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번역 출간된 지젝의 저서들에 대한 주제 서평입니다. 몇 달 전 <정치 비평>의 청탁으로 쓴 글이며 아직 출간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집필 당시 <실재계 사막...>이 출간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언급은 누락되어 있습니다.
지젝의 선택: 민주주의의 우연성에서 혁명-사랑의 필연성으로
“니 얼굴을 해머로 뭉개버리고 싶을 만큼 널 사랑해.”
“니 눈알을 빼내 씹어 빨아먹고 싶을 만큼 널 사랑해.”
<펀치 드렁크 러브>(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 고백
1.
연애담에서 익히 볼 수 있는 결정적인 ‘성공’의 계기는 우연처럼 보였던 만남이 실은 운명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마술적인 급변의 기제는 사실 너무 단순하다. 거기에는 단지 반복된 만남이 있었을 뿐이고 그에 따라 우연이 필연 혹은 운명(악연일지라도)으로 사후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슬라보예 지젝과의 만남 또한 그런 전환의 문턱에 와있는 것은 아닐까? 출간된 적지 않은 번역서들을 제쳐놓는다고 해도 부각될만한 만남이 최소한 두 번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9.11 사태 직후 발표된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가 여러 번역 판본을 남길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지젝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 후 최근 한국철학회 주최로 방한하여 연속 강연을 가지게 됨에 따라 그는 이제 공식적으로 우리 학계에조차 주된 관심사 중 하나로 부상한 것이다.
이런 만남의 반복은 지젝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 그가 단지 후기 라깡의 명민한 주석가 혹은 문학, 영화 등의 정신분석적 비평가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면 이제 그는 정치, 문화, 철학 영역을 망라한 전 영역에서 접근 방식의 근본적인 단절을 촉구하는 전도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 단절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는 것은 지젝과의 만남을 운명의 문턱에서 운명으로 한 걸음 옮겨놓는 데 필수적이다.
학문적, 정치적 이력에 있어 지젝은 여느 현대 철학자들과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우선 영향력 있는 현대 철학자 대부분이 프랑스를 위시한 서구에 집중되어 있는 데 반해 그는 동구 슬로베니아 출신이며 거의 그곳에서(잠시 정신분석 학위 과정차 프랑스에 몇 년 체류한 것을 제외한다면) 자신의 학문적, 정치적 경력을 쌓아왔다. 그런데 그의 학문적 관심사는 자국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서구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그는 이중의 외부자라는 특이한 지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학생 시절부터 그는 슬로베니아 내의 공식적인 프랑크푸르트 학파 정향과 반대파인 하이데거주의 학파 양자 모두를 거부하고 알튀세르, 데리다, 푸코, 라깡 등 외부에 있는 프랑스 사유들에 눈을 돌렸다. 게다가 그는 프랑스 내에서도 외부적이라고 간주되는 라깡을 자신의 사유의 기저적 모체로 선택했고, 더욱이 교조적이라고까지 흔히 간주되어 국제적인 승인을 받지 못한, 라깡 후기 가르침을 강조한 프로이트 대의 학파(Ecole de la cause freudienne)와 연대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지젝 혼자서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런 방향에 동감하는 슬로베니아의 몇 몇 지인들(미란 보조비치, 즈드라프코 코베, 믈라덴 돌라르, 레나타 살레클, 알렌카 주판치치 등)과 더불어 이른바 슬로베니아 라깡 학파를 형성했고 지젝의 작업은 그 집단의 성과의 일부인 것이다.『지젝 리더(Zizek Reader)』의 편집자에 의하면 그의 작업의 특징이기도 한, 그 학파에 공통적인 작업 영역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고전 철학 및 근대 철학(특히, 독일 관념론)에 대한 라깡주의적 독해 (2)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대한 라깡주의적 이론을 세공하려는 시도 (3) 문화와 예술(특히, 영화)에 대한 라깡주의적 분석. 이 학파는 또한 지적 작업뿐만 아니라 정치적 참여에 있어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전후 그 학파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에 몰두해왔고 이어 시민권 운동을 통해 발전했으며 반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중도 좌파인 자유민주당과 연대했다. 이 과정에서 지젝은 1989년 첫 5인 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연대는 어디까지나 전술상의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슬로베니아 학파의 기본적인 정치적 입장은 분명 자유 민주주의와도 거리를 두는 명확히 맑스주의적 입장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지젝은 학문적 이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력에 있어서도 이중의 외부자인 것이다.1)
이중의 외부자라는 그의 지위는 그의 주장들에서 종종 부딪히는 정치적 모호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에 대한 하나의 열쇠를 제공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좌파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 보수적 우파의 노골적이고 잔혹한 주장들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이런 모호성을 오늘날 지배적인 포스트모더니즘적 태도와 유사한 불안정한 양가적 태도와 등치시켜서는 안된다. 그의 기본적인 태도는 양자 모두로부터 배제된 것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는 데 있기 때문이다.
2.
사실 공식적으로 이제 지젝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핵심적인 상당 수의 그의 저서들이 이미 번역되어 있다(물론 번역상의 문제가 없어서 가독적이라는 이상적 가정 하에서). 번역 출간된 순서대로 나열해본다면 『삐딱하게 보기』,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 분석』(이후『징후를 즐겨라』),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후『숭고한 대상』), 『향유의 전이』2), 『환상의 돌림병』, 『믿음에 대하여』로 총 6권이다.3) 원저서의 출간 순서와는 다른 이 순서는 지젝이 우리에게 소개되어 온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지젝은 처음에 후기 라깡 정신분석의 명민한 주석가 혹은 그것을 사회, 문화 연구의 영역으로 확장한 인물로서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초기에 번역된 『삐딱하게 보기』, 『징후를 즐겨라』는 그의 이런 면모를 부각시켜주는 작업들에 속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들은 지젝식 후기 라깡 입문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목차에서부터 시사되듯이 그것들은 후기 라깡의 핵심 개념들과 테제들을 설명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반면 나머지 저서들은 여전히 이런 목적을 염두에 두지만 더 주된 목적은 오늘날 정치적, 철학적, 문화적 교착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구체적 문제들과 맞붙어 그것들에 걸려있지만 종종 오인되는 중핵을 건드리는 데에 있다. 그 중 지젝이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는 문제들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 새롭게 불거지는 인종적 적대, 성적 적대의 폭력적 표출들이다. 이 저서들과 더불어 지젝의 다른 면이 부각된다. 그는 단순히 라깡주의 이론가라기보다는 오늘날 정치, 철학, 문화 등 전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구적 자본주의(혹은 자유 민주주의)의 헤게모니 확대를 배경으로 “좌파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인 정치적 기획을 재정식화”4)하는 데 고심하는 혁명적 사상가에 더 가까워 보이는 것이다.
『삐딱하게 보기』와 『징후를 즐겨라』 양자 모두가 설명하고자 하는 후기 라깡의 핵심 개념과 테제를 각각 하나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대상 a’와 ‘성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일 것이다. 지젝은 라깡의 이론적 작업이 1960년대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수 있는 단절적 계기를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여기서 강조점은 상상계-상징계라는 대립축에서 상징계-실재라는 대립축으로 이동한다. 전기 라깡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유명한 그의 테제로 압축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한 구조의 장악력과 그에 상관적인 주체의 오인/소외를 강조하는 시기로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후기 라깡이 구조를 과정으로, 정적 고정성을 역동적 유동성으로 대체하는 후기 구조주의의 일반적 경향의 한 특수한 경우라는 통설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지젝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적 요점 중의 하나다.
후기 라깡에게 상징적 질서는 열린 구조 혹은 부단한 전위의 영역이 아니라 그 어떤 불가능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일관적인 폐쇄된 구조이며 반복 강박의 영역이다. ‘성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테제는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상징적 질서 본연의 불가능성이란 발상은 후기 구조주의 일반과 달리 두 요소, 즉 주체와 대상을 부각시키는 함의를 갖는다. 여기서 주체는 결여, 공백을 전제하는 분열된 주체(S/)를, 대상은 그 공백의 자리를 채우는 관성적인 현존(a)을 가리킨다. 지젝은 이와 같이 요약될 수 있는 후기 라깡적 구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손쉽고도 핵심적인 길은 대상 a라는 포착하기 어렵지만 집요하게 관성적인 현존과 조우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가 『삐딱하게 보기』, 『징후를 즐겨라』에서 수많은 대중문화 텍스트(특히 영화)를 참조한 것은 바로 이런 현존의 다양한 판본들과 반복해서 조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 목적상에 있어 유사하지만 『삐딱하게 보기』와 『징후를 즐겨라』사이에는 구성방식에 있어 무시할 수만은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가 개념이나 테제 그 자체를 설명하는 데에 치중한다면 후자는 특정한 테제가 함축하는 파장이나 여파가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를테면 『삐딱하게 보기』는 주로 이런 식이다. 먼저 ‘대상으로서의 응시’는 “내가 안전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그림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얼룩”(보기, 254)이라고 추상적인 정의를 내린다음 히치콕의 영화의 한 장면(섬뜩한 집-사물(Thing)에 접근하는 장면)으로 그것을 구체화한다. 반면『징후를 즐겨라』는 가령 ‘모든 행위는 반복이다’라는 테제 그 자체를 간략하게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공통선(common Good)의 윤리의 교착 상태를 보여주는가 혹은 어떻게 역사주의 본연의 한계인 비역사적 중핵을 강조하는가 등 테제의 전체적 효과를 통해 그 테제에 접근하려 한다.
하지만 어쨌든 『삐딱하게 보기』, 『징후를 즐겨라』는 공히 모두 정신분석에 대한 전례없이 새로운 입문서의 형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통상의 입문서와 같이 개념들의 추상적인 체계화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례의 보충으로 이루어진 형식이 아니라 역으로 개념들이 구체적 사례들에 의해 정위되고 채색되는 형식이다. 또한 그 사례들은 더 이상 프로이트가 주로 제시한 전형적인 유년기 경험(여성 성기의 관찰, 아버지의 거세 위협 등) 같은 임상적 사례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중 문화 텍스트들이나 철학적 논의들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 지젝은 정신분석적 사례라고 통상 알고 있던 병리적 경험(꿈, 실수, 신경증 증상 등)의 경계를 와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지젝의 관심이 라깡에 대한 상세한 문헌학적 주석 달기나 문화적 텍스트의 해석학적 틀로서 정신분석을 이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그의 공식적인 첫 저서인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분명해 보인다. 여기서 그가 주요하게 문제삼고 재부각시키는 것은 오늘날 정치적 장과 철학적 장 각각에서 폐기되어 버린 요소들, 바로 이데올로기 개념과 헤겔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는 냉소주의가 만연한 오늘날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는 통설에 맞서 이데올로기의 지배적 기능 양식은 바로 냉소주의라는 슬로테르디즈크(Peter Sloterdijk)의 주장을 지지하고 이데올로기 개념을 재정식화한다. 그가 문제시하는 것은 허위의식 혹은 거짓 환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고전적 정의뿐만이 아니다. 이에 대한 유물론적 역전으로 평가받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또한 분명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내면화’ 혹은 철저한 ‘소외’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통해 유지된다는 알튀세르의 호명 테제는 오늘날의 냉소주의적 추세에 비춰본다면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젝이 아이러니한 것으로 주목한 것은 그런 추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합리하고 몰상식한 어떤 제도, 관례, 규범들이 좀처럼 붕괴되지는 않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스탈린주의 하에서 역사 발전의 주역으로서의 인민 등의 공식적 이데올로기를 아무도 진지하게 믿지 않았지만 그것을 보증하는 대중 집회와 같은 행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믿음은 내면적(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외면적(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이데올로기적 호명은 “동일화/주체화가 없는 호명”(대상, 87)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내면화되기 어려운 것은 이데올로기가 설득력있는 외관을 갖추기는 커녕 ‘법은 법이다’라는 식의 무조건적인 명령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와 같은 권위적 형태의 이데올로기는 전통 사회의 잔여물도 통상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계몽주의적인 원한도 아니라 계몽주의적 기획 그 자체에 고유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계몽주의의 선구자들인 칸트나 데카르트가 비판적 거리, 의심을 역설하면서도 동시에 주어진 법과 관습에 복종하라는 명령을 추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정념적인(pathological) 내용과의 절연을 꾀하는 계몽의 제스쳐는 반드시 반계몽적인 잉여 향유(surplus-enjoyment)를 부산물로 산출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한계는 계몽 그 자체라는 이와 같은 역설을 최초로 완전히 철학적으로 정식화한 이는 헤겔이다. 지젝이 『숭고한 대상』에서부터 줄곧 그를 재조명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다. 무엇보다도 사변적 동일성 혹은 대립물의 통일을 예시하는 그의 테제들, “정신은 뼈다.”, “부(富)는 자기(Self)다.”, “국가는 군주다.'와 같은 테제들이 그런 역설을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은 주체(S/)와 대상(a)의 일치라는 라깡의 환상 공식(S/◇a)의 함의를 읽어낸다. 그 함의는 다음과 같다. 주체(정신, 자기, 국가...)는 그 자신을 큰 타자(상징적 질서)를 통해 표상하고자 하는 시도의 실패로 인해 큰 타자 내에 열린 공백에 다름 아니며 바로 거기에는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 관성적인 대상 a(뼈, 돈, 군주)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결국 무엇인가? 그것은 이데올로기 본연의 비일관성 혹은 불가능성을 체화하고 있는 관성적인 대상 a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파시즘이 내걸고 있는 민족 공동체라는 고귀한 이상은 역설적으로 그 이상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거리두고 배제한 외설적인 유대인의 형상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이 제안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절차는 그것의 이상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 것은 가령 유대인과 같은 외적 방해자 때문이 아니라 그것 본연의 비일관성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에 있다.
『숭고한 대상』에서 제기된 이데올로기 비판은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로 소련 등 전체주의 체제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는 그 책이 쓰여진 1989년이라는 시점이 소련 해체라는 지각 변동 이전이었던 데 기인한다고 보인다. 여기서 지젝은 “민주정은 실현가능한 모든 정치 체계들 중에서 최악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어떤 것도 그보다 더 낫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라는 처칠의 말을 인용하면서까지 전체주의가 표방하는 ‘실질적 민주주의’ 개념은 결국은 ‘계획적 민주주의’에 이르게 됨을 경고하면서 서구의 민주주의인 ‘형식적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가 속한 슬로베니아 라깡 학파가 한때 자유 민주당과의 연대라는 정치적인 선택을 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1994년에 출간된 『향유의 전이』부터 그는 이제 지구적 헤게모니를 구가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비판의 화살을 돌린다. 그의 비판의 핵심은 자유 민주주의적 다문화주의야말로 그 공식적 표방과는 반대로 사회주의 몰락 이후 세계적으로 극심해진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를 효과적으로 무효화시키기는커녕 그것들을 지탱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데에 있다.
『향유의 전이』는 1부, 2부 구성을 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나는 보스니아 사태에서 볼 수 있는 (특히 강간과 같은 성폭력을 수반한) 유혈 폭력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지젝은 많은 서구인들의 방관자적이거나 연민적인 태도에 맞서 그런 폭력의 문제가 단지 보스니아에 국한된 예외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는 오히려 그것이 어떻게 자유 민주주의적 후기 자본주의 본연의 구조적 문제인 것인지를 밝히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여성 혹은 성적 관계의 문제이다. 그는 이에 대한 라깡의 주요 테제들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형적인 남성 쇼비니스트로 낙인찍힌 오토 바이닝거의 성차별주의적 이론이 그 첫인상과는 달리 어떻게 여성과 성적 관계의 중핵을 건드리는지를 보여준다.
『숭고한 대상』에서 믿음 없이 혹은 외면적 믿음에 의해 유지되는 관례로서 이데올로기를 재규정했던 것으로부터 시사되었지만 상징적 질서는 이율배반적인 두 법이 공존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젝은 상징적 질서가 명문화된 공적 법뿐만 아니라 그것에 위배되지만 불문율로서 작동하는 외설적인 초자아적 법에 의해서도 규제된다는 테제를 제시한다. 이 불문율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는데 공동체를 실질적으로 결속시키는 것은 이 법에 따른 죄책감 속의 연대이기 때문이다. KKK단의 흑인에 대한 음성적 구타나 나치 공동체의 음성적인 유대인 대학살,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구타와 같은 사례는 초자아적 법이 작용하는 전형적인 예들이다. 가부장제 등 권위주의가 공적 법을 구성하고 있던 시기에 초자아적 법은 탈권위화 혹은 권위의 전도를 향한 카니발리즘적 반란을 추동했고 이런 활동들은 68혁명으로 대변되는 정치적 지각 변동을 통해 공적 법의 성격을 완전히 탈바꿈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이렇게 공적 법이 중립적-평등주의적인 것으로 바뀜과 동시에 초자아적 법의 자리에는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로부터 스킨헤드나 인종간 유혈 폭력 등의 난동은 음성적이긴 하지만 전례없이 큰 강도로 터져나오고 있다. 하지만 상징화를 통해 공적인 지위를 획득한 이전의 탈권위주의적 초자아와는 달리 최근의 인종차별주의적 혹은 성차별주의적 초자아는 합리적 방법으로 해소되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타자(가령 이슬람 교도)가 우리로부터 향유를 박탈해가거나 우리가 대상을 소유하는 것에 위협을 가한다는 편집증적인 강박적 환상에 기인하며 오직 시위적 제스쳐로서만 텨져나올 뿐 말할 수는 없는 것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오늘날의 공식적 이데올로기인 자유 민주주의적 다문화주의에서 불가능한 것의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실로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가 근본적인 교착상태에 이르렀음을 증언하는 증상이다.
이런 폭력적인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들에 대해 지젝은 그것들을 무조건 금지하는 것은 대책이 되기는커녕 그것들을 음성적으로 계속 유지시키거나 심지어는 더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본다.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오히려 라깡이 ‘환상의 통과’라고 부른 것에 상응하는 외설적 초자아와의 공적인 과잉 동일시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종차별, 성차별 등의 언사나 제스쳐에 대한 비판적 해부나 풍자가 아니라 그것들과 문자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 때 그것은 많은 이들이 우려하듯 전체주의적으로 기능하지 않고 자유 민주주의적 다문화주의의 근본적인 비일관성과 직면케 할 것이라는 것이다.
여성과 성적 관계에 관한 라깡의 유명한 두 테제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지젝이 『향유의 전이』 후반부에서 중심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 두 테제들이다. 그는 그것들을 두 가지 사례, 즉 궁정풍 사랑의 다양한 판본들, 악명높은 반페미니즘적 성 이론가인 오토 바이닝거의 주장들을 통해 해명하고 있다. 궁정풍 사랑은 성적 관계의 근본적인 비대칭성 혹은 불가능성을 체현하는 전형적인 모델이다. 여기서 구애하는 남성에게 여인(Lady)은 숭고한 사물(Thing)의 지위로 격상되어 있어 성적 관계는 영원히 유예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 모델은 단지 중세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팜므 파탈이라는 대중적 형상과의 외상적 조우라는 형태 등 여러 판본으로서 오늘날까지 성적 관계의 근저에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오늘날 많은 성적 관계가 대칭적, 계약적 혹은 상보적인 성격을 띠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특히 마조히즘적 계약 형태의 경우) 불균형을 그 특징으로 하는 궁정풍 사랑은 여전히 그 이면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여성은 철두철미하게 성적이다.” 등 악명 높은 오토 바이닝거의 주장들은 “‘공식적’ 담론이 감히 공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암암리에 전제하는 모든 것”과도 같다.(향유, 268) 이런 의미에서 이 주장들은 성적 평등이라는 공식적 법에 따른 모든 성적 담론들이 결코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근본 환상의 지위에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역설적으로 여성과 성적 관계에 관한 중핵을 건드리고 있으며 그에 따라 라깡의 주요 테제들을 예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우선 지젝은 “남성이 성적으로 될 때, 그는 여성을 형성한다. 단지 남성이 그의 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것이 발생한다.”(향유, 274)라는 바이닝거의 주장에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다.”라는 라깡의 테제들을 읽어낸다. 또한 그는 여성과 남성이 각각 두 가지 본성(자율적, 타율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바이닝거의 주장으로부터 라깡의 성구분 공식을 환기시킨다. 그는 이 공식이 겨냥하는 바를 오인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물론 그 공식은 성적 차이를 공식화하고 있지만 그 차이는 실정적 규정들간의 대립(능동/수동 등)이 아니라 대립물들간의 비일관성, 적대가 무대화되는 상이한 두 양상간의 차이를 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적 차이는 주체가 성적 동일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실패하는 두 가지 양상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남성적 양상이 ‘보편과 그것의 구성적 예외’로 남성/여성 대립을 파악한다면 여성적 양상은 ‘전체는 아님’으로 그 대립을 파악한다. 요컨대 지젝에 의하면 결국 성구분 공식이 말하는 바는 “‘남성’과 ‘여성’은 전체의 두 보완적 부분들이 아니라 그것들은 이러한 전체를 상징화하려는 두 (실패한) 시도”라는 데에 있다.(향유, 307)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등 오늘날 적대의 주요 양상들에 대한 관심은 지젝의 이후 저서인 『환상의 돌림병』에도 계속 이어진다. 물론 여기에는 환상 개념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하는 글이나 페티쉬즘의 현대적 판본들인 유령적 페티쉬즘이나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의 양태를 새롭게 조명하는 글 등 중요한 많은 이론적 성과들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인종차별주의를 ‘탈승화’(desublimation)라는 경험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와 여기서 처음 본격적으로 다루는 사이버 공간 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은 보다 더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욕망의 초월적(transcendenatl) 도식, 즉 욕망을 구성하는 일종의 좌표라는 지젝의 환상에 대한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환상은 기본적으로 애착을 가질만한 대상을 구성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반발감, 혐오감을 가질만한 대상을 지정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환상이 남김 없이 백일 하에 공개되는 경우에 특히 분명해진다. 즉 타자가 지나치게 내게 근접하여 그/녀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외설적인 형상으로 보이는 경우 말이다. 지젝은 이를 ‘탈승화’라고 명명하고 그것을 다문화주의적 정언 명령인 ‘이웃을 사랑하라’가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폭로하는 한계 경험으로서 제시한다. 다문화주의적 관용(‘우리는 인종, 종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이라는 공적 외양은 인종주의적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는 커녕 단지 그것과 적절한 거리를 둔 채 그것을 방치할 뿐임을 말해주고 있다. 지젝은 이런 탈승화의 계기를 피해야 할 것으로 본다기보다는 그것을 공공연하게 무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자유 민주주의에 기초한 권력 체계를 그 기저에서 와해시키는 전복적 실천이라고 보고 적극 옹호한다. 『향유의 전이』에서 제안한 초자아와의 공적인 과잉 동일시 전략은 여기서 탈승화의 무대화라는 이름의 전략으로 재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다문화주의적 유토피아라는 장및빛 전망을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환영받는 것 중의 하나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대안적 체제이다. 그 속에서 나와 타자와의 거리는 좁혀지고 주체는 부단히 탈중심화됨에 따라 우리 네티즌들은 무한히 열린 헤테로토피아의 가능성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차이에 기반한 연대의 꿈은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적대의 골을 고려하지 않는 한 성급한 낙관적 비전일 뿐이라고 지젝은 경고한다. 그는 사이버 공간이 무한히 개방적이기는커녕 그것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으로 파급됨에 따라 극도의 폐소공포증을 유발한다고 본다. 가상 현실의 세계는 기저에 깔린 환상을 드러내 텍스트 표면에 실현시키고 멀리 있는 이웃과 우리 사이에 그 어떤 차이도 무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경향은 우리를 탈승화의 경험에 다가서게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로부터 가상 현실의 경험은 악몽에 가까워지고 그 속에서 조우하는 타자는 한층 더 역겨움을 유발하여 인종차별주의를 더 부채질하는 결과가 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우려는 지젝에게는 우려가 아니라 오히려 환영할만한 전복적 계기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는 탈승화의 무대화를 자유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그 근저에서 와해시킬 전복적 실천으로 보지 않았던가? 지젝은 이에 대해 모호한 태도로 글을 끝맺고 있다. 하지만 이후에 그는 사이버 공간에 대한 애착을 “가상의 열망”이라고 명명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믿음에 대하여』에서도 분명히 감지된다. 그는 여기서 사이버 공간 이성의 이율 배반에 주목한다. “사이버 공간 옹호론자들조차 우리가 자신의 몸체를 완전히 망각해서는 안되고 규칙적으로 사이버 공간에 몰입된 상태에서 섹스나 조깅을 포함하여 활기 있는 신체 활동으로 복귀함으로써 ‘현실 생활’ 속에 우리의 중심점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믿음, 61) 문제는 사이버 공간으로부터 우리는 언제든지 빠져나올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실재와의 조우인 탈승화의 계기에서 언제든지 접속을 끊음으로써 현실로 도피할 수 있는 것이다. 지젝은 『믿음에 대하여』 서론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헤게모니와 단절하는 본연의 유물론적 정치를 복원할 필요성을 단호히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영성화된(spiritualized) 유물론”의 성격을 갖는 그노시스주의의 현대적 판본인 사이버 공간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고 본연의 그리스도적 제스쳐를 반복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바로 신이 세부 속에서 구현되도록 하는 탈승화의 제스쳐이다. 신이 초월적이며 표상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유대교가 승화의 종교라면 그리스도교는 외양 뒤의 본질의 존재를 거부하고 초라한 인간 그리스도를 통해 신이 구현된다는 점에서 탈승화의 종교라는 것이다. 또한 지젝은 여기서 상징적 질서 본연의 불가능성을 단순히 불완전한 상태로서의 주체의 운명을 수긍하고 그로써 체념하는 것과 등치시키지 않고 좀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 “불가능한 것은 진정 일어난다, 사랑과 같은 ”기적“(혹은 정치 혁명: 레닌이 1921년에 말했듯이 ”몇 가지 면에서 혁명은 기적이다.“)은 진정 일어난다.”는 것이다.(믿음, 91, 번역수정, 강조는 원문)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제까지 조심스럽게 제안한 탈승화의 무대화 전략을 정치적인 혁명적 행위와 단호히 등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것을 라깡이 세미나 XX에서 불가능성이 필연성으로 기적처럼 전환되는 것으로서 정의한 사랑과도 등치시키고 있다.5)
지젝이 혁명적 행위와 등치시킨 사랑은 그리스도교에 고유한 무자비한 사랑과도 같다. 이 점은 왜 그 사랑이 근본적으로 원죄를 사하고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려놓는 기적이기도 한 것인지를 해명해준다. 그리스도는 불가해한 자비 행위를 통해 우리에게 커다란 빚을 부과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죄인이고 그 죄를 결코 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젝은 그리스도교에서 죄를 근본적으로 무효화하는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아버지여,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답할 수 없는 물음으로 축약되는 그리스도의 제스쳐를 그대로 반복함을 통해서이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인 내가 극도의 비천함에 직면한 순간에 스스로가 신으로부터 절단되버린 경험을 하게 될 때 나는 신에 절대적으로 가까워진다”는 것이다.(믿음, 155, 번역 수정) 여기에는 신의 근본적인 불완전성을 노출한다는 점에서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가능한 자비가 존재하지 않는다. 본연의 그리스도적 사랑은 이렇게 타자가 결핍되고 불완전한 한에서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자비를 넘어선 사랑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비천한 자신의 운명을 떠맡는 것이 원초적 결정으로부터 영원히 우리가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에 고유한 부활 그리고 신자 공동체의 형성은 원초적 결정을 폐기하고 영점에서 전적으로 재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지젝은 그리스도의 이 제스쳐는 다름아닌 레닌의 선택의 제스쳐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레닌은 선택의 자유에 대해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자유냐?’라는 물음을 던짐으로써 형식적 자유를 거부하고 실제적 자유를 지지했다. 형식적 자유는 존재하는 권력 관계의 좌표 내에서 선택하는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면 실제적 자유는 이런 좌표를 붕괴시키는 개입의 자유를 말한다. 결국 레닌의 요점은 근본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 지지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레닌을 반복하자고 하는 『믿음에 대하여』의 요점은 결국 오늘날 인종차별주의 등 많은 문제의 원인인 자유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제스쳐에 있다.
4.
앞서 지젝의 학문적, 정치적 이력을 간단히 살펴볼 때 그는 이중의 외부자의 지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권의 번역서를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저서에서 드러난 것으로도 그는 유사한 지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전후 시기에 그는 전체주의 비판에 열을 올렸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그것이 완전한 것에 가까워서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우연성에 휘둘릴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불안정한 체제라는 것이 그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 물락 이후 자유 민주주의가 지구적 헤게모니를 구가할 즈음 지젝은 한 때 지지한 (자유) 민주주의를 공공연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의 입장은 전체주의도 아니고 자유 민주주의도 아니라는 것으로 손쉽게 정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그는 초기에 전체주의를 비판하다가 이후에 그 화살을 자유 민주주의로 돌린 것이지 동시에 둘 모두를 비판하거나 둘 간의 갈등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치적 선택에 있어 변증법적 역설의 태도를 취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자.
물론 원칙적으로 우리는 오늘날 공식적 정치의 자유주의 진영과 보수주의 진영간의 투쟁에 무관심해져야 한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선택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한에서만 무관심할 여유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보일 수 있다.6)
이렇게 이중의 외부적 노선을 원칙적으로 표방하면서도 일차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숭고한 대상』을 비롯한 초기의 지젝의 선택이 애초부터 잘못이었다고 단순히 결론짓기는 어렵다. 또한 바로 이 점에서 지젝에게 있어 그 성격이 모호한 또 다른(하지만 연관되어 있는)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는 『숭고한 대상』에서 계몽주의는 ‘의심하고 비판하라’를 주요 동력으로 하면서도 ‘복종하라’는 명령을 수반한다는 점을 칸트, 데카르트를 통해 강조했다. 데카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 모든 비판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법, 관습을 따르는 ‘임시적 도덕’이 또한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그 ‘임시적 도덕’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징후를 즐겨라』에서 그는 그 도덕을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지시키는 냉소주의적 지탱물이라고 혹독히 비판한다. 이런 비일관성은 임시적 도덕이 지젝 자신이 연루된 구체적 상황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가리킨다고 보면 어느 정도 해명이 된다. 그리고 그 두 저서 사이에 지젝의 정치적 선택이 공식적으로 변경되었다는 것 또한 감지될 수 있다.
지젝이 자유 민주주의를 전술적으로 선택한 것보다 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그 다음의 선택이다. 그가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등 자유 민주주의의 외설적 초자아와 공적으로 과잉 동일시하는 것을 대안적 선택으로 제시한 것 말이다. 이는 지젝이 포퓰리즘 우파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선뜩 내키지 않는 제안인 것이다. 그가 ‘자유 민주주의의 헤게모니 장악 하에서’란 단서를 붙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포퓰리즘 우파 정권 창출에 기여하는 꼴 밖에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단서 하에서는 지젝의 그 제안의 정치적 효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물론 자유 민주주의 진영은 우파의 집권을 막아야한다는 구실로 급진 좌파를 항상 협박한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의 합의를 고집해야 한다. 그것에 대한 비판은 원컨 원치 않건 우파를 돕게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더 중요한 것은 ‘이미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의 합의를 고집하는 것 또한 우파를 돕게 될 거라는 사실이다. 우파의 주장들은 공식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한 더욱 더 강력하게 우리에게 호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착 상태를 통과하기 위해 지젝이 전술적으로 제안하는 것이 초자아와의 과잉 동일시 혹은 탈승화의 무대화라고 할 수 있는 제스쳐이다. 일단 금지된 우파적 주장을 공적 영역으로 부상시키는 것은 그와 함께 금지된 다른 정치적 선택의 가능성까지도 열어줄 수 있다. 또한 그렇게 부상될 때 우파는 자유주의 진영과 그리 다르지 않은, 서로가 서로의 그림자와 같다는 것이 분명해질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지젝이 레닌의 선택이라고 부른 혁명적인 근본적 선택의 가능성이 환기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삐딱하게 보기』를 필두로 우리는 지젝과 반복해서 만나왔다. 그 때 이래로 햇수로는 8년이 번역은 5권이나 더 되었지만 아직 그와의 만남은 우연적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9.11 사태에 대한 그의 신속한 반응과 한국에서의 강연을 거치면서 그 만남은 더 이상 우연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이 운명이 되기 위해서는 더 필요한 작업이 있다. 우선 그것은 지젝의 글 속에서 바로 우리 자신과 반복해서 만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사적 경험으로부터 시작해서 보스니아 사태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례적인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어째서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인지를 강조하는 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가 유독 영화 사례를 많이 든 것은 영화야말로 오늘날 강력한 파급력 덕분에 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주요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작업은 지젝을 “읽기를 그치지 않기”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또 다른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구체적인 사례들이 어떻게 아직 실현되지 않은 보편적인 그 무엇인가의 구체화인지를 밝혀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가 지젝의 제스쳐(예시화)를 문자 그대로 반복하는 것으로 지젝을 “쓰기를 그치지 않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과 우리 사이에서 운명적인 무자비한 사랑 혹은 연대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와 같은 행위들에서 일 것이다.
주
1) Zizek Reader, Elizabeth Wright & Edmond Wright (eds.), Blackwell Pub., 1999, pp.1-2.
2) 번역서의 원래 제목은 ‘향락의 전이’이지만 라깡의 ‘jouissance(enjoyment)'의 번역어로 ‘향유’를 사용하는 필자의 사정상 독자의 혼돈을 피하고 일관성을 기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향유’라는 번역어로 통일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향락’보다 ‘향유’라는 번역어가 더 타당한 이유로는 홍준기,「자끄 라깡, 프로이트로의 복귀」, 김상환 & 홍준기 편, 『라깡의 재탄생』, 2002, pp.102-103. 주 41를 참조하기 바람.
3) 인용시 각 저서는 다음과 같은 약어를 사용할 것이다. 『삐딱하게 보기』= 보기, 『징후를 즐겨라』= 징후, 『숭고한 대상』= 대상, 『향유의 전이』= 향유, 『환상의 돌림병』= 환상, 『믿음에 대하여』= 믿음. 또한 본고를 준비하는 동안 최근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라는 지젝의 책이 한 권 새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여건상 그 책에 대한 검토는 여기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4) Slavoj Zizek, The Ticklish Subject, Verso, 2000, p.4.
5) 라깡의 사랑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성적 관계의 불가능성은 “쓰여지지 않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라고 공식화된다. 그런데 타자와의 조우는 “쓰여지지 않기를 그치는” 우연한 예외를 낳는다. 사랑은 바로 이 예외적 우연이 반복을 통해 필연이 되는 것, 즉 “쓰여지기를 그치지 않는 것”으로 기적적으로 전환되는 것을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Jacques Lacan, Seminar XX, Encore XI장을 참조하기 바람.
6) Slavoj Zizek, “Repeating Lenin', http://www.lacan.com/replenin.htm (강조는 인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