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인)문학적 사유

호이징하의 '놀이' 개념 비판 : <호모 루덴스> 읽기

작성자kundera|작성시간02.04.02|조회수955 목록 댓글 0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김윤수 옮김, 까치, 1993

1. 엉성한 '놀이' 개념
호이징하의 '놀이'개념은 너무 포괄적인 개념이다. 해서 그 속에 포함된 추상적인 면을 피하지 못하는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더욱 그렇다.

놀이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정신"을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놀이도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의 경우에도 놀이는 육체적 존재의 한계를 돌파해 버린다. 세계가 맹목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놀이는 말 뜻 그대로 하나의 과잉이다. 우주의 절대적 결정론을 부수었던 정신이 부서진 그 자리에 들어설 때, 비로소 놀이는 가능해질 수 있고 생각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틀림없이 동물은 기계적인 물체 이상이다. 인간은 놀며, 논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 인간은 이성적 존재 이상이다. 왜냐하면 놀이란 비이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3쪽: 밑줄은 인용자 강조)

이 글에서 호이징하는 놀이란 '비물질/정신(적인 것)'이며 이를 '물질/자연'과 대립시키고 있다. 그리고 기묘한 결론을 이끌어내는데, 바로 이 '비물질적 측면'(즉 과잉적 측면)으로 인해 놀이는 '비이성적인' 거라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 말로, '이성'이란 놀이와 대립되는 '물질/자연'이란 말인데, 이는 기묘한 순환논증을 형성한다. 이런 모순은 그가 '놀이'의 영역을 동물까지 확장시키는 데에도 발생한다. 그는 동물들도 '놀이'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한데, 우주의 절대적 결정론을 부수었던 정신이 그 자리에 들어설 때만, 놀이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놀이를 하는) 동물들도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일 수 있다. 그리고 비이성적일 수까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인식'의 유무에서밖에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문제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인간을 특징짓는 것이 '인식(즉 이성)'의 유무라는 점에서) 이런 호이징하 자신의 '놀이' 개념에 대한 우왕좌왕은 {호모 루덴스}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2. '놀이의 형식적 특징' 비판
이 같은 엉성한 '놀이' 개념에서 출발한 호이징하의 논의는 뒤로 가면 갈수록 좀더 명백한 정의를 내리기보다 자신의 논의를 정당화해줄 수사학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선 그가 '놀이'의 형식적 특징으로 드는 세 가지를 살펴보자.

1) 자유로서의 놀이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며, 예쁜 옷처럼 자연의 진행과정 위에 입혀진 그 무엇이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에게 놀이는 도외시하여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놀이로 인한 즐거움이 놀이를 욕구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되고 중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결코 물리적 필요나 도덕적 의미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결코 임무가 아니다. 놀이는 여유가 있을 때, 곧 "자유시간"에 행해지는 것이다. (19쪽)

그가 놀이의 첫 번째 특징으로 드는 것은 바로 '자유'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놀이가 물리적 필요나 도덕적 의미(의무)와 분리되는 '잉여'라는 점이다. 허나, 이런 설명은 너무나 안이다. 왜냐면, 이는 그가 사용하는 '물리적 필요'나 '도덕적 의미(의무)'에 대한 정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유'라는 개념 또한 그 자체로 매우 문제적이다. '놀이는 여유가 있을 떼, 곧 "자유시간"에 행해지는 것'이라면, 놀이가 행해지지 않는 '여유'도 있다는 말인데, 그 '놀이가 부재 하는 여유'란 무엇인가?
이런 애매모호한 설정의 근거엔 다음과 같은 가정이 있다. '놀이'란 '적극적인 그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그가 처음에 가정했던 '놀이'의 개념을 말 그대로의 '놀이' 개념(게임 등과 같이 구체적으로 확정지을 수 있는)으로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2) '일상적인' 혹은 '실제의' 생활을 벗어난 놀이의 '비-이해관계성'(disinterestedness)
일상적인 생활이 아니라는 점에서 놀이는 필요와 욕망의 직접적인 만족 여부 바깥에 있다. 즉 욕망의 과정을 차단하고 있다. 놀이는 삽화처럼 일시적인 행위로서 삽입되는 것이다. (...) 그러나 정규적으로 반복되는 휴식 행위로서의 놀이는 우리의 삶의 반려자이자 보완자가 되어 사실상 삶 전체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 놀이가 포함하는 의미, 놀이의 의의와 놀이와 표현적인 가치, 놀이의 정신적 사회적 결합, 즉 한마디로 문화적 기능의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도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20-21쪽)

도덕적 의무와 분리된 '놀이' 개념은 당연히 이상적인, 실제 생활과도 분리된다. 그리고 그것은 욕망과도 떨어져 나온다. '놀이' 개념의 순수화를 위해, 그는 위험한 시도를 감행하고 있다. 내가 호이징하의 '놀이'개념을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에서다. '추상적인 것'은 그 자체론 '순수함'을 의미하지만, 조금만 달리 보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다. 이는 '놀이'가 일상생활의 보완자이자 삶 전체의 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부분에서 특히 그렇다. 이런 그의 논의가 타당하기 위해선 일상생활이란 삶 전체의 한 부분으로 '도덕적 의무'에 얽매이는 시간/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3) 장소의 격리성과 시간의 한계성
놀이는 시작되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끝나게" 된다. (...) 놀이는 시간적으로 한계성을 지니면서 확고한 문화 형식의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즉 놀이는 일단 놀이한 뒤에는 새로 만들어진 정신적 창조물 혹은 정신의 보석으로서 기억 속에 남게 된다. (...)
시간의 한계성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공간의 한계성이다. 놀이란 모두 그 자신의 놀이 공간, 놀이터 속에서 움직이는데, 이러한 놀이 공간은, 현실상으로나 혹은 관념상으로나, 의도적으로나 저절로나, 미리 구획되어져 있는 공간이다. (22-23쪽)

'도덕적 의무'에서 벗어난 '놀이'의 시간이란 그 자체로 시간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한데, 이것은 아주 협소한 의미의 '놀이'에만 한정된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손장난이나 야구와 같은 게임 말이다. 공간의 한계성 또한 마찬가지다. 한데, 문제는 이런 '놀이'가 가지고 있는 시/공간적 한계성은 엄밀히 말해 매우 '물적인' 것이다. 1-2시간 정도의 축구 경기는 인간의 육체적 한계에 의해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의 육체가 24시간 동안 놀이를 견딜 수 있다면 그 놀이는 아마 24시간이란 한계를 가질 것이다. 공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놀이'는 '자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자가당착에 이르게 된다.

3. 놀이와 진지함
호이징하의 논리적 모순은 그가 놀이와 일상생활을 엄격히 분리시킬 수 있다고 태평스럽게 믿는데서 발생한다. 그가 생각하는 일상생활이란 자연이고 진지함 자체이다. 한데, 그는 어원학적 설명을 통해 이런 진지함보다 놀이가 더 근원적이라고 주장한다.

놀이는 적극적 가치이고 진지함은 소극적 가치이다. "진지함"의 의미는 "놀이"의 부정에 의해 정의되고 그 뜻을 다할 수 있다. 반면에 "놀이"의 의미는 "진지하지 않은 것", "진지하지 않음"이란 마로는 결코 정의될 수 없으며 그 뜻을 다할 수도 없다. 놀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어떤 실체이다. 놀이 개념 그 자체는 진지함보다 한층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지함은 놀이를 전혀 허용하지 않지만, 반면 놀이는 진지함을 아주 적절히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74쪽)

따라서 그는 진지함 속에도 놀이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데, 놀이가 '놀이적 요소'까지 축소되고 나면 문제는 무척 복잡해진다. 왜냐면,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놀이적 요소'와 '진지한 요소'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한데, 호이징하는 이쪽으론 한 발자국도 내밀지 않고 놀이적 요소를 찾는 데만 주력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데, 이때 숨겨지는 것은 바로 사회성(이데올로기)의 문제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라고 함은 인간행위의 그 어떤 것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놀이'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그는 나의 이러한 주장에 또다시 추상적인 '놀이'의 논의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한번 도망치면 다신 내려오질 못할 것이다.
진지함은 놀이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왜냐면, 놀이란 기본적으로 기존 생활영역과 구별되는 금을 긋는 것이데, 그러기 위해선 그 금을 긋기 위한 진지함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즉, 놀이가 행해질 수 있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모방을 예로 들어보자. 모방을 하기 위해선 우선 모방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호이징하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일상생활(즉, 도덕적 의무)'이다. 그는 '놀이와 문화라는 복합체에서는 놀이가 일차적이다'(75쪽)라고 주장하고, 그 근거로 '모든 놀이의 기본요소인 경연, 공연, 전시, 겨룸, 치장 등은 동물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76쪽)는 걸 든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가 타당하기 위해선 그가 말하는 '일상생활'이 동물들에게도 존재한다는 게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동물들에게 '진지함' 또한 존재하는 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가 사용될 수 있는 것은 호이징하 자신이 '놀이'라는 개념을 때로는 광의로 때로는 협의로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는 어느 때 '놀이'를 광의로 사용하고 어느 때 협의로 사용하는 걸까? 이 물음에 답한다는 것은 호이징하 답답한 논리를 꿰뚫는 일이 될 것이다. 그가 광의의 의미로 사용할 때의 '놀이'는 '도덕적 의무'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협의의 의미로 사용할 때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는 '문명에 도움을 주는' 놀이만을 진정한 놀이로 보고있는 것이다. 이런 가치판단을 개입은 스스로 성립한 '놀이' 개념을 허무는 것인데, 이 같은 상황은 특히 11장 <놀이의 아종으로서의 서구 문명>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놀이'를 그 스스로 구별했던 '우스꽝스러운 것', '장난스러움'과 혼동하고 있다.

우스꽝스러운 것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어리석음(folly)"- 그 의미가 어떻든 -과 깊게 관계된다. 그러나 놀이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놀이는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음과의 대립을 벗어난 것이다.(17쪽: 밑줄은 인용자 강조)

이 같이 주장한 그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대해 '눈물과 웃음의 최고 마술사'라는 칭호를 붙일 때, 그는 무얼 생각한 것일까? 그는 '소설'이라는 형식이 가지고 있는 '놀이성'을 이야기하는 걸일까? 아니면 돈키호테라는 인물이 겪게 되는 모험의 놀이성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물론, 그가 염두에 둔 것은 후자이다. 한데, 만약 그렇다면 '놀이는 지혜로움이나 어리석음과의 대립을 벗어난 것이다'라는 주장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라블레에 대해 '라블레보다 더 장난스러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놀이 정신의 화신이라고 할 만하다'(273쪽)라고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나타나는 놀이를 어떻게 사회성(진지함)과 구별하여 논할 수 있단 말인가?

4. 놀이정신과 시대정신
그는 '데카르트, 파스칼, 스피노자를 낳은 매우 진지한 시대'(276쪽)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데카르트의 '교활한 악령'{성찰}(22/40-41쪽: 이현복 옮김, 문예출판사)에 대한 가정이야말로 호이징하의 '놀이' 개념에 가장 잘 부합하지 않는가? 더구나 그는 복장의 화려함에서 '놀이'를 발견하고, 프랑스 혁명 이후 간소해진 복장을 상기시키며 '놀이적' 요소가 사라졌다고 한탄하고 있다. 여기소 그는 '화려함'과 '놀이'를 등가로 놓는 셈인데, 이는 그런 복장을 하게 된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고 '화려함' 자체를 추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는 음악을 가장 놀이적인 양식으로 지적하고 음악 자체의 엄격한 형식성을 높이 평가하는 자기모순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엄한 연습의 필요성,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가에 대한 정확한 규칙, 미의 규범으로서의 유일한 합법성을 요구하는 모든 음악의 주장, 이 모든 속성들이 음악의 놀이적 특질을 나타내는 전형적 예들이다. 그리고 음악의 법칙들을 다른 예술들의 법칙들보다 더욱 엄격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음악의 놀이적 특질이다. (282쪽)

엄격성(진지함) 자체가 놀이적 특질이란 말은 앞에서 스스로 내렸던 구분을 폐지하고 '놀이적'이란 말을 지나치게 확장한 나머지 '문화적'이란 말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과장은 그의 낭만주의 평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낭만주의를 모든 정서적인 생활과 미적인 생활을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비구조적이고 신비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던 이상화된 과거로 회귀시키는 경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고를 위한 그런 이상적 공간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바로 놀이 과정(play-process)인 것이다.(284쪽: 밑줄은 인용자 강조)

이상적인 공간을 설정하는 것, 이상적인 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놀이 과정이라고 한다면 놀이과정이 아닌 게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것은 호이징하가 정의한 '놀이'라는 개념의 논리적 귀결일수가 있다. 따라서 그의 논리 자체(놀이=문화, 놀이>문화)를 탓할 순 없다. 한데, 문제는 이런 그의 논리가 왜 19세기(보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 혁명 이후)엔 통용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19세기를 '진지함이 지배하던'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19세기를 다루는 이 단락에서 그는 단 한 명의 소설가도 언급하지 않고 2/3 분량을 19세기 이전에 유행했던 복장에 대한 이야기로 채우고 있다. 이는 그가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낭만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완전히 딴판이다. 왜 그는 디킨스, 고골,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위대한 19세기 예술가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런 불균형은 '현대' 예술을 설명하는데 이르러 파열에 이른다. 그는 19세기 이후 현대까지를 놀이가 부재하는 시대로 보고 있다. 따라서 현대 예술에 대해 '놀이'의 부재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데, 문제는 그의 논리이다. 그는 현대예술이 어린애 같은 무구성을 잃어버리고 산업적인 면이 강화되었으며, 예술에 대한 지나친 과장이 이루어졌다고 비판한다. 한데, 마지막 부분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그 자신이 지탱해온 논리를 파열을 보여준다.

옛날이나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예술에도 어떤 비교(秘敎)가 필요하다. (...) 비교는 그 자신의 비의(비의)에 몰두하는 놀이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주의(-ism)로 끝나는 곳 어디에서나 우리는 어떤 놀이 공동체를 열심히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과장된 예술비평, 전시, 강연 등이 취급되는 현대적 보도 수단은 예술의 놀이적 성격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302쪽)

특정시대가 다른 어떤 시대보다 '놀이정신'이 더 발달되어 있다 없다, 라는 논리는 애당초 그의 전제(놀이=문화)와 모순되고 있다. 18세기가 '놀이정신'으로 충만 되어 있었다는 논리는 19세기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다. '이상적 공간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바로 놀이 과정(play-process)'이라고 할 진데, 19세기만큼 이상주의가 판치던 시기가 있었던가? 20세기는 말할 것도 없다.

5. 호이징하의 자기모순
'호모 사피엔스', '호모 파베르'이든 '호모 루덴스'이든 달라진 것은 없다. 왜냐면 이 '사피엔스/파베르/루덴스'라는 용어 자체가 엄청난 문제점을 낳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앞에 '호모'라는 말을 붙이면 결국 '문명=사피엔스/파베르/루덴스'란 도식을 낳기 마련인데, 이것은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전제는 항상 문명은 진화(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 진화(진보)하지 않음을 변화가 없음, 역사적인 것은 이차적인 것임으로 취급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호이징하의 경우도 예외다. 아니다.
물론, 그가 역사적인 측면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면에서 그는 자신이 처음에 설정했던 '놀이'의 개념에 균열을 일으켰다. '호모 루덴스'라고 지칭되는 '놀이=문명, 놀이>문명'이라는 거대한 인간 해석틀을 말이다. 시대정신 속에서 놀이정신을 찾으려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 같은 결과는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은 어떻게 보면 솔직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초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놀이는 도덕적 규범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놀이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의지가 우리에게 명하는 어떤 행동이 진지한 의무인가 또는 놀이로서 적합한가를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에는 우리의 도덕적 양심이 즉각 그 시금석을 제공할 것이다. 행동하려는 우리의 결심 속에 진실, 정의, 동정,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행동이 놀이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우리의 걱정스러운 의문은 곧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의 행동이 지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데에는 한 방울의 동정이면 족하다. 우리의 행동이 정의와 고상한 자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인식인 양심은 항상 끝까지 우리를 미망시키는 의문, 그 행동이 놀이적인 것인가, 진지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압도하여 영원히 침묵시킬 것이다. (316쪽)

호이징하는 앞에서 전개한 자신의 논의를 간단히 정의하고, 그걸 '지적인 판단'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진지함이냐? 놀이냐? 라는 물음은 '도덕적 양심'이란 시금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매우 원론적인 결론인데, 이 같은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놀이'나 '진지함'이란 개념을 '도덕성(사회성)'과 분리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서 이런 지적 판단(호모 루덴스인가?)은 도덕적 인식인 양심 밑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한데, 과연 그럴까? 어떻게 '놀이'나 '진지함'이 '도덕성(사회성)'과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도덕적 양심이라는 것 자체도 '놀이/진지함'에서 생긴 것이 아닐까? 이는 그의 첫 부분 전제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한다. '문화가 놀이의 형식에서 발생하며 문화는 애당초부터 놀아지는 것'(75쪽) 호이징하는 자신이 세운 전제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셈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