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품과 교환의 타락한 세계 : 김말봉의『푸른 날개』(1954) 읽기
문학공부를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소설이 늘 있기 마련이며, 또한 할 수 없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흥미와 감동을 가져다주는 소설이 다행히 있을 법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소설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전부 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피치 못해 읽어야 하는 소설이 흔히 알려진 명작도 아니고, 인물의 성격, 구성과 사건에 있어서 핍진성이 상당부분 결여되어 있을 때, 소설 읽기는 고역이 되고, 최악의 경우 시간 낭비가 된다. 꼬박 이틀을 밤새워 읽은 김말봉(金末峰)의 통속소설『푸른 날개』(《조선일보》, 1954년 연재)가 독서의 고역과 시간 낭비임을 일깨워준 소설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서 덧붙여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 점령하의 사회에서 그들에게 기생하며 살아가는 상류층 인간들의 소비와 향락, 부(富)와 교환되는 사랑과 결혼 등의 타락한 세태풍속을 그럭저럭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작가는 여기에 대해 비판적이지도 않고 냉정하게 거리를 둔 채 묘사하거나 하지도 않지만. 따라서 이 소설은 문학적 가치를 가진 작품으로 언급되기보다는, 소설을 둘러싼 풍속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가능하게 하는 자료로 취급된다면, 쓸모가 있을 법하다.
『푸른 날개』의 현실은 한마디로 말하면, 도덕과 습속이 서로 습합하면서 내면화되는 풍속에 대한 일반적 정의와는 정반대되는 타락한 현실이다. 분단과 전쟁 이후, 인륜성의 기반인 풍속마저 뿌리가 흔들린 현실의 결핍된 부분은 한마디로 미국으로 대표되는 박래품(舶來品)적인 소비와 사치, 향락의 가치관이 대신 메우고 있다. 소설은 철저하게 유리(遊離)된 상류층의 상상적 공간인 스탠드바, 술집, 고급 주택, 고급 승용차 안에서 전개된다. 소설에서 막연하게만 추측할 수 있는 미군정하의 현실에서 작중인물들은 철저하게 이들에게 기생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확고한 상징적 정체성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소설의 주인공 권상오마저 일관된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다. 그는 소설의 초반부에는 교사로서의 자기의 위치에 대한 자부심과 그에 따른 양심을 가진 듯 긍정적 인물로 그려지지만, 중반을 넘어서서는 구애하는 여성들의 육체적 유혹에 쉽사리 저항하지 못하고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가치평가도 다소 변덕스럽게 바뀌면서 사랑과 결혼의 대상 또한 바꾼다. 후에 그는 사랑과 결혼을 학교의 체육관 설립자금과 바꾸고 그것을 학교를 위한 자신의 봉사라고 생각한다).
박경대 사장은, 소설에서는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지만, 미군 PX로부터 상당한 양의 주류와 물품을 빼내어 재산을 축척하고 있고 마담 지순에게 스탠드 바를 경영하도록 한다. 김상국은 밀수를 통해 그의 내연의 여인인 미스 현의 허영심을 북돋으면서도 피아노 교사 한영실과 결혼하려고 한다. 한영실은 일말 긍정적으로 묘사되지만, 그녀 역시 사랑과 결혼의 극단적인 대립 속에서 교양 있는 체 하는 속물에 불과하다. 한영실과 상류층 집안의 전형적인 백치 여성인 추백련은 주인공 권상오에게 영어를 배우러 다니며 미군들의 습속인 춤과 술, 음식, 취미의 상당부분을 즐기기에 여념 없다. 이들 각자는 복잡한 삼각관계에 얽혀 있지만, 그것들은 대개 사랑 대신에 변덕스러운 정념과 욕망을 즐기고 최종적으로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정략적 몸부림에 불과하다.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사랑은 집착과 유혹, 변덕과 계산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떻게 보면 소설에서 완전히 타락한 인물(『창세기』의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는 뱀으로 묘사되며 이름보다도 다만 미스 현으로 불려지는) 미스 현이야말로 '악(惡)의 투명성'(장 보드리야르)을 철저하고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인물로, 오히려 이름이 있는 다른 현실적인 인물보다도 철저하게 악을 구현하는 추상성 덕택에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다소 비현실적인 이 소설의 세계에서 그녀는 멜로드라마적 결말, 애매한 봉합과 화해의 결말 속에서 악으로 응징 받고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푸른 날개』에서 유일하게 이해할 만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