도 볼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실재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에서 일단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일상의 사회적 경험에서 실재(The Real)와 맞닥뜨리려는 과도함(초과, excess)의 행위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바타이유적 폭력의 일상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실재란 라깡의 상상계-상징계-실재라는 매듭에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상징계라고 부르는 현실의 토대가 얼마만큼 불안정한가에 대해 알려주는 기표라고 볼 수 있지만, 그때 현실이란 바로 그런 실재의 작은 조각이라는 보충물을 통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 실재란 근본적으로 충격이거나 낯섬 등으로 경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비평가가 주목하는 실재의 경험이란 현실의 지반에 대한 확실한 경험에 비추어 낯선 것으로 첨부되거나 부가되는 실재의 충격이 아니라, 그런 현실 자체가 이미 불안정해진 토대에서 현실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겠다는 주체의 절망적이고 초과적인 열정이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용어를 빌면, 그것은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바디우가 그 예를 드는 스탈린주의 재판에서 실재에 대한 열정은 공산주의적 신인간을 창조하겠다는 공산당의 프로젝트가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인간들에 대한 소거를 통해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잘 실현된다. 순수한 공산주의적 신인간에 대한 믿음, 그것은 평범하고도 실수에 잘 빠지고 공산주의적 대의(역사의 합목적적 전개과정이나 공산주의의 궁극적 실현이라는 대타자(The Other)에 대한 믿음)에 불충성스런 인간들을 제거하면 남아있으리라 가정되는 어떤 잔여물(remainder)에 의지하면서 더욱 더 폭력을 정당화시키게 된다. 바로 그 잔여물을 내용 없는 형식인 공산주의적 신인간에 채워 넣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스탈린식 공개재판을 기획하고 실현하는 공산당은 신인간의 탄생을 위해 현재 어지러이 널려있는 경험적이고도 변덕스러운 인간들을 제거해야 할 순수한 임무에 소명의식을 갖게 된다. 따라서 다음에 그들 자신이 처벌의 대상이 된다고 해도 이것은 결국 공산주의적 대의, 혹은 일반의지를 위한 궁극적인 자기희생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사실 이런 스탈린주의의 폭력적 기원에는 선례의 역사가 있다. 바로 프랑스 혁명의 과정 중에 벌어진 프랑스 공화당의 자코뱅파의 테러정치. 자코뱅파의 테러정치가 가진 과도함에 주의를 기울였던『정신현상학』한 장인「절대적 자유와 공포」에서 헤겔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그런데 만약 일반의지가 통치권에 의한 현실적 행동을 마치 그 자신에 대하여 가해지는 범죄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할지라도 이와는 달리 통치하는 쪽에서 볼 때는 자신에 반대되는 일반의지가 저지른 것으로 나타나는 어떤 특정한 외면적 사례라고는 발견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일반의지로서의 통치권에 대치(對峙)할 수 있는 것이란 다만 비현실적인 순수의지, 즉 의도만이 있을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서는 단지 의심스럽다거나 혐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유죄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그와 같은 정도의 의의와 효력을 지니기에 이른다. 따라서 한낱 의도에 지나지 않는 단순한 내면에 깃들여 있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통치권이 발동시키는 외적, 물리적 반응은 오직 그 존재자체 이외에 또 달리 제거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바로 이 존재하는 자기를 가차없이 박멸하는 것일 뿐이다. (G.W.F 헤겔,『정신현상학 2』,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89, 720쪽. 강조-인용자)
즉, 프랑스 혁명의 자유의 실현이라는 일반의지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유일한 당인 자코뱅파에서 볼 때, 나머지는 그런 일반의지라는 대의를 따르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자로 구성된다. 이것은 마치 신의 관점(신의 관점이라고 가정되는 관점)에 서서 인간을 하나님을 따르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눌 수 있다고 믿는 어떤 신의 대리자가 취하는 관점과 같다(이것은 흔히 스스로를 신으로 간주하는 사이비종교지도자들이 취하는 태도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시점은, 정신분석에 따르면, 정확히 도착적(倒錯的)이다. 도착증의 공식, a<>$가 말하는 것(그것은 $<>a의 반대편이다)은 자신을 대타자의 향락의 대상으로 주는 일이다. 즉 주체, 나($)는 대타자의 향락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한에서만 욕망의 주체이다. 이 자코뱅파의 관점, 즉 스스로 자유와 평등의 실현이라는 일반의지를 구현하고 실현한다는 것, 그 절대적 자유를 선사할 수 있는 일반의지의 대리자의 도착적 관점에서 볼 때, 일반의지를 구현하는 자신들의 대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물론 그 대의의 방관자나 단순한 비협력자조차도 현실적으로는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자코뱅파가 구현하는 일반의지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는 명백히 유죄이다.(강조-글쓴이) 이들에 대한 단죄, 길로틴에서의 처형이 의미하는 바는 헤겔이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과 같다. "보편적 자유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는 유일한 작업과 행위는 죽음(der Tod)일 뿐더러 더욱이 이때의 죽음은 아무런 내면적 요소도 포괄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그 어떤 내실도 기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부정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자기의 점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뜻으로 본 죽음이란 가장 냉혹하면서도 또한 가장 무의미한 것이니, 말하자면 이것은 통배추의 밑둥을 쳐낸다거나 한모금의 물을 마시는 정도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같은 책, 719쪽) 여기서 말하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상태"란 바로 현실이 갖는 병리적, 우연적 상관물을 제거하고 즉각적으로 실재에 도달하려는 열망과도 같지 않을까. 그때 죽음이라는 것은, 그런 병리적, 경험적, 우연적 대상에 대한 무심한 척결과 동일하다. 문제는 자코뱅파 즉, 일반의지의 대리자 역시 일반의지의 측면에서 볼 때, 경험적, 우연적 대상이라는 점이다. 자코뱅파의 연이은 몰락, 그리고 자코뱅파의 대표자들, 즉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인물이 성직자와 같은 금욕주의자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마찬가지로 사이비종교 지도자들이 대개 성도착자인 것도 의미가 있다). 니체 역시,『권력에의 의지』와 같은 후기 저작물에서 "무(無)에의 의지"를 말한다. 즉, 인간은 어떤 것을 원하기보다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재에 대한 열정'과 동의어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실재에 대한 열정과 상관물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지젝에 따르면, 현실을 현실로 경험하는 데에 따르는 필연적 결핍감에 대한
저항이 바로 가상 현실인데, 이것이 정반대로 실재에 대한 우리의 열정의
대립적 상관물이다. "가상 현실은 실질이 빠진 제품을 제공하는 절차를 단순히 일반화시킨다. 가상 현실이 제공하는 것은 실질이 빠져 버린 현실, 다시 말해 그 현실에 저항하는 단단한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실재가 제거된 현실 자체이다."(49쪽)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을 제거한 크림, 알코올 성분
없는 맥주, 성적 상대가 부재한 가상 섹스 등등이 그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상 현실의 예이다.
구약성서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으면 새로운 지식을 얻게된다는 사탄의 말에 담긴 궁극적 진실은 선악과를 먹으면서 보충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정된 어떤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선악과를 먹는 행위 그 자체는 그들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얻을 수 있으리라 짐작되었던 지식=향락에 대한 근본적 박탈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즉, 이때 지식은 그 지식을 통해 얻으리라 생각했던 대상의 결핍,
부재와 궁극적으로 동의어이다. 이것이, 향락의 결여의 형태로 필연적으로
추구되는 향락에 대한 지식(열정)이 뜻하는 바다. 즉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가상 현실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바로 지식의
형태-즉 이 커피엔 카페인이 얼마만큼 들어있다 등등-로 추구되는 상실된
잉여-향락이다. 즉, 지식의 형태의 추구로 그 상실감이 그만큼 더해지는 잉여-향락. 향락의 대상 a, 즉 평범한 사물이 주체에 의해 과도하게 숭고하고도 신비스러운 차원으로 격상된 것에 대한 맹렬한 추구와 이에 따른 현실적
박탈감은 바로 대상 a가 궁극적으로 무(無)임을 알려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잉여 향락이 아니라, 실제로는 현실에 대한
평범한 존재감, 즉 원래의 대상 a에 해당되었던 일상적 현실이다. 또한 그것이 불완전한 결여물로 계속 지각되는 한, 궁극적으로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결국, 실재에 대한 열정은 미학적으로는 숭고함에 대한 열광과도
같다. 그것은 또한 현대판 물신 숭배다. "물신 숭배가 그 정점에 달하는 것은 숭배의 대상 자체가 '탈물질화'되고, 유동적이고 '비물질적'인 가상의
존재로 변하는 바로 그 때"(57쪽)이다. 가상 현실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무(無)다.
9.11테러는 그에 대한 표준적 정신분석의 해석처럼 미국과 같이 온갖 재난영화가 활개를 치며 상상적 스펙타클의 효과가 그 궁극적인 현실을 기다렸던 환상의 공간에 대한 실재의 침범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즉, "현실이 우리 이미지 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와서 이 현실(즉 무엇을 우리가 현실로서 체험하는가를 결정하는 상징적 좌표)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53쪽) 물론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공격은 미국의 재난영화에서 보이던 상상적 스펙타클을 뚫고 그것을 실제로 구현한 '실재에의 열정'이 담긴 폭력행위였다(이것은 지젝에 따르면, 실제 살인을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즉 실재에의 열정을 실현하는 스너프 필름과 단지 그것을 상상적으로 재현하는 폭력 영화와의 차이이다). 하지만, 그 효과는 명백히 스펙타클의 효과였다. 세계무역센터의 파괴가 따라서 숭고의 재현(이미지)이며, 예술작품이라고 본 괴상한 견해에 일말의 진실이 담겨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물론 이러한 숭고의 재현에 담긴 최신의 미학적 사유에서
우리는 반드시 거기에 담겨진 비윤리적인 태도를 간파해야 한다). 텔레비전은 바로 이 스펙타클을 반복적으로 상연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자들의 안전하고도 중립적인 응시를 통해 숭고함을 재현해낸다(이것이 바로 칸트가『판단력비판』에서 말하는 바다. 즉, 숭고함은 주체에 의해 숭고한 대상, 즉
물(物)로 격상된 대상과 주체와의 거리를 통해 획득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젝이 말하는 현대판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를 뜻한다. 이것이 가져오는 것의 효과는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런
재난의 현실과는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안전감이다. 그러나, 갖은 형태의 지배 이데올로기란 정확히 그런 주체가 현실간의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획득되는 안전함에 의해 지탱된다. 단적으로, 미국의 헐리우드 재난영화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의 미학적 상관물이다. 결국,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는 그것에 의해 수많은 형태의 억압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보충물이
된다(헤겔의 금언처럼, 악은 그것을 사방에서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응시 자체에 있다). 9.11테러의 교훈은 바로 미국과 같이 현실의 지배적인 판본(즉, 시장 이데올로기, 세계의 경찰국가로서의 자임, 중요한 자원을 가진
제 3세계와 그 밖의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봉쇄와 군사적 탄압)이면에 스펙터클을 연출하는 사회이자, 상대적으로 타자의 위협에서 안전함을 차지한
나라가 타자의 위협과 그에 따른 미국의 대외정책과 같은 지배 이데올로기와의 그 냉소적 거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현실의 신호이다. 어쨌든 9.11테러 이후 미국인들은 그런 냉소적 게임이 더 이상 무효화된 자리, 즉 영화「매트릭스」의 지하 현실 세계의 지도자인 모피어스의 말처럼 "실재의 사막"에 들어섰다. 그것은 9.11테러와 같은 사건이 "여기서는
일어나서는 안 돼!", 가 아니라, "이런 일은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돼!", 로의 인식의 전환과 그에 따른 책임감의 획득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실재에의 열정과 가상 현실이 맞닿아있는 것에서 파생되는 쌍들의 대립이자, 보충의 논리이다. 즉,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국가에 팽배한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는 그것의 상관물인 이데올로기의 열광적인 숭배자, 즉 '근본 악(radical evil)'의 화신들을 반드시 포함한다. 여기서 근본악의 화신들은 테러리스트들과 그의 배후자들에 대한 악의 이미지로
구체화된다(여기에는 CIA에서 군사훈련과 자금을 받고 아프칸에서 소련과
싸운 오사마 빈 라덴과 걸프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진정한 친구였던 사담 후세인, 그리고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이 포함된다. 이라크와 북한이 '악의 축'의 국가라고 말하는 부시의 유명한 발언을 상기하라). 그리고 지젝이 말한 것처럼, 공적인 문서와 그것의 외설적인 이면인 외설적 초자아와의 관계처럼 테러리스트의 국제 조직은 실은 거대한 다국적 기업의
외설적 분신이며, 이들 테러리스트들의 '종교적/민족적 근본주의'는 사실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응의 필연적인 산물이다. 문제는 미국이나
그 밖의 나라가 자신의 적, 타자를 외부에서 찾지만, 그것은 이미 그 자체
내부에 보충적 형태로 실현된다는 사실에 대한 전적인 무지이다. 박노자 교수에 따르면, 미국에는 약 2000만 명에 달하는 종교적 광신자들(주로 유대계로 구성된 백인중심의 기독교 중산층을 대표하는)이 있으며, 그들이 미국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은폐가 미국 바깥으로
'투사(projection)'되어 적대적인 타자, 즉 근본주의자, 종교적 광신도들,
테러리스트들을 만들어 내고 또 보충하는 것은 아닐까(9.11테러가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논리적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적어도 미국
내부에 이러한 근본주의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내부에서 공격할 타자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것과 결국 동일하기 때문이다. 탄저균 테러의
배후자로 최종 지목된 것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이때 매우 흥미롭다). 결국 지젝의 변증법적 결론은 이렇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하나의 전체성이라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그것 자체와 그것의 타자,
'근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세력들로
이루어진 변증법적 통일체라는 것이다."(64쪽)
이제 남은 것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그 폭력행위 근저에 있는 "실재에 대한 열정"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더 이상 공격할 것도 남아있지 않은 가장 초라하지만 위협적이라고 보여지는 타자 내부에 가정된 잉여-향락에 대한 공격, 즉 미국의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보복공격에도 담겨져 있다)과 미국의 잔인한 보복 공격에 의해 무너지고 세워지는 공적인 법(테러방지법 등등)과 그것 이면의 외설적인 초자아의 향락('무한정의'라는 이름을 얻은)을 넘어서고 지양하는 근본적인 윤리적 태도를 가정하는 일이다. 지젝은, 이때 "모든 희생자들과의 무조건적인 연대"(65쪽)를 가정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테러나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무조건적인 동정을 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나와 희생된 타자가 어떻게든 동일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정치적 반성과 책임감에 대한 헤겔적 통감(痛感)이다. 즉, 이데올로기적 냉소주의에 가정된 '아름다운 영혼'이 그것이 비난하고 거리를 취하는(아름다운 영혼은 헤겔의 다른 표현을 빌면, '관조적 영혼'이다) 현실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폭로하고 그에 따른 책임감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누가, 9.11테러와 아프칸 전쟁과 그 피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통감할 수 있는가. 자, 테러와 연이은 보복전쟁의 파괴와 악을 '바라보는(looking)' 당신 내부에 있는 아름다운 영혼의 '응시(gaze)'를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