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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

조선 인조(朝鮮 仁祖)

작성자이창주|작성시간17.01.30|조회수1,039 목록 댓글 0

조선 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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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
朝鮮 仁祖
조선의 제16대 국왕
본명 이종(李倧)
재위 1623년 3월 ~ 1624년 4월
1624년 4월 ~ 1649년 5월
별명 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작위는 능양수, 능양도정, 능양군, 능양대군
다른 묘호는 열조(烈祖)
종교 유교(성리학)
출생일 1595년 12월 7일 (음력 11월 7일)
출생지 조선 황해도 해주군
사망일 1649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55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매장지 장릉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왕비 인렬왕후
장렬왕후
자녀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효명옹주, 숭선군, 낙선군
부왕 원종
모후 인헌왕후
전임자 광해군
후임자 효종
왕가 전주 이씨
왕조 조선
묘호 인조
시호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인조(仁祖, 1595년 12월 7일 (음력 11월 7일) ~ 1649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재위 기간: 1623년 ~ 1649년)는 조선의 제16대 임금이다.

 

이름[편집]

성은 이(李), 는 종(倧), 본관전주(全州), 는 천윤(天胤), 화백(和伯), 는 송창(松窓).

시호[편집]

사후 시호는 인조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인조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仁祖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다. 1649년(효종 즉위년) 음력 5월 15일에 열조(烈祖)의 묘호를 받았으나, 8일 뒤 인조(仁祖)로 개정되었다.

인조 이후로 명나라처럼 청나라에서도 장목왕(莊穆王)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나 청나라와의 외교문서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력[편집]

선조의 서손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선조의 첫 손자로 할아버지 선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왕궁에서 자랐다. 구성(具宬)의 문인이다. 신경희의 옥사로 동생 능창군이 사사당하고 아버지 정원군마저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복수를 다짐, 반정에 참여하여 인조 반정을 일으키고 즉위한다. 이후 친명반청 정책을 추진하다가 정묘호란병자호란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장남 소현세자베이징에 온 천주교선교사과학자들의 문물을 접하고 청나라에 호의적인 자세를 보이자, 귀국 후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세자빈 강씨와 손자들 역시 사약을 내린다.

치세[편집]

1623년 3월부터 1649년 5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623년 3월부터 1647년 4월까지 친정하였고 한때 1624년 2월 이복 숙부 흥안군 이제실권 탈취를 기도한 바 있으며 1647년 4월부터 1649년 5월 승하할 때까지 차남 봉림대군 이호(훗날 효종)가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하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편집]

아버지 정원대원군

인조는 1595년 12월 7일(음력 11월 7일) 임진왜란 중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딸 군부인 구씨(인헌왕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조선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태어났다. 그가 해주에서 태어나게 된 이유는 당시는 임진왜란 난중으로 전란이 계속되어 왕자 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실록 즉위일 기록에 의하면 그가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선조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으나 그 중 정원군이 일찍 결혼하여 얻은 첫 손자였다. 선조는 그 자신이 방계출신에 서출인 탓에 첫 손자인 그가 서손(서자 정원군의 아들)이었음에도 특별히 불러다 왕궁에서 기르며 총애하였다. 이름은 이종(李倧)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이라 하였으며 호는 송창(松窓)이었다. 그의 자(字, 본이름 대신 부르던 이름) 중 천윤(天胤)이라는 자는, 이는 당시 국왕이었던 할아버지 선조가 종(倧)이라는 이름과 함께 지어준 것이다. 나중에 광해군이 이 말을 듣고, “어찌 이름지을 만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이름지어야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언짢아했다. 능양군은 태어나면서 모습이 범상하지 않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선조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선조의 이와 같은 말은 곧 누설되었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는 등의 소문과 함께 퍼지면서 동생 능창군이 사형당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유년기[편집]

2, 3세가 지나서는 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할아버지 선조의 배려로 곧 궁중에서 자랐는데, 의인왕후는 그를 특별히 귀여워하였다. 그는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우스갯말이 적어 이 때문에 사랑이 날로 융성해져 다른 왕자들이 비교되지 못하였고, 특히 할머니뻘인 의인왕후는 더욱 사랑하고 귀중히 여겼다고 한다. 5, 6세가 되어서는 선조가 직접 그를 품안에 두고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일찍부터 글자를 해독하고 말귀를 알아듣자 선조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선조능해군 구성을 왕손사부로 삼아 어린 능양군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 어느정도 자란 뒤에도 그는 스스로 글읽기를 힘쓰고, 왕손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내외척 사이에서 귀한 체한 적이 없었다.[1]

1601년 능양수(綾陽守)에 첫 책봉되었으며 1607년(선조 40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선조가 별세하면서 정원군 일가는 경희궁으로 나와 살았고, 부모를 따라 경희궁으로 갔다.

청년기[편집]

신경희의 옥사[편집]

1610년(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추증청주 한씨 한준겸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년 연상인 한씨(인렬왕후)는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 읍내 사제에서 태어났다. 인조보다 한 살 위인 한씨는 가례를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하여졌는데, 선조가 일찍이 왕자 부인으로 뽑았다가 낙방하였으나 관상을 보고 귀하게 될 것을 안 선조가 그대로 다시 능양군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였다고 한다. 한씨와 가례를 올린 뒤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하고 1612년(광해군 4) 18세 때 장자인 소현세자를 낳았다.

1615년(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우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능창군은 일찍이 인빈 김씨 소생 왕자들 중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 물망에 올랐던 신성군이 일찍 죽자 정원군에 의해 그의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당시 17살이던 능창군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획책하는 모반에 추대되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 무렵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 정원군의 집터가 좋다 등의 소문이 돌았고, 광해군은 이를 신경희의 옥사 직후 능창군이 사전에 왕위에 뜻을 두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반정 직전[편집]

능창군이 사사되자 아버지 정원군은 홧병을 얻어 몸져누웠고, 1619년(광해군 11)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때 능양군은 빈소에서 곡을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집안의 풍비박산을 초래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인 이서, 신경진, 김류와 그의 외척인 구굉, 구인후 등이 반정을 모의하고 능양군을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능양군은 이들과 비밀리에 만나며 정변을 모의하였고 서인남인계 인사들의 지지와 자문을 구하였다. 반정을 감행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622년 가을 정변 계획이 누설되어, 평산부사 이귀·신경진 등이 거사를 계획한다 하여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동년 겨울에는 이귀·김자점 등이 유폐된 서궁(西宮, 인목왕후를 일컬음)을 비호한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반정과 즉위[편집]

1623년(광해군 15년) 3월 서인의 김류·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정변을 준비하고 그해 3월 13일 새벽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진입, 반정군에 힙입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계를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다.

하지만 반정의 명분인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의 근거자료가 인조시대 때 작성된 광해군 실록과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시대에 작성한 인조실록이 그 근거이므로 인조가 자신의 역모를 정당화 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에 관한 내용을 전부 믿어서는 안된다. 또한 광해군일기 작성의 근거자료로 사용된 사관들의 기록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인조 반정의 주요 명분 중의 하나는 광해군인목왕후 폐모론이었다. 반정 후 형식적으로 인목왕후를 복귀시킨 뒤 그녀의 교서를 받아 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즉위 이후 그녀에 대한 예우는 소홀하였다.

재위기간 중[편집]

즉위 초기[편집]

즉위 직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것과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을 문제삼아 반정을 합리화시켰다. 또한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을 처형한 기록은 연산군 때의 사화 등에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왕이 즉위 직후에 수십 명의 고관대작들을 처형한 기록은 인조가 유일하다. 조선시대에 왕은 집권하면 널리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여 사형수도 사형을 면제해 주었으며 대부분의 죄수들을 사면하고 풀어주었다. 그러할진대 즉위 직후에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을 처형하고 처형당한 고관대작들의 일족들을 멸문 당하게 한 행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연산군은 발끝에도 못따라갈 수준인 것이다. 이러한 광포한 성격은 뒤에 가족까지 살해했다는 혐의를 사게 된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 등이 그들이었다.

북인 숙청과 이괄의 난[편집]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유몽인북인계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 하옥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이유림 등의 역모가 있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추대, 그는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괄의 난).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이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피난가던 인조는 전영의정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계 인사 40명을 전격 처형했다.

인조는 이러한 반왕권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승계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다.

인조 반정 공신 세력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공신 세력의 과도한 세력강화에 위협을 느낀 그는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독재 김집송준길,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 세력을 중용한다.

서인 세력 견제[편집]

인조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 세력은 수시로 자신들이 공을 세워서 인조가 즉위할 수 있었음을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발언하였다. 서인 공신 세력의 이같은 행위에 분노하면서도 힘을 쓸 수 없었던 그는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의 산림 학자들과 김육 등 비공신 계열 서인 세력을 기용하여 서인 공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또한 반정 초기 왕족 출신 남인계 정승인 이원익영의정으로 기용한 것을 비롯, 남인 계열의 정치참여를 확대시켜 이들을 통해 서인 공신 세력을 견제한다.

서인들은 이괄의 난이 진압되면서부터 계속하여 율곡 이이우계 성혼성균관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건의한다. 남인성균관유생들은 이이가 입산하여 불교승려가 되었다는 것과 성혼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가마를 보고도 호종하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소를 올렸고, 서인의 이념이 국시가 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 인조는 이이와 성혼의 의혹들을 언급하며 문묘배향을 거절하였다. 이후 병자호란정묘호란으로 이이성혼의 문묘 종사 여론은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정원군 추숭 여론[편집]

원종 추존의 당위성을 주장한 이정구의 서간 (1630년대)
인조의 정원군 추숭에 반대하는 김장생에 대해, 이정구는 인조가 선조를 아버지로 불러야 하고 정원군을 백숙부로 불러야 한다는 김장생의 논리를 반박하였다.

인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 정원군대원군으로 추존하여 정원대원군이 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고, 정치적 기반이 부족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들 또한 선조-정원군-인조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구성하여 자연스러운 계승 순서와 인조의 정통성 강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서인성리학 예학자인 김장생, 김집송시열남인허목 등은 인조가 선조의 후사를 계승하였으므로, 선조를 아버지라 하고 정원군은 황숙부나 황백부로 불러야 된다고 고집하였다. 인조는 반정 공신인 이귀, 이정구 등을 중심으로 정원군의 추존 작업을 추진하였고, 중론을 듣는 것처럼 여론을 각색한 후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여 원종이라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자들의 반발은 계속되어 정원군의 추존에 반대하여 김장생, 김집 등은 사퇴, 낙향하였고, 허목은 이를 비판하다가 불이익을 받고 관직 임용이 금지당하기도 했다.

친명배금정책과 호란[편집]

친명배금의 정책을 실행한 인조는 "명과 사대를 다하고 만주에 있는 오랑캐 여진족들은 무시하라."라는 식으로 명한테는 대국으로 받들어 지고 후금인 여진족들에게는 조선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된다.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과감히 버리고 광해군의 실록을 일기로 폄하하여 연산군과 같은 취급을 하였다. 이후 인조는 서인세력과 함께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되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정묘호란[편집]

인조 정권은 광해군 때의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조선의 국력과 걸맞지 않은 무리수를 두는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때에 1623년 인조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결국 진압은 되었지만, 이괄과 함께 난을 일으킨 한명윤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 정묘호란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우선 모문룡을 원조해 주며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조선을 쳐서 모문룡을 고립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또한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청나라가 패배하고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후방 안정의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 이괄의 잔당 중 한명윤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627년 1월 14일 인조 5년에 후금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

정묘화약[편집]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6일 의주를 돌파하고[2]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1월 21일에는 능한산성을 함락시켰으며, 1월 24일에는 평양을 함락하였다. 인조는 부랴부랴 1월 25일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3] 안주성에서 남이흥,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전사시키고 평양을 거쳐 1월 25일에는 황주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전주로 피난가고, 인조 이하 조정의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28년 네덜란드선박이 난파되어 제주도네덜란드 사람 얀 얀스 벨테브레이(Weltevree) 등이 표류하였다. 인조는 친히 벨테브레이를 통해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박연이라는 이름을 내려 조선에 정착시켰다. 벨테브레이는 원산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벨테브레이조선 표류로 조선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고려시대 벽란도예성강을 오간 아랍 외에는 막연하던 서구 세계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인조는 그에게 들은 화포와 총기를 만들게 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재료와 기술이 부족하였고 그것이 한계였다.

병자호란[편집]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으로 바꾸었는데 조선측에서 반정이후 끝까지 친명배금정책을 고집했으므로 청은 어쩔 수 없이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고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화도로, 인조 본인은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인조의 원병 요청과 전멸[편집]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각 도에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불러모았다. 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군대를 조선의 군사들이 역포위하면 해볼만 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근왕병은 오지 않았다. 납서는 작게 쓴 글시를 밀로 뭉쳐 몰래 전하는 비밀편지다.[4]

경기도 원병이 왔으나 청나라 군사에 의해 모두 전멸당했다.

충청도 원병이 헌릉에 도착하여 불화살로 신호를 보내어 서광이 비쳤으나 청나라 군사들의 함성 속에 사라져버렸다.[5] 당황한 충청도 병력은 청나라 병사들과 교전도 제대로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전멸당했다. 강원도 영장 권정길이 이끄는 군사는 검단산에서 그리고 충청감사 정대규가 데리고 온 군사는 험천에서 청나라 군사들의 칼날 앞에 쓰러졌다.

원군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접한 경상감사 심연은 8000명으로 근왕군을 편성했다.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에게 군사를 주어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라 명했다. 그러나 선봉부대는 남한산성 동남쪽 40리 지점 쌍령에 이르렀을 때 불당리에 매복하고 있던 청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고 말았다. 본진을 이끌고 여주에 진을 치고 있던 심연은 선봉부대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군사를 돌려 조령 이남으로 철수했다.[5] 그 후 강원감사 조정호, 함경감사 민성휘, 전라감사 이시방이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그것은 임금을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문책을 면하기 위해 오는 척하였던 것이었다. 이후 근왕군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5]

기근과 굶주림[편집]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조선팔도에는 괴소문이 퍼졌다. 청나라 군사는 바람같이 나타나 귀신같이 사라진다는 소문이었다. 옹성 전술을 구사하는 조선군들에게 만주벌판을 달리며 단련된 팔기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5]

그러나 인조는 괴소문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소문을 확대하는 자들에게는 처벌을 공언하였다. 조선인 병사들의 후퇴에 당황해한 인조는 청나라 군사를 피해 후퇴하는 조선인 병사 몇 명을 처벌하였으나 조선인 병사들의 공포감과 무력감을 없애지는 못했다.

남한산성 성안의 군사들은 추위에 얼었고 식량은 바닥나기 시작했다. 인조는 죽 한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갔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말을 잡아먹었다. 설상가상으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다.[5] 성안에 피신한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들과 수종자들도 굶주렸고 기근으로 쓰러져 아사, 동사하는 일도 속출했다.

망월봉에서 천둥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커다란 포탄이 성안에 떨어졌다. 홍이포다. 행궁에 머물던 백관들은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 가기 바빴고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5] 215센티미터 포신과 10센티미터의 구경에서 뿜어져 나온 탄환은 천혜의 요새 남한산성 성벽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홍이포는 현대의 미사일 이상으로 공포의 무기였다.[6] 당황한 인조는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치열했던 논쟁도 허무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어떻게 해야할 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옛 제도를 고수하고 의리를 지키자던 김상헌과 대륙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으니 우리도 변해야 된다는 최명길이 각을 세웠지만 모두가 허사였다. 척화와 주화 논쟁이 불붙었을 때 일찍이 결론을 도출했다면 전쟁의 참화를 막을수 있었을 텐데 인조에게는 그러한 덕망이 없었다.[6]

항복과 인질[편집]
삼전도비
삼배구고두례

결국 59일간을 버티던 인조는 항복을 결심했다. 그러나 인조는 항복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아 스스로 하성(下城)이라 표현했다.[6] 이후 인조는 영을 내려 남한산성 하산을 항복이라 하지 않고 하성이라 쓰도록 명했다. 이후 공식 기록에는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 쓰였다.[6]

성문을 나선 임금이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숭덕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다. 이것도 청나라가 많이 봐준 것이었다.[7]

그들은 처음에는 반합(飯哈)을 요구했다. 반합은 장례를 치를 때 염하는 의식에서 차용한 방법으로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과 함께 나와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괴기스럽지만 중국에서는 흔히 쓰이던 항복의식이다.[7] 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꿇고 절하는 모습을 지켜본 백관들과 유신들은 충격을 받았다. 소중화를 자처하며 명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여진족, 거란족, 왜인, 유구인, 월남인 등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던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은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에 사로잡히게 된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정온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 즉 홍익한·윤집·오달제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국방 정책과 경제 정책[편집]

인조는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지방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 1647년 압록강중강개시가 행해졌다. 개시에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체류일수, 매매총수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생애 후반[편집]

소현세자 일가 숙청[편집]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그곳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인망이 높은 그가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낼 것을 두려워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의 귀인 조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그를 독살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과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이후 유배간 세 아들 중 장남 경선군(慶善君)과 차남 경완군(慶完君)은 제주도에서 죽고 막내 경안군(慶安君)만이 살아남는다.

경선군과 경완군이 제주도에서 죽자, 세인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인조는 손자들이 유배될 때 따라가 그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잡아다가 문초, 장살하는 것으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손자들을 죽게 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졌다.

전란 이후[편집]

한당의 영수 김육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병자, 정묘호란 이후 원칙론을 내세운 산림세력은 북벌을 주장했고 지나친 북벌 여론을 그는 부담스러워하게 된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김장생·송시열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1635년(인조 13년) 정비 인렬왕후가 죽자 3년 후인 1638년(인조 16년) 왕비간택령을 내려, 그해 10월 당시 14세인 인천 부사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를 간택하여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인조는 그로부터 10년 뒤에 사망하고 아들과 며느리보다 나이 어린 계비는 후일 복상예송 등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최후[편집]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그러나 재정 조달은 확충되지 않았고, 산림 세력의 북벌론에 인조는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 황제 숭정제가 자결하자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뭇 신하를 거느리고 슬퍼하여 상복을 입고,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를 남명 조정에 파견하였다.

1644년 11월 볼모에서 석방된 소현세자가 귀국하였으나 친청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자 그를 독살한다. 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산림은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된다고 하였으나 그는 이 의견을 물리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를 사사(賜死)하였다.

사림의 계속된 북벌 요구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던 인조는 1646년 그는 친청파 인사인 김자점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후 군제를 정비하여 총융청수어청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쪽 변방의 연해 방위를 위하여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의 여러 곳에 진(鎭)을 신설하였다. 또한 서적 간행에 힘써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의 서적도 간행하였다.

1649년 (인조 27년) 손자 연(棩)(현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였다. 1649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5월 8일 새벽에 적장자인 왕세자 효종내외를 찾지않고 서녀 효명옹주와 서자 숭선군 낙선군을 찾았다. 인조는 왕세자 효종 앞에서 효명옹주숭선군 낙선군을 벌하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친형제 지간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결국 이날 유시(오후 5시~7시)에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55세를 일기로 승하 하였다.

능묘[편집]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인조와 그의 원비 인렬왕후가 같이 합장된 릉이다. 인조 13년 1635년 12월 9일 산후병으로 42세의 나이로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이듬해 1636년 4월 12일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성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인조 27년 1649년 1월 30일 승하한 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어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 이변이 계속되어 영조 7년 1731년 8월 30일 천장을 결정하고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평가[편집]

옛으로 보나 지금으로 보나 인조는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그가 세계정세에 조금만 관심이 있았더라면 병자호란과 같은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잇따른다. 친명배청주의자인 인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은 외교 기조를 실리외교에서 친명외교로 바꾸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밀명을 받아 청에게 항복했던 강홍립, 박난영의 일가친척을 전부 몰살시켰고 척화파를 중용하였다.

그리고 인조는 청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고 타협책을 제시한 후 강홍립의 숙부인 강인을 가짜 형조판서로 꾸며 회답서를 보냈으나 이 문서엔 명이 내려준 연호를 사용하는 등 청을 자극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분노한 청나라 사신은 4만 필의 옷감과 소 4천 마리를 제공하지 않으면 화의는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조선은 할 수 없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다른 일화도 있다. 병자호란 중에 청나라가 포위된 남한산성을 향해 "임금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면 항복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병력을 물리겠다"고 제안하자 인조는 다른 사람을 보냈으나 용골대가 본인들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이번엔 세자를 요구했다. 이처럼 인조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에서도 꼭 손해를 보았다.

가계[편집]

할아버지 선조의 유묵 어필

할아버지는 선조, 아버지는 추존왕 원종(정원대원군), 어머니는 구사맹의 딸인 인헌왕후 구씨 (연주군부인)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영의정 한준겸의 딸인 인렬왕후 한씨이며, 계비는 영돈녕부사 조창원의 딸인 장렬왕후 조씨이다.

 

 

명의 추존황제 인조에 대해서는 주세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8/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조선의 역대 국왕

15대 광해군 이혼

16대 인조 이종

17대 효종 이호

 

묘호

열조(烈祖) → 인조(仁祖)

시호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장목(莊穆)[1]

본관

전주(全州)

능묘

장릉(長陵)

이종(李倧)

천윤(天胤)/화백(和伯)

출생

황해도 해주

사망장소

한성 창덕궁 대조전

배우자

인열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아버지

조선 원종(정원군 이부/李琈)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2]

생몰기간

음력

1595년 11월 7일 ~ 1649년 5월 8일

양력

1595년 12월 7일 ~ 1649년 6월 17일(53년 6개월, 1만 9541일.)

재위기간

음력

1623년 3월 13일 ~ 1649년 5월 8일

양력

1623년 4월 12일 ~ 1649년 6월 17일(26년 2개월 5일, 9563일.)


1. 개괄
1.1. 묘호 "인조"
2. 일대기
2.1. 반정과 즉위까지2.2. 책봉 문제
2.2.1. 정명공주와의 관계
2.3. 이괄의 난2.4. 정묘호란2.5. 병자호란 2.6. 비정한 군주
3. 치세와 정책의 영향4. 총체적 평가
4.1. 비판4.2. 긍정
5. 인조의 능6. 인조 어필7. 동상8. 대중매체에서의 이미지
8.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8.2. 조선왕조오백년 시리즈 남한산성8.3. 드라마 일지매8.4. 최강칠우8.5. 추노8.6. 전 드라마 탐나는도다8.7. 마의8.8.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8.9.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8.10. SNL 게임즈 - 카스2 병자호란8.11. tvN의 전 드라마 삼총사8.12. MBC의 드라마 화정8.13. KBS의 전 드라마 오렌지 마말레이드


 

1. 개괄[편집]

조선의 16대 임금, 휘는 종(倧).

선조의 5남인 정원군과 그의 아내 구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3]으로, 능양군[4] 으로 책봉되었다. 원래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 과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다. 권력에 대한 열망만으로는 태종 이방원, 세조 이유(李瑈) 다음가는 인물이나, 조상님들과 달리 국제정세를 별로 살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조선 암군 라인에서 새로운 다크호스로 거듭났다.

현대적 관점으로는 사실상 조선 제2왕조의 창건자로 인조 이후의 조선 임금들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후손들이다. 다만 아들인 효종의 혈통적인 직계는 헌종, 철종에서 일단 끊겼고, 고종의 경우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후손.[5] 많은 이들에게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최악의 모태 암군으로 두고두고 까이고 있다.[6][7]

1.1. 묘호 "인조"[편집]

그의 묘호는 시법에서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열(烈)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열조(烈祖)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대십국시대 남당의 열조 서지고는 못난 사람인데요? 열조가 말이 됨?"이라는 비판에 의해 수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논한 신하들 가운데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있어 갑론을박을 하며 재논의를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 묘호의 최종결재권은 임금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국 효종이 불만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재논의 과정에서 "아니 소열황제도 같은 열을 쓰는데 왜 남당의 열조 서지고[8]를 걸고 넘어지는데?"라 옹호하는 반박이 나왔고, 효종 역시도 "이야기 들어보니 열조를 써도 될 것 같은데? 다시 의논해서 올려"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신하들은 "결국 한소열의 사례에 따르면 열조란 묘호도 좋지만 남당의 사례를 봐서는 쓰면 안될 것 같습니다"란 말과 함께 인(仁)을 붙여서 인조(仁祖)로 바꿔올렸다. 그리고 묘호에 인이 들어갔으니 같은 글자가 반복될 수 없으므로 시호 역시 인명(仁明)에서 명숙(明肅)으로 바꿔서 올렸다.

마지막 걸림돌은 이미 인종(仁宗)이란 묘호가 있으므로 또다시 인을 묘호로 올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예종임금 때 묘호를 정하면서 세종이 있음에도 세조를 붙여준 훌륭한(?) 선례가 있었고, 명나라에도 인종인조를 같이 쓰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기에 그대로 인조로 확정됐다.

"열조"는 시법에서 모두 세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하들이 해석한 것은 "덕을 지켜 업을 높였다"이다. 실록에 따르면 한 소열황제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인조의 공덕에 부합된다는 의견이었다고 하는데, 인조가 유비와 비슷한 건 나라를 일으킨 것 뿐이고, 대체적인 모습은 후주에 더 가깝지 않은가(...).[9]

"인조"는 한술 더 뜬다. 시법에서 인은 유교에서 추앙하는 최상의 덕으로 성군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매우 명예로운 묘호였다. 예를 들어 성종 사후 인종(仁宗)과 성종(成宗) 중 뭘 묘호로 정할 지 논쟁할 때 "제왕의 묘호는 仁만한 것이 없으니 成이라는 글자로는 대왕의 지극하신 덕을 다 표현할 수 없다[10]"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다. 심지어 굳이 성종으로 하자면 大자를 붙여서 대성종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성종은 이후 사대부들에게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받들어질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도 결국 仁宗이 되지 못했다.[11] 여기에 조(祖)는 보통 재조의 공과 같이 큰 공을 세운 임금에게 올리는 아주 영예로운 묘호다. 더불어 묘호를 정할 때 조(祖)나 종(宗)은 공이냐 덕이냐의 차이이지 어느쪽이 좋고 나쁘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종보다 더 높게 치는 일이 많았다.

즉,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정말 글자 뜻으로만 보면 성군이자 명군이라는, 거의 요순 급의 이상적인 초월군주에게나 주어질 법한, 조선사뿐만 아니라 5000년 한국사를 통틀어 고려 문종이나 세종대왕정도만이 어울릴만한 그 정도의 묘호라는 얘기다.[12][13]

하지만 인조가 사실상 새 왕조를 개창한 사람이란 것은 감안해야 한다. 인조 이전의 조선과 인조 이후의 조선은 분명하게 다른 나라가 되었다. 광해군 때 정권을 잡았던 북인은 도륙되었으며, 동서 분당이래 선조의 의도적 선택으로만 존속하던 소수파 서인이 만년 집권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인조"로 불리게 된 건 효종이 그 정체성의 연장선상에서 즉위했으며, 아버지의 정통성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게다가 인조는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 능력이 매우 형편없어 나라를 말아먹은 암군이지,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내정파탄을 향해서 폭주한 폭군은 아닌 것도 사실이긴 하다. 인조가 폭군적 모습을 보인 것도 말년에 강빈과 관련된 일 외에는 없다.

2. 일대기[편집]

2.1. 반정과 즉위까지[편집]

복수를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유일한 조선 군주.
폐모살제를 말하며 반정을 일으키고, 본인은 더 심한 패륜을 저지른 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정원군 내외가 해주로 피난을 가 있을 때 인헌왕후 구씨가 그곳에서 인조를 출산한다. 실록에 실린 인조행장을 보면 한 고조 유방처럼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어서 할아버지 선조가 이걸 보고 "한 고조랑 같은 상이니 누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원군에게 당부했다고 하는데, 출처가 '행장'인 만큼 인조를 돋보이기 위한 기록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 선조는 인조의 휘와 자를 직접 지어주며 총애했고, 광해군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역시 띄우는 내용으로 보인다.

선조 때 능양군으로 봉해졌고, 집에 왕기가 있다는 설로부터 시작 된 광해군의 경계 때문에 동생 능창군을 잃었다. 이후 아버지 정원군도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집은 헐려 경희궁이 지어진 것은 덤. 결국 능양군은 중부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게 되었고 서인들과 함께 반정에 성공하여 왕위를 얻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인조는 가만히 있다가 얼떨결에 오른 중종과는 다르며, 반정 대의명분 또한 중종반정에 비하면 약한 편이었다. 폐모살제나 궁궐건축등으로 우호적인 여론을 잃은것도 사실이지만 광해군의 사르후 전투 덕분에 조선을 친명파로 생각한 명나라가 황당해했고, 대북 세력이 박살난 이후에도 남은 반대파가 인조 즉위 중에 끝없이 광해군 복위를 추진했으니... 폭군이라 복위 가능성이 전무해 새 왕이 관용을 베풀 겸 살려줘도 문제가 안 됐던 연산군과 달리, 존재 자체가 위험했던 광해군을 끝내 죽이지 못하고 내버려둔 것도 실은 이 때문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안' 죽인것이 아닌 '못' 죽인 것인 셈.

어쨌든 인조는 정통성이 약했고, 이에 따라 반정 세력인 서인들의 의견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반정 당시 앞장서는 등 쿠데타 주도적 측면은 훨씬 강한지라 중종에 비견하면 자기 목소리가 많은 편이었고, 태종이나 세조처럼 자기 세력을 완벽히 장악한 수준의 주도력은 아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비유에 따르면 태종, 세조는 The First of them(주모자)이라면 인조는 One of them(공모자)이었다.

2.2. 책봉 문제[편집]

명나라 조정에서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국왕은 충순한데 왜 폐위 시켰냐?" 라는 반응을 보냈다. 반정 이후 책봉을 받으러간 사신들은 배를 타고 도착한 산동에서 등주자사에게 "임금을 시해한 짐승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시원하게 바가지로 퍼먹고 북경으로 가는것도 방해받았다.

어렵사리 북경에 도착했지만 당연히 곱지않은 명나라 대신들의 눈초리를 받아야했으며 당시 명 황제는 조선왕을 시해했다는 소문은 물론 왜군 3000명을 동원해 조선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문까지 듣고있어서 조선사신단은 이를 해명하는데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이 결과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 22개월동안 책봉을 받지 못했다. 결국 인조정권은 예전 임해군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명 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대량으로 썼으며 이 과정에서 가도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완전한 도움은 아니었다.

이때 인조가 명에 쓴 뇌물의 양은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쓴 은의 총량을 능가했고 모문룡은 책봉을 도운 것을 인조 정권의 아킬레스 건 삼아서 온갖 갖은 행패를 부린 계기가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지 2년뒤, 햇수로 즉위 3년째 되어서야 명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왕에 책봉된다.

2.2.1. 정명공주와의 관계[편집]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인조와 정명공주와 대립관계를 나타내지만, 실제로는 당시 인목왕후&정명공주 모녀가 유폐되어있던 터라 서로 만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에서 나오는 내용은 픽션이니 믿지 말자.

애당초 정명공주를 옹주로 강등하고, 폐서인으로 만들려고 한 사람이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다. 그리고 이 대북파를 지원한 사람이 광해군이다. 정명공주의 동복 남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사람 역시 광해군이다. 기록에는 이이첨이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한 나라의 왕자[14]를 죽이는데 일개 신하의 힘이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드라마와 다르게 반정의 명분인 "폐모살제"의 타이틀 인목왕후정명공주를 바로 궁궐로 복위시키고, 막대한 전답을 내려준 사람이 인조다. 정명공주로서는 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이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건 사실이다. 인조는 인목왕후와 정명공주를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감시를 하였다. 1632년(인조 10년) 인목왕후가 죽은 지 얼마 뒤 인조는 가벼운 병에 걸렸는데, "정명공주가 저주굿으로 왕을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날부터 정명공주에 대한 감시와 경계가 강화되었다.

실제로 인조는 자신의 병의 원인을 정명공주로 지목했으나, 최명길 등은 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정명공주를 처벌해서 안 된다고 주장해서 정명공주는 위기를 넘겼으나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인조는 계속 정명공주를 감시했다.

이 숨 막히는 감시는 1649년 인조가 죽으면서 비로소 끝나는 듯 했으나 완전히 끝나지는 못했다. 효종도 정명공주를 의심했고, 심지어 그녀의 궁녀를 죽이기까지 했다. 결국 정명공주가 어른으로 대접 받은 것은 숙종 때 일이다. 아마 숙종이 적장자의 적장자라는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명공주가 시집간 풍산 홍씨 가문은 홍봉한, 홍국영영조정조 때 권력의 실세가 된다. 그리고 과거 급제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아마 그녀가 인조에게 받은 막대한 경제력 덕분인 것 같다.

2.3. 이괄의 난[편집]

인조 정권은 초장부터 불안했다. 집권 직후에 대북을 갈아버렸고, 반정의 명분이였던 폐모론에 소극적이었던 소북도 조금이나마 숙청했다. 비록 대북 숙청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서인들의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뤄졌는데, 여기에는 인조 자신의 복수라는 의견도 있다. 능창군의 죽음 당시 능양군이 소북의 영수인 유희분에게 전 재산은 물론 빚까지 얻어 가며 뇌물을 바쳐 동생을 살려달라 애원했으나 유희분은 능양군의 말을 무시했고[15] 결국 동생이 죽자 복수를 맹세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게다가 인조반정에 협조적이었던 북인 잔당(중북)들도 벼락을 맞게 된다. 이 배경에는 서인 김류 주도설과 인조 주도설이 있는데, 어느쪽이라도 이원익이 한탄할 만큼 지나친 일이었다.

이후, 중북 숙청 과정에서 반정공신 이괄에 대한 혐의가 공신들의 내분으로 이어져 이괄의 난이 일어난다. 이괄은 반정의 동료들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혐의로 하옥하자 화가 폭발하여 여진족을 막기 위해 조련한 군사 1만을 끌고 남하하여 안주, 평양, 황주, 개성전격전의 속도로 함락하고 수도 한성까지 점령한다. 내부 반란으로 한성을 점령당한 조선시대의 반란은 이 반란이 유일무이하다.[16]

인조는 공주로 피신하였으며 이괄은 흥안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반란군은 무악재(안령)에서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참패, 이천으로 퇴각하였다가 자신의 심복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 북방의 방위 체계가 붕괴되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괄의 부하들이 청군으로 편입되어 수도까지의 길을 알려주었다는 점이 컸다. 핵심인력들이 반란군이 된 대가를 치른 셈이다.

2.4. 정묘호란[편집]

서인 정권은 흔히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인조가 중용한 인사들은 주화론자였다. 병자호란 직전까지 인조 정권이 (후대의 효종 같은 경우와 비교해) 적극적인 반청정책을 일으킨 적은 없다. 오히려 일각에선 광해군 대의 외교적 성과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계승했다는 연구도 있다. 광해군 대의 외교관련 업무를 맡은 대신들을 유임하고, 내부적으로 후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들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일반 백성들에게 친명배금을 표방한 것은 당연한 문제였다. 지금 당장 대한민국이 미국을 버리고 중국을 사대하겠다고 말하면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까? 결론은, 결국 이런 친명배금 정책 덕분에 인조 5년에 또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애초에 반정 세력의 주요 인물인 이귀나 최명길 등은 주화파였다. 하지만 김자점은 친청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나중에도 그런 오명을 얻게 되지만 당시에도 숫제 매국노 취급이었다. 이렇게 반정을 일으킨 서인 멤버들을 특별히 공서(훈서)라 하는데 광해군 시절의 북인(특히 대북)들보다 더 현실주의적인 세력들이었다. 그러니 현실적인 외교방법을 논한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끌어들인 재야 서인들(이들을 청서라고 일컬었다)은 명분을 중요시하여 척화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후금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고자 하는 의도는 있었을지언정[17]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꿋꿋이 상국으로 섬기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배금 표방은 버리지 못했다. 솔직히, 광해군 때부터 모든 조선 사대부들의 동일한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이 엎어진 건 병자호란 이후 더 이상 명나라를 도울 수도 없고, 명이 청의 공격도 아닌 농민반란으로 망하자 실망을 금치 못한 뒤다.

무엇보다 전쟁의 원인은 인조 탓이 아니라, 누르하치홍타이지 시절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와 경제적 원인이 컸다. 청은 기세등등했으나 산해관조차 넘지 못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조공무역을 독점하며 쌓아올린 경제력이 청태종 때 즈음에는 고갈되는 중이었다. 여기에 내몽골을 평정한 이후 만주에 기근이 닥치면서 청은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처했다. 이런 시점에서 청은 산해관 너머로 들어갈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조선에게 공격적인 요구를 했고, 명나라와 거의 단절된 조선은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선 중립정책을 폐기하자는 척화론이 강하게 대두됐으나 정권 내부에선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실속도 명분도 챙길 수 없는 어중간한 것으로서, 확실한 화친정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명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격동하는 주변 정세 속에서 인조는 이렇다할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로 중립정책만 유지했고, 때마침 누르하치 사후 조선에 대해 강경파였던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후의 청태종)의 등극이라는 악재를 연타로 맞이하며 결국 정묘호란(1627년)을 겪게 된다. 당시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 정권의 타도를 기치로 내건 후금은 빠른 기동전으로 성을 피해 바로 수도를 공략했다. 이에 조선군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밀려나야 했다. 이괄의 난 때문에 북방을 담당하는 방어군이 괴멸된 것은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서인정권들도 전략수립에 이괄의난으로 인한 전력공백과 반란군 진압시 병력피해등도 알고 있었기에 병력 증강에 힘을 기울였다.[18][19] 하지만 이괄의 난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된 서북지역의 군사력 으로 인해 인조반정이후 계획된 후금에 대한 군사전략은 그대로 작동하기 힘들었다.

또한 이괄의 난 이후 강화된 기찰은 북방 무관들이 제대로 훈련조차 맘놓고 못 할 상황으로 만들었다. 정묘호란 중 자폭하면서 까지 분전한 영변부사 남이흥 은 유언으로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강한 적을 만나 죽는 것이 진실로 내 일이지만,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라고 남기기도 했다. 결국 강화도로 도망쳤던 국왕은 직접 형제의 맹세를 맺는 단에 나갔고, 스스로 를 마시지 않고 신하가 대신 마시는 선에서 후금과 형제국으로 관계를 재정립했다(정묘화약).

그러나 후금은 어거지로 조선과 명의 관계를 단절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조공 자체에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또 가도모문룡을 함께 토벌하기도 했다. 후금에 조공을 보내느라 온갖 공물을 징발하는 통에 애꿎은 조선 백성들만 허리가 휘었지만 조정에서는 대충 넘어가며 8년이 흘렀다. 그러나 후금은 명나라 정벌의 목전에서 여전히 친명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조선의 태도에 앙금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정권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 후금과의 사이는 다시 나빠져서 인조는 국교 단절까지 생각하게 된다.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이 전쟁나면 큰일난다고 막긴 했지만 결국 둘은 인조의 눈 밖에 나 유배를 간다. 그리고 후임으로 임명된 도원수가 바로 김자점이였다.[20]

2.5. 병자호란[편집]

정묘호란 8년 뒤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가 사망했다. 이에 후금은 조문단을 보냈으나 이와 함께 홍타이지를 황제로 함께 추대하자는 의견도 함께 보냈다. 후금은 나름 형제국이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으나 상당한 무례함을 보였고, 인조는 논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물러가는 후금의 사신단에게 백성들이 돌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홍타이지는 격분하게 된다. 그러던 인조 14년에 또다시 쳐들어오게 된 것이다.

형제관계와 달리, 칭제인정은 명에 대한 사대가 완강했던 당시 조선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었다. 명이 어려움을 겪었다고는 하나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게다가 결정적으로 명이 멸망할 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21] 오히려 청이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체붕괴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명이 망하지 않은데다 명에게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재조지은이라는 빚까지 있어 이를 저버린다면 내부적으로 반정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도 있다.[22] 이는 명에 대한 의리를 반정의 한 명분으로 정권을 쥔 인조 정권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봐도 당시 조선으로서는 중립외교 이상을 할 수가 없기도 했다. 광해군이라고 해도 이 점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청나라 입장에서도 조선이 확실하게 굴복할 지 알 수가 없는 상황에서 청이 받아들일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즉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결국 조선을 설득하길 포기한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으로 바꾸었다. 예전부터 조선에 강경파였던 홍타이지는 조선이 신하되기를 강박했고 열받은 인조는 초강경 국서를 투하, 동시에 팔도에 교서를 내려 방비를 분부한다. 최명길의 반박상소에 곧 다시 화친으로 정책을 바꿨지만 사신이 심양에 도착하기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한다.[23]. 음력 병자년 12월로, 양력(그레고리력)으로 1637년 1월 되는 해였다.

결국 인조는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강화도도 못가고 남한산성에 갇혀버리고 만다. 남한산성에서 한동안 농성으로 버텼지만 전쟁 전에 식량을 바깥으로 빼놓은 병크 때문에 결국 물자가 바닥나게 되고, 각지의 근왕군(속오군)마저도 고질적인 훈련도 및 조직력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며 쌍령전투 등으로 청군에게 각개격파 혹은 차단되었으며, 심지어 숫적으로 압도적 우세에서도 청의 기동 전술에 휘말려 흩어진 경우가 많았다. 물론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도망친 병사들을 다시 수습하는 과정도 일이고, 재조직해 다시 공격을 할 때는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일부 승전을 거둔 근왕군들도 삼전도의 굴욕을 거둘 때까지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자점의 주력 함경도 근왕군은 한번 털린 이후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24]

단, 인조때 군사대비가 미약했다고 까는 건 현실성이 없는데, 최소한 조선의 경제력 내에서는 할만한 개혁은 그럭저럭 해놓은 상태였다. 차라리 이괄의 난 영향으로 조선의 중요지점에는 중앙의 측근들만 기용하고 국내감시가 너무 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병자호란 때도 도원수의 김자점과 중요한 요충지인 강화도의 김경징같은 무책임과 무능력자들을 임명했는데, 최소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인조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사령관을 잘못 임명한 것이지만, 당시 조선군이 집단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감시한 것도 있다. 이괄의 난 이후 기찰(감시와 통제)이 심각해졌고, 군 지휘관들도 본인들 안위를 위해서 군 훈련자체를 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몽골 침입 때도 굳건했던 강화도마저 함락당해 강화도에 주둔하던 세자들까지 포로로 붙잡히는 꼴을 연출하게 된다. 물론 몽골군과 달리 청군은 수전을 피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25]

2.5.1. 삼전도의 굴욕[편집]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의병의 구원을 바라면서 40일 동안 농성했으나, 각지의 근왕군마저도 청군에게 각개격파되어 더 이상 희망이 없자 김류, 최명길 등이 "피폐(皮幣), 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 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청하고 소현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자, 결국 주권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항복하여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하고 군신의 의를 맺는 굴욕을 당한다. 이는 한국사에서 왕이 몸소 오랑캐에게 조아린 최대의 굴욕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굴욕으로 인하여 왕권은 바닥을 쳤는데, 인조가 삼전도 굴욕 후 궁으로 복귀하기위하여 한강 둔지에서 배를 타려고 하자, 신하들이 인조 목 뒤를 잡아서 밀어내고 본인들이 먼저 배를 타고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버려, 인조를 모시는 내시들이 발품을 뛰어서 배를 구하여 간신히 궁으로 복귀했다는 것이다. 더 웃긴 것은 인조 목뒤를 잡아서 본인들 집으로 간 신하들은 인조가 처벌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청은 왕에게 굴욕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왕자들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볼모로 잡아갔으며, 조선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당한 굴욕을 후세에 길이 남기도록 비를 세우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줄여서 '삼전도비'가 세워지게 된다.[26] 다시 말해 적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우리 손으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 비석은 유교국가이자 명에 대한 사대를 견지해온 조선의 입장에서 실로 대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내내 두고두고 조선의 수치를 상징하는 표식으로 남았으며, 특히 청의 국력이 약해진 구한말부터는 당연히 보복의 대상이 되어[27] 훼손의 운명을 겪었다. 고종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무너지자 바로 삼전도비를 파묻었고, 일제가 이를 다시 복구했으나 이번에는 1956년 제1공화국 당시 문교부에서 치욕의 상징이라며 또 파묻었다. 1963년 이걸 또 꺼내서 다시 훼손하지 못하게 사적으로 지정했는데 이번에는 2007년 2월 3일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서울 한복판에 국가적 치욕이 버젓이 서 있는걸 볼 수 없다며 페인트로 훼손을 가했다.[28]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a/%E5%A4%A7%E6%B8%85%E7%9A%87%E5%B8%9D%E5%8A%9F%E5%BE%B7%E7%A2%91%E6%AF%81%E6%90%8D01.png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3/%E5%A4%A7%E6%B8%85%E7%9A%87%E5%B8%9D%E5%8A%9F%E5%BE%B7%E7%A2%91%E6%AF%81%E6%90%8D02.png

페인트로 훼손당한 사적 101호 '삼전도청태종공덕비'. [29]


훼손된 삼전도비는 정부에서 정성껏 복구해 조선 시대의 원위치로 옮겨 세워놨다. 관련 기사 허나 아무리 반면교사적 가치가 있다고는 해도 이쯤 되면 좀 안타깝다. 비록 치욕적인 역사라고 해도 역사의 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역사를 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왜곡으로 자기 정권에 쓰는 일본 정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행동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들

2.6. 비정한 군주[편집]

병자호란의 패배는 인조가 개판을 친 것과는 별도로 당시 조선군 자체가 임진왜란, 사르후 전투, 이괄의 난, 정묘호란등을 겪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탓에 막장이었던 것도 있어서 그나마 실드를 쳐줄 구석이 있다. 하지만 소현세자 문제는 비정하다고 욕을 먹는다.

인조의 아들로는 요절한 소현세자와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이 유명하다. 또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도 중요한 인물이다. 인평대군을 세종대왕의 3남인 안평대군과 혼동하면 곤란하다... 재밋는 건 인평, 안평 모두 셋째 아들이며 시와 그림, 글씨에 능했다고 한다.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 이유의 5대손이 바로 이채중이란 사람인데 이채중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후사 없이 일찍 죽은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고 이구로 개명했으며 '남연군'이 되었다. 그리고 남연군의 막내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

호란 이후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치욕을 씻자며 북벌론이 산당 등을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대세도 결정난 상황에서 그럴 이유가 없었고 일단 나라 재건부터 해야 했던 인조는 영정제를 실시했으나, 사실 이것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결국 아들 대에 정비를 한번 더 해야 했다.

삼전도의 굴욕 외에도 왕좌를 지키기 위해 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문 도 심심치 않게 제시되는 등, 여러모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에 관해 실록을 보면 사관들의 비판으로 가득할 정도.[30] 세종이 정해놓은 적자승계의 원칙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장남이 세손이 되어야 하나 이걸 무시하고 차남 효종(당시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으며,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까지 역모를 꾀했다면서 세자빈을 폐한 연후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31]

원인은 세손이 어린 상황에서 실권자가 될 다혈질인 강씨의 성품을 두려워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세손들은 안 된다 "라는 논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인조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예상한 것으로 보이며 (4년 뒤 실제로 사망한다) 강빈 사사 당시 고작 열한살에 불과한 장손 이석철이 강빈에게 휘둘리지 않을까 경계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후궁 조씨와 봉림대군에 대한 저주가 담긴 유언을 남긴 강빈을 보면서 "죽어 마땅한 년이었다"고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실제 조선왕조에는 인수대비, 폐비 윤씨, 문정왕후라는 쟁쟁한 사례들이 있었다. 좀 더 설명하면, 인조에겐 새 중전 장렬왕후가 있었으나 장렬왕후가 민회빈보다 열세살이 어려, 후에 대비로 승격할 가능성이 높은 민회빈 강씨가 인수대비나 문정왕후처럼 강경하게 나설 가능성은 충분했다. 게다가 일단 사약을 먹이고 엄청난 유언을 들은 이상, 연산군의 전철을 밟을 손자들도 살려둘 이유가 별로 없다.

이때 신하들이 당태종의 일을 들고 동정론을 펴자 인조가 '당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씨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비답하였고 다시금 신하들이 '강빈이 비록 전하의 자식은 아니지만 빈(嬪)으로 있을 때는 소현(昭顯)의 배필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아닙니까'라 하며 선처를 바라자 인조가 윗전을 모욕했다며 '개새끼같은 것을 임금의 자식이라 하다니, 나를 모욕하느냐?'라는 뉘앙스의 헛소리를 지껄인 말을 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다.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인조실록》 24년 2월 9일[32].


이 발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몇 안되는 욕설사례다. 물론 조선의 왕들도 사람인지라 욕을 하기는 했다. 정조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맘에 들지 않는 신하를 가리켜 '호로자식'이라고 한 정도가 기록에 남아 있다. 경종도 영조가 연루된 역모사건과 관련하여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는 언급이 있다. 이런 욕설을 공문서인 실록에 그대로 싣기는 어렵기 때문에 더벅머리 선비 정도의 순한 욕설만 싣거나, 주로 '임금께서 대노하여', '차마 듣지 못할 전교' 등으로 필터링한다. 이렇게 왕이 직접 "개XX"라 욕한 것이 사관에 의해 여과되지 않은 사례는 인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를 감안하면 사실 인조의 저 발언도 '순화'되었거나 듣던 사관들도 빡쳤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인조가 자기 며느리 상대로 견공자제분 초대형 패드립을 쳐가며 광분했고, 이런 사실 때문에 그가 독살을 지시하진 않았다고 해도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덕분에 송시열 등 예법을 중시하던 서인들은 효종이 정통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이후 예송논쟁이 벌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던져 죽였네 하는 등, 야사의 이야기에서도 좋은소리 못 듣는 임금 중 한명이다. 설령 직접 죽이지 않았다고 쳐도 소현세자가 부왕에게 핍박을 많이 받고 일찍 죽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조선 관련 음모론 가운데 드물게도 정설에 준할 정도로 인정받는다. 당장 음모론을 제기한 것도 인조 지지세력인 서인들이고, 이들이 대놓고 사초에 적어 놓았을 정도다. 물론 그 대가는 아들 효종이 받았다.

자신의 등극 자체가 반정이었기 때문에 역모에 대한 불안감으로 애먼 인사들도 많이 숙청시키거나 죽였다. 특히 거의 성공할 뻔한 이괄의 난을 겪은 뒤에는 경계심이 가히 편집증에 가까워졌다. 인조의 경계로 인해서 역모로 매도당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인 유몽인[33]과 그 아들도 있었으며, 경세가로 이름 높은 유형원 역시 아버지 유흠이 인조에 의해 연좌제로 역적 취급당하여 죽임당한 정치판의 막장스런 현실에 환멸감을 느끼고 재야로 내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큰 며느리마저 비정하게 죽였던 인조의 권력도 오래가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4년 뒤 인조는 날씨가 한창 더워진 인조 26년인 1649년 6월 어느 날,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학질 증세로 사망한다. 실록에는 며칠 전부터 감풍등의 증세가 있어, 계속 침을 맞았던 왕이 갑자기 두드러기오한이 났고, 의원이 진찰한 결과 학질증세가 있다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55세까지 살았던 인조가 조선시대 왕 중에서 단명했다 말하긴 힘들지만, 말년에는 후궁 중 한 명인 조 귀인에게 푹 빠져 지냈는데, 이 조 귀인과 강빈 사이가 나빴고 이것이 인조가 강빈을 사사하는데 한 몫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왕비는 2명으로 능양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렬왕후, 그녀가 1635년 사망하고 3년 후 1638년에 간택된 장렬왕후이다. 장렬왕후는 인조가 사망한 뒤에 대비로서 '자의대비'로 불리었는데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1624년생)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1619년생)보다도 5살이나 어렸다. 나이 차이만 따지면 딱 인목대비-광해군 시즌 2. 그러나 인조에겐 장성한 적자가 셋이나 있었고, 장렬왕후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인조 사후 그녀는 궁궐에서 국왕들과는 별 충돌없이 지냈다. 그러나 효종이 사망한 뒤 그녀의 입장을 두고 조선 역사상 최대의 정치 격론이 벌어지는데 바로 예송논쟁이다. 물론 예송논쟁 자체에 장렬왕후가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고 왕비는 내명부의 수장이자 내명부를 다스리는 역할을 했으므로 왕비가 필연적으로는 필요하긴 했지만.

전쟁 피해를 수습하고 나서 할 일이 줄자 노는 데 집중한 점도 까인다. 궁 내에 연못을 파고 누각들을 화려하게 꾸미고 후원에서 노는 걸 좋아했으며 시녀들이 드는 가마를 타고 다니다 몇 번 넘어져 크게 다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 김자점 같은 간신배들도 많이 늘었는데, 나중에 효종이 쓸어버리느라 고생을 좀 해야했다.

3. 치세와 정책의 영향[편집]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화되고 여성의 지위가 내려간 것도 인조 시기.

조정은 병자호란으로 기존에 세웠던 집권 명분이 약해지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내부에서부터 정권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고, 이에 기존에 상당히 느슨하게 적용되던 성리학적 종법질서를 급격하게 강화해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덕분에 수많은 여성들이 열녀라는 이름아래 목숨을 잃거나 평생을 외롭게 수절해야 했다.

환향녀를 비롯한 환속 문제는 인조도 딱하게 여겼는지 환속 금액 상한 제한과 이혼 금지로 막으려고 하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지키려 하지 않았다. 사실 인조 본인부터가 불탄 한양과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문제를 인식하고 바꿀 생각은 안했던 인간인지라...[34] 다만 이건 당대 기득권층 대부분이 비슷하긴 했다. 백성들이 불쌍하긴 한데 내 기득권은 내주기 싫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 회복된 것은 효종-현종기를 거치면서였다.

이후 소현세자를 박대하고 급기야 아예 후계를 세손이였던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으로 바꿔버리면서 왕권이 약해지게 된다. 당장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즉위 후에도 한동안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고 이후로도 신하들에게 책 잡힐 행동은 하지 못했으며 죽은 다음에도 예송논쟁에서 보듯 계속 시비에 시달렸다. 정통성 문제에서 그나마 자유로워진 현종도 클 대로 큰 산당을 제어하는 데 고생을 했고 결국 숙종 대에 가서야 왕권이 다시 강력해졌다. 정작 인조 본인은 즉위 자체가 서인 정권의 정당성과 연결되어 있었던 데다 명이 멸망한 후 청은 조선이 뭘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35] 죽을 때까지 나름 강한 왕권을 누리고 갔다. 물론 그 왕권으로 그가 한 것은 전쟁 피해를 조금 복구한 정도고, 그나마도 아들과 손자는 왕권을 위해서 더 작업하다가 차례로 과로사해야 했다. 여러모로 무책임한 왕.

더구나 인조가 모문룡이 죽을때까지 가도에 보낸 군량미가 매년 3만석이며, 이마저도 모자라면 모문룡이 주변 조선인들을 약탈한지라 병자호란시기까지 인조정권에서 낭비한 세수는 26만 8천 7백여 석(= 약 5만톤 가량)으로 당시 조선의 세수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양을 모문룡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무조건 욕하긴 힘든 게 모문룡이 명을 뒷배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병자호란 직후 조선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가도에 주둔한 명군(정규군이 아닌 모문룡 잔당)을 쓸어버렸던 일이다.

그나마 인조의 치적으로 꼽히는 것으로는 1. 양전의 실시, 2. 기존 경대동의 문제점 파악 및 추후 시행책 논의, 3. 공물변통론과 대동법 논의, 4. 인조 말기 흉년기의 임시방편적 구휼제도를 시행 등이 있다.

그러나 제도의 정착을 위해 왕실의 희생을 감수할 의지는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법 제도의 시행' 영역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실무자들을 방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즉위 직후 시행한 삼도대동법 시행 과정에서도 그는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데다가, 양전이 미비하여 토지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여기에 방납업자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산림 등에서도 대동법에 대한 이견이 많았으며 대동법을 주창했던 이원익까지 그만두자고 주청하자 강원도 외에서는 폐지하고 만다. 요약하자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논의와 몇번의 시범실시[36]가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정도.

결국 교과서상에는 '대동법을 시작했다'는 타이틀만 달고 있는 광해군[37]이, 학자들 사이에선 '진정한 대동법의 시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효종(정확히는 이때 정국을 주도해 대동법을 정착시킨 김육)과 '대동법의 확대와 정착기'인 현종에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 조도사를 뜯어고친 것도 반정으로 싸늘해진 민심 수습을 위해 내세운 것이었으며, 양전사업을 실시했다지만 이건 사실 법적으로 20년마다 하도록 규정된 것이라 다른 왕이었더라도 어차피 해야 했다. 게다가 최명길이 올린 상차에서 양전을 다시 해야 한다며 '선왕 때 새로 경작된 땅은 전안에 들지 않았고 묵은 것만 전안에 들었다'라고 발언한 점에 비추면 정책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양전 사업마저도 불완전한 요소가 있었다.

인조 대 새로 실시된 '영정법'(영정과율법) 역시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기존의 등급을 나누어 징수하던 전세를 일괄적으로 고정해 걷는 것으로, 대부분의 전답을 최하등급 하하전으로 지정해 최저 세인 4말을 걷기로 한 것이다. 대충 보면 취지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남의 밭을 가는 대다수의 소작농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영정법으로 부족해진 세수를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갖은 세금과 수수료를 추가로 때려서 농민의 허리를 더 심히 휘게 만들었다.[38] 이러다 보니 민중의 원성이 너무 커서 결국 숙종 때엔 영정법의 허점을 보완할 비총법을 만들어 가혹한 징세를 완화시켰고 영조 때 법제화시켰다.

4. 총체적 평가[편집]

4.1. 비판[편집]

인조는 능력 부족 이전에 국가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비전 자체가 부족했다고 평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무책임하게 빠졌다. 이런 모습이 수많은 병크를 일으켜 인조의 비판 여론이 많다. 넷상에서는 일부에서 제기되는 묘호 강등 주장에 따라서 아예 대놓고 능양군이라고 부르거나, 청나라에서 준 시호장목왕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아예 대놓고 휘인 이종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인조의 무책임하게 빠지는 단점은 특히 외교에서 두드러진다. 비록 사르후 전투 덕분에 오히려 국제적으로 친명파라는 이미지를 더 굳힌[39][40] 광해군이나, 광해군 시절의 지도층인 대북파가 대명의리를 주장하는 등 광해군의 중립외교에는 논란이 많고, 오히려 인조 시절의 현실적인 주화론자가 인조 시절의 지도층을 차지한건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김류, 최명길, 이귀 등이 고려 때처럼 유연한 외교를 주장할 정도로 오히려 광해군보다 더 중립외교를 지지하는 지도층을 보유하고 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중립외교를 지지하는 지도층을 보유하고도 인조는 중립외교를 펼치지 못했다. 두 번의 호란을 막을 수 없다면 늦추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를 하지 못한 것이다. 인조는 반정 명분중 하나를 친명배금으로 삼았고, 윤집, 김상헌 등 성리학자들이 반청 여론으로 목소리를 높이면 그거에 휘둘렸으며, 현실적인 주화파들이 중립외교를 주장했으나 그들을 밀어 주기는 커녕 무책임하게 뒤로 빠져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름만 중립외교였지, 외부적으로 볼때는 친명배금이었던 것이다. 외교는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는 대북이 주도하던 광해군 시절에 광해군이 적극적으로 나서 정충신 등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강홍립과 연락을 주고 받은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인조의 중립외교는 명나라에게서도 신뢰받지 못하고 청나라는 적대하는 이름만 중립인 어설픈 외교가 되고 말았다.

명나라와의 외교는 즉위 직후부터 순탄치 않아 명나라"광해군은 우리한테 협조적인데 왜 내쫓았냐?"는 반응이었다. 이 때문에 외교문제에서 거의 호구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41] 더구나 명나라 사신이 올때마다 엄청난 뇌물을 바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백성들 고통은 심해졌다. 이렇게 명나라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정통성을 위해서 아버지 정원군을 '''강력한 반대들에도 불구하고 우격다짐으로 대원군이 아니라 아예 왕으로 추존한다. 그리고 종묘에 있던 11개의 방이 모두 꽉차서 아버지 자리 하나 만들어본다고 성종의 위패를 빼버린다.[42]

청나라와의 외교는 더 심각했다. 물론 조선에서 전쟁을 완전히 막을 방법까지는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어차피 조선이 완전히 복속되지 않은 이상 청나라는 침공할 것이 뻔했고, 설사 전쟁을 하지 않아도 막대한 공물과 군사를 요청 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전쟁이 필연적이라 해도, 아직 임진왜란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조선의 입장에선 최대한 늦출 수록 유리하다. 그래서 이귀, 최명길, 박로 등 서인들이 청나라와의 적대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인조는 결정적인 상황일 때마다 뒤로 빠졌다.

이는 선조와 매우 다른 점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의 특정문제를 제외하면 목릉성세(穆陵盛世)라는 통치력을 뽐냈으며, 인재 육성으로만 따지면 세종대왕 이후 최고의 군주였다. 선조가 졸렬함을 드러낸 건 임진왜란 도중 이몽학의 난 이후였으나 그 이후로도 의주 파천을 진행하고 진주성 함락을 필연으로 보는 등 전황판단도 나쁘지 않다. 애초에 이순신 장군을 직접적으로 발탁한 왕이 선조였고, 임진왜란 이후의 군사전략과 복구정책을 봐도 선조는 국가운영 만큼은 뛰어난 군주였다.[43]

결국 주화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립외교보다는 친명배금 정책을 가지게 된다.[44] 결국 정묘호란이 터지고, 이괄의 난으로 약체화된 조선군은 계속 밀려서 정묘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하지만 조선이 청을 이기지 못한다는게 판명된 정묘호란 이후에도 인조의 정책은 중립외교보다는 오히려 더더욱 친명배금으로 흐르게 된다. 정묘호란 이후 백성들이 분노해서 사신단에게 돌을 던지는 일이 발생하자 인조는 민심과 야합해 허세를 부려 선전포고나 다를 바 없는 짓을 했다! 그 와중에 청의 사신 용골대를 추방하면서 국교를 단절하여 외교적 해결 자체를 제거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물론, 성리학 윤리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대놓고 (백성을 포함해서) 명을 버리고 청과 교류하자는 세력은 전무했다. 그러나 현재 조선의 상황으로선 청나라와 전쟁을 수행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신하(정확히는 산림 출신 대간들)들과 백성들이 분노한다고 해도 최고 지도자가 이를 다독이고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인조는 오히려 청나라와 대적하겠다고 큰소리 쳤다. 이 때 청나라는 산해관은 넘지 못 하지, 대기근이 들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한족은 반란을 일으키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전쟁이 지지부진하고, 대기근이 들어 한족이 반란을 일으켜 고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을 정벌해 민심을 무마시키거나, 조선의 협조를 받는 것 이었는데, 울고 싶은 데 뺨을 때려주자 계획대로 병자호란을 속행했다.

당시 조선 조정의 분위기도 주화파들이 적극적으로 청나라에게 사정해서 전쟁을 늦추거나 달래 보자하는데, 인조는 아무 것도 안 한 채 눈치만 살폈다. 중신들은 빨리 사죄하고 사정을 알려야 한다고 했는데 인조는 이때 어물쩡 넘어가려는 행동을 했다. 왕이라면 책임지겠다는 인사를 지목해 진행을 했어야 했는데도, 그냥 신하들의 갑론을박만 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무책임의 표본이었다. 인조가 눈치만 보는 바람에 7개월 동안 이 문제로 토론하느라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결국 박로가 직접 사신으로 출발했으나, 박로가 압록강을 넘기도 전에 병자호란이 터지고 만다.

물론 인조도 병자호란의 대비를 하기는 했다. 광해군이 병자호란과 같은 전격전의 가능성을 예측했다는 이야기처럼, 인조도 똑같이 그 문제를 경계했다. (인조 4년의 기록이다.) 최소한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건 인조도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병자호란 때 함경도의 2만이 넘는 정예군이 있었고, 비록 훈련은 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속오군으로 8만 가까이 준비되어 있을 정도로 전쟁 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던 중이었다. 문제는 실질적인 총사령관인 김자점과 강화도 수비하라고 보낸 김경징 이 두 인물은 해당 임무를 맡기는데 절대로 걸맞는 인물이 아니었고 순전히 자신이 왕좌에 오르는데 도움을 준 인물들로 인사를 단행했다.

최대 문제점은 인재 보는 눈이 없다는 것.[45] 가장 홀대받았던 서인과 손을 잡은 결과 조선의 역대 정권 중에서도 손꼽히게 열악한 인재풀을 보유하였으며, 발탁 배경에 있어서도 정실인사와 보은인사, 코드인사를 중시하는 정도가 톱을 달릴 지경이다.[46] 그래서 역대 반정공신들 중, 아니 역대 중신들 중 인조반정의 공신들이 제일 무능한 편에 속한다. 애초에 북인 정권이 오래 지속되느라 인조반정에 참여한 서인 공신들 중에서 관직 경험을 가진 양반이 지방 수령을 지냈던 김류, 이귀와 최명길 정도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청요직들이었다. 나머지는 죄다 공신 아들이나 백수들 밖에 없으니 한계가 있긴 하지만[47] 거기서 기존 인재들 포섭할 생각이라곤 남인과 소북을 끌여들이려 했던 김류 정도 밖에 없으니 답이 없다. 결국 이런 인사정책으로 기껏 준비해둔 개혁은 지지부진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최고위급 장수를 선임하는 눈이 없었다. 인조가 최고위(도원수,부원수 급)장수로 선임한 장수가 이괄, 장만, 김자점 등이다. 그나마도 인조 반정 직후 벌어진 이괄의 난,[48] 수차례 일어난 광해군 복위 시도로 북인들이 떼죽음을 당해버렸다 전략적 측면을 보면 인조반정의 공신 중에서 그나마 유능한 사람이 이괄인데[49] 그런 사람까지 쳐내버리고...애시당초 인조도 국경 방위군을 제외한 전반적인 조선군의 상태를 잘 알아서 함경도군을 끌어다 청군 저지에 쓰려고 했는데 그걸 무시한 게 바로 김자점이었다. 만일 김자점이 명령에 따랐다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인조가 강화도 등의 안전지대로 피신했을 것이고 그 동안 근왕병들이 유연하게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주요한 위치에 김자점을 앉힌 것 자체가 실수였다.

게다가 인조는 이런 무능하고 부패한 공신들을 끝까지 끼고 갔다. 그 가운데는 후대에 매국노로 잡혀 죽은 김자점, 김경징까지 있을 정도다. 그나마 최명길 정도가 신료로서 뛰어난 편이지만[50] 그마저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왕위에 앉힌 무리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등용된 것이다. 다만 두번의 호란으로 트라우마를 입어 전쟁을 꺼리던 인조가 주화파인 그를 푸쉬를 해줬지만, 이는 같은 주화파인 간신 김자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은 인조가 더 총애한 김자점에 의해 최명길도 몰락하고 말았다.[51]

애당초 인조가 서인과 손잡고 광해군을 쫓아낸 이유가 가족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이었던 탓도 있다. "폐주보다 잘해보자. 그러니까 당쟁, 동기살육은 안 돼 " 정도의 관념은 있었어도, 딱히 태종이나 세조처럼 정권을 잡고 난 다음 나라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비전은 없었다. 왕이 된 후에도 김자점 같은 무능한 인물도 아부 잘한다고 권신이 될 정도로 주변에 예스맨들만 채우려 하는 모습에 신하들이 반대하는 추숭에 매달릴 정도로 권력에 집착해놓고 정작 그 권력을 즐기는 데에만 썼을 뿐 두 차례의 호란을 겪고도[52][53] 가정적으로는 아들 소현세자를 박대했고, 며느리 세자빈 강씨를 손수 죽이며, 손자들에게 "그 개새끼 같은 것들을 왜 신경 써야 되냐"라고 욕하며 죽였고, 일가까지 박살내는 등 반성을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두고두고 까인다.

과거 서인들이 주류이던 시절에는 반정을 일으켜 즉위하고 침략자 청에 맞서 싸웠다(?)는 명분으로 인조대왕이라고 칭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사실 이 때도 전반적인 평가는 좋지 않았다. 당장 인조가 죽자마자 그가 세운 공신들의 상당수가 갈려나가고, 그가 만든 정책은 전면 재검토되어 그나마 쓸만한 것들만 추가됐다. 이 점에서 정말로 이덕일이 말한 악조(惡祖)라는 표현은 충분히 쓰일 수 있는 수준이라 하겠다. 당연히 현재는 옹호 그런 거 없고[54]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전문 학계의 시각으로 보나 일반인들의 시각으로 보나 평가가 심히 좋지 않다.

전반적인 치세가 치욕으로 점철되어있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문제가 많은 군주임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렇듯 너무 평가가 좋지 못한 나머지 까가 빠를 만든다적인 반작용으로 재평가해주려는 움직임까지 있을 정도. 광해군의 내정이 과도한 궁궐 증축를 시작하여 문제의 소지가 훨씬 대단했기 때문에, 인목대비 폐비론과 과도한 옥사[55]로 현대에 들어서는 명분 자체가 아예 없는 계유정난보다는 명분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4.2. 긍정[편집]

많은 사람들이 생각과는 달리 인조 본인의 판단력 자체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인조 본인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허나, 정작 뚝심있게 결정을 내려야할떄는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즉, 어떻게든 시행하려는 추진력과 비전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악평의 대부분은 광해군이 남긴 뒷처리까지 인조가 뒤집어쓴다는 주장이 있다. 광해군 때 이미 외교와 정책을 이끌어야할 행정부의 능력이 이전 왕(광해군)이 주도한 물갈이로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평가처럼, 만약 인조가 정말로 능력이 없었다면 여러 차례에 호란과 반란을 단순 운이 좋아서 견디며 계속 권좌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말이 정말 안 된다. 단순 무능력자도 아니고, 적당한 능력이 있는데도 권력을 지키기 급급했으니 전형적인 암군이라고 볼 순 있다.[56] 하지만 인조반정과 권력안정 면에서 인조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광해군의 벌여놓은 대규모 토목공사는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모두 배척 받았다. 광해군이 내치는 사실상 망국으로 만들어버렸기에[57], 공사를 중단시키고, 대동법 확대(즉위 초년에 강원도 확대)등 나름 능력을 발휘했다.

소현세자의 박대건도 실상 단순히 소현을 미워했다는 개인적인 호오 이전에 청의 영향력이 소현세자에게 너무 큰 문제가 있었다. 강빈을 사사한 것도 이게 봉림대군을 위한 행동이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이 남지만, 만약 인조가 딱히 개입하지 않았다면 강빈 사사 자체는 외척에게 권력을 주지 않기 위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봉림대군은 효종이 되어 국정을 이끌어 나갔다. 봉림대군이 옹립 될 당시 김자점과 소용 조씨의 힘을 너무 키워주어 나중에 효종이 그들을 내쫓을 때 나라가 한바탕 난리가 난게 흠이라면 흠. 뭐 김자점이나 소용조씨 입장에서는 토사구팽으로 보일 수 도 있을 것 이다.

위에서 지적했듯 단순히 무능한 왕도 아니다. 스스로 반정에 성공하여 왕이 되었고, 인목대비의 명분을 바탕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원익, 최명길, 정충신 같은 중요 인사들도 보호해주었다.[58] 국가운영 면에서는 광해군보다 확실히 나았다. 자기가 친 사고를 보며 통곡하거나 개선해야 한다는 의식도 가져서, 인조말기에는 대동법 개정, 경제회복, 군사개정 같은 업적을 남겼다. 대외정세에 대해서도 신하들보다는 인조의 판단력이 그나마 우월한 수준이었다.

현대의 인식이나 미디어에선 광해군 이미지까지 뒤집어 쓰는 왕이기도 하다. 하지만 광해군은 행정이나 경제 분야에 밝지 못하여, 선조의 중신들을 죽이고 임진왜란 이후의 국가상황을 인조말기가 되어서야 회복될 정도로 악화시켰다. 일례로 광해군이 궁궐 예산을 메우기 위해서 매관매직을 허락한 결과, 궁핍한 백성들끼리 좋은 수령이 쫓겨나지 못하도록 돈을 모으는등 전후복구와는 동떨어진 방향에서 국정이 엉망이었다. 인조 시절의 조선이 왜 국가안정화에만 신경을 썼는지를 이해해야 하는데, 광해군 말기의 실정까지 인조탓으로 덮어씌우는 이미지가 강해서 그 흐름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저런 삽질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살피고 김육, 이원익 등의 실무자들을 방해하지는 않아, 정말 필요한 개혁 자체는 그럭저럭 진행한 왕이기도 하다.[59] 덕분에 말년에는 국정 실패를 만회했고, 아들 효종부터는 암군들의 역사를 끝내고 그럭저럭 국가가 돌아가는 기틀을 물려주었다. 죽기 전에는 효종(세자)-현종(세손)이라는 바른 선택으로 후계자들을 깔끔히 했고, 광해군의 실패와 청나라 태종에게 털린 뒤 왕조의 재건에 성공했고, "여민휴식" 정책을 통해서 경제와 민생을 모두 재건해낸다. 즉 외치나 인사관리로 따지면 암군의 칭호를 절대 피하기 어려우나, 유명하지 않은 후반기에는 수십년간 이어진 암군들과 전쟁의 여파를 막아내면서 숨을 돌릴 기회를 주었다.

광해군 대는 국가재정 수요가 폭증하면서 납세자들의 납세 부담이 급증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공물납부 및 징수 과정에서의 구조적 폐단으로 존재했던 방납(防納)이 다시금 부활했고, 궁궐 공사가 과도하게 연이어 추진되면서 수많은 백성이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만 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는 왕실을 최정점으로 한 지배층의 사치 및 낭비 풍조가 만연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광해군 치세 3기인 광해군 10년~15년(1618~1623)의 5년 동안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조정이 '여민휴식'의 기치 아래 국가재정 규모의 감축, 긴축재정의 실시, 세금 부담의 완화와 같은 개혁적 움직임을 추진해왔음을 고려해보면, 광해군 정권의 일탈적 양상은 바로 그 '여민휴식' 정책의 '부작용'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

예컨대 중국사에서는 명·청 교체기인 1640년대를 소빙기가 가장 활성화된 시기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한국사에서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는 1670~1700년 무렵이었다. 중국 역사학계가 1640년대를 소빙기의 충격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된 시기로 이해하는 까닭은 바로 이 무렵 왕조 교체를 포함한 대규모의 정치경제적 변화가 수반되었기 때문이다.[60] 반면 같은 수준의 이상저온의 충격을 받은 1640년대 즈음의 조선은 도리어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였다. 이는 인조 정권이 1636년 병자호란에서의 패배 이후 '여민휴식'을 모토로 긴축재정, 세금 부담의 완화 등을 통해 농민들의 사회경제적 안정을 위해 매진했던 덕분이다.[61]

여민휴식이라는것은 본래 중국 전한의 황로학파가 내세운 사상으로서 전한 초기 문제와 경제의 정책이었다. 여민휴식 정책은 왕실이 주도하는 철저한 절약과 절검,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경세 정책,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 형벌 완화 등에 정책의 초점을 맞췄으며 이는 한나라 초기의 상태가 임진왜란이 갓 끝난 조선의 그 것과 같다는 점에서 이뤄진 생각이었다. 선조는 임란 이후 이 정책을 실행했고 이 정책은 인조가 계승하여 효과를 거두게 된다. 효종 3년에, 전 판서 조경이 '중국의 능화지로 벽을 바르고 능단과 금수로 만든 옷을 해 입고, 최상의 말을 타고,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 풍조'가 서울 고관뿐만 아니라 시정의 하층민들에게 까지 만연했다고 한탄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한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역 사족들까지 편승 하는 등, 사치 낭비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인조-효종기의 국가 사정은 오늘날의 생각보다 상당히 나은것이었고 이런 자유주의에 가까운 조정의 태도는 민간의 중흥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런 정책은 현종때까지 이어졌지만 민간에 대한 비개입은 점차 지배층의 부의 독점화와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한 사회양극화 현상을 크게 일으켰으며 현종말기부터 숙종시대에 이르는 소빙기로 인한 기근의 연속은 더 이상 민간이 모든 것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것은 숙종, 영조, 정조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왕권을 지닌 왕들이 등장하는 원인이 되는데.이는 한나라의 여민휴식 정책으로 호족이나 지주계급이 성장했고 이로 인한 사회 양극화로 인해 한무제가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국가주도, 국가의 사회경제 개입과 법가적인 통치책을 쓴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또한 한명기 교수에 따르면 인조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은 놀랍게도 병자호란 이전까지 광해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인조이든 광해군이든 기본적인 외교노선은 '친명정책을 유지하되, 청(후금) 자극은 자제'이다. 이는 과거 고려가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유지했던 노선과 똑같다. 왜냐하면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그 순간까지도 청나라는 산해관에서 막혀있었고, 과연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태였다. 물론 당시 명나라가 대체적으로 청나라에게 밀리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송나라는 그보다 더 심하게 털리면서도 압도적인 생산력으로 요나라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대세가 청나라이니 실리를 위해 청나라에 붙어야 한다는 것도 결국 후대의 결과론에 불과한 것이며, 조선의 입장에서는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한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명나라의 멸망은 이자성의 난 때문이므로 청나라명나라를 멸망시키기 어렵다고 본 조선의 판단은 반쯤 들어맞았다. 이 반란의 성공은 청군 때문에 명의 전력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에 원인이 있지만, 어쨋거나 청은 명나라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산해관에서 오삼계에게 막혀있었다. 따라서 조선이 참고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유사한 상황에 있었던 고려의 대응책이 된다.[62]

결국 광해군과 인조의 외교가 가지는 결정적인 차이는, 기본적인 외교 노선이 아니라 구체적인 외교 스킬의 문제다. 물론 그 외교 스킬이 인조 시기 조선이 너무 저질적이라는게 문제이지만.

5. 인조의 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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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장릉(長陵). 단종 능,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능도 장릉인데 이 둘과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할 것.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장릉(章陵)은 김포에 있다. 중전 인열왕후 한씨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삼전도비 테러범이 다음 표적으로 타겟팅한 물망에 오른 곳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능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장릉 참고.

6. 인조 어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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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어필로, 행서체로 적혀 있다. 대대로 필체가 반듯한 조선 왕가의 특질은 계승된 듯.[63] 다만 필체를 남기는 것 자체를 싫어해, 상소에 대한 비답도 내시들에게 베끼게 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7. 동상[편집]

파일:attachment/1171-A-07641_01.jpg


악명에 비해 태조 이성계, 세종대왕, 정조와 더불어 동상이 세워진 조선 국왕 중 한 명이다. 물론 다른 왕들처럼 인조를 기리고자 만들어진 동상은 결코 아니고 다른 인물의 일담에 꼽사리 껴서 만들어진 거다. 서울 송파구 오금동의 송파도서관에 세워진 일종의 미담 동상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인조를 업고 피신한 나무꾼 서흔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전쟁에서 깨지고 목숨만 부지해 도주중인 초라한 꼴을 묘사한 동상이란 소리.

이 동상의 주인공은 서흔남이고 인조는 옆에 있는 병풍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실존인물 서흔남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실존인물로 대장장이나무꾼을 하는 비천한 신분이였지만 포위된 상황에서 남한산성 외부의 근왕군과 연락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로로 양반이 되어 벼슬까지 하게 되었다. 위의 동상에서 보듯 인조를 업고 피신시켰다는 전설이 가장 유명하며 그 외에도 인조가 피난 당시 입던 곤룡포( )를 하사했다는 전설도 유명하다.[64]

8. 대중매체에서의 이미지[편집]

디시위키에선 역대 조선군주 중 군호문서가 생성된 2명 중 하나였다. 다른 한 명은 수양대군. 하지만 수양대군은 적어도 조선군주 틀에서는 세조라고는 적혀있었지 이 인간은 군주 틀에서까지 능양군으로 만들어져 있고 욕을 선조만큼 먹었다. 그나마도 나중에는 능양군이라는 칭호도 빼앗기고 그냥 이름인 이종으로 항목이 옮겨졌다. 똑같이 이름으로 써놓은 군주가 한명 더 있는데 바로 연산군.

대체로 현실의 광해군 이미지까지 뒤집어쓰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광해군 중후반기에 보여준 불안정한 폭군 이미지를 인조의 성격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후반기에는 회복군주로서 평가해 줄 여지도 있으나, 그 시대는 별로 재미도 없고 인조를 써먹는 의도 자체가 못난 왕이라는 점을 부각하는 것이므로 수요가 없다. 특히 소현세자에 관련된 졸렬함 때문에 사극 등지에서는 조선시대의 왕들 중에서 연산군과 함께 악역으로 잘 나오는 편.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워낙 인조 치세가 치욕적인 시대로 인식이 뿌리박힌 탓인지 정통 사극보다는 주로 퓨전 사극의 배경으로 자주 쓰인단 거다.[65][66]

또한 사극에서 악역이나 흑막, 심지어는 최종 보스 등의 역 등으로 나오다 보니 그 악명과는 달리 꽤 무게감 있는 배우가 인조 역을 맡기도 하며, 배우 보정 때문에 현실에서 보여준 평범한 사람이 왕이 되더니 찌질해지는 모습보다는 의외로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 사극에서는 최종보스 보정+배우 보정의 수혜자.[67]

해외에서도 악명이 널리 알려져 있는지 역설사의 전략게임인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 모든 능력치에서 0점을 받은 두명의 조선 왕이다. 나머지 한 명은 폭군인 연산군.

아래의 항목은 인조에 대한 선입견으로 욕만 잔뜩 써놓는 경우가 많은데, 평범하면서도 신하들의 배신과 자신의 무능함에 몸서리치던 인조의 현실적인 기록을 표현한 매우 특이한 매체로는 고일권 작가의 칼부림 웹툰이 있다. 이런 일부의 만화를 제외하면 인조와 광해군의 능력이나 성격을 중립적으로 묘사하는 매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애당초 영화 광해조차 광해군의 미화 일색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기댈 수 있는 통치자의 갈망을 충족해주었다. 이는 반대로 인조라는 절대악을 만들어 욕하고 스트레스를 풀기 때문이다.[68] 그리고 다음 왕인 효종이 명군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있으니 이것보다 좋은 스토리는 없을 것 이다.[69] 실제로 세도정치의 폭주를 낳아 결국에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면서 2천명을 도륙한 순조는 거의 안 알려졌다.

8.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편집]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는 군주. 물론 이 작품에서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욕 안 먹는 군주가 드물지만 그 중 가장 철저하게 까이는 왕이 바로 인조다. 광해군과는 완전히 다른길로 가기로 결심한대로 패륜적인 임금이 되지않도록 보여주려고 노력한 초기 모습은 높이 평가하였지만, 결론은 자기가 만들어낸 참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왕.

그러나 실제로 인조의 초기 균형감각과 자비는 꽤 괜찮았다. 즉위 직후 이귀가 왕족 인성군이 종친들을 거느리고 인목대비를 폐하자고 주청한 것으로 죽이자고 하자 반대했다. 인성군은 이후 두차례나 역모[70]에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이괄의 난에서도 인성군이 직접 자금 제공을 하는등 참여했다는 진술에도 참고 그를 살려주었다. 결국 끝내 북인 유효립의 역모사건 때문에 인성군을 죽이기는 했지만 성의성의 간언에 인성군의 가족에 대한 연좌제를 물리쳤으며, 이후 사후 10년만에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또한 광해군 같이 특정 당파만 등용하고 특정 개인에게 힘을 몰아주지 않는 것 또한 높은 평가를 내렸다. 이귀가 선조시절에 동인이 이이성혼을 비판할 때 선조가 "이이, 성혼이 당이라면 자신이 먼저 들어가고 싶다"라는 것을 회상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이렇게 이귀가 스승을 높이자 인조는 듣기 싫다며 "당이란 말은 비록 주자의 말이라도 듣고 싶지 않소 "라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인조편 마지막 파트의 제목은 대놓고 무엇을 하였는가이며, 선조와 비교해도 사실 선조를 훌쩍 뛰어넘는 왕이었다고 평했다. 박시백 화백도 인터뷰에서 "지도자로서는 빵점이며 가장 그리기 싫었던 편"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작가가 고종 편에서는 인물 평가를 최대한 배제했기 때문에, 결국 이 작품 전편을 통틀어 인조가 가장 심한 비판으로 묘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71] 인조 편 마지막 페이지에 "패륜을 명분삼아 반정한 그였지만 '패륜'에 있어서도 밀려 보이지 않는다"라고 써 놓았는데 그 다음 장면에 광해군 그림이 나오면서 "밀리긴? 나보다 더하구먼. You Win "이라고 써 놓은 걸 보면 진짜 마음에 안 들어하는 듯.[72]

참고로 박시백 화백 본인도 완결 인터뷰에서 작품 속 가장 짜증나는 인물 2명 중 하나였다고 대놓고 말했다. 나머지 1명은 인조의 할아버지 선조.[73] 자세한 것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문서 참조. 조선 중기 이후로 "조선이 왜 망했는가?"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외치를 중시하고, 내치를 크게 경시하는 박시백 화백의 성향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74] 다만, 박시백 화백의 만화에서도 인조까진 몰라도 선조를 무작정 암군으로 보면서 광해군을 좋게 평가해주려는 것은 매우 현대적인 민중주의에 의한 분석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

8.2. 조선왕조오백년 시리즈 남한산성[편집]

80년대 작품답게 폭군 광해군을 인조반정으로 밀어내고 등극한 것으로 묘사된다. 배우문화체육관광부장관을 지낸 바 있는 유인촌. 그저 한없이 착하게만 나온다. 청나라가 쳐들어와도 명나라와의 의리 드립을 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남한산성으로 도주 후 용골대에게 잡혀서 어쩔 수 없이 청나라에 항복했다. 이후의 왕실 피바람은 일절 언급조차 없다.

8.3. 드라마 일지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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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의 전 드라마 일지매에서 대표적인 악역으로 등장한다. 청나라에게 휘둘려 백성들을 고생시키고, 자신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겸(극중에서의 일지매)의 아버지(인조의 동생으로 나온다.)를 죽이는 만행도 저지른다. 백성들과 만날 때는 성군인 것 같이 행동하지만 궁에 들어오면 본색을 드러내는 교묘한 이중 플레이의 인물. 걱정하지 말라며 덥썩 평민 노파의 손을 잡고 달래다가 다음 신에서는 삐뚤어진(;;;) 얼굴로 을 말끔히 물로 씻는다. 결국 마지막 화에서 일지매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일지매가 용서해줘서 간신히 살게되었으나, 이후 정신착란 증세에 걸린다.

김창완이 연기했는데, 왕 역할을 하는 배우들이 대체로 후덕하게 생기거나 카리스마가 있는거와는 달리 좀 빈약하게 보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부분 때문에 과장없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직접 기른 수염으로 연기했다. 다만 목소리랑 싱크가 맞지 않다는 이야기가...

8.4. 최강칠우[편집]

최정우가 연기했다. 드라마 전개상 비중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악의 축. 측근인 김자선[75]에게 소현세자를 죽이도록 지시했다.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소현세자의 막내아들 이석견이 살아있는 것을 알게되자, 데리고 와서는 완벽하게 독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석견을 보호하고 있던 소윤이 총으로 쏴 죽이려고 하자 미쳐버리고, 자신을 부르는 소현세자의 환청을 들으며 자신이 독살하라는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며 세자를 부르며 갑자기, "그놈이 세자 그놈이 내 자리를 노렸단 말이다 아들이 어찌 애비의 자리를 노릴 수 있단 말이야 나는 왕이야 감히 누가 나를죽여 누구든 내 자리를 탐내면 다 죽여버릴게야"라 발광하나 다시 "내가 그런게 아니야 내탓이 아니야 세자야 내가 아니야"하며 결국 이 일이 원인이 돼 얼마뒤 숨을 거두었다.

8.5. 추노[편집]

http://mlbpark.donga.com/data/mpark_bbs_bullpen09/uploadImg/201002/file141390_2.jpg

짤방에 나온 것처럼 김갑수 선생이 연기, 첫 등장은 대전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는 장면으로, 석견이 귀양간 제주도에 역병이 돈다는 말에 석견의 안위를 근심하는 척("참으로, 딱한 아이로다.") 하는 등 겉보기에는 성군 흉내를 내고 있으나, 불안정한 눈빛으로 음험한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그 뒤로 등장하지 않다가 청나라 용골대가 사신으로 방문하는 에피소드에서 다시 등장. 용골대가 소현세자와 의형제를 맺은 인연으로 석견을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하자[76] 크게 근심하며 이경식에게 제주도의 일은 어찌되었는가 묻고, 이경식이 용한 의원을 내려보냈다 하자 안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용골대와의 회담에서 석견을 보낼 수 없다고 하나, 이경식에게 석견 암살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고받고는 분노한다. 이때의 위압감은 악의 축 이경식도 움츠러들 정도. 용골대와 을 쏘며 대화를 나눌 때를 보면 용골대 말마따나 조선인답게 활을 잘 쏜다. 마지막에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석견의 사면을 청하자 이는 자신이 죽고 봉림이 왕이 된 후에 하라고 한다. 이때 남긴 "이건 내 역사니라."라는 독재자카리스마압권.

처음엔 그저 배경 정도로만 등장하는 왕인가 하고 시청자들의 관심에 없다가 갑자기 김갑수 선생의 폭풍간지 인조 연기를 보고 충공깽에 빠진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쉽게 말해 같은 배우가 연기한 연개소문에서의 수양제를 연상시키는 사례. 갑수옹이 괜히 악역본좌 소릴 듣는게 아니다.

8.6. 전 드라마 탐나는도다[편집]

공부의 신의 영어선생 양춘삼(앤써니 양) 역으로 유명한 이병준이 연기했다. 외국인인 박연(벨테브레)와 윌리엄을 등용하여 재능을 발휘해서 조선에서 기거하도록 명했다. 윌리엄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연극 햄릿을 왕실에서 연출하는데 하필 인조의 트라우마를 건드려서 거의 죽을 뻔했다. 같은 드라마에서 광해군이 은거 중인 현자처럼 묘사되는 것과는 비교된다.

8.7. 마의[편집]

선우재덕이 연기하였다. 행적들은 추가바람.

8.8.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편집]

http://pds.joinsmsn.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303/19/htm_20130319180203156.jpg


JTBC의 전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는 이덕화가 인조 역할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는 궁중 여인들에게 휘둘리는 인조의 악역성이 부각되기 때문에 소현세자 독살설을 채택했다. 병자호란 이후 스스로 갖게 된 열등감 등으로 인해 며느리 강빈에게 불만을 갖게 되고, 청나라가 자신을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조 귀인과 김자점의 농간으로 인해 결국 아들 부부를 죽음에 이르게끔 만든 걸로 나온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판단력이 흐려져, 이 드라마에서의 인조는 폭군이면서도 막후 실세인 조 귀인의 야욕에 이용당하는 꼭두각시 국왕이라 봐도 될 정도가 된다. 극 중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성 사이코. 새로 15세의 어린 장렬왕후를 신부로 맞이하면서 첫날 밤에 다른 후궁의 방에서 술을 마시는 진상(?)을 부리기도 했는데, 김자점은 이런 인조를 가리켜 "정숙한 여인 앞에선 뭐가 그렇게 찔리는지 오금이 저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 화를 다른 여인에게 푸는 걸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인간이 따로 없다. 안 그렇소? 능양군 나리 "라는 대사를 날리기도 했다. 극중에서 위 사진처럼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익선관을 쓰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것도 왕 자격이 없는 인간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스토리가 진행되어 갈수록 안습한 인간이 되어가는데, 조 귀인의 농간에 넘어가 아들 내외와 손자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그 죄책감으로 미쳐가기 시작하고, 덤으로 조 귀인이 몰래 인조의 차에 아편을 넣는 바람에 아편 중독자까지 된 비참한 몰골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임종이 가까워오자 조 귀인이 자신이 중전이 되려는 음모로 인조를 감금하기까지 하는 바람에 죽기 직전까지 안습한 꼴을 당한다. 그나마 세자(봉림대군)와 중전, 상선이 힘을 합쳐 인조를 구해낸 덕분에 죽는 순간까지 조 귀인에게 이용당하는 꼴은 면했다.

8.9.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편집]

재미있게도 김훈의 전작 칼의 노래의 싸이코 선조와는 달리 굉장히 동정적으로 묘사된다. 두 임금 모두 무능한 권력을 상징하지만, 두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인 듯. 조용하고 속을 읽을 수 없는 인물로, 청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타계하려 노력하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만든 남한산성(영화)에서는 박해일이 연기한다고 한다.

8.10. SNL 게임즈 - 카스2 병자호란[편집]

민교는 더이상은 안 속는다면서 처음부터 조선군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전작과 달리 잡졸, 왕 인조, 장군 중 한 명을 고를 수 있어서 인조를 골랐다. 마음대로 하라는 해설을 듣고 옥새로 궁녀를 희롱하며 궁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는데, 청나라군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잡혀서, 삼전도의 굴욕을 재현해야 하는데, GTA 군대 시리즈의 모션 인식이라서 키보드의 키가 이마에 붙을 정도로 머리를 키보드에 박아야 했다.

8.11. tvN의 전 드라마 삼총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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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을 맡은 김명수가 인조 역할로 출연. 드라마 공홈에 있는 캐릭터 소개를 보면 여기서도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암군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말로 암군이었다. 백성들의 원성과 청에 대한 분노로 갑자기 용골대의 목을 치고 청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포하나, 주인공과 삼총사의 활약으로 결국 취소한다. 작중 겁이 많아 세자에게 의존하며 의심도 많아 말을 바로 믿지 않는 행태를 보인다. 마지막화 전까지만 해도 능력은 없더라도 불쌍한 왕이라며 동정표가 많았는데 마지막 화에서 그런 동정표 마저 싸그리 사라졌다. 김자점과 최명길을 불러 소현세자가 자신보다 그릇이 크고 왕의 품격을 갖췄다고 겁을 내며 나보다 뛰어난 아들은 원하지 않는다며 어떻게 처리해야 하냐고 말했고, 이후 청의 침략에 겁을 먹고 "빨리 움직여라 "면서 도망치는 모습이 나와 동정표가 완벽히 사라지게 되었다.

8.12. MBC의 드라마 화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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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질적이고, 멀리를 볼 줄도 모르는, 즉, 허수아비 역할도 못하는, 왕좌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 - 강주선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인간적 기본은 돼야, 허수아비라도 제대로 하죠 - 강주선 부인


배우 김재원이 인조를 연기한다.

능양군으로써의 첫 등장에서 부터 광해군이 있는 궁궐을 가리키며 왕의 자리를 향한 야심을 드러낸다. 얼핏 한량 같은 모습으로 행동하지만, 광해군과 적대시하고 있는 세력들에게 접근함과 함께 광해군의 정책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모습으로 대립을 시작하기는 하는데 조선과 백성을 사랑하기는 커녕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 강주선의 꼭두각시가 돼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 억울한 고변으로 자살한 동생을 자신이 고발해 죽인 것으로 묘사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조용히 반란을 준비 중이던 인조와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23화 때 백성을 선동해 광해군을 곤란하게 만든다.[77] 특히 광해군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듣고 이런 일을 해서 더욱 광해군과 대척점이 있는 인물이다. 백성이 죽던, 나라가 망하던, 상관없이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백성과 나라를 희생시키는 인간 말종으로 나오며, 심지어는 정명공주가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자 인목대비를 협박하는 패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당장 사르후 전투 후 명나라 앞잡이인 강주선마저 명나라의 국운이 끝난 것을 알고[78] 광해의 실리외교와 화기도감을 통한 국방강화를 이해하려고 하는데 반해, 인조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유발하거나 화기도감을 없애려고 하는 얼간이로 그려질 뿐만 아니라 나라의 위급함과 광해군의 외교정책 성과를 은폐한다. 게다가 끼리끼리 모인다고 자신과 똑같은 인간 말종인 김자점과 의기투합한다.

말년에 죽기 직전에야 "내가 너를 미워한 것은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미워해서다."라며 화해. 하지만 강주선과 김자점 등은 그대로 소용 조씨의 숭선군을 옹립하려고 한다.

여러가지 고증오류를 보이는 "화정"에서 특히 왜곡이 많다.(...) 이기적이고 쪼잔한 인조에 대한 성격 묘사는 괜찮지만, 이걸 역사 그대로라고 평가하는 건 무리가 있다.

8.13. KBS의 전 드라마 오렌지 마말레이드[편집]

인간세계의 왕으로 흡혈족의 수장과 평화협정을 맺는 착한 왕으로 나온다. 뭐?!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1] 이것이 청에서 받은 첫 시호지만 조선 조정은 청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실제로는 청나라와의 외교 때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의 표제를 살펴 보면 선조실록까지는 '선조소경대왕실록'이라고 명의 시호를 붙여서 사용해 왔지만 인조실록부터는 그냥 '인조대왕실록'으로만 제목을 정해두게 된다.[2] 인조반정 후 추숭[3] 위로 이복형 능풍군이 있었는데, 그는 서자인데다 일찍 사망했다.[4] 군호는 전라남도 순천의 옛지명인 능주(綾州)에서 유래했다[5] 일단 형식적인 양자관계를 따지면 왕통은 계속 이어지는 걸로 간주한다.[6] 증조부덕흥대원군, 할아버지는 선조, 아버지는 정원군. 삼촌들은 임해군, 순화군, 광해군(...)[7] 실제로 인조가 실책을 많이 한 것은 맞지만 이는 학계의 광해군 재평가와 이로 인한 미디어의 미화로 인한 것이다. 일단 광해군 본인도 내치에서 옥사와 과도한 궁궐 재건 등으로 너무나 큰 실책을 저질러 민심이 반쯤 이반한 원인을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으며, 인조는 적어도 다음 대에 효종이 안정적으로 집권하도록 만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조선 역사상 최악이라고 평가하기엔 다소 억울한 면도 있다. 하지만 역대급으로 무능한 안목을 가진 왕이라는 점과 강빈 및 예송논쟁으로 두고두고 정통성이 떡밥거리가 되었다.[8] 남당의 건국자. 원래 이름은 이변(李昪)으로, 서지고란 이름은 오대십국 당시 오나라의 섭정이었던 서온(徐溫)의 양자로 들어갈 때 바꾼 이름이다.[9] 이외에도 열조로 추존받은 사람은 예수게이 정도가 있지만 애초에 이 사람은 군주라고 보기에도 뭣하고 그냥 증손자 쿠빌라이 칸이 명목상 추대한 거에 가깝다. 그리고 사실 예수게이도 약체화된 몽골족 출신으로써 거대부족 타타르와 맞서 싸울 정도로 능력이 좋았으니 인조의 능력과는 비교불가다.[10] 연산군일기 2권, 연산 1년 1월 14일 1번째 기사[11] 다만 이때는 명나라에도 인종이라는 왕이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봐서 성종으로 정해졌으며, 연산군이 통감에 나온 중국 송나라송인종을 들어 성종이라는 묘호가 더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굳이 설명할 것도 없는 얘기지만 조선 성종은 인조 따위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인 명군이다.[12] 세종대왕은 4군 6진의 개척을 이유로 를 묘호로 하였다.[13] 이외에 인조라는 묘호를 받은 사람은 명나라 주원장의 아버지 주세진(朱世珍).[14] 선조의 자식 중 유일하게 대군 즉 적자(嫡子)가 바로 영창대군이다.[15] 유희분이 뇌물을 먹고 입을 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6] 이괄의 난 진행 과정에서 조선 조정의 큰 잘못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최소한 김류이귀 같은 서인들의 지도층은 제각기 정상적인 조언을 했으나, 인조는 이괄의 아들만 체포하면 될거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여서 실질적인 반란의 방아쇠를 당겼다.[17] 인조반정의 중심인 이귀 역시 고려 때 처럼 송나라(남송)와 금나라를 동시에 섬겼는데 조선도 그러면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문제는 요나라-북송 때도 그랬다.) 문제는 명나라가 송나라와 달리 갑자기 무너졌다는 것이다. 다만 영원성 전투를 보면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를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는 것이 정론이다. 청나라가 만리장성을 넘은 것은 이자성에게 명나라가 망하고, 이 때문에 제거 당할 위기에 놓인 오삼계가 열어준 것이다. 조선에 근접한 만주와 요동을 잃었다고 명나라가 바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18] 인조 정권 초반 조선은 후금에 대한 방어 전략으로 서북방면의 거점방어를 최우선시 하였고 그에 따라 방어체계도 수립됐다. 그러나 이괄의 난 으로 인해 약화된 서북지역 방어 대신 임진강, 한강, 강화도 방어가 가장 중요시 되는 수도권 방어 체계가 중심이 된다.[19] 수도권방위를 위해 총 2만 4천에 달하는 병력을 부랴부랴 증강시키기도 하였고 이는 수세적 방어전략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후금의 예상 진격루트 1의주-용천-철산 -정주-안주 2 벽동-창성-삭주-귀성-태천-영변-안주 예상하고 방어진지와 산성정비등 방어태세를 강화하여 중앙군인 훈련도감의 병력250과 충청/전라/경상도= 하삼도 병력 5000을 서북지역에 이동시키며 함경보 남부병력 2000을 평안도로 배치하는등 이괄의 난으로 인해 1만 미만(8500)으로 지키던 변경수비병력을 16000으로 증강하였다.[20] 인조가 김자점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애당초 여러 논의를 할 때 자신이 김자점의 허접한 전쟁 대처 논리를 박살내 놓은 바 있다. 하지만 결국 김자점을 도원수로 기용하지 않나, 자점 외에 도원수에 어울릴 만한 인재들을 배제하지 않나... 병자호란에서 수수방관 해도 용서할 정도였다. 최소한 선조원균을 잘못봤을 때처럼 큰 사고를 안 쳐서 평범한 장수로 오인한 것이 아니다.[21] 명이 본격적으로 막장테크를 탄 건 이자성이 들고 일어난 1639년 이후의 일이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 다만 북경을 약탈 하여 조선에서 약탈한 양보다 많았지만, 임시방편이었던 모양이다. 이자성이 중요한 것은 이자성으로 인해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오삼계는 만리장성의 책임자였다.[22] 광해군 때 중립외교는 오직 광해군 혼자 했다. 집권당인 대북파는 대명의리를 무조건 따랐다. 심지어 광해군의 오른팔인 이이첨이 앞장서서 대명의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 미디어와 달리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20만 대군을 출병시키고, 기근의 허덕이는 조선 백성을 위해 100만톤 가량에 곡식을 보냈다. 물론 당시 황제인 만력제의 독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슬쩍 발을 빼려는 명나라를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다.[23] 방비 분부의 경우 상당히 감정의 산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국서 투하 이전에 청 사신들이 돌아가자 바로 다음날부터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조정에서 나오게 된다.[24] 당시 김자점은 도원수이다. 원래 김류가 군을 지휘해야 하지만, 김류는 당시 남한산성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김자점은 도원수로 군을 통솔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패했다고 해도 계속 청나라를 압박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당시 청나라가 수도를 포위한 것은 장기전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자점을 임명한 사람이 바로 인조다. 비록 장만은 능력은 떨어져도, 능력있는 부하에게 지휘를 맡기거나, 부하를 보호하는 등 개념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그러지 않았다.[25] 이 강화도 함락 상황이 걸작인데, 당시 인조의 지휘관 인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그 극치를 보여준다. 자세한 것은 김경징 문서 참조.[26] 삼전도비는 이 사진에 나온 위치에 있지 않고 2010년에 석촌호수 공원으로 옮겨놓았다. 고증에 따르면 정확한 위치가 석촌호수 물 속이라고 하며(당연히 조선시대에 물 속에 세운 게 아니라, 원래 삼전도비를 세운 위치에 석촌호수의 물이 찼다는 의미다.) 물 속에 비를 세울 수가 없어서 공원 내부에 세웠다고 한다.#[27] 실제로 이 시기부터 반중 감정이 엄청 강해져 나중에 만보산 사건 같은 일도 벌어지게 된다. 문제는 그 대안으로 택한 나라가...[28] 그는 동학운동을 촉발케 했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선정비도 공격한 이력이 있으며, 국가적 치욕의 장본인인 인조의 사당도 공격 타겟에 있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 남자는 2012년 12월노태우 생가 방화 용의자로 붙잡혀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스스로를 정의실천행동당이라는 진보 단체 소속으로 밝혔으며, 방화 현장에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단죄 편지를 남기는 대담함을 보였다.[29] 출처 : 위키피디어, 그리고 위키피디어[30] 다만 인조가 죽은 이후 실록을 쓴 이들이 공신들에 비판적이었던 서인 청서파 산림들임은 감안해야 한다.[31] 이때 강빈의 시녀들을 마구 국문해 10명 중 7명이 죽어나갔는데도 한 명도 끝끝내 시인하지 않으니 말 그대로 조잡함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비망기를 내린다. 요지만 정리해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나 쟤 맘에 안 들어. 당장 죽여버려!"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작자가.[32]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 / 청 순치(順治) 3년) 2월 7일(갑신) 2번째기사, 2월 8일(을유) 3번째기사, 2월 9일(병술) 1번째기사[33] 당대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자 설화문학가. 그 유명한 어우야담이 그의 손에 집대성된 작품이다.[34] 박시백은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고 비판하기도 했다. 아예 백성들을 신경도 안쓴 광해군에 비해서 나은 정책을 내놓은 점도 분명히 많으나, 단지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 만큼 신하들이 반발하면 그 이상은 문책하려하지 않았다.[35] 물론 조선인 포로 송환문제라든지 군사적으로 불온해보이는 움직임 등을 감시하는 등의 간섭은 있었지만 그외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36] 흉년이 심할 때 공물가를 쌀로 대신 내게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37] 광해군이 대동법에 회의적이었고 재위 초엔 대동법 확대 요청을 무시하기도 했지만 이는 교과서상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38] 이같은 제도상의 폐해는 고교 한국사 과목에서도 비중있게 가르칠 정도다. 시험에서도 영정법의 취지만을 설명해서 마치 실제로 괜찮았던 제도마냥 낚는 페이크성 출제가 많다. 게다가 세수 보충을 위해 궁전 경비용으로 쓰는 땅인 궁방전, 관청 경비용 토지인 관둔전을 대폭 증가시켰는데 이 토지에서 걷는 세금들은 호조주관의 중앙재정에 편입되는 세금이 아니었다. 때문에 호조 입장에서는 면세지가 잔뜩 늘어난 셈이고 실질적으로 국가재정 증대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게 정설.[39]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전달했다는 것은 인조실록에서 서인들이 최초로 주장한 것으로서, 광해군이 청나라와 내통했다고 여론의 분노를 호도하기 위해 인조실록에 집어넣은 야사로 보는 시각이 많다.[40] 명군과 함께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장수를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라'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출처 인조실록[41] 이 때문에 인조는 명나라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문룡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을 정도다. (단 진위는 불분명.) 다른 설로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기름칠을 하기 위해 모문룡에게 은 8만냥을 빌려왔고, 결국 이걸 은으로 못 갚아서 인삼으로 갚았다는 이야기도 있다.[42] 다만 정원군 위의 왕자들과 영창대군까지 다 죽었으므로, 광해군과 그 세자 이지가 폐위된 시점에서는 정원군이 살아있는 왕자들 가운데 장자가 되고 그 맏아들인 능양군이 장손이 된다.[43] 선조는 이순신과 광해군에 대한 문제를 빼면 특별히 실정이라고 부를만한 정책이 없는 양호한 왕이다. 당장에 왜란 전후처리를 보면 과연 이 인물이 멍청하다고 왜곡되는 선조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적절한 외교술과 복구정책을 남겼다. 심지어 여진족의 강성을 우려해 여러 번에 정벌과 여진족의 힘을 예측하고 등거리 외교의 떡밥을 남긴 것이 선조다. 그래서 그 당시 선비들이 선조는 일본을 막아내지 못하지만, 여진족은 잘 대처했다고 한다.[44] 당대의 관점에서 조선은 청나라를 얕볼만도 했다. 아무리 잘 해봐야 남북조시대랑 비슷한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나라는 중원을 모두 먹었어도 100년만에 망했으며, 명나라의 역량 역시 청나라가 집어삼킬 수준은 아니라서, 결국 청나라가 아니라 내부 반란으로 스스로 망했고, 만리장성도 오삼계가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자성이 오삼계의 아버지를 비롯한 중신들을 숙청해 오삼계 같은 관료층은 이자성에게 적대적일 수 밖에 없었다.)[45] 다만, 이는 광해군도 마찬가지다. 국제정세랑은 상관없이 반대만 하는 대북파를 유일당으로 만들어 제어 못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광해군이다. 그리고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반정에 참가한 사람이 바로 친위대 격인 훈련도감의 장수들이었다.[46] 물론 이미 광해군 시절에 이미 선조의 중책과 정승들이 박살나서, 손잡을 만한 야인 세력이 서인 밖에 없었던 점도 한몫한다.[47] 중종반정은 조정 유력자들이나 관직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일으켰고, 계유정난은 시작은 완벽한 실직자, 노비와 무사로 일으켰지만 사건 직후 그런 사람들을 포섭했는데,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조정의 아웃사이더 유생들" 수준의 거사였다. 덤으로 영상 이원익이나 살아남은 선조 때의 고명대신만 실권 없는 '고명'으로 뿌려줬을 뿐이다. 어떻게 저 양아치급 서인 그루피 멤버에 최명길이란 명신이 있을 수 있는거지?[48] 이는 이괄의 알력을 빚고 있는 김류를 비롯한 중신들과 화합을 잘 하도록 인조가 했어야 했다. 그러나 고작 인조가 한 짓이라고는 이괄의 아들만 잡아오자는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이괄의 난에도 나오지만, 이괄의 난 성공에는 장만의 정찰 실패와 정충신의 정에 휘둘렸다.[49] 물론 전격전 과정에서만. 전면전 과정을 보면 역시 인조가 고른 무장다운 면모를 보인다. 일단 저지르고 성공하는 것 까지는 좋지만, 뒷 수습은 엉망이다. 이괄에게 패해 물러나 있던 정충신은 그가 도성에만 있는 것이 하책이라 했는데 그는 하책을 택했다.[50] 최명길은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한해에 모두 급제한 괴수에 가까운 인물이다. 인조 정권에서 군계일학의 현실주의자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고, 그러면서도 청의 파병 요청을 극렬 반대하여 부결시켰으며, 명나라와 몰래 연락을 취해서 조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하고, 환향녀 박대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도 반대하는 등 종종 인조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은 축출당했기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인조 편에선 유일하게 동정과 옹호를 받는 인물이다.[51]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면 간신 김자점이 인조와 손을 잡고 소헌세자 사후 세자빈과 세손을 몰락시켜서 봉림대군이 왕이 되었다. 만약 최명길이 계속 사사를 반대하고 그것이 성공했다면 엄청난 분란의 씨앗이 잉태할 수도 있었다.[52] 두 차례의 호란조차 이괄의 난으로 인한 북방의 방위체제의 붕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53] 물론, 이것도 수도권과 지병병력을 방치하고 북방에 군대 몇 개만 양성한다는 광해군보다 정책적으로는 나은 편이었다. 당장에 광해군도 동네 양아치 수준의 거사 한번으로 수도가 털렸다...[54] 인조를 옹호하는 주류 학자는 오항녕 한사람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55] 광해군의 최대 실수는 이로 인해 북인에게 과도한 힘을 실어주고 이에 폭주하는 이들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 이다. 아무리 권신이라고 해도 현 왕의 어머니이자, 선왕의 부인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이려 들었다. 그리고 정작 광해군이 폭주를 제어 못했다. 마지막으로 허균이 자신의 허락 없이 북인들이 제멋되로 죽여버리자 북인의 비대해진 권력을 깨닫게 된다. 이는 일개 서손으로 왕이 되어 대신들을 절묘하게 균형을 맞추었던 선조와 대비된다.[56] 광해군에도 나오지만 암군은 능력이 없다기 보다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무책임하고 회피한다.[57] 국가재정의 1/3을 궁궐에 쏟아 부었다. 지금도 돈 안되는 대규모 토목공사하면 나라가 거덜나는데 국고의 1/3을 십수년간 퍼부었으니...[58] 단, 최명길은 조선과 인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도 믿지 않았으며, 정충신의 경우는 광해군 시절 군사첩보의 핵심 인력이었지만 인조 시대에는 차별대우를 받았다. 정충신은 염탐과 행정, 군사배치 등이 특기인 인물로 외교사절로도 파견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진짜 외교사절보다는 홍타이지를 회유를 시도하면서도 동시에 후금의 군사 배치 등 여러 정보들을 염탐하기 위해 광해군이 밀명을 내린 것이었다. 현장요원이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이괄 같은 맹장을 좋아해서 그런 인재를 썩혀둔 것이 문제였고, 후기에는 그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기다가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59] 그러나 군사 쪽으로 정충신과 남이흥이 받은 고난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며, 이괄의 난 직후 후금에 대비해 방비책을 제시하는 둘을 면전에서 모욕을 주고 심지어 남이흥은 사실상 소모품 취급으로 사지로 몰아넣기까지 했다.[60] 조영헌, 「'17세기 위기론'과 중국의 사회 변화 - 명조 멸망에 대한 지구사적 검토」, 『역사비평』107, 2014, pp.183~192.[61] 김성우.「光海君 치세 3기(1618~1623) 국가재정 수요의 급증과 농민경제의 붕괴」(『大邱史學』118, 2015[62] 여기에 대해서는 '고려는 군사력이 충분했지만, 조선은 아니었잖아?'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역시도 2차 여요전쟁에서는 병자호란 못지않게 영혼까지 탈탈 털려야 했고, 멸망 직전까지 갔으며, 삼전도의 굴욕과는 달리 왕이 직접 치욕을 당한 것은 아닐지라도 항복과 굴욕으로 전쟁을 끝내야 했다. 정묘호란의 경우는, 서희의 외교담판 급은 아니더라도, 조선 입장에서는 출혈을 최소화하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도 성공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자면, 고려는 3차 여요전쟁에서 이전의 굴욕을 되갚을 기회가 있었고, 조선은 기회가 없었다는 가장 큰 차이가 있지만(...)[63] 영조의 경우는 필체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평가도 받지만.[64] 맹꽁이 서당소설 남한산성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꽁이 서당에선 나무꾼이 설마 자신이 업고 가는 사람이 임금인지 몰라서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는데 나라꼴이 이 모양인 건 새로 올라온 나라님이 전 나라님보다 잘난 것도 별로 없으면서 나대다가 이 꼴 난 거 같음. 아 이 얘기는 누가 들으면 큰일나니 우리 둘만의 비밀임."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인조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자신의 이런 처지가 한심해서 울었다고 한다. 다만 이건 윤승운씨가 덧붙인 이야기인 듯 하다.[65] 반대로 광해군이 한 실정은 잘 묘사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광해군 미화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시작으로 광해군은 비운의 군주로 묘사되어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광해군의 난정을 그대로 그려버리면 이런 가치를 잃게 된다. 한 예로 코에이에서 간웅 조조를 미화하여 천하 안정을 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의 수족이라 할 수 있는 순욱은 나오지 않는다. 만약 나오면 조조의 가치가 사라지기에...[66] 또한, 무엇보다도 사극역사가 아니라 역사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이니 상업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광해군의 본 모습이나 인조의 다른 모습은 보기 힘들다.[67] 실제 인조가 무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벌인 반정과 국정장악은 나쁜 수준이 아니었다. 다만 결정적인 순간 때 마다 뒤로 빠졌다. 군주제에서 왕은 최종 결정권자인데 인조는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려 했다. 나중에 후계자 문제는 어물쩡 넘어가지 않아 국정 혼란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마저도 어물쩡 넘어갔다면 어떤 혼란이 있을 지 모른다.[68] 드라마 화정에서는 동생과 집안의 복수를 하기 위해 들고 일어난 인조가 역으로 동생을 시기해 모함하여 죽게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쓴 적이 있다. 최소한 인조는 세조와 달리 명분은 제법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광해군이 쫓겨나고 이원익을 비롯한 남인들이 가담하지 않았을 테니. 복위운동도 있었기는 하지만 광해군이 말년에 다시 남인들과 서인들을 끌어안으려고 했으나 그 동안 쌓인 원한이 많았기에 세조처럼 아예 명분이 없는 경우는 아니었다.[69] 즉 인조만 죽으면 효종이라는 명군이 나타나니 안심이라는 것. 즉 인조는 빨리 죽어라로 요약된다.[70] 박홍구와 아들들이 광해군을 태상왕 삼고 인성군에게 전위시킨다고 했었다.[71] 다만 이건 작가 본인이 최고로 좋아하는 조선 왕 3명 중에 한명으로 광해군을 뽑았을 정도로 광해군에 대해 옹호를 많이 하는 편이기에 그런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박시백도 광해군의 실정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72] 박시백 만화와 대중의 이미지를 인용하여 선조를 지나치게 폄하하는 여론이 인터넷에 많은 편인데, 적어도 선조는 인재를 적재적소하여 나라를 지켰으며 매우 양호한 편에 속하는 왕이다. 하지만 인조의 인선은 권력유지를 제외하면 모두 무능하였다. 거기다 선조는 도읍인 한양을 1번 떠났지만 인조는 무려 3번이나 떠났고, 선조는 폐세자를 희망 했지만 인조는 실현하고 심지어 죽였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책에서도 선조가 엑스트라로 출연해 "2:0, 네가 이겼어." 라고 한다.[73] 작가님께서 선조에 대해 상황 평가는 잘 하는데 책임을 지지 않고 잔머리를 너무 굴린다고 깠다.[74] 다만 인조의 내치는 당쟁을 이용한 정국활용능력을 제외하면 평범하거나 오히려 좋다고는 할 수 없는 편이었다. 그저 상대가 내치에서 삽질이 많았던 광해군이라 상대적으로 고평가 받는 것일 뿐.[75] 모티브는 아무래도 김자점인 듯.[76] 실제 역사에도 있었던 에피소드, 단 이때 용골대가 데려가겠다 한 아이는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77] 실제 인조가 잠저시절에 동생이 역모로 유배가서 자살했는데 대놓고 이런 짓을 했다면 목이 달아날 것이다.[78] 그러나 실제 역사상 사르후 전투 이후 청군은 영원성 전투에서 패해 누르하치를 잃고, 대기근에 시달리는 등 명나라를 압도하지 못했다. 훗날이 아니라 당시에는 국제정세가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몰랐다. 당시 기준으로 명나라가 일개 농민반란으로 망할지, 그리고 산해관을 지키던 한족 장수가 투항하여 같은 한족을 몰살 할 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당장 사르후 전투 이후 명은 30여년을 더 버티다가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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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95 ~ 1649 / 재위: 1623 ~1649) - 27년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기타[편집]

소현세자 독살 사건[편집]

1645년초 석방되어 귀국한 소현세자는 부왕과 언쟁, 갈등하다가 그해 갑자기 사망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의 원인은 독살로, 진원군 이세완 내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독살 증상이 나타나 있었다.[12] 이후 그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증은 없다.

삼전도비[편집]

병자호란정축하성 이후 청나라에서는 인조에게 대청황제 공덕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모두 꺼려하였으나 결국 이경석이 자처하여 삼전도비의 비문을 쓰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치욕적인 상징물로 남게 된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인조실록 1권 1년 3월 13일 즉위일 기록
  2. 인조실록 15권, 1627년 1월 17일, 평안 감사 윤훤이 의주가 금나라에게 함락되었다고 아뢰다
  3. 인조실록 15권, 1627년 1월 26일, 융복으로 갈아입고 노량에 행차하다
  4.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58페이지
  5.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59페이지
  6.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60페이지
  7.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61페이지
  8. 고종 6대조 이혁 묘 출토유물 문화재 지정
  9. 《승정원일기》인조 4년 윤6월 4일 (갑진) 원본14책/탈초본1책 (2/9) 기사에 산실청에 참여한 관원에게 시상하고 있고, 《승정원일기》인조 4년 7월 15일 (을유) 원본14책/탈초본1책 (15/18) 기사에 신생공주의 요절에 대해 인조의 안부를 묻고 있다.
  10. 인조 31권, 13년(1635 을해 / 명 숭정(崇禎) 8년) 12월 5일(신사) 1번째기사, 대군이 태어나자 죽으니, 예조가 예로 장사지낼 것을 아뢰다
  11. 《조선왕조실록》현종 12년(1671) 1월 24일 1번째 기사
  12. 성종의 서자 양원군(楊原君)의 증손이며 인열왕후의 서제부, 한준겸의 서녀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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