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 1889년 6월, 생 레미
- 캔버스 유채, 73.7 cm × 92.1 cm
- 뉴욕 현대 미술관

* "별이 빛나는 밤" : 임마누엘 칸트 vs 빈센트 반 고흐
서점에 갔더니, 흥미 있는 표지를 가진 책이 눈에 띈다. 빌헬름 바이셰델
엮음,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약동하는 자유>(손동현 외 옮김, 이학사,
2002). 칸트의 저술들에서 핵심적인 것들만 골라 엮은 이 책의 표지는 내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언젠가 학교를 가던 도중에 지하철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이 책을 읽는 것을 보았고, 서점에 갔을 때, 그 여자가 읽던
이 책이 갑자기 떠올라 찾아봤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그림이 하반부에 그려져 있고, 뒤 표지를 보니, 이에 상응하는 듯한
<실천이성비판>의 칸트의 문장이 실려있다. 이 문장은 흔히 칸트의 묘비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칸트가 태어나 평생동안 살다가 묻힌 쾨니히스베르크의 한 교회의 동판에 새겨져 있다. "내가 그것에 대해 여러 차례, 또 오랜 시간 성찰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더욱 높아지는 경탄과 경외심으로 나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이 두 가지란,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 안에 있는 도덕 법칙이다."(로저 스크러턴, <칸트>, 김성호 옮김, 시공사, 1999, 24쪽)
고흐는 항상 동생 레오에게 별이 빛나는 밤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북돋운다고 말했다. 18세기의 인간 이성의 위대함을 찬양한 쾨니히스베르크의
사색적인 노인 칸트의 별이 떠 있는 밤하늘과 생애의 마지막엔 서서히 미쳐갔던 19세기의 위대한 한 화가의 별이 떠 있는 밤하늘 사이엔, 그러나,
뭔가 어긋나는 게 있다. 내가 그 책표지를 흥미롭게 보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이런 문장이 내 머릿속에서 떠올랐던 것이다. '18세기, 찬란한 이성의 시대를 열어놓았던 칸트의 조화로운 별은
19세기의 마지막에 와서 고흐의 광기에 찬 매서운 별로 변했다.' 아마,
내가 기억하기론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성의 언어에 의해서
침묵과 어둠으로 밀려난 광기의 사회사에 대해 서술한 <광기의 역사>의
저자 미셸 푸코 뿐이다. 그래서 다시 확인해봤다. 하지만 오래 전 읽은 <광기의 역사>를 아무리 뒤적여도 그 문장은 눈에 띄지 않았다. 도대체 머리 속에 갑자기 떠오른 이 문장을 나는 어디에서 보았던 것일까.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물론 <광기의 역사> 결론부에는 19세기 마지막의 광기의 저자들, 화가들의 이름이 눈에 띄고 거기에 고야와 고흐의 이름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머릿속의 문장은 교활하게 웃음을 흘리며 책 속에서 빠져나갔다. '18세기, 찬란한 이성의 시대를
열어놓았던 칸트의 조화로운 별은 19세기의 마지막에 와서 고흐의 광기에
찬 매서운 별로 변했다.' 혹시 허공 속에 떠 있는 이 문장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내가 그런 멋진 문장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물론 사드의 저술에 대해 언급하는 푸코의 다음과 같은 화려한 바로크적인 문장은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광기에 찬 자연을 역으로 설명해준다.
앞의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문장과 비교해볼 만 하다. "이제 그토록
오랫동안 지배당했고, 더럽혀졌고, 힐난을 받았던 자연은 또 다시 자신과
모순된 요소에 굴복한다. 이제 자연은 광기로 들어간다. 거기서 자연은
한순간 동안에, 그리고 오직 한순간을 위해서 자신의 절대력을 회복한다.(...)폭풍의 밤, 천둥과 번개의 밤은 자연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밤들만으로도 자연이 극단적인 자기분열의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과, 자연이 이 황금의 섬광을 통해서 자기 자신인 동시에 자기 밖의 무엇이 되는 지배력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지배력이야말로 광기의 지배력이다. 광기는 고립을 통해서 세계의 한계에 도달한다. 이 세계는 광기를 괴롭히고 광기를 뒤흔들고 심지어는 광기에 대한 충실한 지배가 오히려 광기에게 세계와의 동일성을 부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광기를 없애 버린다.(...)비이성의 무는 자연의 폭력인 동시에 자연에 반한 폭력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자연 자체가
완전한 소멸에 이를 때까지는 타당하다."(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김부용 옮김, 인간사랑, 1991, 284-5쪽) 여기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는 광란의 밤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흔히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의 광기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이 말로는 고흐의 광기도 그의 예술작품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 푸코가 말한 것처럼 "광기는 작품과의 절대적인
단절(ruptur)"(287쪽)이기 때문이다. 이때 '표현'이라는 것은 근대의 최초의 예술에 대한 정의, 즉 낭만주의에서 말한 자기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광기, 그것은 이러한 표현론적인 근대 예술의 정의와의 단절이며, 작품에서는 표현매체(언어 등) 자체와의 단절이다. 아마 1888년 어느 날 채찍을 맞는 말의 목을 껴안으며 미쳐간 니체의 이후의 언어는 광기에 근접한 언어일 것이다. 광기 최초의 표현 가능성? 아니 이런 표현조차도 뭔가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근대의 언어가 스스로에게 사로잡히는 한계만을 명확히 보여줄 뿐. 아마 푸코(그가 자주 참조한 모리스 블랑쇼)와
함께 묻는다면, 현대의 비평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런 언어의 절대적인
한계점과 경계라는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는 게 될 것이다. <광기의 역사>의 마지막 문장은 차라리 하나의 비평적 선언이다. 조금은 과장된 그의
반(反)-언어, 반-표현적 선언을 보자. "이것이 광기의 책략이며 광기의
승리다. 광기를 측정하고 심리학을 통해서 광기를 정당화시켰다고 믿어온
세계는 이제 광기 앞에서 스스로를 정당화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광기의
투쟁과 고통 속에서 세계는 니체, 반 고흐, 아르또와 같은 작품들에 입각해서 스스로를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속의 어떤 것도 특히 세계가 광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어떤 것도 광기에 관한 이러한 작품들이 세계를 정당화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결코 보증하지 않는다."(289쪽)
어쩌면 칸트의 순수-실천 이성의 찬란한 성좌는 최후의 탐사불가능한 물자체에 대한 욕망의 적극적인 유보 덕택에 세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칸트의 '숭고'한 도덕적 정언명령이란 사실은 불순한 욕망의 어떤 금지와 절제 위에 세워진 질서정연한 강박증의 성좌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들어보자. "칸트의 '강박증적'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와의 외상적인 만남을 회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상계에 대한 우리의 가능한 경험을 제한하고 그것으로부터 '물자체'를 배제하는 그의 '선험적인' 절차는 겉으로 보기엔 진리를 향한 갈망-불합리하게도 현상들을 물자체로 오인함으로써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 : Verso, 1989, p.190)
여기에 비해 고흐의 광기에 찬별은 이러한 칸트의 숭엄한 자연-마음의 법칙을 적극적으로 히스테리화한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칸트가 회피하고자 하는 물자체에 대한 두려움, 즉 현상과 물자체를 혼동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실제로는 진리와의 만남에 대한 두려움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흐는 화폭에서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가 말한 숭고의
개념이 위악스럽고 혼돈에 찬 자연 앞에서 불쾌를 경험하고 조절하는 이성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높여준 것이라면, 고흐의 히스테리적인 별들이
가득찬 밤은 칸트의 별들의 뒷면, 즉 그런 욕망의 금지가 실제로는 물자체를 탐사하고자하는 적극적인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 같다. 여기서 지젝이 말한 가장 위대한 커플인 칸트와 사드는 욕망이 조우하는 지점에서 서로 만나게 되며, 고흐는 뜻밖에도 헤겔주의자임이 증명된다. 칸트의 숭고한 별처럼 고흐의 별도 숭고하지만, 그것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을 빌면 '히스테리컬한 숭고'이며 역으로 그것은 칸트의 숭고한 별이 '강박증적'임을 폭로한다. 또한 칸트에서 헤겔로 이동하는 철학적 입장이란 바로 강박신경증에서 히스테리로 변증법적으로 전환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지젝의 말에 따를 때,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인 헤겔의 철학, 가령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영혼의 오솔길"인 <정신현상학>은 하나의 자기의식이 세계정신에 도달하려는 진리=물자체에 대한 고달프지만 적극적인 욕망의 추구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물론 그 오솔길엔 여러 가지 함정이 숨어있는데,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에 대해 언급하면서
등장하는 조카 라모의 "미친 오성"이라는 광기의 다른 이름은 그 한 예이기도 하다). <정신현상학>은 실제로는 칸트의 강박증적인 3대 비판서에
대한 히스테리-변증법적 희화인 것이다. 아마 당연한 말이겠지만, 고흐는
광기에 들린 상태에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광기는 작품의 부재'라는 뜻에서 푸코는 옳았지만, 고흐의 작품에서 "광기의 책략"을 추출, 헤겔적 "이성의 책략"을 역전시키려는 의도에서 보면
푸코는 옳지 못했다. 그것은 <광기의 역사>의 저자인 푸코 자신의 딜레마이기도 하며 그 유명한 푸코-데리다 논쟁의 시발점이 될 만도 하다. 어떻게 데카르트적(푸코적) 이성의 투명한 언어를 가지고 침묵의 광기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할까. 그리고 푸코와 데리다가 데카르트의 <성찰>의 한 문단을 가지고 논쟁했던 것처럼, 투명한 이성이 광기를 침묵과 어둠 속으로
추방시켜버렸는지(푸코), 아니면 이성 자체가 광기에 대한 편집증적 경제에 사로잡혀 결국 그 자체가 악령에 '들린' 것에 지나지 않는지(데리다)는 잘 판가름이 나지 않는다. 미리 앞질러 말하지만, 위대한 반(反)-헤겔주의자들인 이들 푸코와 데리다는 자신들의 입장이 서로에 대해 변증법적이었음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은 충분히 헤겔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반-헤겔적이었다. 이제 그 책표지를 보면서 내 머리 속에 문득 떠올랐던
다음 문장은 변증법적으로 활성화시켜서 해독해야 한다. 설혹 그것이 나중에 누구의 문장으로 밝혀지더라도. '18세기, 찬란한 이성의 시대를 열어놓았던 칸트의 조화로운 별은 19세기의 마지막에 와서 고흐의 광기에
찬 매서운 별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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