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여성상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이구치 이치요(1872~1896)를 선택한 계기는, '알 수 없다≒미지'로서의 여성의 속성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낸 작가가 있을까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아동이 등장하는, 아동을 발견/인식하는 <키재기>를 통해 히구치 이치요의 매력을 잠깐 경험했는데, 그녀의 소설들의 대거 번역되어 나왔다. 그것도 한 사람의 번역으로. 즐거운 일이다.
24세에 요절한 작가다. 간단하게 책에 실린 약력을 살펴본다. 작품 활동한 것도 고작 14개월이다. 그녀는 소학고등과 4급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집안사정으로 자퇴한다. 하기노야에 입문, 고전등을 본격적으로 배워 15세에 『옷에 걸친 낡은 옷 』이란 일기를 썼다. 그녀의 나이 17세에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후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후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세탁일, 삯바느질, 남의 집 빨래, 아이들을 상대한 한 잡화가게, 유곽에 나가는 여자들이 손님에게 보내는 편지 대필, 술집 간판 써주기, 와카 개인 교습 등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다가 19세에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23세인 1895년 1월 키재기를 발표하면서 부터, 명성을 얻게 되고, 기적의 14개월동안의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키재기>가 호평을 받으면서 이름을 얻게 되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24살, 꽃같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다.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여성들이다. 그녀 스스로, 아마도 자신을 알 수 없어, 여성으로 범위를 확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소설 속 여성들은 명치시대 눈에 보였을 여성들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그 시대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구치 이치요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여인들은 아이, 결혼(이혼)하려는 여자, 결혼한 여자, 유곽 혹은 유곽 주변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여자, 아이을 키우는 여자등이다. 그의 삶/생계를 살펴보다보면, 눈을 뜨고 세상을 살았던 히구치 이치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온전히 다 경험할 수 없으므로, 그가 눈을 뜨고 바라본 세상을 쓴 듯하다.
하나같이 지배적인 정서는 단촐함(쓸쓸함)과 애잔함이다. 그녀의 일기에마저, 정갈하다고 표현해야할까 싶은 외로움이 배여있다. 그녀의 일기 중 일부를 옮겨본다.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은 그 이듬해인 20살 초봄의 일기다. 소설가의 길을 걷고자 한 자신의 이토록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던 부분이다.
"초봄
소설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한 지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아직 출판한 적도 없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도 없다. 친형제들은 내가 결단력이 부족하고 과거 일에만 매달린다고 한다. 허무하게 세월을 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명인이다, 글을 잘 쓴다는 사람들도 처음 작품부터 칭찬받았던 건 아니다. 비난받는 거야말로 가치가 있는 거다, 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충고했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설령 재미없는 소설이라 할지라도 내가 붓을 드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먹고 입기 위해 , 비바람을 견디기 위해 쓴다 해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나역시 소설가라 그저 그런 작가의 작품처럼 한번 읽고 곧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그런 글을 쓰지 않으려 한다. 현대인들은 인정이 경박하고 가치관도 변하기 쉽다. 오늘 좋아 했던 것을 내일은 내버리는 시대라고는 한다지만, 인간의 진심에 호소하는 것을 쓰고, 인간의 진심을 그려낸다면 설령 단 한 장의 작품이라도 문학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사치를 부리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 살고 싶은 게 아니다. 천 년 뒤까지 남기려는 소중한 명성을, 단지 일시적인 화려함과 영달로 어떻게 흐려놓을 수가 있겠는가. 겨우 한 줄의 단문이라도 두 번 세 번 고쳐 써서 세상의 비평을 받고자 하는 것도 모두 그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했지만, 그 결과가 없다 해도, 그저 종이와 붓을 낭비하고 끝났다 해도, 그것은 그것으로 족하다. 천명이라 여기고 생각을 접을 뿐이다.“(62-63쪽, 《치열하게 피는 꽃》)
<치열하게 피는 꽃>는 15살때의 일기 [몸에 걸친 낡은 옷] 몇 부분, 그리고 19살때의 일기 [새싹 사이로], 그리고 20살 [일기 하나], 21살 [티끌에 묻혀], 22살[먼지 속 일기], 23살의 [물 위에서], 23살 [물 위로](12월 30일에서 1월 말), 24살의 일기인 [명경지수]로 구성돼있다. 그녀의 소설처럼, 일기도 여백이 많고 진지하다. 머리 복잡한 날 읽으면 차분해질 일기들이다.
그럼 이제 그녀의 소설을 통해 여성을 얘기해보자. 이구치 이치요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여성성/여성상은 시작하면서도 말했듯이 말하지 않아 알 수 없음으로, 말해도 알 수 없음, 읽어도 읽어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여인이라는 데 있다. 이유는 들어줄 사람이 없어 말이 없다는 것, 생각대로 말하면/살면 안 된다는 것, 자신도 사실 자신이 누군인지 모른다는 게 이유가 된다.
결혼한 부인이지만, 시집간 딸이지만, 유곽에서 일하는 여성이지만, 그네들의 공통점은 아픔을 안고 참고/뛰쳐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놓은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게 공통점이다. 굳이 차이라면 어떤이는 부모님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있는 딸이라는 것, 그러나 이혼하지는 못한다.(<십삼야>)
손님에게 자신의 처지, 즉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사연을 얘기한다.(<흐린강>), 아이를 빙자해 마음을 연다.(<제 아니는 말이죠>)
알 수 없는 미래로 몸을 던져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히 알 수 없는 미래에 자신을 내맡겨야만 한다.
그녀를 소설가로서 인정받게 한 <키재기>와 더불어 여기에 실린 모든 작품이 빼어나다. 그 중 마음이 뭉근하게 가슴아린 작품이 <나때문에>, <흐린강>, <매미>이다. 만약 장편소설을 썼더라면, <제 아이는 말이죠>에서 보여지는 익살과 유머가,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섣달그믐>이 힘을 발휘했을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린 그녀의 웃음을 구경하기는 힘들다.
<섣달그믐>에서는 주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단돈 지폐 두장이 필요한 큰어머니를 위해 손을 가져간다. 그 후의 조마조마한/간당간당한 떨리는 하녀의 불안 심리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애절하기도 하다. 누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단돈 지폐 두장, 그러나 줘야할 돈이지만 그것마저도 주지 않는 주인 여자의 모습에서, 그당시를 잠깐 엿볼 수 있다.
앞서 말한 '알 수 없음, 엇갈림≒만남은 없음'으로 생각되는 히구치 이치요의 심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는 <나 때문에>, <흐린강>, <매미>, <키재기>, <갈림길>, <십삼야> 등이다. 거의 모든 작품이 같이라기보다는 혼자, 따로 남겨진 상황으로 끝내고 있다. 속을 알 수 없는 흐린강물에 툭 던져 사라져버린 꽃잎같다.
<나 때문에>는 누가 봐도 잉꼬 부부였던 부모님(요시로와 미오) 사이의 균열에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부정적인 다수의 쉬운 방식으로 접근하자면 아내의 외도가 될 것이다. 마치를 남기며 떠난 미오의 편지, “미오는 죽을 겁니다. 절 찾지 마세요. 이 돈은 마치의 우유값으로 쓰세요.”(101쪽,<나때문에>)이후에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그러나 작품은 일대에서 끝날 비극이 아니다. 미오의 가출 후, 요시로는 돈벌레라는 별명을 듣기까지 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시로의 나이 오십도 채 안되어 요시로는 한 줌의 재가 된다. 그후 그의 재산은 딸과 데릴사위 요시로에게 사후 넘어간다. 그러나 부모님대에서 벌어졌던 이별의 고통은 정지하지 않는다. 그들의 딸 마치와 남편 쿄우스케의 이별 장면은, 과거가 차이 있는 반복으로 순환되고 있음을 얘기하고자 등장시킨 듯하다. 미오의 편지를 외도로 봐야할지도 모른다.
“당신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는 거죠?
나는 혼자가 되는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요. 이렇게 하찮은 몸을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겠지요. 보기좋게 나를 버리고 이집을 자기 걸로 만들려고 하는 가 본데, 해볼 테면 어디 해봐요. 나를 버려 보라고요! 나도 각오한 바가 있으니까.“(129쪽,<나때문에>)
화족으로도 보이는 미오에 반해 게으르고 빈곤한 남편 요시로라는 설정에서,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는 부부의 정이 유지되기 어렵다를 말하는 <나때문에>이다.
사랑 때문에 동반자살의 모습의 남녀가 있는 <흐린강>을 한번 살펴보자. <흐린강>에서 리키는 일찍이 가난하게 살았다. 부모님마저 여의게 된 후, 어찌어찌하여 유곽으로 흘러들어온 여인이다. 그녀를 잘 알아준 이가 필요한 외로운 여인이다.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고 쫓아다니는 남자 겐시치와의 동반자살, 그들의 죽음이 사실 동반자살인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모른다. 다만 남녀가 죽었다는 것, 남자가 여자를 끊임없이 쫓아다녔다는 것, 사랑했다는 것에서 추측할 뿐이다.
"기쿠노이칩의 리키도 악마가 되살아난 것일 리가 없다.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이런 곳에 흘러 들어왔을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우스꽝스러운 말을 퍼뜨리며 그날그날을 지내며, 인간다운 감정이라고는 얇은 종이 한 장 정도이거나 반딧불 빛만큼 밖에는 드러내지 않는다.
인간다운 눈물을 백 년 분이나 참고 있다. 자기 탓으로 사람이 죽어도 어머나 그것 참 안됐네요, 하고는 외면했다. 어떤 일에도 꿈적도 하지 않는 척하는 것이 완전히 몸에 배었다. 그렇다가도 가끔 느끼는 슬픔과 두려움이 가슴에 쌓여간다. 그런 것은 울음으로 풀어낼 수밖에 없다. 사람들 앞에서는 울 수가 없다. 울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층 객실 좌석에 몰래 들어가 우는 것이다. 동료들에게도 그저 숨기기만 하니까 고지이 세고 강한 아이라고 하는 거시다. 건드리기만 해도 툭 끊어지는 거미줄 같은 구석이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167쪽,<흐린강>)
그러나 유곽의 여성 리키라는 점에서, 동반자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리키의 어린 시절 쌀을 사러 심부름을 갔다가 바가지를 떨어뜨려 쌀을 바닥에 쏟아버린 후, 강이 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에서,
"'아, 정말 내가 싫다. 싫어. 싫다구. 어떻게 하면 갈 수 있을까. 사람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하고 조요한, 자기 마음도 그저 멍하게, 근심할 것 하나 없는 곳에 어떡하면 갈 수 있을까. 재미없고 어처구니엇고, 슬프고, 외롭고, 한심하고. 그런 곳에 나는 언제까지 묶어 있어야만 하나. 이게 내 인생인가. 일생이 이것인가. 아아 이럴 수는 없다.'(168-169쪽,<흐린강>
라는 토로에서, 우린 동반자살로 생각하게 된다.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들은 대개가 이렇듯이, 명백한 인과관계가 없다. 결과에 대해서도, 그게 진정 사실인지, 아님 오해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품 속 인물들로 인해 그들이, 혹은 읽은 나 역시, 어딘가 빈 듯 애잔하다.
<키재기>에 대해서도 잠깐 얘기해보면, 이번 다시 읽은 <키재기>에서는 새삼 '경계'를 벗어냐야 하는 세월/시간에 대한 원망을 읽게 된다. 가버린 지난 날, 떠나버린 신조, 남아 있는 미도리가.
"에이, 뭐 이렇게 미련스럽게 신뇨 같은 애를 생각하는 건......부끄러워."(145쪽,<키재기>)
"아아, 싫어. 어른 되는 건 정말 싫어. 왜 나이를 먹어야 하는 건지? 다시 칠개월, 십 개월, 일 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155-156쪽), <키재기>, 《해질무렵 무라사키》
<갈림길>은 삯바느질로 살아가던 여성 오쿄와 그녀만은 다른 자기를 지킬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는 기치와의 대화가 애잔한 작품이다. <갈림길>은 말그대로 다른 사람의 눈에 맞춰 자신을 잃고 살아갈 것인지, 가난하게 굳굳하게 살아갈 것인지의 갈림길 선 여성 오쿄를 통해, 가기 힘든 고단한 길의 안타까움을 얘기하고 있다. 우산집에게 가장 일을 많이 하는 기치, 그가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죽거나 떠난다. 이번에는 삯바느질로 살아가던 오쿄가 부잣집으로 시집간다는 소문이 진실임을 알게 된다. 오쿄가 기치를 겨드랑이 손을 넣어 안자, 기치가 어쩔 줄 몰라하며 말한다.
"오쿄 누나, 부탁이니 제발 이 손을 놔 줘!"(63쪽,<갈림길>)
그게 끝이다. 역시나 이 작품도 알지만, 그 사이 알 수 없음이 있다.
<매미 >또한 이뤄질 수 없는 (환상으로서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이유는 모르지만 환자인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기분이 좋을 때는 아이처럼 생긋생긋 웃는 그녀다. 그러다나 어느때는 얼굴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이 잘못했다며, 수없이 빌고 또 빌며, 자신도 지금 간다고 말하며 어디로든 뛰쳐나간다. 우물까지 뚜껑을 해서 닫아놓고, 칼날등도 눈에 보이지 않게 해야 할 지경으로 광증에 시달린다. 그녀(유키코)의 광증의 원인을 알 수 있는 건 다음이다.
"자아, 정신 차리고 생각 좀 해 봐. 우에무라의 일은 지그에 와선 돌이킬 수 없는 일이야. 나중에라도 반드시 제사라도 치러 주면 되고, 네가 가서 손수 향과 꽃이라도 꽂아 주면 맘 편히 눈감고 저 세상으로 갈 수가 있고. 유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니. 그 녀석은 이 세상을 깨끗하게 떠났다. 그것과 함께 너에게 대한 모든 것도 단념햇고. 그래서 미련 같은 건 없단 말이다. 그런데도 네가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부모님을 한탄스럽게 하다니. 네가 그 녀석에게 무정했는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그쪽에선 절대로 너를 원망하거나 하지 않아. 녀석은 그런 것을 잘 아는 남자일 거다."(32쪽,<매미>)
부모에게 유키코는 무남독녀다. 그런 그녀가 우에무라의 죽음으로 인해, 같아 간다고, 왜 오지 않느냐고, 따라간다며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런 그녀를 보는 부모님은 마음은, 언젠가 웃을 날이 있겠지하며 마냥 기다리는 일이다.
"매미의 껍데기를 보며 건강했던 지난날을 떠올려 위로 한다'는 옛시가 있듯이 마음이 여기에 없어도 상관없다. 그냥, 유키토의 모습만이라도 보고 지냈으면, 하고 부모는 비었다.
대문 앞에 살랑살랑 부드럽게 나부끼는 버드나무 가지를 바라보면, 이 버드나무 잎은 가을바람이 불면 지고 말겠지, 하며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꽤 높아진 하늘을 보며 바람에 살짝 떨어지는 낙엽같이 유키코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지 않기를 빌었다."(40쪽, <매미>)
텅 빈 것은 아니지만, 빈 느낌을 경험하게 하는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들과 일기다. 표현, 재현, 각인, 흔적(무늬), 상처 등의 글쓰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반해 말을 하면 할수록, 글을 보여지면 보여질 수록 더 깊이 숨어버리는(웅크리는), 더 멀리 흘러가버리는 글쓰기도 있다. 히구치 이치요는 내게 그걸 경험하게 해준다. 이 또한, 드러나기 어려운 여성성/여성상이다.
text:
▣히구치 이치요, 《해질무렵 무라사키》-<매미>,<십삼야>,<키재기>,<제 아이는 말이죠>,<해질 무렵 무라사키> 수록
▣히구치 이치요, 《나 때문에》 -<갈림길>,<나 때문에>,<흐린 강> 수록
▣히구치 이치요, 《치열하게 피는 꽃》
박영선옮김, 북스토리, 2005년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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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살림 작성시간 05.05.28 '알 수 없다≒미지'로서의 여성의 속성... 프로이트가 떠오르는군요. 검은 대륙, 아프리카와 여성. '누구'의 관점에서 미지일까요? 미로처럼 복잡하게 직조된 삶을 하나의 질서로 만드는 것은 앎인가요 폭력인가요? 물론 여성의 삶에 가해진 남성의 앎/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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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폭주기관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5.05.28 저 또한, 어쩌면 프로이트의 영향아래 나왔다고 봅니다. 인정하건 안하건, 조건에서요. 미지의 '관점'은 남성/여성을 떠나 사실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이의 시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여성성을 파고 들어가는 이유는, 제 시선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생각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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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폭주기관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5.05.28 남성에 대한 피해의식,적대감정이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순간 튕겨나오는 불꽃의 정체도 궁금하긴 합니다.^^앎에 의해 가능한 질서를 생각하지 않는데, 순간순간 틀을 만드는 저를 보면, 안다는 것은 혼란스런 충돌보다는 질서를 통해 힘을 발휘하는가로 생각해봅니다. 언제나 모름으로 남아 다행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