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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그토록 전세계적으로 매니아층이 많은 이유?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2.22|조회수640 목록 댓글 0
1. 하루키의 성장과 작가로 가는 길
평범한 학창 시절과 제도 교육 밖에서 매운 문학 수업

◈그의 문학에 깃든 어린 시절의 감상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1월 12일, 일본 교토(景都)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주로 효고(兵庫) 현 아시야 시에서 십대를 보냈는데, 그가 십대를 보낸 아시야는 "극히 평범한 사람이 사는 지역"으로서, 그의 말에 의하면 그곳은 "우리 집 주변은 납치당할 뻔해서 큰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네다섯 명 정도는 족히 튀어나올 듯한, 극히 평범한 주택가이다"라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십대를 아주 조용하고 내성적으로 지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그는 스스로 '공주님' 같은 여자 아이와는 단 한 번도 말을 해 본 기억이 없으며, 지금도 그곳에 대해 유일하게 기억하는 것이라곤 한밤중에 종종 해안가로 빠져 나가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모닥불을 피웠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바다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할 수 있는 일이다, 라고 지극히 평범했던 자신의 십대 시절을 회고한다.
그의 친구들 또한 성격이 그와 비슷해서 비교적 느긋한 편이라고 한다. 즉 흔히 남자들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다든지 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는,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격동과 혼돈 속에 보낸 학창 시절의 투영
학창 시절의 그는 학교란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공부도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고, 반항심 또한 강한 학새이었다. 중학교 때는 교사에게 매를 맞기가 일쑤였고, 고교 시절에는 마작을 하거나 여자들과 놀러 다니는 것을 일삼으며 3년이란 시간을 흘려 보내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한 그는 직간접적으로 학원 분쟁에 휘말렸는데, 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하기도 했다.
그는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 7년 동안이나 다녔지만, 그곳에서도 특별히 학문을 연구했다든가, 문학 작품에 열정을 품고 뛰어들었다든가 하는 일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그런 그가 매사에 공부하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제도 교육을 모두 다 끝마친 이른바 '사회인'이 되고 나서부터라고 하는데, 그는 일하는 틈틈이 짬이 나면, 좋아하는 영어 소설을 번역하거나, 친구에게서 불어를 배워 나갔다.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그는 의식적으로 주위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주로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으로서, 반대로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데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고, 때문에 강연이라든가 강좌 의뢰가 들어온 경우 거절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그가 소설가로서의 소질을 어떻게 발현시킬 수 있었을까 하능 궁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남의 얘기 듣는 것을 꽤 재미있어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여러 가지 사고 방식이 있다. 개중에는 '과연 그렇군' 하고 감탄하게 만드는 의견도 있지만, 전혀 무의미한 생각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무의미한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잘 들어 보면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에 따라 확고하게 성립된 의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내가 한 걸음 물러나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태도를 보이면, 대개 사람들은 마음을 열어 놓고 정직하게 얘기해 준다. 당시에 나는 소설을 쓰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 경험은 훗날 내가 소설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대학에서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것 중의 하나였다."


2.하루키 문학의 원초적 배경 '전공투'
작가의 의식 저변에 짙게 깔려 있는 전공투 체험은 그의 작품 속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그려진 '전공투'는 어떤 것인가?
초기의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등에서는 '전공투'적인 것이 긍정도 부정도 안된채, 지나간 사실로서 그대로 등장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버텼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는 '쥐'의 이야기나, 기동대에게 맞아 부러진 앞니를 보고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여자 친구에게 "나는 나고,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야"하고 무심히 대답하는 '나'의 이야기에서 전공투 체험이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상실의 시대>에서는 전공투에 관한 내용이 매우 왜소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댄스 댄스 댄스>에 이르러서는 '전공투'의 형사를 연상케 하는, 연신 담배를 입에 물고 서성거리는 꼴사나운 왜소화의 정도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한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전공투를 왜소화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전공투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정신적인 활로가 열릴 수 없다는 점에서 과거의 청산과 허무, 공허의 세계 속에서도 미래 지향적인 삶을 누리자는 하루키로서는 당연한 사리의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작품 속에 배어 있는 깊은 상실감과 허무, 그리고 아픔은 '전공투'가 몰아온 인간 관계의 상실과, 관념의 왕국이 무너져 버린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감성이 가장 예민한 20대에 너무도 충격적인 '전공투' 체험을 겪으면서 형성된 하루키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댄스 댄스 댄스>까지의 초, 중기의 거의 모든 작품 속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전공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공투 세대다. 1967년 일본의 대학가는 정부에 항거하는 대학생들의 공동 투쟁의 전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67년 10월, 사토 총리의 베트남 방문을 저지하려는 실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한 교토 대학생이 피살되자, 전공투의 투쟁 대열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확대되고 격화되어 갔다. 그 후 72년 2월, 아사마 산장에서 벌어진 경찰과 연합적군파와의 총격전에서, 마지막 전공투 세력의 전원이 체포될 때까지 5년 간에 걸친 이른바 '전공투 투쟁'은 막을 내렸다. 그러니까 하루키는 입학에서 졸업까지 대학 생활을 전공투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낸 셈이다.
하루키는 이 대학생들의 투쟁 대열에서 그 선두에 서지는 않았지만, 결코 그 대열 밖에 서서 방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대학생들의 이상주의적 관념에 입각하는 투쟁은 엄청남 상처와 상실의 아픔을 남기고, 하루키의 인격 형성과 세계관, 그리고 인생관 정립에 영향을 미치며 사라지고 말았다.
하루키 초기의 문학은 그 전공투 시절에 얻은 것과 잃은 것, 그리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돌아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장식됐다.
그리고 그 후의 하루키 문학에 있어서도 하루키 문학의 출발점이요, 고향이라고 할 전공투 체험은 직접, 간접으로 하루키의 문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하루키 문학을 보다 깊이 그리고 보다 넓게 이해하는 데 참고 자료가 되고, 또 한국의 '운동권' 투쟁과의 비교를 위한 사색의 자료로 삼기 위해, 일본의 '전공투' 운동의 전모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 '대학의 반란'이라는 전공투 운동
전공투 운동은 196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60년대 중반부터 여러 대학이나 학원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온 대학 분쟁이, 이미 단순한 개량 투쟁이나 반대 투쟁만으로는 밀고 나갈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70년 안보 상황에의 투쟁과 결부되는 가운데, 전국적인 대학 반란의 양상을 띄고, 급진적인 투쟁으로 변모되어 갔다.
전공투란 '전국 학생 공동 투쟁 회의'의 약칭으로, 직접 민주주의에 의거한 조직의 운영을 그 원칙으로 하고, 개개의 주체가 각기 주체적으로 결의하고, 책임을 유지하면서 결집된 대중적 전투 조직이며, 투쟁하는 주체의 결집체였다.
이러한 전공투 운동의 배경에는 60년대의 고도 경계 성장 정책에 의한 인플레 기조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배경이 있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정부에 의한 대학의 '노동력 생산 공장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생산 공장'으로의 재편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격적인 재편은, 60년대 중반부터 학비 인상, 기숙사, 학원에 대한 관리 강화, 커리큘럼 개편 등으로 잇따라 구체화되었고, 60년대 말에 이르러 목적별 대학과 대학원만 둔 대학의 구상, 쓰쿠바 대학 설치 등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러한 교육의 제국주의적 재편과 관리 체제 강화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학원 투쟁의 배경이었다. 동시에 세계 각지의 스튜던트 파워, 즉 프랑스의 5월 혁명, 서독, 미국 등에서의 세계적인 학생 반란과도 공통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즉 정보화 사회의 진행과 고도로 발달한 그 정보화 사회 속에서의 관리조작 체제의 강화에 대한 반역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에 있어서의 학생 반란(대학의 투쟁)은, 학원이나 대학의 개별적인 영역을 넘어 '대학 혁명'의 슬로건을 등장시키고, '권력 투쟁'으로까지 치달았던 것이다. 또 전공투 운동은, 이른바 '대학 해체론', '자기 부정론'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권력 투쟁인 동시에 사상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 전투적 행동대로서의 전공투의 조직 형태
전공투의 조직 형태는, 간접 민주주의 대신 직접 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하는 동시에 행동대적 요소를 가진 조직으로 형성되었고, '반대학', '자주 강좌'를 통한 학문, 사상의 재구축을 지향하면서, 좌익사상에 물들어 앞 뒤 돌보지 않고, 저돌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대원들을 끌어 모아 갔다.
이 전공투의 조직 형태와 운영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전공투는 섹트와 논섹트, 학생과 연구자, 개인 가맹 조직과 집단 가맹 조직이, 아무런 서열도 매겨지지 않은 채로 모인 조직이다. 대체로 도쿄 대학 투쟁의 경우는, 기존의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운동에 참가하는 개개인이 자유 분방하게 조직을 만들어 갔다.
이 조직에는 개인의 주체적 결의에 의해서만 참가하고 지도부는 만들지 않았으며, 시시때때로 제시되는 문제들은 전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토의하게 되어 있었다.
반란은 요원의 불길처럼 확대되었다.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공방전을 거쳐, 전공투 운동(학원 투쟁)의 물결은 순식간에 전국의 대학, 고교 및 전문 학교에까지 파급되었다.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에 돌입하는 대학, 고교가 잇따라 발생했다. 1969년 2월에 도쿄 대학, 도쿄 수산 대학, 교토 시립 의대, 히로시마 대학 등이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에 돌입했고, 3월에는 야마카타 대학, 도야마 대학, 간사이 카쿠인 대학, 4월엔 오키나와 대학, 오카야마 대학, 시마네 대학......등 한없이 계속되었다.
1년 동안에 국립 대학 75개 중 68개 교가, 공립대학 34개 중 18개 교가, 그리고 사립 대학 270개 중 79개 교가 각각 투쟁의 전열에 가담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대학수의 거의 절반 가까이 되는 숫자이다.
그리고 투쟁의 스타일은 더욱 더 격렬해져 갔다. 쇠파이프나 화염병은 일상적인 무기가 되었고, 수제 폭탄이 개발되었다. 또 바리케이드 사수, 철저한 항전의 전술이 일상적인 일로 되어 갔다.
투쟁의 불길은 사방에서 불타 올랐다. 그리고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갔다. 그렇게 퍼져 나가는 가운데 불꽃은 하나가 되었다. 투쟁은 이미 개별적인 대학 투쟁의 영역을 넘어 '대학 해체', '교육 분쇄'의 위상에까지 치달았다. 그리고 이때 하나의 역설이 생겨났다. 여러 대학의 개별적인 전공투 운동은, 전공투 운동이라는 하나의 운동 자체가 된 것이다. 전국 대학의 투쟁 지도는, 반드시 하나 하나의 대학(및 고교)의 투쟁의 소재를 나타내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종합적인 단 하나의 투쟁이기도 했던 것이다.

◈ 전국 전공투 연합의 결성
학생 반란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그때가지 각 대학의 개별적인 투쟁 조직이었던 전공투들 사이에 횡적인 연락 조직이 생겨났다. 그것이 전국 전공투 연합이다. 1969년 9월 5일에 히비야 야외 음악당에서 개최된 결성 대회는, 전국 178개 대학의 2만 6천 명에 이르는 전공투 학샏들이 결집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대회는 의장에 도쿄 대학 전공투의 야마모토 요시다카, 부의장에 니치다이 대학 전공투의 아키다 에이다이를 선출하고,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채택되었다.

70년 안보 분쇄! 오키나와 투쟁 승리
10,10,10,21 투쟁 승리!
파방법(파괴 활동 방지법), 소란죄 공격 분쇄!
대학 입법 발동 분쇄, 전국 대학 투쟁 승리!
베트남 인민의 해방 투쟁 승리, 온 아시아 인민과 연대하여 투쟁하자!
반전파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싸우자!
전국 대학을 바리케이드로 점령하라!

히비야 야외 음악당은 아침 일찍부터 헬멧 모습의 학생들로 가득 메워지고, 슈프레흐코르 (Sprechchor:슬로건 등을 일제히 외치는 일)와 떠나갈 듯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전란의 시대 상징하는 미니스커트
여자들의 다리가 기묘하게 눈부셔 보였다.
계속 달려가고 있던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사람들은 달렸다.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계속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도 달렸다. 쫓겨서 달려가기도 하고, 쫓아가느라 달려가기도 했다. 남자도 여자도 달렸다. 기동 대원들과 샐러리맨도 계속 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60년대 라는 시대였던 것 같다.
시대는 뜨거운 꿈을 꾸고 있었다. 계속 꿈을 꾸고 있었다.
일종의 풍속이 범람했다. 모든 게 '풍속'이었다. 실수를 하면 투쟁마저 '풍속'이 되어 버릴 지경이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투쟁이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두들 기묘한 패션을 따르고 있었다. 그것이 시대의 패션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예쁜 다리를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했다.
문화 인류학자인 앨프레드 크로버의 말에 의하면, 미니스커트의 유행은 전란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핫팬츠와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들이 시대 속을 헤엄치고 다녔다. 회색의 압송 차량의 쇠창살 사이로 내다보이는, 긴자의 거리를 거니는 여자들의 다리가, 기묘하게 눈부셔 보였던 일이 생각난다.
아무튼 '풍속'이 시대의 '열쇠'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 전공투의 적은 민청과 경찰 기동대 그리고 매스컴
우익, 민청, 기동대 등이 당장 눈앞에 있는 적이라면, 매스컴 또한 거대한 적이었다.
"도쿄 대학 투쟁은 매스컴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 그 무렵의 도쿄대학 전공투 기관지인 <신케키>에 실려 있었다. 이 말은 전공투 운동이 놓여 있던 좌표 같은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캐스컴은 투쟁을 왜곡하여 선동적인 중상 모략이나 유언비어만을 보도하고 있었고, 과격파 캠페인을 펴, 활동가들을 폭도라고 부르고 있었다.
매스컴은 말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의 하나였다. 그리고 눈앞에서 직접 대결하게 되는 적은 역시 민청과 우익, 기동대 등이었다. 니치다이 투쟁에서는, 실제로 투쟁 파괴자로서 투입된 우익과의 대결 없이는 운동이 진척되지 않았드며, 민청은 더욱 지독하게 굴었다. 민청은 '일반 학생'이라는 그 묘한 가면을 쓰고 투쟁 파괴자로서 활동한 것이다.
운동이 고양되어 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면, 언제나 전면에 나타난 것이 기동대의 벽이었다. 기동대는 데모를 규제하며 가두를 제압하고, 나중에는 아예 교내에 상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가스총을 난사하고, 두랄루민 방패로 테러와 린치를 가했으며, 온갖 포학한 짓을 다하는 정치 권력자들의 폭력 장치였다.
투쟁은, 이 권력의 폭력 장치로서의 벽을 돌파하며 무너뜨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 전쟁터로 변한 도심
70년 안보 투쟁은, 11월의 사토 총리의 방미를 앞두고 최대의 고양기를 맞았다.
국제 반전 데이인 10월 21일에는,도쿄 시 공안 위원회가 모든 집회와 데모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주쿠, 간다, 긴자 등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이 전개되어 도심부는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11월 16일과 17일에는 사회당 계열의 반안보 실행 위원회가 주최한 항의 집회(사토 방미 저지 투쟁)가 요요기 공원에서 개최되어 7만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이 모였다. 전공투 반전 청년 위원회의 부대는 그 후 속속 가마다 역 주변에 결집하고, 격렬한 시가전을 펼쳤다. 그러나 기동대의 저지선에 막혀, 하네다 공항에는 돌입하지 못했으며, 새벽녘에는 투쟁이 끝나 버렸다. 이 날 체포된 사람은 모두 2천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날의 투쟁을 계기로 하여, 운동은 이윽고 무장 투쟁 및 게릴라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 레몬과 헬멧 - '자기 방어'와 '자기 주장'
최루탄을 터뜨리면 모두들 울었다. 울고 싶지도 않은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중에는 분해서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개중에는 생각이 세심한 데까지 미치는 학생도 있어,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레몬 한개를 갖고 다녔다. 레몬을 짜낸 즙을 눈에 넣으면, 이상하게 아픔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커다란 투쟁이 벌어지게 되면, 모두들 미리 다투어 레몬을 가지고 다녔다. 레몬은 점퍼나 코트의 포켓에 몰래 숨겨져 투쟁의 현장으로 나간 것이다.
투쟁이 있는 곳에서 역시 발견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헬멧이었다. 헬멧은 학생들의 자기 주장이었다.
학생들은 가지각색의 헬멧을 쓰고 있었다. 헬멧은 원래 게발트(gewalt, 폭력)나 투석에 대항하여 머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 이상으로 학생들에게 있어선 '자기 주장'의 상징이기도 했다.
특정한 섹트(당파)의 헬멧 이외에 각 대학의 전공투마다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색깔의 헬멧을 썼다. 은빛 헬멧, 금빛 헬멧, 여러 색깔이 칠해진 헬멧 등이 나타났다. 전면에는 '전공투'라고 커다랗게 씌어져 있거나 당파의 이름이 적혀 있고, 옆이나 뒤쪽에는 여러 가지 슬로건이 씌어져 있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캠퍼스에 새로운 헬멧을 사가지고 오면, 학생들은 스프레이식 페인트로 색깔을 칠했다.
이 헬멧의 끈을 타월을 끼워 넣어 마스크처럼 복면을 하는 게 투쟁할 때의 일반적인 스타일이었다

◈ 전공투 일지-학생반란의 궤적
다음은 전공투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중요한 사건을 뽑아 연대순으로 기술한 것으로, 전공투 운동의 생생한 발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67년 10월 8일에는 수상 사토의 베트남 방문 저지를 위한 투쟁이 하네다에서 벌어졌다. 이 날 교토 대학생인 야마자키 히로아키가 경찰과의 공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서 학살당했다.
68년 1월 5일에는 사세보에 엔터프라이즈가 기항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전학련 1,500명이 히라세바시 위에서 기동대와 충돌하였고 이후 일주일 동안 현지에서 격투를 벌였다.
같은 해인 10월 21일은 국제 반전 데이로 신주쿠, 방위청 국회 등에서 격렬한 데모를 벌였고, 기동대와 충돌, 소란죄가 적용되었다.
해가 바뀌어도 전공투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69년 1월 18일에는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에서 공방전이 벌어져, 2일 동안에 걸친 격투를 벌였고, 간다에서는 해방구 투쟁이 있었다.
69년 4월 28일에는 긴자, 오차노미즈, 신바시 등에서 기동대와 충돌한, 일명 오키나와 투쟁이 벌어졌다.
같은 해 9월 5일, 드디어 전국 전공투 연합이 결성되었다. 전국의 학생 3만 4천 명이 결집한, 전공투 사상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11월 16일에는 사토 방미를 저지하려는 투쟁이 벌어져, 가마다 역 주변에서 기동대와 격돌, 약 2,000명이 체포된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듬해인 1970년 3월 31일에는 적군파 9명이 일본 항공기 요도호를 공중 납치한 사건이 있었고, 71년 1월 25일에는 적군파와 일공 혁명 좌파의 공동 정치 집회(지요다 공회당)가 벌어졌다.
72년 2월 19일에는 연합적군 사카구치 히로시 등 5명이 아사마산장에서 농성, 총격전을 전개하다가 28일에 모두 체포되었다.

◈ 야스다 강당 낙성 이후 20년, 1989년의 풍경
1989년 쇼와 시대가 끝나고, 풍경은 바뀌었다. 1969년 겨울, 야스다 강당의 낙성이 있은 이후로, 2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 해에 우리가 본 광경은, 기묘한 허무주의와 그로케스크해 보일 정도로 애국적인 것으로의 회귀였다. 신주쿠 거리의 양쪽 연변에는 작은 일장기들이 여러 겹으로 이어져 있고, 그 한가운데를 검은색의 거대한 투구 풍뎅이와도 같은 영구차가 천천히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릿느릿 달려가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1989년 2월에도 우리가 계속 지켜 봐야 했던 광경은 어떤 광경이었는가. 눈을 감으면, 언제나 그 느릿느릿 앞으로 나가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슬로 모션 비디오의 풍경이 떠오른다.
1969년에는 사방에 '해방구'가 출현했었다. 신주쿠, 시부야, 오차노미즈 등지에.....그리고 그 후 '보행자 천국'이라 는게 출현했다. 권력은 그 '해방구'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배웠던 것이다. 우리가 돌멩이와 화염병과 책상, 의자의 부서진 조각 따위로 '해방구'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권력은 단 한 장의 시달서로 신주쿠의 대로에 '보행자 천국'을 출현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 풍경은, 우리의 '해방구'와 너무도 흡사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사이비한 것이었다.
20년 동안에 사람이 변하고 풍경도 바뀌었다. 풍경의 변모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들의 의식의 변모를 말해 주는 것이다. 거리의 광경을 보면, 사람들마저도 균일화되어 버렸다. 모두들 똑같은 표정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3. 하루키가 영향을 받은 11인의 미국 현대 작가
챈들러, 피츠제럴드, 스티븐 킹을 중심으로 하루키가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살펴본다.

◈ 하루키와 미국의 현대 문학
하루키는 일본소설은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읽지 않았다. 그는 고교 시절부터 페이퍼 백으로나온 미국 현대 작가들의 소설을 탐독했다. 하루키는 일본인이지만, 일본 문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 미 문학적인 작품의 흐름을 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특히 미국의 현대 작가 11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그의 솔직하고 소박한 인간성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일로, 흔히 일본에서도 큰 작가가 되면 여간해서 자기가 영향을 받은 작가를 제대로 밝히지 않거나,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앗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미국 작가 11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문학적 영양소를 얻었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존 업다이크, 헤밍웨이, 포크너 같은 현대 미국의 문단을 풍미하고 있거나 과거의 한때를 지배했던 그런 거물급 작가들은 아니다.
그들 11인에는 중견 작가라고 확실히 자리 매김되지 전의 작가도 포함돼 있어, 모두 제일급의 작가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그 작가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그것으로 자신의 작품 속의 자양분을 삼은 것이다.
그는 그 11인의 작가들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어떤 점에 공감하였으며 무엇을 참고했는가.
이제 하루키가 가장 선호하고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콧 피츠제럴드, 스티븐 킹, 레이먼드 카버를 중심으로, 이른바 하루키의 문학적 영양소가 됐다고 하는 11인의 미국 작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 챈들러 적인 소설 기법
80년대의 세계적인 인기 작가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자각적이라는 데 있다. 무엇에 대해 자각적이냐 하면 방법에 대해서 자각적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보르헤스(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시인), 민화와 만난 뒤에 '소설의 마술사'가 된 칼비노, 근대 오컬티즘(occultism, 자연 또는 인간의 숨어 있는 힘이나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의 영향 아래, 뛰어난 환상의 세계를 차례로 발표한 미하엘 엔데, 혹은 사상과 종교의 스케일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크게 설정하고, 그 스케일에서 현대의 문제를 거시적으로 재파악하여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장미의 이름>의 움베르토 에코.
이러한 경향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일본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도전하고 있는 작가들은, 방법에 있어서 자각적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런 자각적인 의식을 갖게 되면,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연주의적인 소설은 쓸 수 없게 된다.
하루키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소설의 방법에 있어서 매우 자각적이다. 그리고 자신의 문학사적 위치, 현대 세계에서의 위치에 대해서도 충분히 유념하고 있다. 특히 그는 소설 기법에 있어서 다분히 챈들러(미국의 추리 소설가, 하드보일드파의 거장)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루끼: ....내가 챈들러를 무척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로우-작품 속의 주인공-라는 존재 자체가, 존재감이 있는 가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챈들러 자신의 자질문제라고도 생각하지만, 그것을 잘 표현해 내지 못하면, 도시라고 하는 것은 그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가설이라는 뿌리를 빼버리면, 굉장히 피상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가와모토: 챈들러는 도시 속에서 황야를 본다고 할까, 도시를 도시로서 보고 있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평소에 살고 있으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도시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쓰는 것이지요.

- 가와모토 사부로, <도시의 풍경학> 중에서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끼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양을 쫓는 모험>의 작품구성은 분명히 챈들러적이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한 사나이가 경제 사정이 좋지 않게 되자, 어떤 기묘한 의뢰를 떠맡게 되고, 그 의뢰에 따라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는 과정에서 주도 면밀하게 준비된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차츰차츰 의뢰주가 수상해지고, 의뢰 받은 일 자체도 수상해지면서, 소설의 구성 그 자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스릴 넘치는 변화가 일어난다.
하루끼 자신은 이 변화를 'seek and find'라는 말을 사용하며, 가와모토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이때 쓰여진 'seek and find'라는 말은, 후에 마치 무라카미 하루끼 문학의 대명사처럼, 연구자나 팬들 사이에서 쓰여지게 되었다).

'find'했을 때는 'seek'했던 것이 이미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 테마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보편적인 일이다. 구태여 챈들러나 하루키 문학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모든 문학은 발견'find'했을 때에는, 찾고 있던(seek) 것이 당연히 변질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그것에서 또 다른 테마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찾아 내야 할 것이 미리 상실되어 있는, '부재'라고 하는 테마이다.
'seek and find'에서 테마가 찾아야 하는 것의 부재로-상실로-이행할 때, 무라카미 문학은 챈들러와 뚜렷이 결별하고, 일본으로, 자신의 원래의 체험에 입각한 표현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 피츠제럴드의 시대인 1920년대
하루키는 스콧 피츠제럴드를 가리켜 "한동안 그만이 나의 스승이요, 대학이요, 문학하는 동료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감수성이 예민한 고교 시절부터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라면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1920년대 미국의 작가를 대표하는 그는 감각적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에 가까웠고, 유연함과 오만함, 센티멘털리즘과 시니시즘, 극단의 낙천주의와 자기 파괴적인 욕망, 상승 지향과 하강 감각, 도시적 세련미와 중서부적인 소박함 같은 서로 상반된 감정이 작품 속에서 약동하고, 그런 대립된 요소를 조화시킨 점에 그 매력이 있다고 한다.
그러한 요소는 하루키의 여러 소설 속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하루키의 문학을 상실이라는 테마에서 살펴보변, 기법상으로는 물론 챈들러적이지만 - 지극히 하드보일드적인 -, 테마 그 자체로 보면, 피츠제럴드 쪽에 가깝다. 왜냐하면 피츠제럴드의 작품 속에는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의 기본이 되는 상실감이 농밀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 제 1차 세계 대전 후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인 및 예술인들에게 주어진 명칭. F.S. 피츠제럴드, J. 더스패서스, E.E. 커민스, W.H. 포크너 등이 이에 속함)'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난 피츠제럴드는 태어난 지 2년 만에 부친 회사의 도산으로 인해, 뉴욕의 버팔로로 이사를 한다.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남부에서 군 복무를 하다가, 종전과 함께 뉴욕으로 올라와 카피라이터를 하면서, <낙원의 이쪽>을 완성했다. 처음 쓴 이 장편 소설이 순식간에 전 미국의 베스트 셀러가 되어, 그는 작가로서의 운 좋은 첫출발을 하게 되었다.
1920년 -<낙원의 이쪽>을 출판한 그 해에, 피츠제럴드는 운명의 여성, 젤다와 결혼하였고, 그 5년 뒤인 1925년에는, <위대한 개츠비>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을 발표하기 전까지 피츠제럴드는 젤다와 함께 이 파티에서 저 파티로 뛰어다니며, 며칠씩이나 파티를 벌여댔다. 결국 베스트 셀러 작가로서 얻은 막대한 수입은 술값과 호텔비와 모피로 사라져 버리고, 급기야 출판사로부터 가불까지 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10개월가량 유럽에 머물면서, <위대한 개츠비>를 완성했던 것이다.
하루키는 그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이라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한 대목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하루키의 피츠제럴드에 대한 기호는 각별한 것 같다.
피츠제럴드라는 작가 체험 및 작품 체험에 못지않게, 하루키는 그의 작품을 번역함에 있어서도, 역시 독특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미국 문학의 연구자인 다쓰미 다카유키는, 대학에서 미국 문학을 가르치면서 '오늘날 피츠제럴드를 읽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것이다" 라고까지 하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비유나 유추가 아니라, 피츠제럴드를 읽는 것은 하루키의 일부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가령 <마이 로스트 시티> 원문에서는 단순히 '더 걸(The Girl)' 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하루키는 '꿈의 소녀'라고 번역하였다. 그것은 '누구라도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은 문장인데도, 번역문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장이 찍혀 있다'는 얘기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번역이 대단히 적절했다는 사실이다

◈ 하루키 소설 속에서 연상되는 다른 작가들 - 스티븐 킹 외
피츠제럴드 외에도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국 작가를 들어 보면 - 환상 문학의 연구자 가제마 겐지의 연구 -, <댄스 댄스 댄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공포 소설가, 스티븐 킹을 들 수 있다.
스티븐 킹은 매년 한 작품 정도 베스트 셀러 소설을 내고 있는데, 작품마다 정성을 다해 치밀한 구상과 탁월한 소설 기법을 발휘,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갖춘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하루키는 킹의 소설의 일관된 모티프인 반부권성, 반권력적 경향에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은 가제마 겐지가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나서 연상되는 작가들에 대해서 서술한 것으로, 그 대목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장편 소설 <댄스 댄스 댄스>를 예로 들어 보자. 우선, 이야기 전반부에서 무대가 되는 '돌핀 호텔', 이 호텔은 엘리베이터의 정체 모를 존재도 포함하여, 스티븐 킹의 작품 <샤이닝>의 무대가 되는 '오버루크 호텔'의 재판에 지나지 않는다. 킹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샤이닝>은 "자비로 몇 번인가 사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정도"라고 공언했을 정도로, 그의 마음에 드는 작품인 것 같다. 겨울철 자연 조건이 나빠서, 일단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한 5,6개월은 외부와 접촉할 수 없게 된다는 유령 호텔 '오버루크'는 <양을 쫓는 모험>에서 일단 눈이 쌓이면 길이 폐쇄되어, '그야말로 동면'으로 화하는 쥬니타키 마을의 산 위 '별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밖에도, 주인공은 '나'와 약간의 영매 능력을 갖고 있는 열세 살의 소녀 유키와의 관계는, <파이어 스타터>의 맥기 부녀를 방불케 하며, 저주받은 외제차 마세라티는 <크리스틴>의 58년형 플리머스 퓨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한 인상을 열거해 나가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하루키는 스티븐 킹 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의 작품도 똑같이 이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C.S. 루이스의 <나르니아국 이야기>,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50년대 SF>, 혹은 보네거트의 <고양이의 요람>, 레이먼드 챈들러나 로버트 B.파커의 하드보일드 소설, 르 구인의 <그림자와의 싸움>, 브라우티건의 <사랑의 행방>, 카프카의 <성>, 라브 크래프트의 <쿠트르 신화>, 그리고 킹의 <파이어스타터>와 <데드 존>과 같은 작품을, 어떤 때는 노골적으로 인용하거나, 또 어떤 때는 암시하면서, 독자에게 친밀한 눈짓을 보내고 있다.

그밖에도 하루키가 문학 수업을 하면서 가까이 한 작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트루먼 카포티 : 대학 수험용 영어 부독본에 실린 트루먼 카포티의 <머리 없는 매>를 읽고 감탄한 이래, 그의 많은 작품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는 작품을 특히 좋아했다고 하며,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카포티의 단편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하루키는 카포티로부터 작품의 내용보다도 그 문장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으며, "그의 문장에는 읽어 가면서도 어디에서 뒤집어질지 알 수 없는 무서움이 있다"고도 말했다.

* 커트 보네거트 : 그 역시 하루키가 애독한 작가의 한 사람이다. <챔피언들의 아침 식사>를 처음으로 읽었을 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루키는 말하고 있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발표됐을 때, 문장이 너무 번역투고, 버네거트의 문장과 비슷하다고 어느 평론가가 지적한데 대해서, 그는 보네거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솔직하게 시인한 적도 있다.

* 폴 세로 : 주로 단편 소설을 많이 쓴 폴 세로도 하루키가 높이 평가하는 작가이다. 특히 <스위스이 로빈슨>이나, <모스킷 코스트> 같은 작품은 여러 번 읽었고, 그의 싱싱한 문장과 표현에 큰 매력을 느꼈으며, 특히 그의 작품 세계의 고립성에 끌렸다고 한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말했다.

* 리처드 브로우티건 : <미국의 숭어 낚시>로 200만 부의 베스트 셀러 기록을 세웠던 리처드 브로우티건도 하루키가 좋아했던 미국 작가였다. 데뷔작이 화제가 되어 화려하게 등단하게 되면, 브로우티건처럼 심리적 압박을 많이 받게 된다고 자신의 경우와 비교하며 하루키는 조심해 왔다.
브로우티건은 한동안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점점 평판을 잃게 되었고, <그렇게 그 바람은 모두 날려 버리지는 않는다>는 긴 이름을 단 가장 만년의 작품은 1만 5,000부 밖에는 팔리지 않았다. 브로우티건은 그런 좌절의 아품에 견디지 못한 탓인지 권총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하루키는 브로우티건을 추모하는 수필에서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후기의 브로우티건은 저 천마(天馬)가 하늘을 달리는 것과 같은 상상의 날개는 잃어 버렸지만, 그래도 평범한 몇백 명의 작가들이 흉내낼 수 없는, 차분하고 부드러우며 유머에 넘친 독자적인 세계를 그려 냈다."
브로우티건은 만년에는 미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번역 작품을 통해서 더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그의 아주 오밀조밀하고 정치(精緻)한 문장이 분재 원예같은 미니어처적이고 우아한 것을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성향에 잘 영합된 탓이라는 해석도 있다.

* 게이 타리즈 : 하루키가 애독했던 작가 중에는 게이 타리즈도 포함된다. 특히 그의 초기 작품 <뉴욕 선책자의 수기>와 <당신의 이웃집 아내>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그를 좋아하는 이유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시선이 아주 낮아서 사물을 정확히 보는 멋있는 문장을 나는 좋아한다. 길 위에 떨어진 것에서 쓰레기통의 위치 같은 것도 모두 자세히 보고 걸으며 쓰고 있다. 역시 모든 사물은 위에서 본 시선으로 쓰면 절대로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 레이먼드 카버 : 하루키는 레이먼드 카버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그의 단편 <발밑에 흐르는 깊은 강>을 읽고, 미국에는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작가가 있다고 감탄하면서 그의 매력에 끌려 작품집을 번역했다.
그는 카버를 만나기도 했으며, 인간과 작품을 통해서 친숙해졌다. 또한 그가 죽었을 때는 가장 좋은 친구중 한 사람을 잃었다고 애도하기도 했다.
하루키는 레이먼드 카버를 가리켜 "그는 항상 오리지날한 창작자였으며, 그가 아니고는 쓸 수 없는 세계를, 그만이 쓸 수 있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기쁨이 농축된 인생을 통해서 자신의 몸으로 익히고 터득한 것을 그대로 그의 작품 세계에 표출하는 작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 팀 오브라이언 :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누군가와 무척 얘기를 하고 싶었다. 뭔가 기대고 싶은 하염없는 공백을 메우고 싶은 말을 찾고 싶었다"고, 그가 번역한 <그래도 살고 싶다(원제 : 뉴클리어 에이지, 문학사상사 간행)>의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래도 살고 싶다>를 처음 읽고 나서 너무 흥분하고 감탄했던 그는 그 긴 소설을 번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소설은 자신이 읽은 그 어느 소설보다도 영혼의 총합 소설이라고 할 만큼, 갖출 것을 다 갖춘 훌륭한 작품이라고 이렇게 격찬했다.
"이 소설은 '현대의 총합 소설', 또는 '영혼의 총합 소설'이라고 할만큼 엄청난, 그리고 진지한 소설이다. 이 작가는 자기의 안에 있는 정신성의 모든 요소와 조각조각의 단편 - 형태를 갖춘 것에서 그렇지 못한 것까지의 모든 것을 다 소모해서 이 소설을 써냈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지점에서 이 작품을 마무리지었다."
하루키는 그 밖에도 오브라이언의 장편 <진짜 전쟁 이야기를 하죠>도 번역하였다.

* 존 어빙 : 그 밖에도 <호텔 뉴햄프셔>, <사이더 하우스 룰즈>, <곰을 놓아 주다> 등의 작품을 쓴 존 어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하루키는 장편 <곰을 놓아 주다>를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하루키 문학에 있어서의 미국과 중국
그의 문학 저변에 흐르고 있는 공간 감각은 자국을 떠나 자유롭게 부유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과 중국이다.

◈로스트 제너레이션 미국
무라키미의소설이 미국 현대 문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것은 무라키미 자신도 주저없이 자인한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군조 신인상을 수상했을 때부터 오늘날까지 자주 거돈되어 왔던, 미국 문학과 무라카미에 대한 예를 들면, 군조 신인상의 심사 위원 중 한 사람인 마루타니 사이이치는 선후평 <새로운 미국 소설의 영향>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무라카미 씨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현대 미국 소설의 강한 영향 밑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커느 보네거트라든가, 브로우티건이라든가, 그런 작품을 매우 열심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연구 태도는 대단히 진지한 것으로, 뛰어는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면 이 정도로 깊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옛날식의 리얼리즘 소설에서 빠져 나오려고 해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현재 일본 소설의 일반적인 경향인데, 설사 외국의 본보기가 있다고는 하나, 이처럼 자유자재로, 그리고 교묘하게 리얼리즘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주목해야 할 성과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중략) 그리고 이런 점을 잘 살려 나간다면, 이 일본적 사정에 의해서 되장된 미국풍의 소설이라는 성격은 마침내는 이 작가의 독창성이 될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평론가 구로코 가즈오는 "무라카미의 소설은 옛날 식의 리얼리즘 소설(사소설)의 전통이 끊어진 곳에 성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라카미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한 직후, <나의 문학을 이야기한다>라는 인터뷰에서, "일본의 순수 문학은 외면하고, 당신의 소설 속에 나오는 피츠제럴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소설 쪽을 읽었겠군요?"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피츠제럴드와 카포티와 보네것트, 이 세 작가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야 물론 모두 유명한 작가들이니까, 그다지 직접 본보기는 될 수 없지만, 그들에게서 글을 쓰는 자세 같은 것을 배웠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 후 하루키는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말이나 글로 되풀이해왔다.
그렇다면, 무라카미는 미국 문학의 어떤 면에 끌린 것일까?
무라카미는 저서, <더 스콧 피츠제럴드>(1988년) 속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코멘트>에서, 그 이유의 일단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국 문학사 가운데서 가장 미국적인 소설은 멜 빌의 <백경>과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 작품은 미국이라는 국가와 그 문화의 특수성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가장 전형적이며 미국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세 편의 작품은 모두 각 소설의 주인공들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1) 뜻은 고귀하며,
(2) 행동 스타일은 희극적이며,
(3) 결말은 비극적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특성을 좀 더 단순화해서 말하면, 아메리카 신대륙에 계승된 돈키호테성=기사성(騎士性)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문학에서 프런티어 시대의 멜 빌, '일어버린 세대'의 피츠제럴드, 1950년대의 샐린저와 현대 문학의 보네거트, 어빙을 더한다면, 무라카미의 미국 문학과의 인연이 어떤 것인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진 헤밍웨이나 포크너, 혹은 미국의 전후 문학이라고 불리우는 긴즈버그나 케리워크 등의 비트 세대의 문학을 무시하고 있다.
무라카미는 왜 피츠제럴드를 좋아하느냐, 라는 물음에, "구체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고, 다만 서로 기분이 통하기 때문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무라카미를 매료케 한 피츠제럴드의 문학은 1920년대의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이 물질 문명의 붐을 이룬 끝에 경제 대공황에 이르기까지의 물질적 목적 추구의 시대에 살았던 청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린 주인공은 자동차, 토키(유성영화), 라디오가 발달하고, 기사, 증권 중매인, 세일즈맨, 영화 배우가 각광을 받았던 시대에 청춘을 보낸, 중산 계급의 인텔리였다.
물질적 추구에 여념이 없는 청년, 그러나 많은 것을 잃어버린 상실의 아픔을 가슴 깊이 지닌 청년의 모습이 피츠제럴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그것은 동시에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난숙한 물질 문명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지 않으려고--또는 이미 상실된 자신을 애써 찾으려고 하는 무라카미 문학의 주인공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라카미의 소설도 항상 '잃어버린 것=로스트'에 관계하고 있다는 것도, 그가 미국 문학사에서 로스트 제너레이션에 강한 흥미를 갓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로스트 제너레이션의 미국 작가들이 제 1차 대전이라는 미증유의 대량 참사가 낳은 비인간적 소행의 체험을 근거로, 전후의 니힐리즘을 뒤에 감춘 퇴폐와 필사적으로 싸우며 자기파괴적인 고독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과, 무라카미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의 학생 반란 = 전공투 운동을 통과하여, 외면상의 '평화'와 풍요로움 속에서 '정신의 상처'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쓰고 있는 것은 거의 같은 맥락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라카미와 미국 문학과의 관계를 말할 때, 유의해야할 점은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일본의 구세대가 지녀왔던 '종속'의식이나 열등 의식, 또는 '동경'의 마음은 거의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선진 공업국으로서의, 그리고 파트너로서의 공통 부분에 커다란 공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키 문학 속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무라카미의 어린 시절의 환경은 그의 문학에 줄곧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고향이 상업 무역 지역인 간사이(關西) 지방이었고, 자라난 곳이 국제 무역항을 갖는 도시의 주택가였다는 것이, 그가 미국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요인이라고 한다면, '중국'에 대한 관심도 역시 그의 성장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본시 간사이 지방에는 재일 한국인이나 재일 중국인(화교)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어 일상 생활에서 '중국'과 만나는 일은 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라카미의 '중국'에 대한 관심의 대상은 중국의 역사나 혁명 또는 문화 같은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 주변에 있던 '중국인'에 대한 것이다.

단편집 <중국행 화물선> 중에 나오는 다음고 같은 중국인에 대한 관심이랄까, 인연의 범위가 바로 그것이다.
고교가 항구 도시에 있었던 탓으로, 내 주위에는 꽤 많은 중국인이 있었다. 중국인이라고 해도 특별히 우리들과 어딘가가 다른 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또 그들에게 공통된 뚜렷한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략)
우리 반에도 몇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도 있었고, 좋지 않은 학생도 있었으며, 명랑한 사람도 말수가 적은 사람도 있었다. 굉장한 저택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햇빛이 들지 않는 방 한 칸에 부엌만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가지각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와도 특별히 친해지지는 않았다. 애당초 나는 아무나하고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 아니다. 상대가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누구이건 간에, 그것은 마찬가지다.
--<중국행 화물선> 중에서

'나'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회의를 갖고 '죽음'을 생각했을 때, 왠지 세 사람의 중국인을 생각해 냈다.
한 사람은 초등학교 때 치룬 모의 고사의 감독관, 또 한 사람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만났던 여대생, 마지막 한 사람은 28세가 되어 재회한, 백과 사전 외판을 하고 있는 고교시절의 동창생이다. 이 세 사람과의 우연과 우연이 겹친 것 같은 만남과 헤어짐이 '나'에게 '나 자신의 지구'나, '나 자신의 우주'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이란 '지구의(地球儀) 상의 황색 중국'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흔히 발길에 닿는 그런 생활 주변이다.
'나'는 그곳에 가는 것을 '모험'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가령 "치과 의사의 대합실"이나 "은행 창구" 등, 극히 일상적인 장소이다. 다만 '나'는 갈 수 있을지 없을지 조차 알 수 없는 '중국'을 향해서 "언젠가 모습을 나타낼주도 모르는 중국행 화물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단편 소설에 나타나 있는 것은, 민족이나 인종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하는 철저한 개인주의 사상이다. 무라카미의 사고 방식 밑바닥에는 '평등'과 '개인주의'를 기치로 삼고 있던 '전후 민주주의 교육'의 성과가 존재한다는 것이, 그런 인간관에 잘 나타나 있다.
'차별'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추하고 증오해야 할 만한 것이라는 사고 방식이 근저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일본인이건 중국인이건 누구이건 간에 마찬가지다"라고 하는 생각을 무라카미는 굳은 신념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라카미는 자진해서 소리 높이 반차별 사상의 소유자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미국 '문학'에 대해서 아무런 외화감도 갖지 않는 감성과 '중국인'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대응하는 자세에는 상통하는 것이 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하여 등거리를 유지하는 생활 태도는, 무라카미의 내부에 확실한 '민주주의=개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무라카미의 경우, 이 '민주주의=개인주의' 사상은 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사회 속에서 '니힐리즘'으로 전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행 화물선>은 이 글의 머리 부분에서 말한 세 사람의 중국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 마무리는 이렇게 당돌하게 끝낸다.

지구의 상의 황색 중국. 앞으로 내가 그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중국이 아니다. 뉴욕에도 레닌그라드에도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나의 방랑은 지하철의 차 안이나 택시 뒷좌석에서 행해진다. 나의 모험은 치과 병원의 대합실이나 은행 창구에서 행히진다. 우리들은 어디에도 갈 수가 있고, 어디에도 갈 수가 없다.

마무리의 전반부에는 '중국'이라는 메타포어에 위탁한 무라카미의 상황 인식의 표백이 있다. 물론 이 인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은 '미국'이라고 하거나 '소련'이라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는 메타포어이다.
그리고 "나의 방랑은 지하철의 차 안이나 택시 뒷좌석에서", "나의 모험은 치과 병원의 대합실이나 은행 창구에서"라고 말함으로써, 일상 생활이나 내면=관념에서 '방랑'이나 '모험'의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그것은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며, 동시에 무라카미가 작가로서 '관념의 왕국'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 아닌가, 라고 구로코 가즈오 씨는 지적했다.
무라카미의 장편 제2작, <1973년의 핀볼>이 '정신의 상처'를 입은 채 타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핀볼 머신을 찾아 헤매는 청년의 '헛된 정열'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면, <중국행 화물선>은 그런 정열의 뒤쪽에 깊은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단편 소설이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그리고 <1973년의 핀볼>과 함께 <중국행 화물선>을 읽을 때, 거기에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멘탈리티의 원형이 떠올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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