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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허먼 멜빌 읽기 (1) : <모비딕(백경)>

작성자kundera|작성시간01.05.13|조회수648 목록 댓글 0
허먼 멜빌, <모비 딕>, 오국근 옮김, 삼성출판사, 1984 카프카만큼이나 생전에 거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불후하게 죽은 멜밀, 그가 32살에 쓴 작품이 바로 <모비 딕>(1851년)이다. 이 작품에 대한 수식어 중 가장 어울리는 것은 바로 '고래와 같은 책'이라는 표현인데, 이것이 뜻하는 것은 단지 이 작품이 고개를 다루었다는 것에서 생긴 것이다. 아니다. 표현 그대로 이 소설은 고래와 같이 거대한 책이다. 인간문명에 새롭고 거대한 변화가 있지 않는 한, 다신 이와 같은 소설이 쓰여질 수 없을 것이다. 1. 이게 소설인가? 이 소설이 처음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황하기 것은 바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기묘한 구성 때문이다. 쿤데라는 소설에 에세이라는 장르를 뛰어나게 삽입시킨 작가로 <몽유병자들>을 쓴 블로흐를 드는데, 이는 멜빌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을 반영한다. 사실, <모비 딕>만큼 에세이이란 장르가 소설 속에서 훌륭하게 소화되고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허나, 이런 외부 장르의 삽입은 소설 전체 구성을 크게 해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고 이 점이 바로 멜빌 당대의 사람들이 이 작품을 폄하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 이런 소설 외적 요소는 비단 이것뿐이 아니다. 소설 처음은 이스마엘이란 인물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서술하는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소설이 조금 진행되자 전지적 시점에 가깝게 변해버리고 만다. 처음 중요하게 등장하는 퀴퀘크는 중반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후반에 가서야 그것도 잠시 언급될 뿐이다. 이는 이 작품의 주인공 에이헤브도 예외가 아니다. 서술자 이스마엘은 도무지 인간들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들을 묘사하는 대신, 고래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거의 절반 이상의 분량을 소모한다. 그럼,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고래란 말인가? 맞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에이헤브가 아니라, 바로 고래이다. 이 같이 인간의 역할이 극도로 축소된 경우를 우린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에서 중요한 것은 청년과 그의 소꿉 친구인 여자가 아니라, 바로 오토바이이다. 이런 기괴한 현상은 왜 이러나는 것일까? 그리고 이로 인해 갖게 되는 효과는 무엇일까? 또 그나마 인물 중심으로 서술된 부분은 지극히 연극적 형태를 띠고 있다. (일부분은 완전히 연극적인 장면도 있다. 예를 들어 <40>장) 등장인물을 묘사하는데 있어 화자는 심리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로 하여금 독백을 하거나(<37>장은 완전히 에이헤브의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적어도 연극적 발언을 하도록 만든다(이런 경우는 수없이 많다). 화자가 소설적 서사를 하게되는 것은 오로지 고래와 인간이 만나 싸우는 장면뿐이다. 이런 연극적 요소의 우위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물론, 이 두 작가 소설 속에 나타나는 연극적 요소가 가지는 차이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모비 딕>에 나타나는 연극적 요소란 말 그대로 지극히 연극적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다. 이 점에서 멜빌은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쿤데라에 가깝다. 멜빌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들의 문제성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멜빌과 쿤데라의 비교 멜빌과 쿤데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만남 같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차이점만큼이나 많다. 특히 <불멸>의 쿤데라와 말이다. 우선 <모비 딕>과 <불멸>은 구성상 소설이란 장르가 가진 잡식성이 가장 발휘된 작품이다. 에세이, 희곡적 요소가 아무 무리 없이 소설 속으로 들어와 중심 서사를 강화시켜준다. 또 인물의 유동성 및 시점의 자유로운 변화 등등 소설이 가지고 있는 자유분방함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작가의 공통점은 비단 형식적 측면에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한결같은 전진은 있을 리 없다. 또한 정해진 단계를 거쳐 나아가다가, 마지막에 딱 정지되는 건 아니다. - 즉 어린아이의 무의식적인 도취, 소년시절의 생각 없는 신앙, 청년의 의혹(만인에게 공통되는 운명), 그리고 회의, 그 다음에 불신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만약에?"라는 침착한 숙고를 하게 되었을 때 삶은 정지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 그 단계를 거치고 나면 우리는 또 같은 일을 되풀이하여 영아가 되고, 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 영원히 "만약에?"를 되풀이하는 것이다.(<114>장, 459쪽) 이 부분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불멸>에서 루벤스를 이야기하면서 비유로 든 '문자반'과 같다. 인간은 시간에 따라 변해간다. 하지만, 그것은 발전이라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정 궤도를 돌뿐이다. <모디 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런 문자반의 궤도를 한번은 다 돈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발전이란 없다. 오직, 하나의 몸짓만 있을 뿐이다. 특히 에이헤브의 경우, 그는 모비 딕과의 대결로만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녜스가 불멸에의 저항이란 하나의 몸짓으로 압축되는 것처럼. 물론, <불멸>에선 아녜스의 이런 몸짓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모비 딕>은 이런 과정들을 잘라내고 마지막 몸짓만 보여준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이 이상하고도 뒤죽박죽 엉켜 버린 일에서 때로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인간은 이 우주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면서도 그 장난감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한 것은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고 다만 내 멋대로 생각하면 그만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낙담하지 않으며, 어떤 일에 의문도 갖지도 않는다. 그는 온갖 사건, 주의, 신조, 신념, 이론, 예측 가능의 또는 예측 불허의 온갖 어려움, 그런 것이 아무리 삼키기 어려워도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꿀꺽 삼켜 버리고 만다. 그것은 위장이 튼튼한 타조가 총알이건 부싯돌이건 통째로 꿀꺽 삼켜 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소한 고생이나 걱정, 돌발적인 재난의 예상, 생명의 위기 같은 것은 문제도 되지 않으며, 죽음이라는 것, 그 자체도 그에게는, 들은 바도 본 적도 없는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장난꾸러기에게서 기분 좋게 얻어맞았다든지, 옆구리를 맹랑하게 걷어챈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기묘한 변덕은 극도에 달한 고통 속에서만 찾아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장 진지한 순간에만 찾아오는 것이므로, 조금 전만 하더라도 가장 중대한 일같이 보여진 것이 농담의 일부로밖에 보이지 않는 수가 있다. 이렇듯 자유분방하고 평이한, 낙천적이며 절망적인 철학을 낳게 하는 것으로서는 위험을 안고 있는 고래잡이에 따를 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나로서도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피쿼드 호의 전체 항해와 그 목표인 백경 추적에 관해서 지켜보고자 한다.(<49>장, 230-231쪽) 우주를 커다란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것, 아무리 중대한 것도 농담에 지나지 않다는 인식은 <농담>에서 루드빅이 깨닫게 되는 진실이고, 쿤데라 소설의 기본 사상이다. 솔직히 말해, 쿤데라 소설의 인물들 대부분은 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또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데, <모비 딕>에 등장하는 포경선 선원들은 이미 그 사실을 삶 속에서 깨달은 상태로 등장한다. 쿤데라 소설을 지배하는 근원적 세계관(사건을 이끌어 가는 힘)이 <모비 딕>에선 기본전제로서밖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서, 우린 쿤데라 소설이 끝나는 지점, 바로 그 지점에서 멜빌 소설이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소설적 발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왜냐면 이는 뒤집어서 '멜빌 소설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쿤데라 소설이 시작한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현대적인' 비극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비극적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단순히 비극적 경향이 보인다는 정도가 아니다. 더욱이 이 소설이 가진 비극적 요소는 세익스피어 비극보다 그리스 비극과 더욱 가깝다. 에이헤브와 그의 선원들을 비극으로 몬 것은 성격이기라기보다는 운명이다. (이 소설에서 성격이 문제가 안 되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등장인물들이 이미 개개의 인간 성장의 발전을 이미 마친 상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된 요인은 이 소설이 인간이 아니라, 고래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헤브는 영원히 에이헤브야. 이 모든 연극은 변함없이 진행되어야 한데. 이건 이 바다가 물결치기도 전, 억만년이나 옛적부터 자네와 내가 연습해 온 것이다. 바보 같으니! 나는 운명의 부하다. 명령대로 할뿐이다. 너희들 졸개들은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134>장, 522쪽) '에이헤브는 영원히 에이헤브다'라는 말은 그의 인간적 발전이 모두 종료되었다는 선언이자, 이제 운명과의 대면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장 단계에선 운명이란 '미래'로 미루어질 수 있다. 왜냐면, 성장 단계(즉, 문자반을 돌고 있는 바늘이 아직 시작점에 도착하기 전)에선 운명이란 극복할 수 있는 대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경선에 선 사람들에게 그런 환상이 남아있을 리 없다. (단 서술자인 이스마엘을 포함한 미친 피프 등 몇 명은 제외다) 에이헤브의 '나는 운명의 부하다'라는 선언은 이를 단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이는 그가 조금 앞부분에서 한 의문과 같은 말이다. '에이헤브는 과연 에이헤브인가?'(<132>장, 505쪽) 그럼, 이들을 모비 딕과 대결하게 만드는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이스마엘은 다음과 같이 에이헤브를 분석하고 있다. (...) 에이헤브처럼 보이는 어떤 존재가 선실에서 뛰쳐나올 때, 그의 육체의 눈에서 번쩍이는 고난의 영혼은 하나의 공허, 형체 없는 몽유병적 존재물, 살아 있는 빛의 뭉치, 물들일 수 있는 대상도 없는 광선, 그야말로 허무 그 자체였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늙은이여! 그대의 망념은 그대 속에 또 하나의 생물을 창조했다. 스스로 치열한 의식에서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된 인간, 그대의 심장은 영원히 독수리의 먹이가 되었고, 그 독수리야말로 바로 그대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44>장, 207-208쪽) 이 소설에서 에이헤브는 육체를 가진, 변화가 가능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정신 그 자체이다. 우린 이와 같은 인물을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찾아볼 있는데, 이런 부류 인간들이 시도하는 것이란 바로 '허무'와의 대결이다. 물론, 이들이 행하는 대결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기 마련이다. 왜냐면, 그들이 부정하고자 하는 대상이란 곧 자기자신이기 때문이다. 깨달음(불멸)과 소멸의 동시성! 이것 자체가 또 다른 깨달음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현대적인' 비극을 구성한다. 여기서 현대적인 비극이란 연극 그 자체로 충족적인 비극을 말한다. 4. 고래란 무엇인가? / 에이헤브의 광기 <모비 딕>을 읽고 "고래(또는 모비 딕)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고도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과 같다. <모비 딕>은 고래에 대한 소설이고, 절반 이상이 고래에 대한 객관적 또는 주관적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앞에서도 한 바 있다. 한데도 "고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일반적으로 고래는 악의 상징으로, 또는 정반대로 신의 상징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한데, 이는 인간을 중심에 놓고, "대결"이란 입장에서 바라본 편협한 생각이다. 에이헤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마분지로 덮어씌운 가면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나 어떠한 사건이건- 의심할 바 없이 살아 있는 행동은 말이다, 그 엉터리 같은 가면의 배후로부터 어떤 알지 못하는 그런 합리적인 길을 찾아서 뚫고 나오는 법이야. 만일 사람을 때려 주고 싶다면 그 가면을 걷어내고 때려야 하는 거야. 죄수는 벽을 깨뜨리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지. 내게는 그 흰 고래란 놈이 벽이란 말일세. 벌써 가까이 다가오고 있단 말이다. 그러나 저편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 그러나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그놈이 나를 괴롭히며 나에게 덤벼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악의로 맹렬히 힘을 모아 포악한 힘으로 달려드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 그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한 것이 무엇보다도 내가 미워하는 거다. 그 백경이 악의 사도이건 혹은 본체이건 나는 그놈에게 나의 증오를 풀겠다는 것이다. 나에게 신을 모독한다고 말하지 말게나. 모욕을 당하면 태양이라도 대려 부술 테다. 만일 태양이 그런 것을 할 수 있다면 나도 그 반대의 것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모든 생물체 속에는 일종의 공명정대함이라는 것이 뽐내며 자리잡고 있지. 그러나 그 공명정대함도 나를 좌우할 수는 없어. 내 위에 또 누가 존재하는가? 진리는 끝이 없는 거야. (Who's over me? Truth hath no confines)(<36>장, 171쪽) 에이헤브에게 있어 백경이란 존재는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한 것/불가해한 inscrutable thing'로 일종의 '벽'이다. 아베 코보가 그의 중편 <벽>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게 밝혀진 후, 지구의 끝, 낭떠러지로 외부에 존재했던 벽(한계)이 이젠 지구 어느 곳에나, 즉 인간 개개인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내 위에 또 누가 존재하는가? 진리는 끝이 없는 거야. (Who's over me? Truth hath no confines)'라는 말과도 연결될 수 있다. 내 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자신 위에 존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일 뿐이라는 인식이며, 진리엔 끝이 없다는 것은 진리란 바로 자기 자신의 한계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해서, 에이헤브가 백경을 추격하는 것은 바로 벽, 한계, 진리에 대한 부딪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부딪침'이란 구체적으로 무얼 말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특히 스타버크가 나를 미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악마다. 이중으로 미친 광인이다. 이처럼 맹렬하게 일어나고 있는 광기는 내가 광기라는 것을 이해했을 때만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예언은 내 몸뚱아리가 산산이 부서질 거라고 했었지 - 좋다, 이 다리는 날려 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제 나를 찢어놓은 자를 갈기갈기 찢어놓겠다고 예언을 한다. 이제는 예언을 하는 자와 행동을 하는 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위대한 신들이여! 그대들 힘으로도 이런 것은 할 수 없었다. (<37>장, 175쪽) 예언을 하는 자와 행동하는 자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한계와의 부딪침으로 이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대결이기도 하다. 왜냐면, 한계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 에이헤브에게 있어 백경이란 그 자신이란 말인가? 결론적으로 말해선 그렇다. 백경은 에이헤브의 분신이다. 그럼, 왜 하필 백경인가? 그것은 바로 '흰빛'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의해서 그렇다. 흰빛은 '초자연성'(198쪽)을 의미하며, 숭고함과 공포 그 자체인데, 이는 자신의 한계와의 부딪힘, 그리고 소멸(아베 코보의 <벽>에선 주인공 자신이 '벽'이 된다)의 순간에 발생하는 모든 충격이 시각화된 것이다. 그럼, 이와 같은 한계에 다다르기, 흰빛 보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한 소멸과 자기파괴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여기에 흰빛(白)이 가지는 뛰어난 상징성이 존재한다. 그 본질에 있어서 흰색은 색깔이라기보다 색깔을 볼 수 없는 상태- 그러면서도 모든 빛깔이 동시에 응집된 상태인가? 그래서 광막한 설경은 그처럼 삭막한 공백이고, 그처럼 온통 의미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인가? 거기엔 무색이면서 모든 색인 하나의 무신론이 있어서 그것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일까? (...) 자연물의 온갖 색채를 창출하는 그 신비의 확장, 즉 대원칙으로서의 광선도 그 자체만으로는 항상 흰색 또는 무색일 뿐이기 때문에, 만일 매개물 없이 물질에 작용한다면 튜울립이건 장미건, 그 자체의 공허한 색조로 물들게 할뿐이다. 우리가 이런 모든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우주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문둥병자로서 우리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마치 색안경을 쓰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의지가 강한 랩플랜드의 여행자처럼, 저주받을 이단자는 그의 주위를 온통 둘러싼 이 어처구니없는 흰색의 수의를 앞에 하고 장님처럼 멍해질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상징하는 것은 흰색의 고래,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이 광적인 추적을 의아스럽게 생각하겠는가?(<42>장, 201-202쪽) 흰색은 그 자체로 무색이면서 모든 색이기도 하다는 이 기묘한 역설! 이는 세계에 있어서의 역설이기도 하다. 만약 흰빛이 없다면, 세계는 모든 색깔을 잃고 어둠 그 자체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빛 자체는 아무런 색깔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 같은 흰빛을 가진 고래는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세계의 종말(한계) 자체를 의미하고 세계 창조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는 '현대적' 비극인 <모디 빅>에서 그것은 에이헤브을 세상에 버티게 하는 핵심 그 자체이기도 하다. 해서 그의 백경 사냥이란 결국 백경과의 동침 그 이상이 아니다. 우린 이 작품 맨 처음에서 이스마엘과 퀴퀘크의 기묘한 동침을 보게 되는데, 이는 정확히 에이헤브와 백경과의 대결과 대칭을 이룬다. 이들이 동침을 하기 전, 에이헤브가 포경선을 타기 전, 이들은 문명인과 야만인이라는 대립 구조에 속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스마엘과 퀴퀘크가 동침을 한 후, 더욱이 포경선에 탄 후, 이들 모두는 야만인이 되고 만다. '본격적인 고래잡이는 이로쿼이 인디언과 다를 바 없는 야만인이다'(270족) 모든 등장인물의 야만인화는 이 소설이 본질적으로 근대문명에 대한 강한 비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이는 상당히 모순적인 것이기도 하다. 왜냐면, 적어도 본격적인 고래잡이는 근대에 들어서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런 이익도 없이 백경에 덤벼드는 에이헤브의 경우는 분명 다르다. 그는 과학을 상징하는 사분의(四分儀)를 부시기까지 한다. '그렇게 무능하면서도 감히 태양을 경멸하다니! 과학! 저주 받으라, 그대 무익한 장난감이여!'(466쪽) 쿤데라는 소설을 '망각된 존재의 본질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정확히 <모비 딕>에도 들어맞는 말이다. 에이헤브의 광기는 허무로 인한 자기-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바로 백경(인간의 한계)와의 동침(대결)로 향하는 힘인 셈이다. 5. 고아의 아버지 찾기 아래는 백경을 만나기 위해 억지로 항로를 바꾸고 만난 폭풍우 속에서 에이헤브가 번갯불에게 하는 말이다. 그대는 광명이긴 하지만 암흑에서 뛰어나온 놈이야. 그리고 나는 광명에서 뛰어나온 암흑이야. 그대 속에서! 불의 화살이 멈췄다. 눈을 떠라, 보이는가! 안 보이는가? 그래서 나는 혈통을 찬양하는 거다. 불타는 그대는 나의 부친일 뿐, 부드러운 나의 어머니를 나는 모른다. 그대는 잔인한 놈! 그대는 나의 어머니를 어떻게 했는가?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대의 의문은 더 크겠지. 그대는 대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니, 그래서 그대를 아비 없는 자식이라 부르는 거다. 아니 조상도 알 까닭이 없으니 자기 자신을 뿌리 없는 자라고 부르는 거다. 오오, 전능한 그대여, 그러나 나는 그대가 그대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대 맑은 영이여, 그대 피안에는 무언가 충만 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에 비하면 그대의 영원이란 시간의 흐름에 지나지 않으며, 그대의 창조는 기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볼에 그을린 눈이 그대를 통하여, 그대의 불길을 통하여, 희미하게 그것을 보는 것이다. 오오 그대, 아비 없는 불이며, 나이도 모르는 은자여, 그대도 그대 나름대로 수수께끼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슬픔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또 나는 거만하게 고민하면서 나의 아버지를 알아보는 거다. 날아라, 날아라! 하늘을 핥아라! 나도 그대와 함께 타 버리며, 기꺼이 융합하고 말겠다. 거역하면서도 나는 그대를 존경하는 거다!(<119>장, 472-473쪽) 에이헤브는 번갯불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것과 대결하고 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했는지 묻고, 그가 그것을 알 수 없을 거라고 단정한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아버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이헤브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우위를 획득하는데, 이로서 그는 아버지와의 대결을 감행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아무런 인식도 없는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강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아들과의 대결. 이 것이 무얼 의미하는가에 대해선 다음 구절을 살펴봄으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은, 출산하다 숨을 거둔 미혼모가 남긴 고아와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가 누군가 하는 비밀은 어머니의 무덤 속에 있으니, 그것을 알려면 무덤 속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459쪽) 해서, <모비 딕>은 기본적으로 아들의 아버지 찾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에이헤브에게 있어 백경이란 자신의 아버지(흰빛으로 색깔, 생명을 준)인 셈이다. 해서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해명을 해줄 수 있는 근원을 찾아나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버지 찾기란 그 자신이 또 다른 아버지가 되기 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왜냐면, 에이헤브는 온전히 그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흰빛, 그 자체에 부딪히기만 원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드넓은 바다, 그가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백경(아버지)을 찾아 나선 피쿼드 호는 결국 어머니의 무덤(바다)에 침몰되고, 그 어머니는 또다시 고아 한 명을 낳는다. '관으로 만든 구명부표'(삶/죽음의 이중 상징을 띠고 있는)에 매달린 이스마엘을 말이다. 그 배는 우회하면서 항해하고 있던 레이첼 호였는데, 이리저리 헤매면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남의 집 고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5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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