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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 글 번역 1 :"박물관으로서의 역사"

작성자kundera|작성시간00.10.20|조회수813 목록 댓글 0
박물관으로서의 역사:
오카쿠라 텐신과 어네스트 페놀로사

-가라타니 고진- (esthlos 역)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화에 지나지 않는데, 이는 입법을 말하지 않더라도 학문과 예술에 미친 영향을 말한다. 이런 흐름에서 에도 시대를 통해 전해 내려왔던 전통들은 정부의 문화정책들과 대학 시스템에 의해 체계적으로 배제를 당했다. 이렇게 버려진 주제들은 한의학, 한문학, 불교뿐만 아니라 메이지 부흥의 주요 이데올로기적 근원인 국학연구까지 포함되었다. 이런 분야들이 재평가를 받게 된 것은 서구학문의 사상과 방법이 의해 재형성된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예외적인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시각예술이다. 일본 최초의 공립 미술 대학인 도쿄미술학교의 커리큘럼은 1889년 학교가 생긴 때부터 일본과 동양 미술에 집중되었다. 이런 경향이 후에 서구주의자들로부터 전복 당함에도 불구하고 동양음악 과정이 완전히 삭제된 그의 자매 기관인 도쿄음악학원과 특별히 비교해볼 때 이런 처음의 정책은 매우 고려할 만한 풍토이다.
그럼에도 미술이 서구화를 완전히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것은 장르의 특유성을 알린 에른스트 페놀로사 Ernest Fenollosa(1853-1908) 덕택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페놀로사는 도쿄제국대학에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과 헤겔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1878년 일본에 왔다. 그는 이 체류 중에 일본 예술에는 서구의 모더니즘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적이고 일본적인 예술을 특히 대중적인 경향을 가진 사실적인 그림의 서구예술보다 우월하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예술을 역사화하고 범주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영어에 능숙했던 청년 오카쿠라 텐신 岡倉天心(1962 - 1913)은 페놀로사의 계획을 도와주었다. 페놀로사와 (이때 문화관료로 지목을 받았던) 오카쿠라가 이끌었던 그룹에 의해 도쿄미술학원이 세워진 것은 이런 도움 덕택이다. 따라서 이 학교는 시작부터 특별히 전통주의적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들이 경멸당하고 포기당할 때, 왜 미술만이 근대적 체계에 받아들여졌던 것일까? 그것은 페놀로사의 중재가 있기 전에 일본의 그림들과 공예들이 일찍이 유럽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1850년부터 우키요에 그림들은 유럽에서, 특히 인상파 화가들로부터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다. 186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도쿠가와 쇼구나데에 의해 제공된 작품들은 파리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결국 일본에 대한 인상파화가들의 평가는 우키요에 같은 일본적 그림의 공간을 참고함으로써 근대 유럽의 리얼리즘에서 부딪히게 되는 재현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들로 나타났다. 이로 인한 냉혹한 결과는 기호로써의 일본 생산이다. 예를 들어 반 고흐는 그의 편지에서 봄(seeing)에 대한 일본적인 방법에 대해 반복해서 감탄했다. 이 같은 열광은 너무 널리 퍼져 있어 오스카 와일드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게 만들었다.

" 나는 당신이 일본적인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 지금 당신은 예술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그들처럼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을 진실로 상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일본예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어떤 개별적인 예술가들이 가진 자유로운 자의식의 창조물이다.(…)사실 일본이라는 것 모두가 순전히 창작이다. 어디에도 그런 나라는 없다. 어디에도 그런 사람들은 없다."

일본유행이나 일본풍은 단지 우키요에뿐만 아니라 가구를 포함하여 보통 넓게는 미술들과 공예들에서도 발생했다. 이런 경향은 메이지 정부가 1873년 비엔나 세계 박람회에 토산 공예품과, 가구 그리고 직물들을 전시함으로 나타났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전시회는 누보아트(Art Nouveau)의 전개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적인 문화와 재현이라는 문맥 속에서의 사건이다. 다시 말해 일본적인 부분에 대한 우월성을 말하거나 이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에도 시대만큼 오래 전에 소개된) 근대 서구 사실주의적 그림들이 일본에 더욱 자극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서구주의자들이 일본에 더욱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구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전통주의자들은 일본의 예술계와 학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왜냐면 전통적인 미술과 공예는 단지 미적으로 평가된 것보다 미국과 유럽에서 엄청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비엔나 세계 박람회에서의 성공에 즐거워한 일본 정부는 1878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 대략 4500개의 작품을 보냈다. 이들은 즉각 팔렸다. 가공하지 않은 실크만을 수출했던 일본 정부에게 새로운 수출 상품의 발달이 가지는 의미는 엄청났다. 문화관료인 오카쿠라는 이 성공을 가능하게 하고 서구주의자들로부터 헤게모니를 차지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오카쿠라는 서구주의자도 전통주의자도 아니었다. 정의에 따르면 전통주의자란 민족주의를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이다. 다양한 영역에서 전통주의자들/민족주의자들은 미술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 민족주의는 항상 미의식에 세워진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민족주의는 인도나 중국으로부터 나온 지적 도덕적 입장보다 우월한 것으로 모노노아와레(사물들에 대한 슬픔 sorrow of things)라는 미적 입장을 취한 에도 시대 국학의 창시작인 모토오리 노리나가로부터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민족주의자들의 감정은 자의식의 폐쇄 안에 남아있었다.
비교적 일본 미술의 경우 다른 분야의 것과 달랐다. 왜냐면 그 작품들은 서구에서 처음으로 예술로써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일본인들에 의해 예술로써 인식되기 전에 헤겔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일본의 미술은 "타자인식 recognition of the other"을 성취한 것이다. 전통주의자들은 도쿄미술학교를 설립함으로 주도권을 잡았다. 이는 그들이 일본 전통을 구체화하려했기보다는 서구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산업으로써 이루어진 전통예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을 연지 십 년도 못되어 도쿄미술학교의 주도권은 오카쿠라를 성공적으로 방출한 서구주의자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로 서구화의 운명은 근본적인 패러독스의 싸움이었다. 즉 일본의 새로운 반-전통주의자들에 의해 찬양된 것은 서구에선 단지 모방물에 불과할 뿐이었고 이와 반대로 일본 전통주의로의 귀환이 서구에선 뛰어난 강점으로 보였다. 이와 같은 아포리아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붙잡고 있다. 사실 외국에서 인정받은 일본 예술가들이 어떤 의미에서 문자 그대로 전통주의로 돌아간 것(그들을 전위로 보이게 하는 것은 이 귀환이다)인 반면에, 일본에서 널리 찬양 받는 대부분의 서구주의자들이 서구에서 덜 가치 있을 수는 없다.
이와 똑같은 메커니즘은 다른 분야에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1930년대 문학에서 전통주의자들은 미술에서 일어났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지배적인 사조를 만들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카와바타 코세이, 미시마 유키오 등등은 서구에서 전통주의자들로 알려졌음에도 근본적으로는 서구적인 모더니스트들이다. 그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모두가 향수에 대한 자각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것이 좀더 전위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서구주의에서 전통주의로 바꾸었던 것이다. 즉 미적 대상으로써의 일본은 우리들의 담론적인 형성물에 의해 훌륭한 미술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여기가 우리들이 뛰어난 예술품의 특이성 주변담론들을 고려해야하는 곳이다. 이 같은 패러다임은 누구보다도 텐신의 담론적 실천들을 통해 주어졌다.
오카쿠라는 예술이 상품이고 특히 일본 예술은 세계시장에서 좋은 상품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런 날카로운 인식에 있어 그는 서구주의자, 전통주의자, 그리고 페놀로사와도 다르다. 평생을 산업적 자본에 맞섰던 오카쿠라가 예술의 상품가능성에 대해선 매우 민감하고 열정적이었다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 오카쿠라는 예술이 일본을 대표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는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영혼을 나타낼 수는 있는 것은 예술(미술)이다. 왜냐면 문학이나 종교가 그의 제한된 관심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영향을 줄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을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뿐이다. 왜냐면 예술이 가져올 수 있는 영향의 크기와 특이성은 문학이나 종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생각할 때 나는 도쿠가와 쇼쿠나데 시대 말기에 있었던 사회적 혼란 중에 전통으로 내려왔던 모든 보물들이 아무런 주의 없이 나무토막과 종이쓰레기들과 함께 버려지고 내던져졌다는 사실에 대해 더 이상 한탄할 수는 없었다."

오카쿠라의 주된 관심은 "대표(재현)representation"의 문제였다. 도쿄미술학교가 확고히 세워졌을 때 오카쿠라는 그곳에서 27살에 교수가 되어 페놀로사를 밀어내었다. 이것을 단지 개인적인 충돌로 간주할 수는 없다. 활발히 전통예술을 발견하고 그것을 역사편찬의 순서로 범주화하는 관점을 소개한 사람은 페놀로사이다. 그러나 후에 패놀로사를 추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대표"의 문제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일본예술은 서구 교사인 페놀로사에 의해 완전히 대표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그들은 그들 자신을 대표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표되어야 했다. 그들의 대표자들은 동시에 그들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주인으로 나타났다.…" 라고 말함으로 (작은 소농지 농부들과 루이 보나파르트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맥에서의) 타자(the other)에 의해 대표되는 존재들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것은 분명히 오카쿠라가 대표자 대신에 스스로-대표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의 결론은 스승이었던 페놀로사를 매정히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오카쿠라는 스스로를 대표한다는 것이 대자에 의해 생산되는 재현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아포리아'를 잘 알고 있었다.
반대로 보면 페놀로사는 일본이 단지 허구라도 좋다고 생각한 유럽 인상파화가들과 분명히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근대 서구에 있어 재현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핵심으로 일본이나 동양의 그림들에 기대를 걸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스턴에서 살 때 에머슨의 초절주의 transcendentalism의 영향을 받은 페놀로사는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무시하는 세계주의자였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에 의해 움직여 그리스 예술의 흔적에서 극동의 일본에 도착한 그는 그의 에너지를 일본과 동아시아 회화의 체계화에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일본회화에 대한 페놀로사와 인상파의 수용에 있어서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페놀로사는 일본회화의 독특함(uniqueness)이 정확히 그려진 윤곽선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그의 학생화가들에게 이 방법을 따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미국을 포함하여 외국시장에 알려진 소위 개화반대론자(Moroha)의 것과 정반대의 형태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상파의 평가 방법이 우세했었다. 오카쿠라와 페놀로사가 분쟁의 첫 번째 징조를 보인 것은 아마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머뭇거림 없이 오카쿠라는 팔리는 예술을 선택했다. 따라서 페놀로사는 세계시장의 경향 때문에 그의 영향력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일본 서구주의자들과 전통주의자들 사이의 싸움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상업의 문제만은 아니다. 발전 과정에서 오카쿠라는 예술이 단지 담론의 투쟁들일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페놀로사는 일본예술을 '예술'로 보는 관점을 알리려했다. 예술은 예술로 간주되지 않고는, 다른 말로 그에 대한 담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일본예술은 오랫동안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예술로써의 지위는 페놀롤사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는 그것을 '예'로 선택했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담론이 구조화된 것은 미술 기관들과 박물관들을 통해서였다. 오카쿠라는 제도화에 의해 구성된 담론의 중요성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같은 점에서 그는 페놀로사와 완전히 달랐다. 오카쿠라는 서구에 영향을 주려고 했고, 페놀로사는 일본을 알리려 했다.
도쿄미술학교와 제국박물관(지금의 도쿄국립박물관)은 일본헌법이 반포되고 제국의회가 소집되던 비슷한 해에 설립되었다. 보통 근대 제도들에서 정치적인 집단은 주의를 관심을 모으려고 하고 미적인 것(본질적으로 강력한 것)의 힘에 눈독을 드린다. 내용과 관계없이 형태상으로 박물관은 근대(특히 19세기 후반) 서구의 제도이다. 첫째, 박물관은 이제까지 특권계층에 의해 독점 당해온 '지식'에 대해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하는데, 이 지식들은 원래의 문맥들에서 분리되고 대체적이고 인공적인 공간에 놓여진 정보과학으로의 작품들이다. 둘째, 박물관은 공간적으로 시간적 순서를 보여준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박물관은 공간적 배치가 시간적 발전을 재현하는 장소이다. 이 같은 '회화의 역사'라는 사건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오직 박물관에서이다. 그러나 회화의 역사는 다른 역사들과 독립해 있지 않다. 근대성의 경야(wake)에 세워진 "세계역사"도 마찬가지다. 모두 박물관으로써 형성된 동일한 장치들이다. 예를 들어 영국 박물관에는 세계 각처에서 약탈해온 문화유산들이 놓여져 있다. 분명, 헤겔의 역사체계(그 자체는 세계철학의 역사인)는 박물관의 체계와 비슷한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헤겔의 역사철학은 아프리카에 대한 탐구로 시작되어 인도, 중국 등으로 옮겨가 프러시아에서 끝난다. 이 시나리오는 단지 헤겔의 민족주의를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이 체계는 논리적으로 지구의 어떤 곳에서 끝나는 어떤 다른 스토리를 가능하게 한다. 더욱이 '역사의 종말'은 '역사의 텔로스((telos)와 동일하기 때문에 세계역사를 배치하는 방법은 자동적으로 세계 역사의 텔로스/관념(idea)을 결정하게 된다.
세계시장의 헤게모니를 영국이 쥐고 있는 덕택에 영국박물관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세계역사에 관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발전과정에서 서로를 침입하는 개개의 영역들이 늘어갈수록 이로 인해 개개의 국가들의 근본적인 고립은 다양한 국가들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노동의 분업과 간섭, 생산물의 발달된 형태에 의해 점점 붕괴되어가고 역사는 세계역사가 된다." 마르크스의 비판적인 위치는 앞에서 언급된 과정을 추론적으로 왜곡하고 미래역사를 전역사의 종말로 만드는 독일 관념론적 철학자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세계역사에 대한 헤겔 철학은 이 같은 메커니즘에 의해 세워졌다. 자, 이제 우리는 물질과 경험적 사건에 대한 이런 왜곡이 박물관의 배치와 동형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역사가 목적론적으로 구성되고 보여진 것은 오직 박물관의 공간적 배치를 경유해서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 제도를 간단히 거부할 수 없다. 사실, 마르크스가 관념론적인 세계역사에 대한 비판인 그의 주요저작을 쓴 곳은 바로 영국 박물관에서였다.
따라서 근대적인 '박물관'으로써의 세계역사에서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문제들은 모두 항목들이 적당한가 아닌가가 물어지고, 놓여지는 투기장에 위치한다. 모든 국가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주의, 소위 '서구적인 문화중심주의'는 박물관과 그의 공간적 배치에 근거를 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는 박물관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보다 그 안에서의 근본적인 재배치(바로 오카쿠라가 필수적이라 생각했고 확실한 인식으로 추구해간 전략)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군사적 헤게모니의 문제가 아니다. 메이지부흥 이후의 일본정부는 강력하게 "부국강병"(Hukoku Kyohei)정책을 추구함으로 서구-중심의 체계 안에서 더 낳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이로 인해 오카쿠라가 의도했던 체계의 완전한 전복은 성공할 수 없었다. 단지 같은 체계 안에서의 경쟁에 이르렀다.
오카쿠라는 예술에 초점을 둔다. 왜냐면 예술의 평가와 박물관에서의 배치는 예술에 대한 중립적인 판단보다는 세계 헤게모니의 문제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헤겔주의 미학을 일본에 소개한 것은 페놀로사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서 헤겔에게 발견되는 것과 똑같은 서구중심주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헤겔주의의 "세계정신"은 문자 그대로 세계주의이다. 『중국과 일본예술의 신기원』라는 그의 주저에서 그는 일본예술을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부터 해양예술로 분류한 넓은 스펙트럼에 연결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일본예술에서 그리스적 요소의 흔적을 찾는 걸 기뻐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오카쿠라는 페놀로사의 세계주의 뒤에 서구중심주의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카쿠라는 따로따로인 '동양'을 하나의 단일체, 하나의 자발적인 체계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뛰어난 예술에서만 가능했다.
2.
오카쿠라는 1902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인도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동양에 관한 생각들을 영어로 썼다.

"아시아는 하나다. 히말라야는 커다란 두 개의 문명(유교적 공동체주의를 가진 중국과 베다적 개체주의를 가진 인도)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심지어는 눈장막도 생활의 의미를 찾고 특별한 것에 머무르는 것을 사랑하는 지중해와 발틱의 해안민족들과 구별되는, 세계의 위한 종교들이 나올 수 있게 만든 모든 아시아 인종의 일반적인 사유-유산인 궁극성과 전체성에 대한 사랑의 넓은 확장의 순간을 막을 수 없다."

첫째 문장은 이후에 범-아시아주의(라빈드라나 타고르에 의해 심지어는 아라비아 세계까지도)를 위한 슬로건이 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오카쿠라가 벵골의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책에서 정치적인 암시는 분명하다. 오카쿠라는 예술이 단지 담론적인 실천들의 산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정치적이었다.
오카쿠라는 예술을 통해 동양이 하나라는 것을 보았다. 좀더 분명히 말하자면 오카쿠라는 예술을 통해 "동양"을 발명한 사람이다. 페놀로사가 전한 헤겔철학의 도움으로 그는 미학적으로 세계역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동양의 이상』에서 "이상"이란 용어는 아직 완전히 이룩되지 못한 관념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헤겔의 이념, 즉 존재하는 실재성을 말한다. 헤겔에 따르면 역사는 이념이 스스로를 알아가는 무대이고 예술은 이념이 감각적으로 변형된 형태이다. 헤겔에겐 미학이 철학의 일부가 아니라 철학 그 자체가 미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예술의 역사, 즉 이념의 자기-인식화의 역사로써 세계역사를 파악했을 때 매우 헤겔적이다. 그러나 그가 명확히 자신의 의도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을 통해 오카쿠라는 헤겔의 서구 중심주의를 전도했을 뿐만 아니라 변증법 그 자체를 문제삼았다. 헤겔 철학에서 모순은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왜냐면 모순이 번갈아가며 역사적 발전을 추진시키는 투쟁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카쿠라는 인도철학의 不二一元論(Advaitism)-차이와 다양성으로 구성된 하나-를 변증법의 영역에 집어넣었다. 그가 "아시아는 하나다."라고 주장하게 된 것은 이런 방법에서다.
역사철학에서 헤겔은 인도를 정신이 동일성의 추상적인 요소와 결합함으로 모순, 대립, 그리고 투쟁에 의해 추진되는 발달이 억제된 초기 무대에 위치시킨다. 이 같은 형식으로 인도에 접근하는 헤겔은 그 자신의 용어에서 소위 아시아적 정체(停滯)를 설명하는 것 같다. 이 같은 관점과 반대로 헤겔의 변증법을 부정하고 이에 대항한 오카쿠라는 모순되는 바로 그것의 근원적인 동일성을 불러낸다. 오카쿠라의 "동일성"이란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의 용어로 "사랑"이라는 모든 다양한 가능성을 허락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이후의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가 "절대적 모순들의 자기 동일성"이라고 부른 것을 떠올리게 한다. 1930년대에 니시다는 똑같은 논리로 헤겔의 변증법을 비판하고, 동시에 그것을 "대동아공영권"을 이론적으로 기초짓는데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 같은 조건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오카쿠라의 책들은 "근대의 초극"이라는 지적 운동에서 개척자적인 작품으로 관심을 끌어내었다. 이는 초기 수용으로, 전후에는 그가 발전시키고자 했던 '하나'에 반대되는 악명 높은 계획을 가진 부담스러운 오카쿠라를 지양할 수 있었다. 나는 뒤에서 간단히 언급하겠지만 이 같은 결과가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오카쿠라는 파시즘 하에서 농민운동, 반-산업주의/자본주의 요소를 드러냈는데, 이는 곧 범-아시아주의가 되었다. 모든 오카쿠라의 작품은 미학적 문제들을 다루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치적인 것을 피하기보다 모든 의미에서 정치적인 의의를 찾았다.
오카쿠라 생각에 동양의 "단일함(oneness)"은 서구의 엄청난 힘에 식민화될 운명을 가진 동양의 동일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수동적인 동일성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능동적인 것을 발견하려 했다. 그것은 예술을 경유할 때만 가능했다. 왜냐면 첫째, 실질적으로 동양의 단일함은 서구의 유럽적 단일함과 달리 정치적-종교적 관점으로부터는 생각할 수 없었다. 둘째, 오카쿠라가 철두철미하게 믿고 있던 예술은 서양과 동등하게 설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카쿠라의 책에 담겨진 미의식은 페넬로사에게는 부재하는 명백한 정치적인 의도를 포함한다. 오카쿠라에게 "동양의 이상"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동양" 그 자체가 이상(이념)이었다.
그러나 오카쿠라의 희망과는 반대로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미와 심지어는 동양의 이념들에 완전히 대척되는 서구문명에 의해 가능했다. 러일전쟁 후, 보스턴에서 쓰여진 『茶의 책』에서 오카쿠라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만약에 러시아가 일본을 아는데 겸손하게 굴었다면 20세기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광경으로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무서운 결과는 동양적 문제에 대한 경멸적인 무시에 있다. 황화(黃禍: Yellow Peril)라는 터무니없는 외침을 끌어올리는 걸 경멸하지 않는 유럽제국주의자들은 아시아도 백화(白禍: White Disaster)라는 잔인한 인식을 깨우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너무 많은 차를 가졌다고 우리를 비웃는다면 당신들 서구 사회는 "차 없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우리가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가?
유럽대륙사람들이 서로에게 경구를 퍼붓는 걸 막자. 그리고 반구의 절반을 공동으로 얻음으로 현명해지지 않음을 슬퍼하라. 우리는 다른 길을 통해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들을 보 충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당신들은 불안함을 희생시켜 확장해 왔다. 우리는 공격에 대항하여 약한 조화를 창조하겠다. 당신들은 믿는가? 동양은 서양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수하다."

일본의 군사적 승리 없이 오카쿠라가 이 같은 수사학적 확신만으로 "동양의 우월성"을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고, 막상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무시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카쿠라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일본의 승리가 (중동에서 극동까지의) 다른 아시아 사람들에게 얼마나 용기를 주었든, "불안함을 희생시켜 확장"하는 것을 얻기로 스스로 선택한 일본사람들에겐 아시아적 독립의 희망적인 모범을 보인 일본의 의미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카쿠라는 이 같은 사건들의 변화에 깊이 실망했다. 그리고 그의 실망은 예술은 한번 가져온 어떤 의미도 잃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획득한다. 이때 일본은 이미 예술보다 다른 생산물들을 수출품으로 발견했었다. 오카쿠라의 일본에 대한 환멸은 그를 미국으로 가게 했다. 그곳에서 그는, 보스턴에서 일본으로 온 페놀로사와는 정반대로 훌륭한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보스턴 박물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협소한 의미의 박물관이 아니다. 앞에서 난 근대의 "세계역사"는 단지 박물관으로써 형성된 장치라고 강조했고 이것은 오카쿠라가 그의 의견을 말했을 때 그가 가장 강조했고 존중했던 개념이다. 그는 협소한 의미에서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왜냐면 그는 지속적으로 그의 관점에서 '동양'을 보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이 보통 일본의 고유성을 주장하는데 반해 오카쿠라는 주저 없이 모든 일본적인 사유와 종교는 아시아 대륙에 빚지고 있는 걸 인정한다. 심지어 『동양의 이상』에서 그는 기본원리로써 인도 불교 철학을 사용하고 『茶의 책』에선 중국불교인 禪(Ch`an)을 이용한다. 그러나 아직 그는 인도와 중국의 모든 역사적 흥망성쇠가 일본에 축적되었다는 것을 함유하는 "위대한 일본의 특권"을 고집한다. 불교는 그것이 탄생한 인도에서 사라졌고 중국에서도 변형된 형태인 禪(Zen)이 소멸했다. 그것들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오직 일본뿐이다. 예술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관찰이 가능하다.
오카쿠라에 따르면 "섬의 고립은(…)일본으로 하여금 아시아적 사유와 문화에 대한 신뢰의 진정한 저장소이게 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일본예술의 역사는 민족적인 의식에 대항하여 동양사상 개개의 지속적인 물결이 남긴 모래자국으로 아시아적 이념들의 해변사가 될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 문명의 박물관이다. 아직 박물관 이상은 아니다. 왜냐면 인종의 고유한 재능은 그것을 과거 이념들의 모든 면에서 끌어오고 오래된 것을 잃어버림 없이 새로운 것을 환영하는 불이일원론을 실행하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신도는 아직 조상숭배의 전-불교적인 의식에 고착되어 있고 불교도 자신들도 토양을 풍부하게 하는 자연의 섭리에서 오는 종교의 발달로 인한 다양한 학파들에 집착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지적이 전후 일본 정치학자인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 좀더 비판적인 문맥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엔 다양한 개별적인 사유들을 위한 축으로 동등하게 작용할 원리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외래 문화들이 조절되지 않고 받아들여졌다. 축을 가진 갈등이 부족했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대한 지속적인 수입 외에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일본에서 보는 것은 그것들의 문화적 역사적 기원에 대한 고려가 삭제된 외국 사유들의 동시적인 동거이다. 더욱이 완전히 추방된 것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잠시 잊었던 것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
이 같은 환경들은 예술에 대한 진실을 간직하고 있다. 오카쿠라가 "위대한 특권"으로 보았던 그러한 '일본'은 없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일본은 실체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니시다의 그 자체가 변형기능인 텅빈 그릇, 즉 "무의 장소"와 같다. 오카쿠라가 인도 철학으로 동일시했던 "不二一元論"은 사실 일본의 고유한 공간에 적합하다. 다시 말해, 그는 소위 일본이라는 진공에 "동양의 역사"를 만들었다. 의심할 것 없이 이것은 변형된 일본 중심주의이다. 따라서 오카쿠라의 "박물관으로써의 일본"은 피할 수 없이 일본에 의해 주도된 "대동아공영권"의 이데올로기에 적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카쿠라의 박물관으로써의 일본에 대한 설명은 매우 중요하다. 페놀로사는 단지 일본과 함께 살아온 고대의, 고전적인 동양문화유산 때문에 일본에서 "동양예술"을 발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심지어 사산왕조의 문화유물은 이란보다 일본에 더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따라서 페놀로사가 했던 것은 관리자의 작업, 물건들(예술품들)의 목록화와 배치이다. 동시에 일본 예술역사를 "발명한" 사람이 보스턴에서 자란 미국인이었다는 것은 간단히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페놀로사와 오카쿠라 사이의 만남에서 사람들은 단지 동과 서의 만남이라는 일반적인 설명 대신 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발견한다. 만약 극동의 섬나라인 일본이 오카쿠라가 믿었던 것처럼 '박물관'이라면 미국(아무리 거대하다고 하더라도)도 또한 극서의 섬나라이고 일종의 '박물관'이다. 유럽과 세계의 다른 곳들로부터 여러 가지 사유의 지속적인 물결이 있는 "해변"엔 결국 모래 자국만 남는다. 만약 미국에서 외국사조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랄프 왈도 에머슨의 "초절주의"에 의해 대표되는 것이다. 그의 "미국의 학자"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에머슨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주장했다. 책들로부터 틈을 만들고, 대륙으로부터 전통을 만들고, 자신 안에서 나오는 직관에게 모든 지상권을 부여하고, 이론적인 것에 대항해 실용적인 것을 확고히 하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로부터 월터 휘트먼에 이르기까지, 비트시대까지 미국인들의 동양에 대한 공감은 그러한 상황주의(positionality)에 뿌리를 두고 있다.
페놀로사의 세계주의엔 에머슨의 "초절주의"가 따라다닌다. 페놀로사는 스스로 '서구'에 속한 사람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유럽인이 아니었다. 예술에 대한 자세에 있어 유럽의 인상파들과 페놀로사의 차이는 명백했다. 그는 틀림없이 반-유럽주의의 의지에서 나온 "세계예술의 역사"(예술을 통해 보여진 역사)에 관한 계획을 수행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의 경제적, 군사적 헤게모니를 쥠으로써 대영제국을 능가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영역을 지배할 만큼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는 못했다. 후에 미국은 서구 예술의 박물관이 됨으로 유럽으로부터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빼앗게 된다. 1929년 뉴욕에 근대미술박물관(The Museum of Modern Art)이 세워지자마자 건축가 필립 존스 Philip Johnson는 1931년에 "근대건축-국제전시회"(표준화된 근대건축 쇼)라는 국제적인 형태의 진취적인 쇼를 계획했다. 1936년과 1937년에는 MoMA의 감독인 알프레드 바 Afred Barr는 "큐비즘과 추상예술"과 "환상적 예술 - 다다 그리고 쉬레알리즘"이라는 그가 가지각색의 유럽 근대예술운동을 기하학적 추상주의와 표현주의로 체계화했던 두 가지 볼거리를 기획했다. 그것에 의해 그 같은 근대 예술의 진정한 개척자로서 두 가지의 조합으로써 미국의 추상적 표현주의를 위치시키는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그후 계속해서 클레망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를 포함한 비평가 그룹은 근대예술의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명확한 논리를 만들었고 더 나아가 서로 경쟁할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하위-패러다임을 갖는 대체적인 방법들에서 패러다임을 조종하므로 모든 과정을 프로그램했다. 따라서 박물관과 비평을 언급하지 않았던 예술시장도 이 과정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으로 인해 세계예술이 미국이라는 박물관에 흡수되었다는 것은 결코 너무한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미국 박물관에 의해 개최되는 프로그램이 포화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동시에 소위 다-문화적 운동들이 흘러 넘치고 있다. 이런 운동들은 페놀로사가 꿈꾸었던 것과 의미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카쿠라가 추구했던 것과 같은 담론적 투쟁을 같이 함으로써만 완벽히 수행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문제로 돌아가자. 일본근대예술운동은 페놀로사나 오카쿠라를 추방함으로 이전의 광휘를 다시는 얻을 수 없었다. 그것은 유럽에 지속적으로 중심을 두고 있으며 일본에 있는 외래적이고 토착적인 원리들 사이의 조응을 거의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문화적 공간은 끊임없는 수입의 결과로써 마루야마 마사오의 용어를 빌리자면 "동거공간cohabitation space"을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만약 이 지점에서 일본 예술가들이 '일본적인 것'을 다시 주창하길 의도한다면 그것은 오카쿠라가 제안했던 不二一元論이나, 그렇지 않으면 니시다의 '무의 공간'이란 이념으로 즉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들은 미국 박물관에 카테고리화되어 전시될 것이다. 이 같이 판에 박힌 일은 페놀로사와 오카쿠라 사이의 만남에 의해 거의 백년 전에 이미 운명지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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