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넨 결혼 전의 여자와 결혼 후의 여자가 똑같은 여자라고 생각하나?"
이렇게 나오면 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평소 그런 걸 생각해보지 않은 탓이겠습니다만, 이번엔 내가 밥을 두어 술 연거푸 우물거리며 형님의 설명을 기다렸습니다.
"시집 가기 전의 오사다 씨와 시집 간 뒤의 오사다 씨는 전혀 다르네. 지금의 오사다 씨는 이미 남편 때문에 스포일spoil되고 말았다네.""(389쪽, <행인>)
형 이치로가 동생 지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황당한 질문과 너무 단정적인 판단이 아닌가? 이런 사유체계로 된 이치로이기에 그는 "죽느냐, 미치광이가 되느냐, 아니면 종교를 얻느냐, 내 앞엔 이 세가지밖엔 없네."(342쪽,<행인>)라고 말한다. 무섭다는 말과 함께.
여기에서 문득 29일 개봉할 <친절한 금자씨> 시사회에서 박찬욱 감독의 기자회견 내용이 연상된다. 우리나라 영화 감독은 크게 이영애씨와 영화를 찍은 감독과 찍지 않은 감독으로 나뉜다는 허무한 농담을 던져 사람들을 웃겼다고 한다. 이는 분명 누가 들어도 유머이다. 그렇다면 <행인>과 <명암> 등 기타 여러작품에서 보여지는 이분법적 사고 또한 유머로 생각되어야 하지 않을까? <명암> 읽고나서, 박찬욱의 그 기자회견 내용이 생각나는 것은 아마도 그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분명 사건에는 전과 후가 있고, 사건화와 무고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세상이 그렇게만 나눠지느냐? 명/암이 명백히 존재하던가?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만이 존재하던가? 사랑하지만 사랑이라 말할 수 없는 게 있지 않느냐? 빛의 존재로 더욱 어둡게 느껴지는 어둠이 아니더냐?
그런데 <명암>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다와 (~)아니다라는 이분법으로만 구별하려는 태도가 심히 거북하다. 혹은 (~)이어야 한다와 (~)이면 안된다, 혹은 (~)일 듯한데 아니라면이나 (~)이 아닐 듯한데라는 측면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태도가 <명암>을 읽는데 다소 지루함으로 작용한다. 예전에는 분명 알 수 없음을 한발짝 더 다가갈 수 없는 소통의 부재의 안타까움으로 인식했다면, 이번에는 소통의 부재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서인가를 의문하느라고 어쩌면 지루함을 인식한다. 안타까움과 감동보다도 힘을 발휘하는 반복적인 지루함의 측면을 새삼 확인하는 책읽기가 된다.
변역되기전 기대치를 가지고 <명암>을 기다렸다. 이렇듯 지리함에 실망하기 위해서 였을까? 당연히 아니다. 공감(감동)하기 위해서가 이유이다. 그러나 소세키의 다른 여느 작품에서 느끼지 못하는 지루함(지겨움)을 경험한 작품이다. 그래서 싫어냐고? 아니다. 지루함의 미덕이 있는 문학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명암>에 대한 기대치는 미완의 유작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뭔가 달라도 될 죽음이 아니던가라는 측면이었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1867~1916) 미완의 유작인 <명암>은 1916년 5월부터 아사히 신문에 연재를 시작하여, 12월 14일 188회로 중단된 미완의 작품이다. 소세키는 그해 12월 28일 조시가야 묘지에 안장됐다. 소세키의 다른 작품이 그러하듯 큰 골격으로 보면 몇 줄로 정리될 내용의 <명암>이다. 츠다와 노부는 이제 결혼 6개월이 된 부부이다. 츠다는 이제까지의 고질병인 치질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급기야 수술을 받으라는 통고를 받는다. 그후 병원에 입원하여 치질 수술을 받게 되는 그 며칠간 츠다와 노부를 중심으로 불안한 인간심리를 잘 표현한 작품이다. 츠다의 수술을 전후하여 엮어지고 풀어지는 인간관계가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츠다와 노부를 중심에 두고 츠다의 여동생 히데와 츠다와 친분이 있는 부인 요시카와, 사회주의자로도 볼 수 있는 고바야시, 노부의 고모부, 그리고 츠다의 옛애인 교코가 이러저리 얼키고 설키게 된다. 아니 개입하려 하고 개입된다고 봐야할 것이다.
<명암>은 크게 '알고 싶다와 알 수 없다'는 시소게임으로 긴장감이 유지된다. 변했을까 변하지 않았을까. 사랑할까 아닐까. 보여주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일까 아닐까. 제대로 본 것일까 아닐까. 눈치챘을까 아닐까. 이렇게 (~)이다와 (~)아니다의 대립적 심리상태를 통해 소설은 이끌어져간다.
자꾸만 탐정과 근대소설에 관한 카페글을 읽다보니, 나 역시도 이 소설을 그렇게 읽어지게 된다. 의도하지 않지만 물드는 경험을 이번에도 하게 된다. <명암>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탐정이다. 소세키는 작중 노부를 유독 고양이의 모습과도 같은 탐정로 묘사하고 있다.
소세키의 강연들을 모아놓은 <나의 개인주의 외>란 책에 보면 '나의 개인주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무엇인지, 뭐가 좋을지를 생각할 수 없었다고 소세키는 말한다. 그 막연한 안개 속에서 빛이 보일 거라는 기대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자기 내면의 탐조등을 사용해서 밝은 빛을 보고 싶었지만 어렴풋하고 희미했다. 자신의 손에 송곳 한 자루만 있으면 어딘가를 뚫고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소세키는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 마음속으로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하며 사람들 몰래 우울한 날을 보냈습니다."(51쪽, <나의 개인주의 외>)라고 말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가서도, 어떤 책을 읽어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날이 부풀려지는 욕망에 왜 책을 읽는지조차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됐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붙잡게 되고, 그 질문에 대한 다른 답변의 인정(가능성)으로 인해, 이제껏 자신이 자신만의 눈이 아닌 타인본위의 눈으로 세상(문학작품)을 봤음을 인식하게 된다. 왜 자신의 눈이 정확하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는 그는 자기본위라는 언어를 손에 쥐게 된다.
"자기본위라는 언어를 손에 쥔 뒤부터 매우 강해졌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야?'하는 기개가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망연자실하고 있던 나에게 여기에 서서 이 길에서 이렇게 가야 한다고 인도해준 것은 실로 이 자기본위 네 자입니다."(54쪽,<나의 개인주의 외)
소세키는 걍연문에서 개인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개인주의란,
"당파심이 없고, 옳고 그름이 있는 주의입니다. 붕당을 결성하고 단체를 만들어서 권력이나 금력을 위해 맹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주의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면에는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쓸쓸함도 잠복해 있습니다. 이미 당파가 아닌 이상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마음대로 갈 뿐이고 타인이 가야 할 길을 방해하기 않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경우에는 서로 흩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부분이 쓸쓸한 것"(68쪽,<나의 개인주의 외>) 입니다라고 말한다.
물론 이 문제를 개인주의자 ≒국가주의자 ≒세계주의자로까지 확대시키기도 한다. 그러면서 물론 국가주의의 맹아를 말하고 있다.
"원래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외교적 응대가 아무리 엄격해도 도덕심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기를 치고 속임수를 쓰고 엉망진창입니다. "(74쪽,<나의 개인주의 외>)
<나의 개인주의 외>에 실린 [나의 개인주의]라는 강연문으로, 다이쇼 3년(1914) 11월 25일 학습원 보인회에서의 강연문을 그 다음해 3월 《보인회》에 실은 내용이다.
여기에서 소세키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를 하나 찾는 기분이다. 당파심이 아닌 옳고 그름을 지향하는 주의인 개인주의로 인해 그는 언제까지나 쓸쓸한 삶을 살았을거란 추축이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명암>에 츠다가 묻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해보자. 츠다는 '완만한 인생의 여행자'로 숙부가 부르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남편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헤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아내 노부의 남편이다. 왜 갑자기 나타난 노부에게 온 마음을 바치는 것처럼 살아가는 오빠인가를 의문하게 하는 히데의 오빠이다. 생활자체가 힘들어, 다른 이에게 피해만 주는 삶이 싫어 조선(혹은 중국)으로 가려는 고바야시의 친구이다. 한때 교코라는 여인과 사랑했다고 생각했으나 돌연, '앗'하는 사이 다른 이에게 시집가버린 교코를 알았던 자이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의 누구이나, 사실은 츠다는 츠다일 뿐이다. 기타의 관계는 다만 연약한 관계일 뿐이다. 츠다가 남편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남편일 수는 없는 것이고, 츠다가 남편이라고 해서 노부가 츠다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역시 노부 또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언제나 남편이고 아내인 츠다와 노부라기보다는 누구의 남편인 츠다는 누구의 오빠이기도 하고 누구의 자식이기도 하고 누구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국 츠다는 츠다일뿐이다. 츠다는 츠다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그와 관계된 인연을 맺을 뿐이다. 그런고로 츠다와 고저적일 관계를 유지할 이는 어느 누구도 없다. 이름을 부여받는 자신 외에는 어느 누구도 지속적인 관계가 될 수 없다. 이게 <명암>을 관통하는 '알 수 없음의 퍼레이드'이다. 아버지도, 동생도, 아내도, 왜 그러는지를 모른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명암>을 읽으면서도 나또한 알고 싶다기보다는 알아서 뭐하려고,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지루함이라니... 감춰진 사소한 것들의 매력이랄까, 그것마저 까발려서 뭐하려고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사실은 호기심(의구심)에 연약한 마음이 싹둑 베이지 않을 이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자는 <명암>에 대해서 말하길 '근대적 자아의 내적 숙명이 지닌 한계를 남녀의 사랑에서 찾고 있다'고 말한다. 알 수 없음을 불통으로 한계지은 듯한데, 그것은 아니지 않을까? 불통이어서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고정되는 것은 어느 것도 없어서 알 수 없는 게 아니지 않을까? 흐르는(변하는) 마음이어서, 흐르는 관계여서 말이다. 변화하는데 있어 그 변화이전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국 알고자 하는 이에게 더욱 커보이는 구멍일 뿐이지 않을까.
한때 나 역시도 이유가 뭔지, 나에게 왜 그랬는지, 그래서 결국 어쩌자고, 하는 의문에 심히 괴로웠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의 문제는 순전히 내가 만든 커다란 구멍이었음을 알게 된다. 의미부여하는 이에게 의미로 작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상대를 알고 싶어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인지상정에는 그 정도라는 게 있다. 그 정도를 벗어나지 않아야만 온전히 살 수 있다. 그걸 <행인>에서 소세키는 이미 보여줬다. '죽거나 ,미치거나, 종교를 찾거나'로 말이다. 그런데 다시 그 문제를 가지고 <명암>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되짚어보자. 어린시절 막내로 태어난 소세키(본명:긴노스케)는 남의 집 양자로 가게 된다. 9살때 양부모의 이혼으로 다시 나쓰메가로 돌아온다. 바로 이 근원없음(불안)의 노출이 바로 소세키 문학의 근원이 아닐까? 그걸 <한눈팔기(원제道草)>에서 자전적으로 풀어냈고 말이다. 왜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러했는지를 그는 결코 알 수 없다. 오직 결과만을 사건으로 수용할 뿐, 자신은 자신의 일만을 알 뿐이다.
물론 개인적인 외상(trauma)에서만 머물렀다면 그가 일본 소설의 대가로 자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중성과 보편성을 획득했기에 그 위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불안, 허영심, 변하는 자타의 마음(세상)으로부터 보편성은 획득된 게 아닐까? 어느 누구도 존재, 위상, 소임에 대해 명확하게 대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소세키는 그걸 경험으로부터 문자화한 작가라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알고 싶다'를 유독 많이 드러내는 작품 <명암>은 또한 '알 수 없다'를 자꾸만 반복한다. 왜 숙부가 노부를 맞선보는데 초대했는지, 왜 요시카와가 노부에 대해 좋지않은 선입견을 갖는지, 왜 갑자기 아버지는 송금을 그만뒀는지, 왜 히데는 자신에게 돈을 주는 지, 왜 히데가 노부를 싫어하는지, 왜 츠다는 고바야시를 멸시하면서도 두려워하는지가 그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결정적인(근원적인) '왜'는 다음이다. 왜 교코는 츠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는지이다. 그럼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에서도 <산시로>ㆍ<그후>ㆍ <문>에서도 갑작스런 결혼 이유에 대해서 남자들이 수긍할 수 있는가를 의문해보면, 답은 '알 수 없다'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꼭 어떤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서로 미적미적한 관계에서 좀더 명확한 관계를 선택한 것뿐이라는. 매사 애매할 수밖에 없는 인간 관계에서 조금 더 애매한 관계를 선택한 것이라는. 고로 선택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늦은 나중 알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행동해야했었다는.
그럼 여기에서 진의란 무엇일까를 의문해본다. 노부와 결혼한지 이제 6개월 된 츠다에게 요시카와 부인은 농담으로도 진담으로도 볼 수 없는 끝없는 질문으로 대화를 이끈다. 진의를 파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말이다.
"요시카와의 부인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주 츠다를 놀렸다. 기분이 좋을 때에는 더욱더 그랬다. 츠다도 이따금 그에 맞서 상대방을 놀려댔다. 하지만 그가 본 부인의 태도에는 농담으로도 진담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번득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경우에 부딪히면 꿋꿋한 성질을 지니고 태어난 그는 대화 도중에 자주 얽매였다. 그리고 만약 사정이 허락할 경우에는 끝까지 이야기의 뿌리를 파서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했다. 자중하여 그렇게까지 할 수 없을 때는 묵묵히 상대의 안색만을 주시했다. 그럴 때에 그의 눈엔 필연적인 결과로 항상 가벼운 의혹의 구름이 끼여 있었다. 그 모습은 겁먹은 듯하게도 보였다. 주의깊게도 보였다. 혹은 자위적으로 우쭐하는 신경의 빛을 풀어놓은 듯하게도 보였다. 최후에는 '사려에 찬 불안'이라고 형용해야 할 일종의 정취도 띠고 있었다. 요시카와의 부인은 츠다를 만날 때마다 한두 번 꼭 그를 거기까지 몰아넣었다. 츠다도 역시 그걸 알면서도 어느 틈엔가 거기로 끌려 들어갔다."(34쪽)
'사려에 찬 불안'으로 내려앉게 하여 발견하려고 하는 진의란 무엇인가? 아는 것에서 도대체 무얼 얻고자 하는 것일까? 무엇때문에 진의를 알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질문자와 거기에 대응하는 대응자간의 관심(마음, 연관짓는 마음)이다. 불안과 허영심(자만심)에 기초한 마음이다. 자기 생각에, 허영심의 테두리에 머물러야 할 관계의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란 결코 그럴 수 없는데 말이다. 그 연관짓는 관계에는 세상에서 중대하다고 인정하는 관계일 수도 있고, 사소한 관계일 수 있다. (진의를) 알려고 하는 데의 이유는 연관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굳이 알지 알아도 되는 걸 알려고 하는 것이고, 연관짓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정작 마음(생각)을 알고 싶다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다음이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을 뿐입니다.“(383쪽)
생각하면 모른다. 그렇다면 그 역도 가능할까? 알고자 한다면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친구 고뱌야시가 츠다에게 하는 말에 또한 그에 대한 답이 담겨 있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납득하지 않는 게 현재의 자네일세.”(438쪽)
교코와 츠다의 대화에서도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다. 잠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오해받는 츠다가 역으로 교코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복도 끝에서 자신이 잠복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를 묻는다. 이때 교코 또한 정답에 가까운 답을 말한다. 말할 수 없다고 말하자 츠다가 묻는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제발 말해주라고. 그에 대한 교코의 대답은 다음이다.
“말할 수 없으니까 말할 수 없는 거죠.”(528쪽)
“내 마음속에 아무것도 있지 않아요.”(528쪽)
없으니까 말할 수 없다. 이유가 없었는데 질문자가 이유를 만들어, 혹 답을 생각하고 질문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츠다가 다른 질문 -어제저녁에는 분명 놀랐던 교코였는데, 오늘 아침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하냐는 -을 던진다. 도대체 어떤 심리작용이냐는 질문에 대해 쿄고의 대답 역시 수긍가능하다.
“심리작용 따위의 어려운 말은 나도 알 수 없어요. 단지 어제 저녁은 그랬고 오늘 아침은 이래요. 그것뿐이죠.”(531쪽)
'말할 수 없다', '아무것도 있지 않다','모른다'는 그 말에서 츠다는 사실 많은 걸 깨달아야 할 것이다. 관심(마음)없다는 그것 말이다. 당신을 안다는 그 허영심에 기초했던 아니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건 아니건 관심없다는. '불안과 허영'의 탐정놀이는 무관한 사이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관계있다, 관계를 맺으려는 의도가 없는 한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미완성의 <명암>을 통해 여러가지를 생각해보게 됐다. 지루함이야말로 끈질기다는 걸, 또한 새삼 인식한다. 소세키의 여러 작품을 통해 그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다는 허영심(자만)이 있는 가운데서 그걸 반복체험하는 즐거움. 그럼에도 또 반복할 것 같은, 감동과 지루함의 책읽기이다.
text :
나쓰메 소세키, <명암>, 김정훈옮김, 범우사
나쓰메 소세키, <나의 개인주의 외>, 김정훈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 <행인>, 유숙자옮김,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