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나 학계에서 회자되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이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특수성에 의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의미일 터인데, 당연히 이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적인 요소를 많이 활용해야 할까? 아니면 무국적적인(또는 국제적인) 요소를 강화해야 할까?” 이전에는 전자의 목소리가 컸지만(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봐라!), 최근에는 후자 쪽이 더 큰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하루키의 세계적 성공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영미연이 주최한 ‘세계문학’에 대한 학술대회에서 타전공자로서는 유일하게 참석해 다른 작가도 아닌 하루키(주최측이 선택한 것이었다)에 대해 발표를 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루키가 국내에서 널리 읽히기 시작할 무렵 그를 규정하는 것 단어 중 하나가 ‘무국적’이었다. 하지만 무국적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코즈모폴리턴이라고 불리지 않은 것에 주의하자) 엄밀히 말해, 그것은 특정한 국적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지 정말 국적이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 역시 또 다른 국적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루키와 관련하여 말할 때, 위와 같은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기보다는 차라리 ‘미국적’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그것이 잘 인지되지 않았다는 것은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가졌던 신선함이란 국적과 관련된 어떤 감성보다는 소위 ‘일본적 감성’의 부재에서 온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즉 우리가 하루키에게서 발견한 것은 어떤 ‘있음’이 아니라 ‘없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초기 수용기를 지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의 소설에서 피츠제랄드니 카버니 어빙이니 보네거트니 하는 그와 영향관계가 존재하는 미국의 작가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하루키적 감수성이란 미국에서 온 것들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일본문학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 “하루키야말로 가장 일본적인 작가다”라고 말이다. 도대체 어느 쪽이 맞은 것일까? 사실 이것은 복잡한 문제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의견을 크게 나뉜다. 1) 우선 미국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가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이는 하루키가 등단할 때부터 받던 평가로, 이를 둘러싼 영향관계를 밝히는 것이 비평의 주종을 이루었다. 하지만 2) 오쓰카 에이지 같은 평론가는 미국에서의 하루키 수용을 고찰하면서 새삼 ‘일본적인’ 하루키를 강조한다. 그는 영문판 표지(최신판 표지는 조금 다르다)를 예로 들어 그것을 설명하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표지’의 문제만으로 치부하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일본적이냐 미국적이냐, 또는 아시아적이냐 서구적이냐 라는 물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하루키를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바로 일본에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오에 겐자부로이다. 그렇다면 오에는 후배작가인 하루키의 소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1994년, 오에 겐자부로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가 주관하는 <일본연구교토회의>의 연사로 초대된다. 이 회의는 일본문화, 일본문학을 연구하는 외국인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하는 모임으로(미국 일본사 연구의 태두 마리우스 잰슨도 있었다), 성격상 화제는 일본문화(일본문학)의 세계화를 논외로 할 수 없었다. 사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라는 곳 자체가 일본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다. 이 강연의 외견적 특징은 그가 강연제의를 받은 것은 노벨문학상을 받기 이전이고, 이 강연은 수상 직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강연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강연원고를 작성하는 도중에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고, 그로 인해 원래 의도했던 글감을 포기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래 쓰려고 했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일본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즉 그는 일본문학을 몇 개의 라인으로 정리하고, 그것들과 세계문학의 관계를 논하려고 했다. 뜻밖의 사건으로 도중에 철회되었지만, 대체적인 줄거리를 서술하고 있는 터라 참고가 가능하다.
오에는 세계문학과 관련하여 일본문학을 세 가지 라인으로 정리한다. 제1의 라인은 세계로부터 고립된 문학이다. 이를 대표하는 작가로 그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등을 든다. 제2의 라인은 세계문학과 피드백을 하고 싶어 하는 문학이다. 여기에 속한 작가는 세계문학으로부터 문학적 자양분을 흡수한 작가들로서, 대표적인 작가로 오오카 쇼헤이, 아베 고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호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3의 라인은 현재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일본문학을 제시하는데, 여기에 속하는 작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와 요시모토 바바나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여기에는 꽤 복잡한 문제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먼저 제1의 라인과 제2의 라인의 구분을 보자. 단순화하면 그것은 1) 세계로부터 고립된 문학(즉 일본문학)과 2) 세계와 소통하려는 문학(즉 세계문학)이 될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에가 말하는 세계문학과 국민문학(일본문학)이라는 구분을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세계적인 인정’이라는 잣대로 봐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든 가와바타 야스나리든 미시마 유키오든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작가이다(플레야드 총서에 들어가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이들의 지명도는 세계와의 소통을 원한 아베 코보나 오에 겐자부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즉 제2의 라인보다 제1의 라인이 세계의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에 쪽이 일본문학에 가깝고, 오히려 다니자키 쪽이 세계문학이라고 해야 논리적으로 타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에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오에의 구분에서 중요한 것은 ‘외부의 인정’이라기보다는 창작자가 외부를 바라보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제1 라인의 경우 외부보다는 일본적인(민족적인) 것에 침착하여 창작을 한 작가들이라면, 제2의 라인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둘러싼 이런 오에식의 구분은 확실히 우리에게는 낯설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데, 오래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정작 오에 자신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토마스만은 <괴테와 톨스토이>라는 책에서 실러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각각 독일문학이자 러시아문학에 불과하지만, 괴테와 톨스토이는 세계문학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는 이런 주장은 어떻게 보면 오에의 그것과 정확히 포개진다고 볼 수 있다. 즉 실러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제1의 라인에 서있는 문학, 괴테와 톨스토이는 제2의 라인에 서있는 문학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야기가 공전하고 있는 것 같기에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보도록 하자. 오에는 제2의 라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2의 라인은 세계의 문학으로부터 배운 사람들의 문학입니다. 프랑스문학이나 독일문학이나 영문학이나 러시아문학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독자적인 경험을 통해 일본문학을 만들었습니다. 세계문학에서 배워서 일본문학을 만들어 가능하면 세계문학과 피드백하고 싶다고 생각한 작가그룹입니다.
나는 그것을 세계문학이 일본문학이 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리하면, 제1의 라인이 [민족문학→세계문학=민족문학]이라면, 제2의 라인은 [세계문학→민족문학=세계문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두 라인의 차이를 찾는 작업을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첫째 중요한 것은 정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 아무리 정의를 내리더라고 해도 그것은 또 다른 반론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앞서 필자는 오에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 원래의 계획을 취소하고 다른 내용의 강연을 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원래 쓰던 내용을 포기했을까? 그것과 노벨문학상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노벨상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벨문학상 자체라기보다는 우리가 아직 다루지 않은 제3의 라인과 관련이 있다.
제1의 라인과 제2의 라인은 어느 쪽이 세계문학이고 민족문학이냐 하는 논의와는 무관하게 ‘세계문학’을 논할 때 항상 등장하는 한 쌍의 개념이다. 하지만 제3의 라인은 그렇지 않다. 이는 그것이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문학이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제3의 라인에 속한 작품들을 제1의 라인이나 제2의 라인에 억지로 집어넣어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민족문학이냐 세계문학이냐”라는 논의에서 이 같은 제3항의 도입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데,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A냐 B냐”라는 논의를 통해 우리가 밝힌 것은 매우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세계문학과 관련하여 어떤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C의 관점을 고려할 때가 아닐까 한다. 이는 ‘세계문학’을 단순히 명작들의 목록이 아닌 현재적인 문제로 본다면, 무엇보다도 제3의 라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논할 여유는 없다. 이는 적어도 책 한 권 정도는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보다는 오에 겐자부로가 세 번째 라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수준에서 그칠까 한다.
제3은 어떤 라인인가 말씀드리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라인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 라인은 두 명밖에 없지만, 그것만으로 제2의 라인의 200배 정도의 판매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웃음). 나는 그들을 세계 전체의 서브컬처가 하나가 된 시대의 매우 전형적인 작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도 전 일이지만, 나는 멕시코시티 반년 정도 체재하면서 콜레히오 데 메히코라는 대학원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옥타비오 파스 씨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파스 씨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쓴 글에도 있습니다만, 뉴욕, 런던, 파리, 모스크바, 베를린, 멕시코시티, 도쿄, 그 전체를 하나의 서브컬처가 포착하는 시대가 이미 지금 존재한다. 조만간 그것이 새로운 문학도 만들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제3라인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과 둘째 그 배경으로 전 세계가 하나가 된 서브컬처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오에가 바로 그것에 대해 어떤 위기감을 느꼈다는 점이다(그는 제3의 라인이 엄청나게 팔린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를 자신의 라인과 비교하고 있다). 이는 이어서 나오는 그의 진술에는 분명히 나타난다.
현재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라인이 그런 것들로,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학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작품은 번역되어 아메리카에서 주목받고, 이탈리아에서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충분히 세계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라인은 다니자키, 가와바타, 미시마, 그리고 무라카미, 요시모토 라인으로 중간에 함몰이 있는 셈입니다. 이 움푹 들러 간 곳에 오오카, 아베, 오에가 떨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런 분류에 기초해 나는 이런 논리를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학은 자신들의 문학을 만들었다. 하지만 제1의 라인처럼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노벨상을 받은 적이 없다. 제3의 라인처럼 아메리카나 이탈리아에서-국내의 경우는 여기선 언급하지 않는다- 잘 팔린 적도 없었다. 우리는 세계로부터 가장 풍부하게 받아들였지만, 세계부터 가장 빨리 망각되는 자들이 아닐까?
이쯤 이르면, 우리는 이제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데, 오에는 원래 세계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세계에 되돌려 주려고 노력한 자신과 같은 작가들(즉 세계문학의 생산자)이 아이러니컬하게 세계로부터 도리어 소외당하는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꿔 말해,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세계문학의 위기’였다. 물론 제2의 라인은 이전부터 많이 팔리지도 않았고 또 상복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에가 새삼 위기를 감지한 것은 ‘자신들보다 더 세계적인’ 제3의 라인이 등장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오에는 문학인의 최대 영예인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동안 써오던 원고를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세계문학’ 대신에 ‘세계언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이 역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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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어떤 글(아직 끝을 보지 못한)의 일부입니다 (올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