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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다수 실체론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은 스피노자 실체론의 핵심을 이룬다. 보통은, 데카르트가 실체라는 개념을 엄밀히 사용하지 않았던 허점을 스피노자가 지적하면서 보다 엄밀하게 사용하여 전개한 것이 스피노자의 유일 실체론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다수 실체론과 유일 실체론의 관계가 단지 후자가 전자보다 개념에 더 충실한, 따라서 전자는 그 함의는 풍부하다 할지라도 결국 이론 내적으로는 부정합적인 이론이라는 식으로 이해되고 말아서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중대한 차이들이 제대로 드러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데카르트의 실체론을 그 자체로 정확히 이해할 때, 우리는 데카르트의 실체론이 스피노자의 실체론보다 부정합적인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와는 상당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며 그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할 때 근대 실체론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 데카르트의 다수 실체론이며 그런 한에서 데카르트 실체론의 의미를 되새겨볼 여지가 새로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는 스피노자로부터 데카르트로 넘어가면서, 앞으로의 계속적인 연구를 위한 몇 가지 단초들과 제안들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1. 스피노자의 유일실체 논의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다수 실체론에 반대하면서 실체는 오직 신 하나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 주장에서 결정적인 쟁점이 되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정리 4와 5이다. 우선 그의 유일실체 증명을 살펴 보자1).
스피노자의 유일실체 주장은 정리 14인 “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또한 파악될 수도 없다.”이다. 이 정리 14가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은 정의 6, 정리 11, 정리 5이다. 신은 정의 6과 정리 11에서 보듯이 모든 속성을 지닌 절대적으로 무한하며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 이외의 다른 실체는 신의 속성으로 설명해야 하는데, 이는 정리 5에 어긋나게 된다는 것이 그 논증의 내용이다. 스피노자는 『윤리학』을 기존 실체론(즉 데카르트 및 스콜라 철학이 공유하는 개념들, 관념들)의 바탕 위에서 전개해나가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데카르트의 전제들, 관념들로부터 스피노자가 결정적으로 벗어나면서 유일실체론을 주장하게 되는 지점을 확정할 수 있다. 정리 14가 의존하는 세 개의 근거들 중에서, 정의 6인 “나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즉 모든 것이 각각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로 이해한다.”과 정리 11 “신 또는 각각 영원하고도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은 데카르트도 동의할 수 있는 주장들이다. 최고 완전성의 무한한 통일로서의 신이라는 관념은 데카르트가 곳곳에서 습관처럼 되풀이해 표현하는 관념이며(가령 세 번째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신은 그 완전성에 그 어떤 것도 추가될 수 없을 정도로 현행적으로 무한하다”2)라고 말하며, “신 속에 있는 것들 가운데 통일성, 단순성, 혹은 불가분리성이야말로 신 속에 있다고 생각되는 가장 주요한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성찰』, 76)라고 말하는데 이 통일성은 각각의 완전성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가지고 있는 완전성을 의미한다. 또 『철학의 원리』22항에서는 “우리가 무한한 완전성을, 즉 어떠한 불완전성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은 완전성을 명석하게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는 존재”3)라고 말한다) 신의 필연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성찰』에서만도 세 개의 서로 다른 논증들(제 3 성찰에서 두 개의 인과적 논증들과 제 5 성찰의 존재론적 논증)을 제시할 정도로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는 문제이므로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의 타당성 검토 여부를 논외로 친다면 일단 정의 6과 정리 11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양자에게서 어떤 불일치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들이다.
결국 문제는 정리 5에 걸려 있게 되는데 정리 5는 다음과 같다. “사물의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이나 속성을 가지는 둘 또는 다수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 이 정리는 다시 정리 4 “서로 다른 둘 또는 다수의 사물은 실체의 여러 가지 속성에 의하여 또는 실체의 여러 가지 변용에 의하여 구분된다.”에 의존해 있다. 실체는 변용에 앞서기 때문에 실체들 간에는 속성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므로 동일한 속성을 소유한 두 실체는 차이 없는 하나의 실체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데카르트는 다수 실체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체계에서 신과 정신, 물체는 모두 실체이다. 그에 따르면 실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인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에 합당한 존재는 신뿐이며, 정신과 물체는 “존재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신의 조력뿐”이라는 점에서 실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다(『철학의 원리』, 51-52항(42, 43쪽)). 그런데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는 그 속성에 의해서 구분될 뿐 아니라 그 속성의 완전성 정도에 따라서도 구분 가능하다. 완전성의 정도 차이, 곧 실재성의 차이도 실체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있어 실체에 실재성의 정도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리 5는 속성과 양태만으로(실제로는 속성만이) 실체가 구분되는 기준이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가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에 반대하며 데카르트로부터 벗어나는 지점인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실재성의 정도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재성의 정도 차이는 다른 곳에서 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윤리학』 정의 2는 무한과 유한을 정의하고 있는데, 이 정의는 실체론에서는 실상 무용한 것이고(실체는 하나뿐이므로 다른 실체에 의해 제한될 수 없는 무한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유한한 것은 없게 된다) 양태와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무한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게 되는데 실체의 무한함과 양태의 무한함이 그것들이다. 들뢰즈는 “메이으르에게 보낸 편지 12”에서 스피노자가 소개한 3 가지의 무한을 설명하고 있다(124-125). 그 중 첫 번째 무한은 “본성에 의해서 한계를 갖지 않는 것”인데 이는 각 속성과 실체의 무한함, 즉 각각의 완전성과 그 완전성들의 남김 없는 포괄로서의 완전성을 의미하는 신적 무한성이다. 두 번째 무한은 “자신의 원인에 의해서 한계를 갖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무한 양태에 해당한다. 무한 양태는 그 원인(속성)과의 관련 속에서 볼 때에는 무한하지만 그 자체만을 떼어서 추상적으로 고찰할 경우 다른 무한 양태들에 외적이고 한계를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무한은 유한 양태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는 “보다 크거나 작고, 최대와 최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어떤 수에도 상응될 수 없는 것”이다.4) 스피노자는 실체와 양태 모두가 무한하다고 말하면서 무한의 등급을 통해 유한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은 유일 실체의 산물이며 유일 실체 그 자체에 다름 아니라는 내재적 존재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존재자들 사이의 실재성 정도를 구분하는 전략일 것이다. 데카르트가 다수의 실체를 구분하는 척도로 내세웠던 실재성의 정도 차이는 실체(속성), 양태(무한, 유한, 매개적 무한)간의 차이로 전치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무한성에 어떻게 등급을 두어 유한함을 끌어들일 것인지는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가 이 점을 다룰 수는 없다. 정의 2에서 표명된 “유한”이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은 실체론에서가 아니라 양태론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 따라서 데카르트의 다수 실체를 구분하는 척도로서 실재성의 정도 차이는 실체와 양태들의 구분에서 유의미하게 고려된다는 점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2.데카르트의 실체론
이제 데카르트가 실재성의 정도 차이에 근거해서 스피노자에게 던진 최초의 반박은 데카르트 자신에게 형태를 바꿔 되돌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변호해야 할 사람은 데카르트 자신이다. 왜 실재성의 정도 차이가 실체의 구분 기준이 되어야만 할까? 이에 대해서 데카르트에게 그럴 듯한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디에선가 데카르트는 존재가 속성의 하나, 즉 실재성의 정도 차이가 실체의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군가 던진 반문에 대해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것” 정도의 대답밖에 하지 못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게는 유한 실체를, 즉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의 조력만을 필요로 하는 것들을 신의 조력뿐 아니라 다른 것들의 도움도 필요로 하는 것들과 구분해서 실체의 지위에 올려 놓은 것에 대한 다른 이유가 있다. 실제로 데카르트가 유한 실체를 주장할 때 그는 실재성의 정도라는 차이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차이에 근거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실체라는 개념의 엄밀하지 않은 관습적 사용의 결과라는 식으로 해명되어서는 안 된다. 데카르트 자신이 유한 실체라는 개념은 실체의 내포적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념의 엄밀하지 않은 사용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유한 실체를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실체론적인 관점에서 실체-속성-양태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논의를 위해 유익할 것이다(하지만, 여기에서 “정확하게”라는 말은 다소 역설적인데, 우리가 여기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이해는 결코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을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제안, 개념의 여백을 채워넣는 창안이 될 제안이기 때문이다). 실체는 양태와 구분되는 존재론적 지위를 갖는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에게 양태는 어떤 것일까? 이를 손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데카르트의 유명한 텍스트를 잠시 살펴보자. 이 텍스트는 제 2 성찰에서 밀랍을 고찰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데카르트는 밀랍에 속하지 않는 것을 제거해나가는데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은 밀랍의 연장성이다.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화하지 않은 채 남아 있어서 변화를 지각 가능케 해주는 불변의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hypokeimenon 개념에 맞닿아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적 개체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데카르트에게 밀랍 자체도 하나의 양태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밀랍의 모든 속성들을 지워나갈 수 있고 그래서 밀랍의 연장성 자체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밀랍의 개체성마저 지워낼 수 있을까? 밀랍이 없어진다 해도 그 자리에는 다른 무언가(공기라든가)가 들어올 것이고 따라서 밀랍이든 공기든 아니면 다른 어떤 물체이든 간에 물체 일반이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서 취하는 양태일 뿐이라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양태가 우리가 볼 수 있는 현상적인 개별적 사물들과 그 사물들의 속성들(딱딱함, 뜨거움, 사각형 모양 등등)이라면 실체는 그 개별적 사물들과 속성들의 생성, 소멸, 변화에 무관하게 남아 있는 불변의 기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즉, 데카르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실체는 양태에 비해 더 많은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제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체를 실체라고 부른 것은, 정신과 물체가 밀랍의 경우에서처럼 모든 속성들을 다 지워나가고 나서 더 이상 지워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속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실체, 양태, 속성의 관계가 명시적으로 집약되어 나타나 있는 텍스트는 『철학의 원리』1부 56항이다.
“내가 여기서 양태로 의미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속성이나 성질로 이해되는 것들이다. 실체가 속성들이나 성질들에 의해 자극되거나 변화되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그것들을 양태라고 부른다. 그런 변화에 의해 그 실체가 어떤 종류의 것이라고 불리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그것들을 성질이라고 부른다. 끝으로 더 일반적으로, 단지 그 성질들이 실체에 내재해 있다는 점만을 고려할 때, 나는 그것들을 속성이라고 부른다.”(『철학의 원리』, 46)
양태에 대한 설명은 방금 우리가 시도한 방식에 잘 부합하며 큰 어려움 없이 이해될 수 있는 것 같다. 성질이란 이제 양태들의 분류를 시도할 때 그 양태들을 특징짓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들일 것이다. 가령 밀랍의 달콤한 맛, 향기, 무른 강도는 다른 물체들과 구분해주는 특징들이므로 성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밀랍의 연장성 또한 성질일 수 있다. 그리고 인용문의 두 번째 문장에 의존해서 우리는 속성이 양태를 산출하는 원인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같은 문장에서 실체는 일종의 질료인의 역할을 맡고 있는 듯 보인다. 여기에서 63항과 64항의 언급들을 참조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데카르트는 63항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써 넣고 있다. “우리는 사유와 연장을 사유하는 실체와 물체의 본성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사유와 연장을 바로 사유 실체와 연장 실체, 다시 말해 정신과 물체로서 이해해야 하며,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그것들을 가장 명석 판명하게 인식한다.”(『철학의 원리』, 52쪽) 64항에서는 실체의 속성인 “사유와 연장을 우리는 실체의 양태로도 간주할 수가 있는데, 이는 동일한 하나의 정신이 여러 가지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고 또 동일한 하나의 물체가 크기를 동일하게 유지한 채 여러 가지 다양한 양태로 연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철학의 원리』, 53쪽)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진술들은 놀랍게도 속성을 실체와도, 또 양태와도 동일시할 수 있다는 말로 읽힌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속성은 실체와도, 양태와도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오히려 속성은 실체와 양태를 연결시켜주는 공통의 어떤 형식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속성을 통해 실체는 작용하게 되며 속성을 통해 양태는 산출되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실체의 활동적 측면을 속성이라고 본다면, 실체의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양태인 셈이다. 그렇다면 속성과 양태는 원인과 결과로서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왜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을 실체의 양태로도 간주할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5) 『성찰』에 가해진 반박에 대한 첫 번째 답변에서 데카르트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의 빛은 동인의 본성상 동인이 시간적으로 그 결과보다 선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 반대로 엄밀하게 말해서 동인은, 그것이 그 결과를 산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원인의 성질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결과에 앞서지 않는다.”6)
원인은 결과와 동시적이며 그런 한에서 원인은 결과에 내재적이다. 양태를 사유라는 속성의 결과, 산출로 이해하고자 할 경우 사유와 정신의 양태들은 동시적이며 사유는 양태들에 내재적이다. 그런 한에서 사유는 양태로도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해석이 지지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실체와 양태에 대해 속성 개념이 하는 역할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속성은 실체와 양태라는 존재론적 범주에 운동성, 활동성을 불어넣는다. 모든 운동은 그 자체로, 존재론적으로는 하나이지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는 언제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움직여지는 부분(수동적인 부분, 움직임을 받아들이는 부분, 움직임이 미치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움직임이 낳은 결과, 운동의 결과)과 움직이는 부분(능동적인 부분, 움직임을 일으키는 부분), 그리고 움직임(혹은 힘) 자체가 그것들이다. 즉 실체론의 중심을 이루는 실체-속성-양태의 세 개념쌍은 운동하는 존재를 사유하기 위한 틀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 개념쌍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어려움에 주의하자. 실체는 운동의 주체로서 움직이는 부분이면서 동시에 양태, 즉 운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실체는 운동의 세 꼭지점 중 하나를 차지하면서 동시에 운동의 세 꼭지점이 이루는 삼각형 자체이기도 하다. 이것은 운동의 연속성(전에는 에피쿠로스 학파가, 후에는 베르그송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반대해서 그 가능성을 한껏 열어놓았고 열어놓게 될 운동, 움직임 자체로서의 운동)과 운동의 계기성 내지 분할가능성(쉽게 운동의 이전, 이후와 운동의 과정이라는, 사유에 의해 분할되어 사고된 운동)을 하나 속에 엮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체가 양태, 속성과 같은 것이며 실체는 이 모두라는 것, 이것은 운동의 연속성, 분할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며, 실체가 속성, 양태와 구분되는 것이라는 것, 이것은 운동의 분할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실체를 산출하는 능력으로, 실체를 속성과 양태와 함께 연속적인 운동 자체로 보고자 한 것은 스피노자에게서 보다 명시적으로 나타나며 아마도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로부터 받은 암묵적인 영향을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여기에 스피노자 실체론의 가장 중요한 몇 가지 문제들 및 난점들과, 데카르트의 실체론과 스피노자의 실체론 사이의 연관관계를 더 연구해야만 할 중요성이 드러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분명 이러한 실체론의 아이디어에 머무른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에게는 또 다른 실체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다. 데카르트는 56항의 인용한 문장이 끝나고 난 뒤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신이 양태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며 단지 속성만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왜냐하면 신이 변화한다고 생각하면 안되기 때문이다.”(『철학의 원리』, 46)
신은 양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실체와 양태 사이에 공통의 형식으로서 간주된 속성을 통해 이해하고자한 활동적, 산출적 실체에 대한 아이디어는 신에 있어서는 배제되어 있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이러한 논의는 또다시 상당히 그럴 듯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은 양태들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양태들을 산출하는 활동적 실체를 창조할 뿐이며, 이로 인해 변화가 가지는 불완전성은 신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될 수가 있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신이 양태들을 필연적으로 산출해야만 할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은 반면, 데카르트는 이러한 부담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을 수 있는 논리를 가지게 된다. 또한 이 점에 근거해서, 우리는 스피노자에게 데카르트가 던질 법한 질문을 구성해볼 수 있다. 속성의 완전성 차이, 즉 실재성의 차이를 실체들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간주하지 않고 단지 실체와 양태 사이의 실재성 정도 차이로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에 따르면, 실체와 양태 사이의 실재성 정도 차이로 해소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활동하는 실체와 활동하지 않는 실체 사이의 차이이다. 스피노자는 실체의 본성이 산출하는 힘이라는 점을 자명한 사실로 간주하고 논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데카르트가 볼 때 결코 자명하지 않은 것이다. 신이 모든 점에서 완전하다면 그는 운동하고 산출할 이유가 없다. 그가 양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변화를 겪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그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태 없는 실체의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 데카르트의 다수 실체론을 정당화하는 핵심이다. 우리는 아직 이러한 사고가 가지는 함의가 무엇인지 충분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데카르트에게서 신의 의미를 운동하지 않는 실체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야말로 근대 실체론 이해에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체는 세계 내의 세계 외부이기도 하며, 하나의 세계 안에 공존하는 두 개의 세계이기도 하다. 더 많은 사변들이 요구될 자리는 남겨두기로 하고 데카르트에게서 이러한 실체론이 낳는 몇 가지 문제들을, 유한 실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 보면서 찾아보기로 하자.
3. 데카르트의 유한 실체
정신과 물체는 양태와 달리 존재하는 실체인데, 정신의 이러한 실체성은 코기토 명제에 대한 논증에서 읽어낼 수 있으며, 물체의 실체성은 데카르트의 신 개념에서 읽어낼 수 있다. 보다 간명한 쪽인, 물체의 실체성에 대해 고찰해보자.
데카르트는 스피노자와 반대로 신의 속성에 연장성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연장성은 가분적이고7) 가분적인 것은 파괴가능하고 파괴가능한 것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완전성이라는 신의 개념에 어긋나기 때문이다.8) 신이 가질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지만 우리는 세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연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라는 상식적인 신념의 고수에만 의존하고 있는 생각은 아니다. 『철학의 원리』2부 1항에서 데카르트는 물질적인 것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 곧 물질이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해 논한다.
“우리는 길이, 너비, 깊이로 연장된 어떤 물질을 감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감관이 자극되어 명석 판명하게 지각한다. 그 물질의 부분들은 다양한 모양을 지니고 있고 다양한 운동을 하며 또 우리로 하여금 색과 냄새와 통증 등의 다양한 감각을 가지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신이 직접 우리의 정신에 연장된 물질의 그런 관념을 드러나게 하거나, 연장과 모양과 운동을 지니지 않은 어떤 것으로 하여금 그런 관념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라면, 신이 사기꾼이 아니라고 믿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철학의 원리』, 67쪽)
우리는 물질이 정신이나 신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고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명석 판명한 지각이 실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류가 생긴다면(물체는 실체가 아니라면) 신은 사기꾼이 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고하게 정립된 코기토 명제의 진리성마저 의심받게 된다. 데카르트는 제 3성찰 초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사유하는 것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이 확실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최초의 인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명석 판명한 지각 이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만일 내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한 것이 거짓인 경우가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지각으로 사물의 진리를 충분히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극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일반적 규칙으로 설정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성찰』, 56~57쪽)
실제로 명석 판명한 지각은 참이라는 규칙은 논증되지 않은 채 공리처럼 들어오고 있으며 코기토 명제의 참됨, 신 존재의 참됨, 나아가 물체 존재의 참됨이 모두 이 규칙에 의존해 있다. 물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이 규칙을 부정하는 것을 함축하므로 연쇄적으로 코키토 명제의 진리성에 대한 부정으로 소급해가지 않을 수 없다.9)10)
이제 우리는 두 개의 테제를 획득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신에게는 연장성이라는 속성이 부여될 수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연장성을 속성으로 가지는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두 테제를 모순 없이 조화시키기 위해서 물체는 유한 실체로 간주된다. 명석 판명한 지각은 물체가 양태와 달리 불변하는 기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물체의 본질인 연장성은 신에게 귀속될 수 없으므로 물체는 신과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이제 모든 문제는 연장성에 대한 해석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연장성이 한 편으로는 실체의 본질로 이해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불완전한 속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 스피노자는 연장성을 신의 속성으로 포함시키는 쪽을 택했고 라이프니츠는 연장성을 실체에서 배제시키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선택이 완전히 무리한 선택인 것만은 아니다. 앞서 우리가 활동하는, 산출하는 실체와 완전한 부동의 실체를 구분했던 것에 비추어 보면, 연장성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줄 가능성이 있다. 물체의 연장성이란 사실 다양한 양태들이 산출될 수 있다는 것, 그 가능 조건에 다름 아니다. 밀랍과 초, 공기는 다 같은 물체 실체라는 점에서 사실 구분이 안되지만 그 실체의 연장성, 가분성 때문에 양태 차원에서 구분 가능하다. 활동하는 실체의 경우 그것은 운동 자체에 다름 아니므로, 우리는 실체, 속성, 양태를 완전히 존재론적으로 독립적으로 고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물체의 연장성은 물체라는 실체 자체의 무한 가분성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양태들의 산출, 양태 차원에서의 가분성(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에서 다양한 개체들이 산출될 수 있도록 하는 물체 실체의 가분성)을 함축한다. 단적으로 말해 물체 실체의 연장성은 물체 실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분되어”(실제로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실체에서 잘라낸 두 개의 부분은 실체인가 아닌가라는 라이프니츠의 의문은 부당한 것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부분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이다. 우리가 실체를 잘라낸다는 것, 분할한다는 것은 곧 양태를 산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11)12) 이제 자유 문제를 다루기 위해 앞서 남겨 두었던 정신의 실체성에 대한 문제로 들어가자.
연장성에 대한 문제보다 정신 실체를 논증하는 일은 더 어려워 보인다. 사유 속성은 신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만큼은 신의 양태일 뿐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데카르트에게는 정신에게 독립적인 존재성을 부여할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 7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의심할 수 있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거부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고자 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도 하늘도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쉽게 가정할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손도 다리도 그리고 결국 어떤 육체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우리가 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어떤 것이 생각하고 있을 때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철학의 원리』, 12쪽)
데카르트의 회의는 합리성에 따라 이루어진다. 모순적인 것은 합리적으로 의심한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의 존재도 논리적으로 이성에 따라 의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생각하는 나의 존재만은 논리적으로 의심 불가능하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생각하는 나는 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된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라는 단서 조항에 주의하자. 여기에서는 실제로 나의 존재가 신의 존재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논증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 신의 존재와 독립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곧바로 존재의 독립성에 대한 주장으로 넘어갈 수는 없지만 “나의 존재가 신의 존재와 독립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그런 인식의 존재론적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13) 데카르트는 바로 앞의 6항에서 이 점에 대해 논한다. 그에 따르면, “그 무엇에 의해 우리가 창조되었든, 그리고 우리의 창조자가 얼마나 큰 힘을 가졌든, 또 그가 어떤 속임수를 쓰든, 언제나 우리는 완전히 확실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따라서 오류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철학의 원리』, 11쪽) 의심스러운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나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근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의심할 바 없이 우리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제 4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자유의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오히려 의지가 어떤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음을 내 안에서 분명히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의지만큼 완전하고 큰 것은 내 안에 없으며, 그래서 나는 의지를 지금 있는 것보다 더 완전하고 더 큰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성찰』, 84쪽) 이어지는 데카르트의 말은 다소 놀라울 정도이다.
“물론 의지가 이와 결합하여 더 확고하고 효과 있게 만들어 주는 인식과 힘의 측면에서나, 또 의지가 더 많은 대상에 미친다는 의미에서 대상의 측면에서도, 신 속에 있는 의지는 내 안에 있는 것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것이기는 하지만, 신 속에 있는 의지는 형상적으로 그리고 엄밀히 보아 내 안에 있는 의지보다 더 큰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이는 의지는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오성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을 우리가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또 추구하거나 기피할 때에 외부의 힘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면서 그렇게 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성찰』, 85쪽, 강조는 인용자)
내가 가지고 있는 의지는 신의 의지와 동등하다. 곧, 나의 의지는 신의 의지만큼이나 완전하며 의지라는 유 안에서 무한하다. 이것은 나의 존재가 신과 대등하게 하나의 실체일 수 있다는 강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이 논점은 변신론의 측면에서도 개진된다. 신은 인간에게 유한한 능력을 주었지만 이 사실이 곧바로 인간이 오류를 범하는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논의는 신과 물체 세계를 연결시키기 위해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논법과 유사하게 진행된다. 그에 따르면, 신은 물체 세계의 변화를 직접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신은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물체 세계를 변화시키는 자연 법칙만을 창조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이 오류의 원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신은 능력만을 주었고 그 능력의 사용, 우리의 행위는 우리 자신이 원인이다. “인간은 일종의 독특한 방식으로 행동의 주체(author)가 되며 또 그 때문에 칭찬 받을 수가 있다.”(『철학의 원리』, 33쪽) 신이 오류와 악의 원인이 된다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독립적 존재성을 상정하는 것이 필요하다.14)
우리는 앞서 물체의 실체성에 대해 논하면서 두 개의 모순적인 테제를 조화시키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정신 실체에서는 물체 실체와 같은 문제는 생기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물체 실체의 경우 연장성이라는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면서도 동시에 신이 가진 완전성으로부터 배제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면, 정신 실체의 경우에 자유의지는 신과 정신 모두에 같이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칫하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는 개념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정신 실체가 가지는 자유의지는 정신 실체의 양태이지 속성이 아니다. 하지만 신이 (자유)의지를 가진다고 했을 때, 이 의지는 분명 양태일 수 없고 속성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듯이 신에게는 속성만이 있을 뿐 양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실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까? 하지만 신의 의지에 대한 언급은 실체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철학의 원리』에도 있으며(1부 35항), 실체론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세 가지 구분에 대해 말하면서 데카르트는 자신이 성찰의 첫 번째 반박에서 이성적 구분과 양태적 구분을 혼용했음을 밝히고 이어서 그 반박의 주제가 세 가지 구분들을 엄밀하게 논하는 것과 직접 관련이 없었기에 혼용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1부 62항). 데카르트가 기만자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가 『성찰』을 쓸 시기에도 속성과 양태는 다르며 신의 양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앞서 우리가 제시한 실체, 속성, 양태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나의 가능성 있는 제안은, 사유 속성을 일종의 힘 내지 능력으로 간주한다면 의지는 이런 능력의 한 측면이면서 또한 이런 능력이 실제로 발휘되는 특정한 양상(양태)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제안은 의지를 사유 속성의 한 측면으로, 따라서 속성으로 보면서 또한 정신 실체의 양태로 보자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사유가 정신 실체의 양태로도 간주될 수 있다고 한다면, 반대로 정신 실체의 양태는 어떤 점에서는 사유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한에서 의지는 사유 속성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본다면 정신이 유한 실체라는 점은 이성(오성) 능력의 유한함을 통해 해명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성의 유한함은 사유 속성의 유한한 측면이고 의지의 무한함은 사유 속성의 무한한 측면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제안은 정신 실체의 사유 속성이 완전한 것인지 불완전한 것인지 결정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결국 이 난점은 상당히 해결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러한 실체론과의 불협화음을 받아들여준다 하더라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의지의 무한함과 이성의 유한함을 정신 실체 안에 공존하게 함으로써 유한 실체를 설정하려 한 데카르트의 시도는 이제 보다 확대된 형태로 모순을 재생산하게 된다. 바로 예정 조화설과 자유 의지 간의 모순이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철학의 원리』39항~41항까지가 이 문제에 할애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데카르트의 해결법은 의외로 너무나 간단해서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의 방식은 어떤 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선 신이 모든 것을 예지하며 예정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이 예정한 것을 명석 판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이성의 유한함 때문에 우리는 신이 어떻게 예정해두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신의 예정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 우리는 우리가 자유의지와 비결정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의 예정도, 우리의 자유의지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데카르트는 양자 택일의 모순을 특이하게 “해소”시켜 버리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사태가 아무리 양자 택일의 모순으로 보일 지라도 양자 택일의 모순이 아니라는 것, 양자 택일의 모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부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두 개의 선택지는 양립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어떤 준거도 주어져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문제를 두 개의 선택지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로 바꾸어 버린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무지에 호소함으로써이다. “...우리는 신이 그런 힘[예지하고 예정하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석 판명하게 지각할 정도로 그 힘과 충분히 마주치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규정하지 않은 채 놓아두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힘을 파악하지 못한다.”(『철학의 원리』, 36쪽) 신이라면 자신의 예정 조화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떻게 양립가능할 수 있는지 그 해결책을 알고 있을 테지만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의 유한한 이성을 통해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신의 결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두 항이 신에게서도 또 실제로도 반드시 양립불가능한 것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도 신의 예정, 결정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방식의 결정이 아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인 논리에 따른 결정이기 때문에 우리의 자유 의지와 양립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어떻게 자유 의지와 양립불가능한 결정이 가능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는 반박은 오히려 데카르트의 논지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신의 예정이 우리가 추론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신의 이성의 무한함이 주장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정과 자유의지의 양립 가능성을 생각하기조차 어렵다는 점이야말로 양립 가능성에 대한 강력한 근거가 되어 준다. 게다가, 우리는 양립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아야 될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은가. 신의 예정도, 우리의 자유 의지도 어느 것 하나 부정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것이며 이것들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유한한 우리의 이성이 제공하는 논리적 법칙들에 따른 양립 불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더 올바른 선택일 것이다. 이러한 논증은 겉보기와는 달리 상당히 강력한 논증이 될 수 있다.
4. 최종적 문제
정신 실체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이것이 유한 실체를 상정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가 되어줄 수 있을까? 모든 논증 자체는 이 마지막 논증의 방식으로 진행되어 가는 것 같다. 최초에 코기토 명제의 진리성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 실체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의 진리치를 보증해준다. 이것은 우리의 유한한 이성의 한계 내에서 가장 확실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로부터 정신 실체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 근거에 대해 묻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자유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이것은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류의) 고전적 비판에 대한 하나의 참조점이 되어줄 수 있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신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철학자의 자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다. 『에티카』라는 책의 저자는 신보다 우월하거나 적어도 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책을 저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 말이다.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결정된 세계를 기술하는 것 자체는 그러한 결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 결정된 세계에 대한 기술이 또다른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최소한 결정된 세계 내의 결정에 종속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제 3종 인식, 직관지는 사실상 그러한 자유의 표현이 아닐까? 이러한 의문은 데카르트가 자유의 높은 단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을 보자면, 더 타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데카르트는 제 4성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롭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 가운데 한쪽으로 내가 기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내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질수록, 내가 참된 것과 선한 것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이쪽에서 명증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든, 혹은 신이 이쪽으로 기울도록 내 생각의 내부를 배치했든 간에, 나는 더욱 더 자유롭게 이쪽을 선택하는 것이다. 실제로 자유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도, 자연적 인식에 의해서도 감소되지 않으며, 오히려 증대되고 강화된다.”(『성찰』, 86쪽)
여기에서 데카르트는 필연성과 자유가 양립가능함을 주장하고 있다. 강제로부터의 자유 뿐 아니라 선택의 자유까지 인정하는데, 이것은 스피노자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자유의 개념이다. 만약 이러한 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 있다면 스피노자도 능히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을 법하다. 어찌되었든,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15) 만약 여기까지 동의할 수 있다면 이제 우리는 유한 실체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렵게 된다. 자유 의지를 가진 정신은 오류를 범할 수도 있고 범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행위의 원인은 전적으로 정신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신이 준 능력과, 정신 실체가 행하는, 능력의 사용이라는 미묘한 구분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우리가 앞서 제시한 실체론 해석에 부합한다. 신은 활동성의 원인이 아니라 활동성의 근거의 원인이다(그는 능력을 주었지 행위를 준 것이 아니다). 신에게 양태가 없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대로 유한 실체는 활동하는 실체이고 따라서 양태가 있으며 그에 있어서 속성은 활동하여 양태를 산출하는 원인이자 힘이 된다(일단 의지가 신에게서 속성인 동시에 정신에게서 양태라는 문제는 신과 유한 실체의 속성은 이렇게 활동성하는 실체인가 아닌가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반대쪽에서 제기할 수 있는 마지막 반론은 예정 조화와 자유 의지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에 대한 것인데 그에 대한 논증은 앞서 살펴 본 바 있다. 앞서의 것들, 자유의지의 존재가 부정될 수 없다면, 예정 조화의 결정론적 아이디어로 자유의지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결정론적 아이디어는 유한한 이성으로 신의 무한한 이성을 파악하게 되는 결과를 함축하고 이는 결국 신의 무한함을 은연중에 유한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논증들은 결국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가 채택하고 있는 논증과 증명의 기준에 의존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것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겠다는 기준이다. 이 기준은 뒤집어 말하면 어떤 것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는 근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거짓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참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6). 그리하여 신과 정신 실체의 존재가 이러한 방식으로 확립되었다면 이제 물체 실체의 존재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여전히 물체 실체에서 연장성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아마 데카르트가 연장성을 신의 속성으로 간주하였다면 보다 정합적인 체계가 되었을 것이다. 그 경우 물체 실체의 존재는 정신 실체의 매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지만 신이 우리의 명석 판명한 지각의 진리성을 보증해주고 있으므로 물체 실체의 인식이 정신 실체에 의존적이라고 해서 물체 실체의 존재 자체가 다른 실체에 의존적이라는 점은 나오지 않으므로 무난하게 물체 실체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유한 실체를 상정하고자 한 데카르트의 시도는 내재적으로는 비정합적이지 않으며 모순적이지도 않다. 그 시도는 다소 복잡한 논증을 거치고 있어서 그 결론인 신에 의존하는 실체라는 것만을 놓고 보자면 모순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데카르트의 진리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불화는 이제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제시한 진리성의 기준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식의 논박, 즉 실체라는 개념의 엄밀하지 못한 적용이라는 논박이 가진 단순 명료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을 참된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스피노자 못지 않게 데카르트에게도 할 말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1) 스피노자 『윤리학』의 인용은 『에티카』, 스피노자 지음,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을 사용했다. 쪽수는 따로 표기하지 않는다.
2) 『성찰』,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문예 출판사, 1997, 72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괄호 안에 제목과 쪽수로 표기.
3) 『철학의 원리』, 르네 데카르트 지음, 원석영 옮김, 아카넷, 2002, 24쪽. 이하 인용시 본문에 괄호 안에 제목과 쪽수로 표기.
4) 『스피노자의 철학』, 질 들뢰즈 지음, 박기순 옮김, 민음사, 1999, 124~125쪽.
6) AT Ⅶ, p. 108. 『데카르트와 회의주의』, E. M. 커리 지음, 문성학 옮김, 고려원, 1993, 220쪽에서 재인용.
8) 이 점과, 이에 대한 스피노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Behind the Geometrical Method: A Reading of Spinoza's Ethics』, E. M. Curl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25~26쪽 참조.
9) 물체의 존재에 관해 주제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물론 제 6 성찰이다. 하지만, 커리에 따르면 이 성찰의 실제 주제는 “내가 이전에 감각을 통해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중에서 어느 정도가 참인가?”라는 물음이며, 데카르트 자신은 물체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이미 앞서의 성찰들에서 충분하고도 확실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 것처럼 보인다(커리, 『데카르트와 회의주의』 353쪽 참조). 그가 이렇게 간주한 이유는 아마도 물체 존재의 증명은 그 자체로는 논리적 문제가 없으며 이론의 여지가 있다면 앞서의 다른 논증들, 즉 코기토 명제나 신 존재 증명의 타당성으로 소급해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 코기토 명제와 신 존재 증명이 문제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면, 물체 존재 증명은 무리 없이 도출되는 것으로 간주한 것 같다. 이 점에서 제 6성찰의 물체 존재 논증을 따로 다룬다는 것은 다소 부차적일 것 같다.
10) 코기토 명제, 신의 존재, 물체 존재 이 각각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분명히 해두자면, 코기토 명제의 진리치는 신 존재의 진리치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신이 부정된다고 해서 코기토 명제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물체 존재의 진리치는 신 존재의 진리치에 의존하기 때문에 신이 부정되면 물체도 부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셋 모두의 진리치는 명석판명한 인식은 참이라는 규칙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물체 존재의 진리치는 이 규칙과 신 존재의 진리치 모두에 의존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두 가지 근거의 역할이 각각 다르다는 점을 주의하자. 규칙은 물체가 존재함을 직접 보여주며, 신의 존재는 물체 존재의 거짓됨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물체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11) 앞서 각주에서 지적했듯이 이러한 해석은 연장성은 파괴가능성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신에게 귀속시킬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과 상충되는 문제를 갖고 있다. 문제는, 변화 가능성이 파괴 가능성을 직접 의미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변화 가능성이 곧 파괴 가능성은 아니라면 연장성은 변화 가능성이지 파괴 가능성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며 이 경우 우리는 연장성을 실체에 귀속시키면서도 신에게는 귀속시킬 수 없는 정당한 이유를 갖게 된다. 하지만 변화 가능성을 파괴 가능성에 연결시키지 않고서 어떻게 변화 가능성이 곧 불완전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는 남아 있다. 아마도 데카르트는 이에 대해 완전성은 변화할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완전성과 변화 가능성은 직접 모순된다는 입장을 취할 것이다.
16) 물론 거짓이 아니라고 해서 반드시 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우리가 참이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분명 어떤 것은 참임을 중명해야만 할 것이다), 데카르트로서는 1)그것이 참일 수 있는 근거를 증명의 엄밀한 방식으로는 아닐지라도 제시할 수 있고 또 2)그것이 거짓임을 부정할 근거가 없다면, 이 두 가지 조건들은 어떤 것의 진리성을 충분히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이런 약한 기준의 채택이 불러올, 방법적 회의 너머의 회의에 대해서 데카르트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한 기준은 우리의 유한한 이성이 획득할 수 있는 최대의 것에 대한 기준이다. “우리가 어떤 진리를 명석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하자마자,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설득한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설득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는 것을 의심할 어떠한 이유도 결코 가질 수가 없다면, 그 이상 탐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합리적으로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확실성을 갖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가 아주 강력하게 그 진리성을 확신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이 신이나 천사의 눈에는 허위로 보인다고, 따라서 절대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허위라고 짐짓 말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우리가 그것을 전혀 믿지 않거나 혹은 그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경우 왜 우리는 이러한 절대적 허위성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확신이 너무나 확고하여 그 확신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추정하였으며 따라서 그 확신은 가장 완전한 확실성과 같은 것이다.”(AT Ⅶ, pp. 144~45. 『데카르트와 회의주의』 172~173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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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undera 작성시간 03.07.30 오랜만에 본격적인 글이 올라와서 기쁩니다. 한데, 아쉽게도 이런 글엔 답글이 올라오지 않죠. (반성중 ^^;;) 질 님의 꼼꼼한 독해는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하도록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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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gilles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3.08.01 페이지가 넘어가서 볼 지 모르겠지만... 빈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간만에 저도 카페에 글 올려서 약간 회원 티를 내봤습니다. 조만간 많은 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글을 올려서 "대화"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그럼 또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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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undera 작성시간 03.08.01 절대 빈말이 아닙니다. 이 같은 글들이 조금 많이 올려졌으면 합니다. 절대적으로. 조금 전문적인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이런 작업은 탄탄하고 본격적인 사고를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징검다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