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신진범옮김,들녘, 2003년
11살 아이의 비극을 한해가 아닌 분리된 가을, 겨울, 봄, 여름으로 나누어 놓은 작품으로, 그 당시 사회상황의 폭로가 있는 토니 모리슨의 처녀작이다. 화자의 이동은 이 작품에서도 역시 보인다. 아름다움의 잣대는 어떻게, 누가 만들어주는가? 무엇을 아름다움이라 생각하는가? 인간의 삶이란, 절대미가 아닌 상대미의 발견으로 인해 서로 마주보며 보기 좋더라는 아름다운 삶에 빠지는 것 아닌가? 클라우디아라는 흑인 소녀의 눈에 보여진 소녀 피콜라의 가족과 그들의 꿈과 현실, 그리고 로레인의 사람들이 보여진다. 여기에서 피콜라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푸른 아름다운 눈의 소유자가 되어, 이제까지와는 다른, 누가 보아도 멋지고 아름다운 소녀가 되어 보다 멋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꾸만 반복되는 만약, 푸른 눈의 예쁜 아이였다면 내 인생도 분명 달라졌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피콜라의 삶을 통해, 1941년 그때의 인종차별과 현실을 글로 보여주는 것보다도 더 적나라하게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인물들
a.아이들
시간이 흘러 클라우디아라는 화자가 있다. 1941년 가을에는 금잔화가 꽃이
피지 않았다고 말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고양이와 함께 그림같은 집에서 살고 싶은 한 소녀의 비극이 점차로 보여진다. 여성과 출산가능에 접어드는 피콜라의 초경이라는 사건에 대해 먼저 얘기하고 있다. 월경에 대해
그녀들이 들은 얘기란 이제부터는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과 아이를 갖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을 받아야한다는 것이다. 시작부터 이 작품이 어떻게 갈지 미리 알려준다. 이렇게 여성의 생리적인 특성과 사랑과의 연관관계를 시작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가장 푸른 눈을 갖고 싶은 아이인 피콜라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때론 화자가 되는 클라우디아와 언니 프리다가 있었다.
b.폴린
열한번째 중 아홉째인 자식으로 태어난 폴린은 열다섯이 되도록 집안일과
동생들을 돌보며, 남자에 대한 환상과 주님에 대한 환상만을 품고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휘파람을 불며 나타난 남자가 그녀의 발을 간지른다.
그 남자는 촐리다. 폴린과 촐리는 그렇게 사랑한다. 그녀는 결혼한 후, 백인 가정의 가정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 촐리가 돈을 달라며 찾아온 바람에
백인여자 밑에서의 가정부 노릇을 하지 못한다. 백인 여자가 자기 집에서
일하고 싶으면 촐리와 헤어지라고 요구하는데, 이때 그녀는 가정부 일을 그만두고 남편을 선택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아이를 갖게 되고, 다시 신혼때처럼 좋아 지내는 사이가 되기도 하지만 그녀는 환상 속에서만이 살아있는
존재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두운 극장을 찾는 삶 속에서 헤메게 된다. 영화를 통해 그녀의 환상은 더이상 지상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그녀가 본 영화란 하나같이 아름다운 백인남녀가 나오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며 절대미(絶對美)의 기준을 찾아낸 그녀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절대미'라는 잣대로 잴 수 없었기 때문이다.(146쪽)'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끝없이 백인들에 의해 형성된 절대미에서, 흑인인 자신을 망각한 채, 아이를 출산한다. 아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애는 내 생각과는 달랐어. 마음의 눈으로 그 아이를 보았을 때, 마치 엄마의 소녀 시절 사진을 보는 것 같았어, 누군지는 알겠는데
영 지금 모습과는 다른 사진 말이야.(149쪽)'으로 말하는 것처럼, 그녀는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가, 환상 속의 그녀의 시간에 너무도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다. 이렇게 그녀는 신에 대한 끝없는 환상으로인해 신실한 신자의 삶과 함께 백인들의 절대미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의미없는 몽상가적인 삶만을 살뿐이다.
c.촐리
촐리는 태어나자 마자, 엄마가 철로 옆에 버려진 것을 할머니가 주워 기른다. 14살이 되던 해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그즈음, 달린이라는 여자아이의
끈을 묶어주다가 성교의 과정으로 가는데 이때 백인들에 의해 비춰진 불빛으로 그는 첫경험에서 굴욕을 맛본다. 이로인해 그에게 성행위란 백인들이
맘껏 놀려대는 수치스러운 행위이고, 그의 욕망 자체는 증오스러운 본능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또 여기에 괴롭힌 백인이 아닌 달린에게 증오의 화살을 돌리는 어이없는 방향전환이 생겨버린다. 이 행위로부터 가능성이 없었음에도 달린이 임신했을까봐,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그곳을
떠난다. 그곳을 떠나 그를 부정한 아버지를 찾아가는데, 아버지는 또다시
부정한다. 이러한 삶을 거쳐 그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가 되는데,
어느날 딸이 한발로 다른 발을 긁고 있는 상황에서 예전 폴린에 대한 사랑의 환상과 욕망으로 그의 11살 딸을 범하게 되는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인
인물이다.
d.소우프헤드
사람들과의 사소한 접촉에 오랫동안 혐오감을 느껴 물건만 사랑한 늙은 남자가 있었다.(195쪽)로 시작하는 소우프헤드에 관한 부분이 봄에 나온다. 아무런 힘이 없는 목사, 신과 만나지만 그가 하는 일이란 어린 소녀들을 추행하는 일이고 초기 설교시절에서 이름 부쳐진 소우프헤드 처치의 이름에 걸맞게 분노, 동경, 오만, 복수심, 외로움, 불행, 좌절, 배고픔으로 찾아온 그들이 원하는 사랑, 건강, 돈에 관해 조언을 해주는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는 늙고 병든 자신과 같은 개가 있다. 그는 개를 위해 독약을 준비했으나, 공포심때문에 그것을 사용하지 못한다. 어느날 소녀의 방문을 받는다. 소녀 이렇게 말한다. "눈을 푸르게 해주세요."(205쪽)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그는 '여기에 못생긴 소녀가 아름다움을 달라며 서 있다. 애정과 이해심이 한순간 솟구쳤다가 노여움으로 바뀌었다. 그녀를 돕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205쪽)'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가 창가의 개, 보브를 보고서, 약간의 제물을 바쳐야 한다며 독약이 든 음식을 개에게 가져가라고 한다. 가장 파란 눈을 가진 고양이에 이어, 피콜라가 신에게 바친 또 다른 제물이 된다. 이때 소녀의 행동은, 입을 가리고서 약간 뒷걸음친 후 돌아서서 마당 밖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이를 보고서, 소우프헤드는 인간의 본성을 창조함으로써 그것을 아주 고상하게 만드신 분이라 말하며 신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한 것은 그 못생긴 소녀를 희롱한 것도, 몸을 만진것도 아닌, 다만 당신이 해주지 못한 것을 장난을 친 것뿐으로, 그 아이에게 코발트 빛의 푸른 눈을 두개 주었다며 안부의 편지를 쓴 후, 그는 상아색 꿈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늙은 개의 시체를 발견한 늙은 여자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소우프헤드는 나이을 먹게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목사 행세를 하며 오하이오주 로레인에 정착한 인물로써, 젊은 날 사랑하던 아내 마저도 그가 즐기는 우울때문에 '죽은 삶을 되살려 낼 사람은 어디 있는가(201쪽)'라는 말을 하며 떠났다. 지금, 그는 신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 신이 해주지못한 일들(사랑,건강,돈)을 대신 해주며, 늙은 개와 함께 살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이 소우프헤드의 존재로 인해 피콜라가 갖게 되는 푸른 눈에 대한 환상의 근원은 존재하게 된다.
*무심과 잔혹
간혹 그런 경험이 있다. 슬프거나, 기쁜 일에 있어 그 슬픔과 기쁨을 글로
혹은 말로 표현했을때, 그 표현된 말과 글이 감정상태의 강도에 너무도 확연히 미치지 못하는 것을 경험한 경우가 있다. 한없이 주체하기 어려울 감정일 거로 생각하고서 표현조차도 힘들었던 일들이 정작 표현하고보니 약간
넘치는 감정뿐이었고, 표현된 것을 보니 너무도 일상적인 감정뿐이었음을
경험할 때가 있는 것이다. 한데 이 작품은 표현하는데 있어 일부러 아무것도 아닌척, 흘러가는 지나가는 노래처럼 흘려 보내, 읽으면서는 작가의 의도대로 같이 흘러가는데, 읽고나서 남은 잔상은 너무도 가혹한 현실을 느낀다. 아무것도 아닌척 표현하며, 한 소녀에 대한 철두철미한 싹밟기를 감행하는 작가를 통해 전달에 있어, 위장과 절제가 미치는 파동을 경험한다.
태연한 척 말하고 있는 클라우디아의 표현을 보자.
'우리의 아름다움은, 처음에는 모두 그 아이의 것이었고, 나중에는 그 아기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그 아이가 알고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아이를 통해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나서 아주 건전해졌다고 느꼈다. 못생긴 그 아이를 짓밟을 때 우리는 아주 아름다웠다.(241쪽)' 아버지는 감화소에서 죽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가정부로 일하고 가장 푸른 눈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 피콜라를 가끔 만난다.
자신이 아름다웠더라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괴로운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믿는 피콜라와, 영화의 이미지에서 구축된 백인들에 의한 절대미의 환상과 기독교도로서의 순응적인 삶을 살아간 어머니와, 양쪽 부모에게서 버려진 아이라는 것과 첫경험의 치욕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의 딸 겁탈이라는 파격과 아이 임신, 그리고 물신숭배자로써 신과 같은
장난을 하는 인간을 마주하게하여, 가혹한 현실을 통해 작가가 말하는 주제는 확연하다. 아름다움의 척도가 왜 백인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누가 타인의 사생활을 간섭할 수 있는가? 흑인 가정폭력은 그들 자체에서 발생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주제를 말하기 위해 한 아이의 잔혹한 삶과 환상을 보여주고 있다. 가능성과 실제성에서 실제로 꼭 보여주어야만 했을까? 결국, 아버지는
감화소에 어머니는 다시 백인 가정부로, 아버지의 아이를 가졌다가 사산하고서 환상만으로 '가장 푸른 눈'을 갖게되는 피콜라의 삶은 너무도 처절하다. 작가 후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한 아이가
푸른 눈을 갖고 싶다는 슬픈 어조로 말을 하자, 그녀가 그 아이의 모습을
그려보았는데, 무지 기분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얘기라고 작가 스스로 말하고 있다. 단지 푸른 눈을 갖고자 한 흑인소녀에서, 아름다움의 잣대에 대한 의문제기에는 공감하나, 흑인이기에 이렇게 욕망과 학대를 선혈이 낭자한 채 보여주어야만 했는가를 반문하게 된다. 그것도 10살도 되지않았던 아이의 눈을 비쳤던 사실이라는 데 작가는
너무도 잔인하고 공격적이다. 이런 이유로 지난 과거의 일이지만, 성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씨앗 자체마저 까맣게 불태워버리는 잔인한 작품이다. 너무도 충실한 의도의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더욱 더 냉혹한 인간이 보여지는 것은 시작부의 띄어쓰기 없이
보여지는 소녀의 바램으로 보여지는 문장이다.
여기에집이있습니다초록색과흰색으로칠한집입니다문은빨간색입니다아주예쁩니다여기에가족이있습니다어머니아버지딕그리고제인이초록색과흰색으로칠한집에서살고있습니다그들은무척행복합니다제인을보세요빨간옷을입고있습니다제인은놀고싶습니다누가제인과놀아줄까요고양이를보세요고양이가야옹야옹웁니다(10쪽)
그래도 그나마 이 작품에 있어, 작가의 이러한 무심한 냉혹함에 대한 출구가 되는 것은 바로, '왜'라 물을 수도 없는 사건이었지만, '어떻게'라는 말에서 피난처를 구한다는 다음 문장들을 통해서다.
피콜라의 아버지가 그의 씨앗을 검은 피부의 자기 딸에게 뿌렸던 것처럼 우리도 검은 흙으로 덮인 작은 땅에 씨앗을 파종했다. 우리의 순수와 믿음은
피콜라의 아버지가 지녔던 욕정과 절망만큼이나 비생산적이었다. 지금 분명한 것이 있다면 희망, 두려움, 욕정, 사랑 그리고 슬픔, 그 모든 것 중에서
피콜라와 불모의 땅만 남았다는 것이다. 촐리 브리드러브도 죽었고 우리의
순수도 사라졌다, 그 씨앗들도 메말라 죽었고 피콜라의 아기도 죽었다.
'왜'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왜'라는 말의 해답을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어떻게'라는 말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13쪽)
*공격성과 관용
이 작품에 대해 나중 작가후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여성적인 표현을 위해 노력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여성적인 겉모습에 만족해야 했다. 그 이유는 작품 전체에서 소설의 첫 문장과 같은 여성적인 서브텍스트를('모두가 쉬쉬했지만'에서처럼 깜짝 놀라 열성적으로 떠드는 여성들을)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피콜라의 분열된 모습이 보여지는 문장은 여성적이라는 의도가 보인다.
-왜 학교를 그만뒀지?
그들이 그만두게 했어.
-누가 그만두게 했는데?
몰라. 나는 푸른 눈으로 학교에 갔지. 그 다음날 그들이 브리드러브부인더러 나를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더 이상 학교가 가지 않아. 난
괜찮아.
-괜찮다고?
그래, 괜찮아. 그들이 편견을 가진 것뿐이야. 그게 다야.
-맞아.그들은 분명 편견을 가지고 있어.
내가 푸른 눈을, 그것도 그들보다 더 푸른 눈을 가졌다는 ,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편견을 보였어.
-맞아.
내 눈이 더 푸르지, 그렇지?
-그럼, 그렇고 말고. 훨씬 더 푸르지?(231쪽)
하지만 피콜라와 아버지의 관계, 고양이의 죽음, 개의 죽음이 보여지는 데에서 작가는 작품의 힘이 더 느껴진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이 작품이 그렇게 와닿는다. 이 작품을 통해 은폐된 듯 보여지는 공격성과 잔혹성은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갈수록 다듬어지는 것 같다. 1970년 발표된 이 작품은 흑백 인종차별, 남녀 불평등, 아동 학대, 성에 무방비로 노출된 아동 등에 관한 과도한 생각이 보여지는 데 비해, 나중 <파라다이스>에서 보면 흑과 백에 대해 일부러 흑백이 뭐가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약간은 무심한 작가를 만난다. 급기야는 독자 스스로 먼저 구분해보게되는 흑백 구분에 대해 흑백구분의 애매성에서 미지성으로 일부러 그려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가장 푸른 눈>에서는 유독 흑백에 대해 자꾸만 주입시키고, 흑인과 깜둥이 그리고 백인에 대해서 유독 강조하고 있는 인종의 피부색이다. 이런 이유로, 책을 읽고난 뒤 이런 생각을 잠시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흑백문제에 있어 관용의 시선을 갖게 된 평등한 세상을 작가가 만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