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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원의 세 방면

작성자엘리야권|작성시간26.06.06|조회수0 목록 댓글 0

리스도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현재 '구원을 받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구원의 싯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3시제 

바울은 엡2: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미 구원은 받아 놓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1:12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여기에서는 현재형을 써서 "지금 이루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불신자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옥중에 있는 자신에게 연보를 보내 준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말을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불신자들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딤후4:18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현재 사자(같은 자)와 싸우고 있는 중이지만,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에 주실 것을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아직 바울은 구원을 못받았다는 뜻일까요?

 

아무튼 바울 조차도 이렇게 말했으니, 우린 들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다. 아니다 현재 받고 있는 중이다, 아니다 앞으로 받게 될 것이다라면서 싸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이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싸울 일은 아닙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 대하여 제 나름대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단계적 구원론

먼저 신학자들이 말하는 구원의 서정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구원의 서정에서는 7단계를 말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구원과 관계되는 세가지를 말하라고 하면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믿는 사람은 즉시 <칭의 구원>을 받는 것이므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칭의>는 구원의 과거성(혹 완료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칭의 받은 것으로 만족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옛 성품이 죽고 새 사람의 성품으로 변화가 되는 과정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죽는 날까지 거룩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현재적으로 우리가 이루어 나가야할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화>는 구원의 현재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구원의 최종단계는 아닙니다.

더 이상 죄성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 즉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되는 데까지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영화(榮化)>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이생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에, 즉 온 세상이 다 변화를 받을 때에 되어질 일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화>는 구원의 미래성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분설에 의한 구원론

마지막으로 제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삼분설에 의한 구원론>입니다.

이것은 인간은 <영> <혼> <몸>으로 되어 있다는 삼분설에 기초한 구원론입니다.

인간의 삼분설은 원어상으로 볼 때 분명한 것입니다.

살전5:23에 보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또 너희의 온 <영(πνεῦμα)> <혼(ψυχή)> <몸(σῶμα)>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우리 성경에서는 영이나 혼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영혼>이라고 통칭을 한 경우가 많은 데, 그래서 영과 혼을 구분하기가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일례를 든다면 고전15:45에서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고 했으나 <생령>이 아니라 <생혼>으로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창2:7에서 인용한 것인데, 히브리어로는 <네페쉬>이기 때문이고,  헬라어로는 <푸쉬케>이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영과 혼을 구분하지 않음으로 인해 해석상 많은 혼란을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삼분설>을 가지고 구원의 3시제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영의 구원>

먼저 문맥을 잘 살펴보아 과거나 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구원>은 <영의 구원>이라고 보면 거의 맞을 것입니다.

영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으로써 초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구원 역시 초자연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드리는 순간, 그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나 도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방인 교인(에베소 교회)에게 단순히 믿는다는 하나의 이유로 "너희는 믿음으로 인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에 무관하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되어진 구속 언약으로 된 것이니 우리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영의 구원>은 이미 믿는 신자들에게는 "과거적인 사건" 또는 "완료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혼의 구원>

그러나 영이 구원받았다고해서 전인적인 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영으로만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혼과 몸도 있어야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의 구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인지, 생각, 감정, 의지등이라 할 수 있는 데, 이런 혼의 요소들이 죄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의 구원은 죽기 까지 우리가 이루어가야할 진행행인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성화>가 바로 <혼의 구원>인 것입니다.

 

<몸의 구원>

마지막으로 몸의 구원도 있어야 합니다.

몸은 하나님이 만드신 영과 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은 자아와 타자를 구분할 수 있는 울타리와 같은 것으로써 이것이 없으면 개인이라는 독립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 역시 소중한 부분인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거의 몸에서 옵니다.

몸이 다쳤을 때 아픔이 오고, 병듦으로 인해 혼까지 괴롭게 되고, 몸이 죽음으로 인해 절망하고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고통도 없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아니할 존재로 지음을 받았지만, 사단의 꾀임을 받아 타락함으로 인해 고통과 질병과 죽음에 지배받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몸의 구속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아프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물질계를 초월하여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는 몸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음 구절들이 구원된 몸의 상태입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계21: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전15:42)

"나팔 소리가 나매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2)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

 

몸이 이렇게 되는 과정을 우리는 몸의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이러한 몸의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구원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말해 구원은 하셨으되 영과 혼만 구원해 놓으셨으니  불완전한 구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그처럼 불완전한 모습으로 구원을 하실까요?

예수님을 영체로 부활시키신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의 몸은 부활시킬 수 없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신령한 몸은 장차 우리가 입게될 샘플이 되시는 것입니다.

어떤 나무에 첫 열매로써 단감이 열렸다면, 앞으로도 단감이 열리는 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는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몸의 부활은 <몸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은 세 방면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느 한 방면만 구원이라고 우긴다면 소경들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 만져 보면서 "코끼리는 벽 같이 생겼다"

"아니야, 기둥같이 생겼다." "아니야, 부채같이 생겼다". "아니야, 동아줄 같이 생겼다."라고 싸우는 것 같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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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요르단(Jordan)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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