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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변증법 : 상실된 거세의 기표, 남근을 찾아서-라캉의『햄릿』읽기

작성자쌍수대인|작성시간02.11.18|조회수1,605 목록 댓글 0

욕망의 변증법 : 라캉의 <햄릿> 읽기

 

* 자크 라캉,「욕망, 그리고『햄릿』에 나타난 욕망의 해석」,『자크 라캉의 욕망이론』, 권택영 외 엮음/옮김, 문예출판사, 1994.

욕망의 변증법 : 상실된 거세의 기표, 남근을 찾아서
-라캉의『햄릿』읽기

1. 오필리아, 대상 a와 욕망

우선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은 햄릿이 최초의 요구(demand) 대상인 타자로서의 어머니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지배되는가다. 그런데 곧 드러나겠지만, 햄릿의 욕망은 항상 다른 주체에 의해서 나타나고 거기에 의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햄릿은 대상 a에 대한 욕망 앞에서 항상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는 분열된 주체 $로 나타난다. 즉, 공식 $<>a. 그렇기 때문에 햄릿은 "상상계의 층위에서 욕망의 종결점이지만, 의식에 위치해 있는 환상" 속에서 살게 된다. 텍스트의 층위에서는 그는 상상적 자아 S에서 상징적 자아 $를 왕복 운동한다. 극중에서는 위와 같은 햄릿의 외상적 원인(traumatic cause)으로 어머니의 파렴치한 욕망, 즉 거트루드의 욕망이 햄릿이 아니라 숙부 클로디어스에게로 향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 즉 햄릿은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킬 만한 남근을 가질 기회를 박탈당했던 것이다. 그 남근은 죽은 아버지, 유령의 것이기 때문에 이미 상실된 대상이다. 왜 극중에서 클로디어스에 대한 햄릿의 복수는 지연되는가. 그것은 상실된 대상 a인 남근을 혹시라도 클로디어스가 가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의식의 차원에서 클로디어스에게 인정받으면서 그 남근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이다.『햄릿』의 리비도 경제는 이렇게 상실된 남근 기표를 찾아 헤매는 여정과 같다.
햄릿의 오이디푸스적 상황은 햄릿을 사랑하는 대상 a인 오필리아와의 관계 속에서 비극적으로 고양된다. 햄릿은 진정으로 오필리아를 욕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체의 상상계적 환상 내에서 욕망은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햄릿은 타자-오필리아에게서 그 타자의 일부분인 대상 a만을 본다. 그들 사이에는, 라캉의 말을 빌면,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필리아를 진정한 욕망의 대상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제시될 수 있다. 하나는 햄릿이 죽는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써 상실된 욕망에 마지막 순간의 빛을 던질 수 있다. 적어도 죽는 순간은 자신의 욕망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을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오필리아가 죽는 것이다(햄릿은 최후에 후자를 선택하면서 전자를 끌어안는다). 라캉이 말한 것처럼 "대상은 환상의 종결어가 되었을 경우에만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오필리아의 죽음은 햄릿이 상상적 영역, 환상을 깨뜨릴 최후의 기회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필리아는 극의 구조 속에서 오직 죽음을 놓고 죽음을 연기(演技/延期)하는 자에 불과한가. 그녀의 죽음은 햄릿의 연기(演技)에 의해서만 잠정적으로 연기(延期/演技)된다. 오필리아, 그녀는 햄릿의 연기(演技/延期)다. 그녀의 존재는 햄릿의 시선에 의해 미리 구조화되었다. 이 불균등하기만 한 교환경제의 위악적인 상황 속에서『햄릿』은 비극적인 전망을 획득하게 된다.

2. 신경증과 도착증

햄릿은 도착증 환자인가. 신경증 환자인가. 라캉에 따르면 도착증에서는 대상 a가 강조되는 반면, 신경증에서는 환상을 나타내는 용어인 분열된 주체 $가 강조된다. 앞에서 햄릿이 욕망의 종결 즉 환상이라는 보충으로 살아가는 인물임을 밝혔다. 극 전반부의 햄릿은 신경증 환자에 가까운 모습을 띠고 있다. 다시, 공식 $ <> a . 신경증의 환상에서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주체와 시간의 관계에 기초한다. 햄릿이 자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항상 타자의 시간에 좌지우지한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가정의 결정적인 증명의 예로 우리는 기도하는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를 햄릿이 죽이지 못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햄릿은 왜 숙부를 죽이지 못하는가. 이유는 참회하는 숙부는 예외적으로 햄릿이 복수하기를 기다리는 타자의 시간에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햄릿에게는 오직 자신만의 시간이 있을 뿐. 결국 타자의 시간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항상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빠르기만 하다. 부언하면 신경증 환자에게 타자는 언제나 자신이 정해놓은 예상과 목표를 어긋나 과잉이나 결여로만 다가온다. 데리다나 들뢰즈가 즐겨 인용하는『햄릿』의 표현을 빌면, "시간은 경첩에서 빠져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

다른 한편으로 보면 햄릿은 도착증환자다. 이는 욕망의 대상 a인 오필리아의 출현으로 인해 그 흔적이 확인된다. 햄릿에서 오필리아의 역할은 환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햄릿을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 상징적 질서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즉, 그녀는 현재 욕망의 불구상태인 햄릿에게 상실된 남근을 돌려줄 차원의 욕망 대상으로 나타난다. 라캉은 언어유희를 구사하여 오필리아(Ophelia)가 "오, 팰러스(O, phallos/phallus)"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부기한다. 하지만 햄릿은 이 기회를 다음과 같은 순서를 통해 저버리게 된다. 첫 번째는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두 번째는 대상을 '기괴한(unheimliche)' 측면을 통해 바라봄으로서. 물론 햄릿은 대상 a인 오필리아를 바라봄으로서 자신의 욕망이 어머니=타자[m(other)]의 욕망에 종속된 자신의 환상을 인식하고 한편으로 프로이트의 말처럼 '기괴한' 것(das unheimliche)이 원래 '친숙한' 것(heimliche)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의 환상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는다. 그녀만큼은 어머니와는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라캉이라면, 주체가 욕망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세 단계, 즉 1)소외(상상계)->2)분리(상징계)->3)환상의 횡단, 혹은 거세의 암초의 돌파(실재계)라는 계기 중 두 번째 계기에서 햄릿은 고민한다. 전형적인 강박신경증 환자의 물음, "삶이냐, 죽음이냐."의 기로에 그는 서 있게 된다. 햄릿은 이 깨달음을 통해 '어둠 속의 도약' 후 오필리아와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인가(햄릿은 현재의 불안정한 상징적 질서에서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에게 부여된 환상을 횡단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해체의 위기에 있는 상징적 주체가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환상의 보충물로 폭력과 무관심을 택해 그녀를 고착화된 대상으로 다룰 것인가(햄릿이 거꾸로 상상계의 영역으로 추락해서 거기에 머무르는가)하는 양자택일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햄릿은 끝내 그녀를 "미래의 '죄인들을 낳는 사람'", 즉 그녀를 숙부와 동거하는 불결한 어머니와의 동일시의 차원 아래로 격하시켜 버린다. 이는 신경증보다 더 퇴행한 도착증의 상태로, 결국 햄릿은 오필리아마저도 어머니의 요구에서 벗어나지 못한 욕망의 대상으로 격하시켜버린다. 즉, 햄릿은 햄릿의 욕망의 원인이 어머니의 요구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도착증세를 보인다. 결국 오필리아는 햄릿이 내던져버린 남근으로 외화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햄릿의 리비도 경제속에서 오필리아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녀는 수수께끼적인 존재인가. 라캉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지만, 그녀는 햄릿의 욕망의 대상인 a의 위치, 즉 히스테리 환자의 입장에 서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a<>A(빗금쳐진 A). 햄릿의 욕망의 원인이 더 이상 되지 못하자, 그녀는 마침내 착란을 일으키고 죽게 된다. 그녀는 오직 햄릿의 욕망의 원인으로 사전에 구조화된 위치에서 존재하였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3. 연기(演技/延期)와 죽음

햄릿은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누가 거기에 대해 정확히 답할 수 있을까. 햄릿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기를 끊임없이 지연시키고, 온갖 병리적 환상 속에서 사회적 역할(기사적 연인, 아버지의 복수자, 왕의 후예)을 거부하며 결국 스스로를 패러디해야만 살 수 있는 광대로 보인다. 그런 햄릿은 확실히 라캉이 "주체는 돌이킬 수 없이 기표의 영향을 받는다"는 문제제기를 구현하는 인물이다. 그는, 기표를 연기하지만, 한번도 주체인 적이 없다. 왜냐면, 주체는 그것을 보증할 법, 남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햄릿은 클로디어스, 레어티즈 등의 음모로 레어티즈의 결투신청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햄릿이 죽음과 애도를 통해 상실된 남근의 회복을 최종적으로 바라게 되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햄릿과 레어티즈의 결투, 이는 햄릿이 저 유명한 묘지 장면 이후 죽음의 운명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가정을 통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햄릿이 결투에 임하는 자세는 초연함과 동시에 우스꽝스러움을 연출한다. 그는 죽음과 교환될 결투조건으로 내건 온갖 사치품들을 아무렇게나 처리하고, 더군다나 그의 원수인 클로디어스 편에 서서 결투에 응한다. 왜 클로디어스의 편인가. 이는 여전히 햄릿이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킬 남근을 숙부가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인가. 즉, 이때 햄릿의 욕망은 '어머니를 욕망하는/어머니가 욕망하는' 남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되는 클로디어스의 욕망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인가. 때문에 여전히 그를 죽일 수도 없는 것인가. 복수는 끊임없이 연기/연기되는가. 하지만 햄릿은 이 지점에선 확실히 타자의 욕망에 공백이 있음을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알고 있다. 그것은 죽음의 비밀을 엿본 자의 깨달음이다. 어차피 이 부조리한 결투장면 역시 음모가들이 햄릿을 떠보기 위해 연출한 소극에 불과하기 때문에, 햄릿 역시 이를 연기로서 맞설 수밖에 없다. 햄릿은 타자 내부의 결핍을 자신의 결핍으로 응수한다.
그런데 햄릿은 왜 레어티즈, 그가 그렇게도 존경하던 레어티즈와 결투하겠다고 나섰을까. 라캉은 '거울단계'의 변증법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세익스피어는 거울관계 혹은 거울의 반사작용에 의해, 즉 상상계에서 일어나는 주체와 이미지의 동일시 현상에 의해 공격성이 유발된다고 생각한다. 싸우는 대상은 바로 우리가 가장 찬양해 마지않는 사람이다. 자아이상이란 헤겔의 공식에 따르면 공존이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죽여야 하는 존재이다.

즉, 두 사람이 한 공간을 차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편으로 햄릿은 즉, 짝패인 레어티즈의 완벽함 속에 거세의 기표인 남근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에, 레어티즈와 결투를 해서 이를 빼앗아야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레어티즈가 햄릿에게 자아-이상이면서 동시에 이상적 자아의 두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겐 어떤 방식으로든 남근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이상적 자아, 아버지의 대리물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햄릿의 광대짓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호 표현의 관계의 연쇄속에서 의미작용이 발생하며 그 의미작용이 실현된 자리에 주체가 자리잡는다"라는 라캉의 말은, 햄릿의 광대짓과 햄릿 이외의 세익스피어의 극에서 광대들의 역할(다의적인 표현들, 은유, 말장난)을 통해 입증된다. 여기서 햄릿이라는 연극적 자아는 무수한 기표들의 유희를 통해 결정적인 의미화 작용(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오필리아에 대한 사랑, 즉 궁극적으로는 상실된 남근의 회복)을 끊임없이 연기(延期/演技)하는 광대다.

라캉은 하이데거적인 어조로 "인간의 모든 경험에서 참을 수 없는 면은(...)다른 사람의 죽음이다"라고 말한 후 주체가 타인의 죽음에 "애도를 요청하는 틈새, 혹은 구멍"이 "실재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가. 그것은 장례의식이라는 상징적 제도와 관계가 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가 차지하고 있던 사회의 위치에 공백을 가져오는 일이다. 이른바 상징계엔 언제나 구멍이나 결여, 틈새가 불안정하게 자리잡고 있다.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서 그 사회를 새롭게 재배치하는 것이다. 장례식이라는 문명화 과정은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따라서 우리가 죽은 자에 대한 애도를 의식화하는 이유란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가 완전히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애도 속에 완전히 죽지 않은 자, 유령의 출현이라는 본질적인 공포가 숨어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유령의 출현, 이는 다른 말로 불완전한 상징적 질서가 억압한 실재의 귀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햄릿의 애도의 목적은 바로 불충분한 추모의식 속에서 이루어진 상징계의 공백, 틈을 통해 발생한 실재계의 침입 즉 떠도는 유령을 달래기 위해서이며, 또한 이는 상실된 기표, 남근에 대한 애도의 몸짓이기도 하다. 거꾸로 위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남근이라는 기표의 현존은, 상징적 질서 내부의 결여, 틈새, 공백을 현시하는 실재의 기표가 될 수도 있다.

4. 남근, 아무 것도 아닌 그것

라캉이 말한 것처럼 햄릿의 어머니가 재혼한 사실을 수치스럽게 만든 것은 바로 애도이다. 거트루드의 말처럼 햄릿의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곧바로 성급한 결혼이 치뤄진 것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극중에서 햄릿이 어머니의 재혼에 차려진 잔치상을 '장례식 음식'을 절약한 것이라고 하면서 '검약'이라고 뱉은 기표에는 잔혹한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에서 끊임없이 중요시되어 온 두 텍스트인『오이디푸스왕』과『햄릿』의 공통점으로 이들 비극의 발단이 최초의 범죄과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다.『햄릿』은『오이디푸스왕』의 후속편인데, 이를 라캉은 법이 각인되는 자리인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통해 설명해낸다.
첫째, 최초의 범죄의 단계가 있다. 프로이트는 최초의 부친살해가 발생하고, 그 다음에 그를 금지하는 법이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둘째, 비극적 영웅이 나타나 비극의 차원에서 이 법을 새롭게 하고 법의 부활을 보증하는데, 이때 법과 범죄의 관계가 새롭게 전개된다. 둘째 단계에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는 다시 햄릿의 이야기에서 상이한 판도로 뒤바뀐다. 우선『오이디푸스왕』에서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살해당하지만, 그는 오이디푸스와 그가 속해있던 테베에 대한 모든 처벌의 근원지요, 진실을 판단하는 진실의 현존의 자리, 즉 법의 위치에 있다. 라캉은『세미나』11권에서 이를 두고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고,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나타내었다. 메타-언어는 없지만, 메타-언어는 없다고 보증하는 주체의 발화, 즉 법의 발화는 존재하며, 바로 이것이 바로 남근-기표다. 진실의 보증자인 아버지-법을 초과하는 법은 없다고 말하는 음성의 담지자인 남근-기표. 한편 <햄릿>에서는 이러한 아버지는 자신의 죄과를 지불할 여유도 없이 현실세계로부터 완전히 추방당하고, 극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햄릿은 자신이 초래하지도 않은 상황을 바로잡아야 할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이다. 오이디푸스왕과 달리, 극의 시작과 더불어 햄릿에겐 자신이 짊어져야 할 거세의 위협조차 없었던 것이다. 법이 없는 상태에서 법을 만들어 가기. 법 아래에서 오이디푸스는 그 법에 대한 무지 때문에 처벌당했지만, 법이 부재하는 즉, '시간이 경첩에서 빠져있는' 정신병적 상황에서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햄릿은 거꾸로 어떤 법도 세우기 불가능하다. 햄릿이 오이디푸스적인 비극의 영웅이 되지 못하고 상황의 힘들에 의해 이리저리 잡아당겨지는 '수동적인 제반관계들의 총체'로 나타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처음부터 햄릿에겐 오이디푸스적 상황이란 없었으며, 대신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의 소멸'로 제시한 남근의 애도라는 임무가 새롭게 주어진다. 이 남근은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요구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띠게 된다. 이는 당연히 자아의 상상적 상황 속에서 보존되다가, 그 시기가 끝나면, 상실되는 그 무엇(a thing)이다. 햄릿에서 그 남근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실된 것 같지만, 앞에서도 계속 반복했던 것처럼, 클로디어스에게 그 남근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왜 햄릿이 기도하는 숙부를 죽이지 못했을까하고 질문해 왔고, 답은 앞에서 이미 제시되었다. 숙부는 정말 햄릿에겐 '아무 것도 아닌(nothing)' 인간이지만, 햄릿의 상상적 자기애는 숙부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햄릿은 어머니를 계속 숙부의 침실로 보내도록 용인한다(햄릿의 어머니와 숙부에 대한 증오는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면, '자기-기만(mauvaise-foi)'적이다. 그는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항상 "예"라고 대답한다). 햄릿은 결투에서 자신의 죽음을 대가로 지불해서야 숙부의 남근이 허상임을 깨닫고 복수를 완성하지만, 그 순간에도 남근은 햄릿의 인물들을 벗어나, 히치콕의 맥거핀, 혹은 "도난당한 편지"처럼 그 위를 유유히 날아다닌다. 남근은 클로디어스에게도, 레어티즈에게도, 혹은 오필리아에게도 없었던 것이다. 즉, 남근은 '없는 존재(nothing)'다. "그것은 항상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그것 없이는 어떠한 욕망(하기)도 불가능하며, 그 욕망이 욕망하는 대상에 대해 언제나 결핍임을 나타내기에도 불가능하다. 남근은 없다, 남근은 있다. 없다, 만 있고, 있다, 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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