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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1779 Trail 종주. 4 th of July.

작성자Lovebear|작성시간20.07.15|조회수282 목록 댓글 0

2 년전 Fort Mongomery 와 Clinton을 영국군에게 빼앗긴 대륙군 사령관 워싱턴에게 허드슨  강에 반도처럼 뻗어 나온 Stony point 에 마지막 까지 남아 있던 영국군은 꼭 제거해야 만 할 군사적 목표였다. 훗날 버고인 플랜이라 불린 허드슨  강을 장악하여 Continental Army 인 독립군을 뉴 잉글랜드 지방과 허드슨 남부로 갈라 놓으려 했던 영국군은 1777년 10 월 6일에 헨리 크린튼 경이 지휘하는 약 2100명이 지금은 1777 이라고 이름 붙은 트레일을 따라 행군하여 포트 몽고메리와 크린턴을 점령하며 허드슨 강에 배의 통행을 막기 위해 설치한 굵은 쇠사슬을 끊고 사라토가 부근의 버고인 장군을 돕기 위해 영국군함은 북상하였다. 그러나 배가 킹스톤 부근에 닿았을 무렵 뉴욕항구로 부터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아 후퇴 하였다. 이유는 그들의 도움의 애타게 기다리던 버고인 장군이 게이츠 장군의 지휘하에 있던 베네딕트 아놀드 장군의 첫 돌격공격으로 사라토가에서 항복을 했던 것이었다. 독립전쟁의 분수령이 된 저 사라토가 전투의 뒤에는  이처럼 포트 몽고메리와   크린턴에서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군과 군함을 여기서 오래 막아서지 않았다면 독립전쟁은 더 힘들게 이어졌을 것이고 당시 절대적이었던 프랑스의 지원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민병대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분투한 당시 뉴욕 주지사 였던 죠지 크린턴, 제임스 크린턴 형제와 대륙군 장군인 이스라엘 퓨트남과 약 600 명의 병사들은 반 이상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될 만큼 처절한 전투를 벌였지만 역부족으로 이 요새를 영국군에게 넘겨주어야 했었다. 그로부터 채 2 년이 되지 않은 1779년 5월 하순 경 워싱턴의 군대를 전투하기 좋은 곳으로 끌어 내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작전을 구상하던 헨리 크린턴 장군의 전략가들에게 스토니 포인트는 주목을 받게 되었다. 허드슨 강으로 뻗어 나온 반도에 요새를 만들고 포대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 시키면 허드슨을 오르내리는 배들을 감시하고  킹스 포인트 페리에서 강을 건너는 길목을 막을 수 있는 잇점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하여 약 40 명의 동네 민병대가 변변치 못하게 지키고 있는 이 곳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영국군의 공격에 제대로 방어를 할 수 없던 그들은 도망치면서 스토니 포인트 꼭대기에 나무로 지은 진지를 불지르는게 고작이었단다. 쉽게 내어 준 이 전략적 요충지를 빼앗기고 나서야 킹스 페리에서 강을 건너는데 꼭 필요함을 깨달은 죠지 워싱턴은 6월 초 부터 스토니 포인트를 관측하기 좋은 백버그 마운틴에서 진지를 구축하는 영국군을 면밀히 살펴보고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은 독립군에게 협조적이었던 마을 주민과 어부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탈환 작전을 구상하였다. 그리고는 1779년 6 월 12일 워싱턴은 펜실버니아 부근에서 공을 세운 Mad Antony 미친 안토니라고 별명이 붙은 Antony Wayne 장군에게 4개 연대 약 1350 명의 경보병으로 구성된 특공대 조직을 명령했다. 정찰과 훈련을 마친 이 특공대는 허드슨에 남은 영국의 마지막 거점요새인 스토니 포인트를 1779년 7월 15일에 야간기습 공격을 가하여 약 750 명 가량의 영국군을 25 분 만에 패퇴 시겼다. 영국군은 78명의 사상자와 74 명의 부상포로, 472 명의 포로 그리고 58 명의 실종자 등 많은 피해를 입고 요새를 빼앗긴데 비하여 대륙군은 15 명이 전사하고 83 명이 부상하는데 그쳤다. 야간 기습 공격을 은밀히 실행하기 위하여 포트 몽고메리와 부근의 다른 진지에서 행군을 시작한 독립군은 그 전에 행군하는 길가의 동네 마을 에 있는 개들이 짖을까봐 미리 다 죽였고 행군시 마주친 마을 주민들은 비밀을 위해  유치장에 가두어 두었다고 한다. 행군을 시작한 이 경보병군은 지금의 퀸즈 보로 호수 근처의 올드 몽고메리 로드가 만나는 지점에서 점심을 먹고 남쪽으로 마을을 이어 주던 동네 길로 진격하여 저녁 8 시 즈음 당시의 Springsteel’s Farm 지금의 Boy scout camp Bullowa 부근에 도착 전열을 가다듬어 밤이 깊기를 기다렸다. 7 월 16 일 자정에  남 북 그리고 정면의 세 방향으로 공격하여 25 분 만에 전투는 끝나고 영국군 장교 헨리 크린튼은 항복한 것이다. 전투가 독립군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고 이 요새를 독립군이 장악한 다음 날 아침 죠지 워싱턴은 직접 이곳에 들어와 병사들과 장교들을 사열하면서 전공을 치하하였다. 특히 웨인 장군은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의회가 주는 아주 드문 건국메달을 받게 되었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영국군의  허드슨강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고 독립전쟁의 주도권도 독립군이 가져오게 된것이다.

그 길을 걷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Walk Book 에 Historical Trail 로 분류 돼 있는 이 길을 마침 토요일에 맞은 독립기념일에 걷자니 약 241 년 전 이 길을 변변한 무장도 하지 못하고 오직 독립에의 열망으로 모인 대륙군의 투지와 집념이 느껴진다. 1778 년 겨울 벨리 포지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대륙군과 승리에 목말라 있는 워싱턴에게 이 스토니 포인트의 전투는 한치의 실수도 용납치 않는 냉엄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전에 신중에 신중을 더하며 지휘관도 고심을 거듭한 끝에 가까이 있는 게이츠나 아놀드 보다 안토니 웨인을 멀리 펜실버니아에서 불러 왔을 것이다. 화약장전과 발사에 시간이 걸리지만 명중율은 떨어져 기습에 적합하지 않은 머스켓 소총을 쓰지 말고 총검으로만 은밀하게 보초를 죽이고 기습을 하라는 명령도 직접 내리면서 가까운 웨스트 포인트에서 야간기습 작전의 결과를 기다리는 워싱턴에게 전해진 완벽한 승전보는 얼마나 큰 안도와 기쁨을 주었을 것인가.
산길을 걸으며 네 개의 연대로 나누어 은밀히 행군하던 대륙군의 거친 숨소리가 불같은 성격의 웨인 장군의 질타와 더불어 생생히 느껴진다. 더구나 오늘은 독립기념일 아닌가.
사람 구경하기 힘든 피인 코스라 그런가 좀처럼 산꾼을 만나기 힘든데 세븐레익 드라이브를 건너 조금 더 들어가니 백인 부부가 맞은 편에서 오고 있다. 독립기념일을 기념해서 이 길을 종주한다고 하니 웬 아시안이 그럴까 싶어 언뜻 이해가 안가는듯 의아해 하더니 깜짝 놀라며 금방 엄지척을 해보인다. 길은 8.5 마일 정도 되지만 마을과 마을로 이어진 길이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종주를 끝내고 포트 몽고메리로 들어섰다. 아직 기념 박물관은 공식적으로 열리지 않았지만 독립기념일을 그냥 넘길 수 없는지 닫힌 문 앞에 갖가지 안내서를 내어 놓고 있는 박물관 직원이 안내를 하고 있다. 1779 종주를 다 했다고 하니 역시 엄지척에 대단하다며 부러운 눈길? 아니면 자기네도 종주하기 쉽지 않은 길을 이민자가 했다는 질투 같은 눈길을 보낸다. 안내서 몇 장 집어 들고 돌아서는데 코로나가 아니면 여러가지 기념행사를 하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다 취소되었다고 박물관 직원은 아쉬움을 표한다. 언덕을 올라 옛 군대 막사인 버락 터도 보고 포대 터도 보면서 주차장에 돌아오니 긴 여름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었다.

스토니 포인트

벰비~~

팰리사이드 파크 웨이를 건너서

세븐레익 드라이브를 건너

포트 몽고메리의 트레일 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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