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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논평 **

[화요논평]《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변호가 필요한 사람들 (2010년 12월 21일)

작성자폭주기관차|작성시간10.12.21|조회수852 목록 댓글 0

이 책에 대해 처음, 어디에서 읽은 건지 모르겠다. 이런 책도 있다는 내용의 신간소개 기사였는데...독일의 한 변호사가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느냐는 말을 수 없이 듣게 되었기에, 이 책을 쓰게 됐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렇다. 아무리 살인자라고 해도, 왜 그를 변호할 근거가 없겠는가.  

 

1964년생인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형법변호사라고 한다. 평소 어떤 사건의  이면에 관심이 많은 독자이다. 궁지에 몰린 사람을 변론해야할 부분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왜 그런 사건이 발생됐는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사실상,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들에 신경쓰면서 살기도 한다. 더불어 다양한 (직업)세계에 관심이 많다보니,  당연 내 귀는 이 책이 나오게 된 사연에 솔깃했다.  아니, 기사를 읽었으니,  사실은 눈이 번쩍했다.  그러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다. 살인사건과 유관한 변호의 글일 것이라는 지례짐작과 누군가의 얘기라는 측면에서,  귀와 눈이 번쩍했으면서도 큰 기대는 없었다.   독일에서는 이미 베스트셀러라는 말,  드디어 독일에도 대단한 이야기꾼이 생겼다는  슈피겔지 광고글을 읽었지만, 그럼에도 사실에서 비롯된 책이라는데, 얼마나 흥미로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작가적 자의식이 가미되지 않는 듯한 책이기에, 시간이 흐른 다음, 이 책에 대한 인상이 어떤 여운으로 남게 될지는 모르지만,  평소 읽었던 어떤 소설보다도 흥미로웠다. 울림이 있었다.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어쩌면 그건, 사람 냄새나는 이런 얘기를 좋아하는 나의 성향 때문인지 모르겠다. 자기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릴적, 재미난 얘기로서 삶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면, 문학작품은 교육의 연장선상의 일환으로 읽기 시작했었다. 물론 흥미가 없었다면 이어지는 독서로 이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소설을 읽어가는 시간을 살면서,  드문드문 나는 의문했다. ' 내가 왜 소설을 읽을까'를 생각해보곤 했었다. 내가 소설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시간을 보내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은 어떤 상황에 처할 때,  이런저런 반응을 보이는걸까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세상은 왜 이래야만 하는지, 사람은 왜 저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주의 깊게 탐구한 한 사람의 시선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반응하거나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의 (무)의식에는 어떤 존재이유가 있을걸까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한 사람의 의식세계는 어떤 형식으로 완결되는지를 읽고 싶어서가 아니었던가.   쉬라크의 이 책은  그런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준 작품이다.  

 

작품의 역사 속에도 살인자들은 있다. 오이디푸스, 햄릿,  라스콜리니코프, 뫼르소, <사람의 아들>의 조동팔, <빌러비드>의 시드, <부서진 사월>의 그조르그, <1Q84>의 아오마메가 그들이다.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서, 독자들이 그들을 변호하도록 소설이 전개되는 건 아니다. 다만 사건에 얽힌 사실만은 소설은 적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소설(희곡) 속 그들의 경우, 그들의  왜 다른 존재를 부인하는 살인을 저지르게 됐는가에 대한 서술이 관건이다. 소설을 읽으면 어느때는 공감하고, 어느때는 꼭 그래야했을까를 의문하지만, 각기 작품 속에서 살인은 그 작품이 있게 한 사건이다.  하여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살인 자체를 읽기보다는, 그 사건이 왜, 무엇을 위해, 발생됐는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거기에 작가도 잘 모를지 모를 작가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위 소설을 읽었었다.

그런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례 하나에 대한 사건을 필자의 시선에서 문자화된 사연으로 적은 글이다.  그래서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를 대단한 얘기꾼이라고 했는가보다. 이 책은 객관적 시선이 아닌 주관적인 필자의  시선에 동화될 준비가 돼있는 청자(독자)가 있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변호사인 저자의 책이라고 해서,   변호해야할 살인자나 범죄자의 편에 일방적으로 서 있는, 일방적으로 용의자 편에 서 있는 편파적인 글이라고만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어쩌다보니 범죄자가 된  사람들의 죄를 조금이나마 줄여주려는 그 태도를 분류하자면,  약자의 편이겠지만. 그러나 글은 단지 사실(일)에 집중하여 쓴 글로 보인다.  그렇다고 실제 상황이 이렇게만 전개되는 건 아니다. 사건이 세상에 이렇게만 보여지는 것도 아니다. 사건은 언제나 다양한 담론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그 담론마저 담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는 작가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나의 시선으로는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사람의 눈에 들어오는 한 상황을 모두 기술할 수는 없다. 다만 변호사로 보이는 한 남자의 시선이 있다.

 

 

이 책 원제는 VERBRECHEN (범죄)로 저자가 형법변호사로 있으면서 경험한 열 한개의 사건에 관한 얘기이다. 여기 실린 얘기들을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책 속에는 평판좋은 72살의 노의사가 자신을 평생 가둔 맹세를 깰 수 없어 생긴 분노를 터트리는 것처럼, 아내를 도끼로 수차례 자른 사건을 다룬 <페너>부터 시작하는데,  단순 절도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400백년이 넘게 지켜온 찻잔세트가 도난당한 사건과 얽힌 살인 사건이 발생된 <타나타 찻잔>,  사랑하는 남동생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미모의 첼리스트의 맘 아픈 얘기가 담긴 <첼로>,  딱 한가지에만 집중하여 형의 죄를 멋게 한 머리좋은 동생이 프로듀서한 <고슴도치>,  성교하다 돌연사한 남자를 애인이 죽인줄알고 그 남자를 토막내 유기한 남자의 얘기 <행운>, 아무리 사소한 단서라도 찾아내어 경찰이 만든 범죄의 우연의 사슬을 끊어버린 <서머타임>, 분명 뭔지 모를 낌새가 보이지만  정당방어에 의한 살인이기에 죄를 물을 수 없고 풀어줄 수 밖에 없는 한 남자의 살인사건을 통해 법의 정신에 충실한 독일 상황을 잘 보여준  <정당방어>, 왜 그런지 모르지만 사람을 모두 숫자로 보는 정신분열증 소년의 기행을 다룬 <녹색>, 박물관 여직원의 실수로  23년동안 조각상과 함께 갇혀지냈다고 생각되는 한 남자의 기행을 다룬 <가시>,  흔히 한 사람을 사랑하면 먹고싶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 사랑하는 살마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실제로 행해버린 남자의 <사랑>, "몹쓸 동화"같은 삶을 살았던 한 남자의 감동적인 얘기가 담긴 <에티오피아 남자>가 담겨있는데,   하나같이 무심해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스스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얼마나 힘들었으면 본인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무엇이 그토록, 한 사람으로 하여금 현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들었을까를 의문하게 된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살인은 살인이다,  범죄는 범죄이다. 살인은 살인죄에 해당하는 벌을 받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살인 사건이기에, 그 사건들은 각기 다른 법정 구형을 받는다.   증거 불충분이나 근거 부족이나 논리 부족은 무죄가 될 가능성이 크고,  심증만으로는 용의자를 단죄할 수 없다.  증거가 불충분한 용의자를 죄인으로 만들 수 없다.  

작년이었던가.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을 보고나서,  단순히 재밋거리 차원에서 젊은 대학생을 죽인 두 남자 용의자가 수사당국과 사법제도의 무능함으로 인해 모두 죄를 물을 수 없는 실제 사건을 보고, 공평정대한 법의 정신이 때론 인권이라는 이름에 의해 오용(악용)되기도 하다는 걸 생각하게 됐었다. 이미 저질러버린 상황에 빠진 죄인을 벌하기보다 범죄사실 자체와 정황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지만, <이태원 살인사건>을 보면서, 아마도 영화를 제작한 시선의 감염일지 모르지만,  성난 자신의 얼굴을 뒤돌아보지 않는 인간의 얼굴을 본 느낌이었다. 당사자가 밝히지 않고서는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정황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위 책에 실린 11개의 얘기는 알고나서 마음이 뒤숭숭한 얘기는 아니다.  용의자나 범죄자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듣게 된 후, 왜 이렇게 생의 무게는 무거울까를 되돌아보게 한다. 

물론 당사자가  죄인이라 해도,  억울한  경우도 있다.  죄를 지었지만, 그 정황에 대한 정상참작이라는 것도 있다.  죄를 지었지만, 죄를 짓게 한 사회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는지 되묻게 한다.  그런 사회의 숨은 면면들을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를 통해 읽게 된다.

 

 

이 책에 실린 11개의 얘기는 아마도 모두 사실인 얘기에서 나왔다고 추측된다. 물론 부수적인 설명이 없기에,  정확하게는 모른다. 단지,  글쓴이가 실제 형법변호사라는데서, 그리고 책 속에 사건 이후에 대한 화자의 언급이 있어서, 그렇게 추측된다.  사이사이 사실적 미래를 얘기해주는 것으로, 이 얘기들이 현실에서 나온 사실이라고 생각되는 건 당연한데, 얘기나 글은 누가 어떤 시선으로 얘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알기에, 정확하지만 따사로운  눈길을 주는 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내겐 여기에 수록된 11개의 얘기들이 모두 흥미로웠다. 모두 마음을 건드리는 얘기였고, 모두 그 속에 포함된 사람들의 감정이 느껴졌다. 읽으면서 놀라게 되고, 주의깊게 보는 건, 법과 재판과 변호사와 검사의 자리에 관한 변호사인 화자의 견해였다. 특히나 <정당방어>와<에티오피아 남자>의 경우에서 독일법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읽으면서 놀랐다.

"형사재판에서는 검사가 먼저 논고를 펼친다.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독일에서 검사는 당파적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 검사는 어디까지나 중립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검사는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래야 피고의 부담을 덜어 주는 상황도 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독일 검사에게 승소냐 패소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검사는 법을 지키는 데 충실하면 그만이다. 검사에게 그 이상을 요구할 경우, 권력은 부패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익히 배웠기 때문에 이런 법체계가 생겨났다. 그래서 검사는 오로지 법과 정의에만 봉사한다. 적어도 이론적으로 보자면 말이다. 수사를 하는 동안에는 이런 태도가 일반적으로 지켜진다. 그러나 본격적인 재판이 벌어지면서 열기가 더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객관성이 흔들리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검사의 승부욕이 자극을 받는 것이다. 또 그게 인간적이다. 아무리 훌륭한 검사일지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기소를 한 원고이다.  기소를 해서 피고를 법정을 세웠음에도 중립을 유지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어려운 일이다. 아마도 이는 우리네 형법 체계가 갖는 약점이리라. 법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셈이랄까. "(304- 305쪽. <에티오피아 남자>)

 

 

<정당방어>에서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남자가 누가 봐도(들어도) 정당방어로 두 사람을 죽게 한 상황이 발생한다. 변호사는 그가 정당방어로 죽였다는 것만을 밝힌다. 그 이상은 모른다. 그러나 검사는 자신을 공격했다고 해도, 너무도 적확하게 사람을 죽인 그 사람은 분명 위험인물일 수 있으니, 그의 신원파악을 위해서 그를 법정에서 구속할 수 있는 최장 12시간을 넘어 구속할 근거를 잡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름모를 그 남자를 구속할 어떤 법도 없다. 그렇게 하여, 분명 위험한 인물임에 분명한, 어쩌면 살인청부업자(살인기계)일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풀어주게 된다. 다른 사건은 모르고, 이 책에서 언급한 사건에 관한 한 정당방어였기에. 어떤 신원도 확인할 수 없었다 해도 그 이상 죄를 물을 수는 없다고 한다 .

""우리는 그의 신원조차 모른단 말이요."

"아니죠, 달거 씨. 그건 당신이 모르는 유일한 거예요. 정당방어라는 게 명명백백한데 그 남자를 붙잡아 두는 건 월권이라고요.""( 196-197쪽, <정당방어>)

달거 씨는 경찰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이럴 수 있을까를 의문했다. 인간의 만든 법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법을 준수하는 독일이라는 데서. 놀라웠다.

 

 

더불어 <서머타임>에 등장하는 이런 경찰과 변호사의 이런 기조도 솔직해보였다.

"경찰의 수사는 우연이란 없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수사의 95퍼센트는 사무실에서 이뤄진다. 모아 온 증거를 검토하고, 증인을 심문하며, 조서를 작성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고함을 지른다고 범인이 자백을 하리라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현실에 그런 범인은 없다. 현실이 그리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으랴!"( 168쪽, <서머타임>)

 

"반대로 변호사는 수사관이 지어 놓은 증거라는 가건물에서 될 수 있는 한 틈새를 찾아내려 노력한다. 우연은 변호사의 친구이다. 성급하게 그럴싸한 겉보기를 진리라고 고집하는 것을 막는 게 변호사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어떤 경관은 대법관 판사에게 변호사는 정의라는 이름의 자동차에 장착된 브레이크처럼 자꾸 제동만 건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법관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가 얼마나 위험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형사 재판은 이런 힘겨루기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의뢰인을 구할 수 있는 우연을 찾는 데 혈안이 되었다."( 169쪽)

 

 

<인 콜드 블러드>를 연상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를 팩트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의뢰인을 변론해야하는 변호사가 본  사실들만을 다룬 팩트로 생각되어서.

 

다른 무엇처럼 글 또한  어떻게의 문제가 중요하다.  쉬라크는 어떤 사건을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최상인지를 잘 아는 변호사이다. 사건발생 상황, 사건 속 인물들의 심리, 그리고 외부자의 시선이 고루 들어간 글을 쓰고 있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를 쓴 베른하르트 슐링크 영향 때문인지 몰라도, 독일에서는 법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글도 잘 쓰는가 하는 생각도 순간 들었다.  더불어 독일의 법조인들은 이토록 공정함에 대해서 의문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인간의 한계를 의식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도. 간혹 법정을 드나드는 사건사고를 들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사례를 접하는 걸 보니, 어쩌면 판례들을 공부하는 법학관련자들에게는 이런 얘기가 흔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을 법학(법무)을 공부하는 이들의  인간에 대한 마음을 넓혀주는 필독서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내재된 아픈 마음이 읽혀지는 책이라고 할까.

 

더불어 나는 소설과 연관하여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소설이지만, 굳이 허구란 전제를 달지 않아도 괜찮을 장르도 있겠다고.  어쩌면 실화지만, 굳이 실화라는 전제를 달지 않아도 괜찮을 장르도 있겠다고. 《어떻게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을까? 》는 굳이 위에 언급된 일들이 실제로 발생된 사실이라며 호들갑스럽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일거라는 당연스레 생각되니 말이다.  사실일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모른다. 사실이라고 해도 이건 필가의 시선이지 그 사실을 바라본 다른 누군가(나의) 시선은 아니다. 내게는 화자(필자)의 사유가 담긴 이 책이 화자가 본 사실을 진실이라고 보는 작가의 글같아 보인다.  글(얘기)이란 쓰여지는(말해지는) 순간, 쓰는 자, 읽는 자, 듣는  자가 만든,   소설과 실제 그 사이에(저변에) 만들어진 실재가 되지 않던가.  구성의 묘미와 함께, 살[肉]이 들어있다고 할까.   그래서일까,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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