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다"-이성의 공적 사용과
인간의 자유
칸트는 아래 예문에서 몇 개의 예를 통해서 계몽의 필수조건인 이성의 공적 사용의 자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의 공적/사적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흔하게 인식하고 있는 공/사 개념과는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텔레비전에 출현하는
연애인들이 "나는 공인(公人)의 신분으로서..."라고 말하거나, 그런 연애인들을 두고 사람들이 "그런 공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이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고, 또 흔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공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또 다른
사람들은 "그건 그 연애인의 사적이고도 프라이버시(privacy)한 삶이기
때문에 간섭의 여지가 없어"라고 반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예 모두에서 '공'이라는 개념은 보통 대중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그/그녀의 사회적 위치를 뜻하는 것이 된다. 이에 비해 사적인 것은 통상 비밀스럽고 친근한 개인생활, 쇼핑이나 레저, 연인이나 친구와의 소중한 만남, 혹은 가족과 함께 하는 삶 등을 일컬을 때 많이 쓰인다.
그런데 칸트가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에 대해 언급할 때의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개념은 모두 앞에서 우리가 연애인의 예를 들어 설명한
통상 공적인 것에서 출발하고 나중엔 그것을 뒤집는 것처럼 보인다. 칸트도 그 예를 많이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칸트의 예를 따른다면 이성의 공적 삶(사용)과 사적 삶(사용)의 예를 우리는 지금도 얼마든지 만들어볼
수 있다. 만일 원자핵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유능한 남성 과학자가 그것이 인류에게 어떤 이득과 해악을 끼치는 지에 대해 감안함이 없이 공직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더라도 칸트의 정식에 따르면 그는
그의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혹 그 과학자가 자신의
직업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에 대해 감안하더라도 원자핵이 핵
폭탄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침묵하거나 원자력 사고나 핵폐기물
처리에 대해 무심하다면, 그 과학자는 자신의 이성을 단지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고, 다시 칸트의 말을 빌면, 그는 사회라는 "기계적 장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최악의 상황으로 그 과학자는 더 많은
월급을 약속하는 핵 폭탄을 적극 제조하는 직장으로 자리를 옮길 수도 있다. 물론 칸트는 딱히 그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한편으론
그는 그의 중요한 이성적 능력을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그것을 보장하는 직장이 요구하는 삶에 충실하게 따르도록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고 말할 때 "사적(私的)"이라는 개념이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보통 우리가 직장 등에서 공직을 수행할 때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공적(公的)인 것"으로 통하고 있고 통상 이것을
사람들이 이성의 사용으로 제한하는 것에 어떤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한편 다른 수준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에 대해 말하자면, 공적인 자리에서 인류를 위협하는 핵 폭탄을 만들거나 그것에 동의하는 남성
과학자는 보통 말하는 자신의 사적인 삶에서는 우정어린 친구이자, 자애로운 아버지, 사랑스런 남편, 효도하는 자식일 수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600만명이 넘는 유태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주범인 나치 장교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전범재판 당시 자신은 상부에서 지시한대로 공직의 일을 엄밀히 수행했을 따름이라고 증언했고, 한편 그의 지인(知人)들은 그가 가정에선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칸트의 구분에 따르면 이성의 사적 사용을 실행했을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삶의 사적인 모습과 그리 모순되지 않는다). 그것은 칸트가 정의한 계몽의 개념에 관한 문제와도 연결된다. 보통 사전에서 정의하는 계몽의 의미는 무지한 것을 깨우치거나 낡고
고정된 인습에서 벗어나 참된 지식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금 더 연장하면 계몽은 인간의 삶을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로 이끌도록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도록 만드는 제반의
이론과 실천을 의미한다. 앞에서 핵을 만드는 과학자의 예를 들었지만,
통상 말하는 계몽의 개념이 인간의 삶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도록 하는
노력에 있다면, 그 과학자는 그런 계몽의 이념의 일부분에 봉사하고 있는
셈이 된다. 하지만, 그가 만든 핵이 인류를 살상하는 무서운 무기로 둔갑하거나 할 때, 그것은 과연 인간에게 더 나은 진보와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계몽의 이념에 충실한 것인가 라고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을 종식한 미국의 핵 폭탄 사용이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은 지구를
수십 번도 더 파괴하도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핵을 보유하고 있다. 계몽은 그 원어인 enlightment(독일어로는 Aufklarung)가 말하는 것처럼 빛(light)을 뜻하지만, 그 이면엔 항상 어두움이 잠복해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계몽이라는 개념은 그 내부로부터 근본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위 예시문을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칸트는 통상 사용하는 계몽 개념의
낙관적인 분위기에 반대했으며 그래서 그런 계몽 이성에 대해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고 못박았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칸트 자신이 새롭게 정의한 계몽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이성의 사적 사용에 겹쳐서 말하는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칸트가 그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우리도 앞의 핵 과학자의 예를 다시 한번 든다면 아마 간단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학자는 자신이 만든 핵을 폭탄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공적인 장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반대한다 하더라도 핵을 폭탄으로 제조하는 것을 승인하는 사람들이 한편으로 있을 것이고, 그 결과 불가피한 충돌과
갈등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갈등과 충돌이 더 지배적이고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칸트가 정의한 계몽의 개념은 이런 인간들간의
상호 충돌과 적대성(antagonism)을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궁극적으로 계몽을 위한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개념도 그 실천에 있어선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다. 칸트도 예를 들고 있지만 이성의 공적 사용을 위해선 그럴 자유를 우선적으로 사회나 국가가 인정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국가나 사회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위한 자유마저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충돌은 불가피해진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공적인 매체인 신문에 발표했다고 한다.
만약에 핵을 만드는 과학자가 자신이 만든 핵이 폭탄으로 쓰이게 되는 위험을 감지하고 이에 반대하는 글을 신문이나 그 밖의 언론매체에 발표할
자유마저 없다면 어떻게 될까? 혹 그가 설령 그럴 자유가 있는 좀더 나은
국가나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직장 내에서의 지배적인 의견이 핵을 폭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용인하고 묵인하고 공공연히 그에게 반대한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는 자신과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좀더 커다란 힘과 세력 얻을 수도 있지만,
아마 그런 그에겐 자신의 의견과 다른 직장이라는 공동체에서 추방될 위험도 있을 것이고, 그 밖의 위태로운 처지에 몰릴 가능성이 훨씬 많다.
아래 두 번째 예시문에서 미셸 푸코가 칸트의 문장을 분석하면서 언급하는 것처럼 이성의 공적인 사용 혹은 그럴 자유는 그 자체로 매우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보인다. 몇 년 전에 개봉된 <인사이더>라는 영화에서 담배회사에서 근무하던 평범한 직장인인 주인공은 자신의 회사가 담배-담배자체가 그렇겠지만-에 인체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약품을 넣는 사실을 알아채고 이를 고발하려 한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찾아든 것은 회사라는 거대한 집단의 폭력이다. 그는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자신과
가족은 수 차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그런 와중에서 단란한 가정은 마침내 붕괴되고 만다. 그 자신도 거의 정신분열의 지경에 이른다. 영화는
결국 과거 60년대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인 허버트 마르쿠제를 추종하고 비판적인 학생운동의 경험을 한 적이 있는 한 언론사 PD의 줄기찬
노력과 회유, 주인공의 결단으로 결국 많은 지지자들을 얻어 담배회사를
고발하고 비리를 저지른 관계자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주인공은
사건 이전의 원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피로한 그에게 남은 것은 여전히 상처로 가득한 마음과 붕괴된 가족의 형해(形骸) 뿐이다. 물론 그는
이전의 그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추상적이지만 자유와 책임, 윤리적인
삶의 근본을 깨달은 자로 말이다. 한편 그런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이 마땅히 살아야 할 도리나 자유, 혹은 윤리에 관해 생각할 것이다. <인사이더>라는 영화의 예를 들었지만, 칸트가 말하는 계몽을 위한 이성의
공적 사용, 혹은 그럴 자유란 어떻게 보면 통상 말하는 계몽의 이념과는
달리 행복의 약속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칸트는 자신이
재정립한 계몽의 이념이 그가 살고 있는 시대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과제로 여기고 "우리는 지금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다"라고 자신의 글을 마무리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의 칸트를 따라 현재 우리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반복한다면, 여전히 우리의 대답도 칸트의 대답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다."
칸트가 말하는 이성의 공적 사용의 자유란 것은, 결국 푸코의 현대적인
진술에 따르면, 인간이 쟁취해야 할 정치적·윤리적 자유인 셈이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게 산다는 것
역시 가혹하기는 매한가지다. 칸트에 앞서서 철학자 스피노자(B.
Spinoza)는 이를 매우 드물고 어렵지만 고귀한 삶이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여전히 계몽의 시대인 현재에 인간이 보편
이성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마땅히 살아가고 또 살아가야 하는 최고의
준칙이자 정언명령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하는
것은, 이 미성년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이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하는 것이 계몽의 표어이다. (중략)
그렇지만 이런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 중에서도 가장 해가 없는
자유, 즉 모든 국면에서 그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사방에서 "따지지 말라"(rasonniert nicht)는 소리가 들린다. 장교는 "따지지 말고 그저 훈련하라"고 말하고, 세무원은 "따지지 말고 그저 세금을 납부하라"고만 하며, 성직자는 "따지지 말고 그저 믿기만 하라"고 외친다. (이 세계의 오직 한 사람의 군주(프리드리히 대왕)만이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고 말한다.) 도처에 자유에 대한 제한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떠한 제한이 계몽에 장애가 되는 것인가? 어떤 것이 계몽을 방해하지 않고 촉진시키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자 한다 : 이성의 공적인 사용은 언제나 자유롭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이성의 공적인 사용만이 인류에게 계몽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계몽의
진행이 특별히 방해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란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의 학자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이다. 반면에 이성의 사적인 사용은 그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공동체의 이해가 걸려있는 많은 일들은 어떤 기계적 장치를 필요로 하는데,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 장치에 의해 단지 수동적으로 정부의 명령대로 그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정부는 그들에게 공공의 목적을 지시하고, 혹은 적어도 그들로 하여금 이런 공공의 목적을 파괴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논의가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기계 장치의 한 부분이 자신을 전체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혹은 세계 시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간주하는 한에서, 그리고 저작을
통해 대중에게 이야기하는 학자의 자격으로서는 그는 확실히 논의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그가 수동적으로 수행해야 되는 일들이 방해받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근무중의 장교가 상관으로부터 어떤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이 적합한지 혹은 유용한지에 관해 시끄럽게 논의한다면, 그것은 매우 쓸데없는 짓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한 사람의 학자로서 병역의 의무가
안고 있는 결점을 비판하고 이것을 대중의 판단에 호소하는 것은 정당하게 금지될 수가 없다. 시민은 그에게 부과된 조세의 납부를 거부할 수는
없다. 실제로 납세의 의무에 대한 뻔뻔스러운 불평은 괘씸한 일로서(그것은 일반적인 조세 저항을 유발할 수도 있으므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의 학자로서 과세의 부당함이나
부정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대중 앞에 발표한다면, 그것은 시민으로서의
그의 의무에 반대되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니다. 같은 논리로, 성직자는 문답 교시를 받는 생도나 신도들에게 그가 봉사하는 교회의 신조에 따라 강론을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조건으로 채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학자로서는 그 신조의 결함에 대해 세심히
검토한 우호적인 의견과 종교 제도나 교회 제도의 개선에 관한 제안을 대중 앞에 발표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갖고 있으며, 심지어 그러한 직분까지도 갖고 있다. 이런 경우 그의 양심에 가책이 될 만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교회의 업무 집행인으로서 직무상 하는 강론은
그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하는 자유로운 강론이 아니라 교회의 규정과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행하는 강론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이다 : "우리 교회의 가르침은 이러저러하다. 그것들은 교회가 사용하는 논거이다." 이리하여 그는 그 스스로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승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할 책임이 있는 교의로부터 신도들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발췌해 낸다. 왜냐하면 어쨌든 간에 진리가 그 교의 속에 숨어 있을 수 있고, 적어도 내면적 종교에 모순되는 어떤 것이 그 속에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교의 속에서 그와 같은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도저히 마음놓고 그 직무를 맡을 수 없을 것이고, 끝내는 사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임명된 교사가 신도들 앞에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단지 이성의 사적인 사용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종교적인 모임이란 비록 크다고 할지라도 가정적 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성직자로서의 그는 자유롭지 못하며, 또 그가 다른 사람의 명령을 수행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도 없다. 그러나 학자로서 저술에 의해 대중
앞에, 전세계에 널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경우, 즉 성직자가 그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그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며, 그 자신의 인격으로 말할 수 있는 무제한의 자유를 향유한다. 왜냐하면 국민의 후견인도 (정신적인 일에 있어서) 미성숙이라는 것은 불합리하며, 그렇게 되면
그것은 불합리를 영구화시키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직자의 사회가, 예를 들어 교회의 회의나 성직자 회의 (네덜란드인들이 이렇게 부르고 있다)가 그 회원에 대해 그리고 이를 통해 전체 국민에 대해 계속적인 후견 감독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제도를 영구화하기 위해서 스스로 어떤 불변의 신조를 서약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그러한 협약은 그 이상의 계몽을 인류에게서 저지하기 위해
맺어진 것으로, 전적으로 무효이다. 그것이 비록 최고 권력에 의해서, 의회에 의해서, 가장 엄숙한 평화 조약에 의해서 확인된 것이라 할지라도
전적으로 무효이다. 한 시대는 다음 세대가 (특히 매우 중요한) 지식을
확장할 수도 없고, 잘못을 제거할 수도 없고, 계몽을 진행시킬 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 머물도록 서약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인간성에 대한 침해이며, 그런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규정이 바로 계몽의 진전 과정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후대들은 이런 결정을 정당화되지 않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거부할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 (중략)
이제 누군가가 "우리는 지금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leben wir
jetzt in einem aufgeklarten Zeitalter?)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계몽의 시대(in einem
Zeitalter der Aufklarung)에 살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1784년 9월 30일) * 원문출전 : 임마누엘 칸트,『칸트의 역사철학』, 이한구 편역, 서광사, 1992.
*칸트는 인류가 미성숙을 회피할 수 있는 두 가지 본질적인 조건을 정의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조건은 정신적인 동시에 제도적인 것이고, 윤리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다.
첫 번째 조건은 복종해야 할 자리와 이성을 사용해야 할 자리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미성숙 상태를 간략하게 특징짓는 말로서 칸트는 다음과 같은 흔한 표현을 사용한다. "생각하지 말고 명령에 복종만 해라." 칸트에 따르면 군대 규율, 정치 권력, 종교 권위는 보통 이런 형태로 실행되곤 한다. [그러나] 인간성은 더 이상 복종하지 않아도 될 때 성숙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라. 그러면 네가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이성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요구받을 때 비로소 성숙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쓰이고 있는 독일어가 rasonieren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의 3대 비판서(『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비판』을 말함-인용자 주)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이 단어는 단순히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외에는 다른 어떠한
목적도 없이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즉 rasonieren은 이성 작용만을 위해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칸트는 언뜻 보기에 완전히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예를 든다. 즉 조세 제도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을 만큼 논의하면서도 세금을 내는 것은 성숙한 것이다. 다른 예를 들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사제라면, 이성을 사용해서 자유롭게 종교적 교리에 대해 논의할 수 있지만 성직을 책임 있게 수행하는 것은 성숙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몽에 대한 이러한 주장이 16세기 이래로 양심의 자유라는 말이 의미해 왔던 것과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양심의 자유란 사람이 복종해야 할 것에 복종하는 한 원하는 대로 생각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렇지만 칸트는 여기에 다소 놀라운 방식으로 또 다른 차이를 도입한다. 그는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과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구분하자고 주장한다. 거기다 그는 즉시 공적으로 사용할 때
이성은 자유로워야 하지만 사적으로 사용할 때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인다. 따라서 용어만을 비교해 볼 때 그것은 우리가 통상 양심의 자유라고 불러온 것과 정반대의 뜻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칸트에게서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영역에서 이성은 사적으로 사용되는가? 칸트는 사람들이 '기계 속의 한 부품'상태에 있을 때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즉 사람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특정한 일들을 수행할 때 말이다. 병사가 된다는 것, 세금을 납부한다는
것, 성직을 맡는 것, 공무원이 된다는 것 등등 이 모든 상태에서 사람들은 사회의 한 부분이 된다. 그런 자리에 있을 때 사람들은 특정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거기서는 특수한 규칙들을 적용해야 하며 특수한 목적들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칸트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바보같이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사람들이 이러한 결정된 상황에 이성의 사용법을 순치 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 이성은 어떤 특수한 목적에 부속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여기서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사람들이 이성을 사용하기 위해서만 이성을 사용할 때, [기계 속의 부속품으로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성적인 존재로서 이성을 사용할 때, 사람들이 이성적인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서 이성을 사용할 때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자유롭고 공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계몽은 개인들이 개별적인 사유의 자유를 보장받는 과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계몽이란 이성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서로 겹치게 될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분석은 칸트의 텍스트에 대한 네 번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우리는 이성의 보편적 사용이 개인으로서의 주체 자신과 관련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이미 이성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없을 때 이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 순수하게 부정적인 방식으로 어떻게 보장되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보편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떻게 보장될까? 우리가 보았던 것처럼, 계몽은 단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반 과정으로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또 계몽은 단지 개인들에게 부과된 일종의 의무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계몽은 이제 정치적인 문제로서 나타난다. 그러니까 문제는 어떻게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이성에게 필요한 공적인 형태를 띨 것인가를 아는 것이며, 또 어떻게 개인들이 가능한 한 충실하게 복종하고
있는 동안에도 알려고 하는 대담성을 노골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중략) [칸트에 따르면] 자율 이성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복종을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복종해야 하는 정치 원리가 보편 이성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말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84),「계몽이란 무엇인가」, 1984년.
*원문출전 : 미셸 푸코 외 지음,『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 정일준 편역, 새물결,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