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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세계사

혁명의 달 1968년 프랑스 10 - 노동자들의 민주주의?

작성자코끼리|작성시간09.06.12|조회수18 목록 댓글 0

 

 

노동자들의 민주주의?


1968년 5월의 마지막주에 노동자계급에게 정치적 권력의 장악을 위한 재집결의 요구가 있었다면,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주의는 조종을 울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위원회를 통해서 레닌의 강령에 토대를 두고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이제까지 알려진 민주주의적인 노동자들의 규칙중 가장 진보된 형태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위해 그들은 단지 레닌의 간단한 강령들을 택해야 하고 파리꼬뮨의 소중한 경험들에 기반해야 한다.

지방적, 지역적, 국가적 수준에서의 모든 위원회들의 대표들과 간부들은 선출될 것이며, 언제든지 소환될 수있다. 그들 중 누구도 숙련노동자의 평균임금 이상을 받을 수 없다. 노동자들에 반하여 사용될 수 있는 독립된 군대는 있지 않으며, 그들 스스로가 집단적으로 방위와 치안 업무를 수행한다. 회계와 통제의 완전히 민주적인 체제와 노동일의 과감한 단축은 모든 이들이 정부에 참가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모든 요리사들이 수상이 될 수 있다’는 레닌의 말처럼, 모든 기술자, 모든 전화교환원, 모든 버스운전사, 모든 간호사들도 그러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행동위원회는 생산, 분배, 재정, 그리고 토지를 그들의 통제와 운영하에서 공공의 소유로 만드는 투쟁에서 함께 단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점거와 투쟁의 기관에서 노동인민의 진정한 의회와 행정부로 전화할 것이다. 그들은 여태까지의 부채를 일소시키고 손해를 입히는 이자의 지불이 없는 새로운 신용을 창조하는 것을 통해, 소농․소사업가․상점주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대표자들에 의해 결정된 가격으로 민중들의 수요품들을 생산할 계획을 입안할 수 있다. 지대, 이자, 이윤, 낭비, 가난은 일소될 수 있다. 이것이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는 세계 역사에 굉장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혁명적 지도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공산당은 그 상황에서 결코 혁명적 지도를 입증해내지 못했다. 이것은 순수한 ‘임금투쟁’이며 ‘노동자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이런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혁명적 정당의 역할이란 것은 엄밀하게 말해 노동자 계급의 겉으로 말해지지 않는 희망까지도 옹호하는 것이며, 분명한 사회주의적 강령으로 수백만 노동자들의 대담한 행동을 고취시키고 북돋우는 것이다.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간단히 이것을 할 능력이 없었다.

5월 27일 밤에 상층의 진공상태는 가장 강력하게 느껴진다. 그르넬의 제안은 거부되고 노동자들은 지도를 기다린다. 극도로 높아진 정치에 대한 관심이 학생조직이 조직한집회의 대중적 참여로 드러난다. 샬레띠(Chalety) 스타디움은 대규모의 대중들로 오만 수용규모를 꽉 채운다. 그러나 정치적 내용은 흐릿하고 모호했으며, 혼란스러웠다. 노 좌파 인물인 삐에르 망데-프랑스(Pierre Mendes-France-이전의 프랑스 수상)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나라의 부름’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고 학생들과 하나임을 암시하지만 어떠한 강령도 실천하지 않을것이었다. 그는 연설하지 않는다. 그 집회에서는 다른 누구도 운동이 나아가야 할 분명한 강령을 갖고 있지 않다.

공산당 당원들은 당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아왔다. 그중에는 그들의 깃발을 들었던 CFDT의 대원들과 모든 학생 그룹들이 있었다. 비지에와 바르죠네는 이제 공산당에서 추방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드골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강령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프랑스 공산다(PCF)를 공격하는데 10배 이상의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또 하나의 황금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 다음날인 5월 28일 CFDT는 격렬한 파업을 요청한다. 프란시스 미테랑은 ‘임시정부’에 대한 그의 주장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그의 강력한 동맹군 중 헌법옹호자들과 결별하면서 공산당이 자신의 지위에 대한 약속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

공산당과 CGT 지도자들에 대한 열기가 성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희망을 좌파연합의 강령으로 못박았다. 그들은 마지막 선거에서 구백이십만표를 받았었다. 공산당은 인민전선 정부를 더덕더덕 끼워 맞춰 만들어 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소규모의 급진 정당을 이루고 있던 쁘띠 부르조아의 정치적 대표자들은 여전히 좌파연합의 일부분이었고 대부르조아지의 은신처 역할을 여전히 할 수 있었다. 모든 공동 강령이 단지 가장 낮은 수준의 일상적으로 허용되는 수단만을 포함할 뿐이었다. 인민전선정부는 그 임무에 전적으로 부적절함이 드러났고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막는 브레이크가 될 것이었다. PCF의 지도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 거대 독점 자본의 국유화가 들어가야 한다고’ 입에 발린말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유형의 정부’를 강력히 비판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의 정책은 잘못된 것이었다.

CGT의 지도자들은 이제 정부와 대화하는 것에 동의하는 어떠한 노선도 그들이 항상 반대해 왔다고 주장한다. 5월 28일에 모닝 스타지는 다음의 믿을 수 없는 내용을 썼다. ‘일부 프랑스의 보도는 Seguy씨가 르노 공장에서 야유를 받았다고 썼다. 사실 그 야유는 그가 연설에서 언급한 고용주 연합을 향한 것이었다.’

후에 똑같은 신문에 그들은 세귀씨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코 그들을 나오라고 한 적이 없다. 기억하라! ‘CGT리더들이 노동자들이 일을 재개하라고 설득했다는 허위보도가 있었다. 몇몇 경우에 그들은 그들이 그런 제안을 충분히 생각하지도 않았음을 분명히 했다.’ 많은 부분이 노동자들의 지도자들의 소망과는반대로 -그들이 어떻게 이의를 제기하건 간에 그들의 ‘허가’없이- 총파업은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부분들이 저항의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전환점


노동자계급은 그들 조직의 한 부분이 주도권을 장악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계급이 그 기대가 오류라는 결론에 도달할 때 -그리고 이 순간은 아마도 멀지 않았을 것이다- 급진화의 과정은 급작스럽게 멈출 것이고 실의, 낙담, 그리고 절망의 고립적인 폭발로 전화할 것이다. (트로츠키, 프랑스는 어디로 가는가?)


내전이 직면했음에 대해 언론 내에서 여론이 일어나면서 시공무원들은 그들 자신에게 그들이 확신하는 것처럼 어떻게 권력이 노동자들에게 이전될 것인가를 질문한다. 도시계획가들, 통신사, 그리고 출판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한다. 화랑 경영자들은 ‘예술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드골의 국민투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명백해졌다. 그 양식을 인쇄할 곳을 프랑스는 물론 벨기에와 영국남부에서도 찾을 수없었고, 헌법위원회는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이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영국의 추밀원이나 상원이 내각이나 그 나라의 법적인 원수-국왕-의 행동을 위헌이라고 선언한 것과 동등한 것이었다.

프랑스 부르조아지의 결코 작지 않은 한 날개인 이 단체가 드골의 계획에 대한 그러한 공개적인 반대에 의지한다면 상황을 절망적인 것으로 사고했음이 틀림없다. 그 결정은 ‘헌법적 타당성’에 대한 고려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며, 전적으로 드골의 계획이 그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전체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때문이었다. 그의 제안이 대중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이미뜨겁게 달아오르던 상황에 불을 질렀다. 쇠퇴기가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그 순간에는 급속도의 혁명과 맞서고 협상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불어넘치는 강은 진정으로 대홍수를 이루었다. 그것은 둑을 허물어뜨렸다. 연대활동이 유럽전역에서 일어났다. 이태리 부두노동자들이 제노바(Genoa), 레그혼(Leghorn), 시비따베치아(Civitavecchia)에 도착한 프랑스 배들의 짐을 내리기를 거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타임지는 프랑스공장에서 일하는 영국노동자들에 의한 연대활동을 이야기했다. 네덜란드의 부두 노동자들은 프랑스로부터 수송된 배의 하역을 거부하고 있었다. 벨기에 인쇄공들은 렉스프레스(L'Express)의 인쇄를 거부했다.

혁명적 프랑스가 고립된 상태가 아니었냐고 의심도 있었다. 스페인 노동자들은 이미 프랑코 장군의 정권의 근본을 부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는 거의 죽음 직전이었다.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부터 전세계 노동자들에게 호소가 일어난다면 자본주의의 종말이 역사에 새겨졌을 것이다.

불품없는 노동자 국가의 상층부 도당들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6월 5일까지 소비에트 관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중국은 소련이 침묵함으로써 드골을 돕고있다고 선동적으로 비난했다. 옵저버지는 이렇게 논평했다. ‘크레믈린이 가장 택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자신을 지지하는 드골장군의 외교정책을 러시아로부터 뺏어갈 혁명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되었던 것은 모스크바나 뻬이징의 지배 관료들의 운명 그 자체였다. 혁명적 운동이 프랑스에서 발달한다면, 그것은 유럽의 자본주의뿐아니라, 스탈린주의 국가 상층부의 관료적 엘리트들도 쓸어버렸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죠르쥬 세귀뿐만 아니라 프랑스 공자당의 지도적 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그의 수동성 때문에 세귀는 라디오프로그램에서도 집중포화를 받았다. ‘어디에서난 노동자들은 끝까지 해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 CGT의 헌장은 그 목적이 자본주의적 전복과 그것의 사회주의로의 대체에 있다고 언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귀는 이것이 ‘근본적으로는’ CGT의 목표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현재의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사회적 계층들이 그렇게 멀리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여러번 그 지도자들은 대중이 ‘준비’되어있지 않다고 결단내렸다. 그들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자신들은 결코 혁명적 상황을 보지 않았다고 고집했다! 5월 마지막 주중에 모든 다른 분석가들은 그 혁명적 상황을 보았고, 심지어 1958년에 위기에 몰린 정부의 입장에서 드골을 정권으로 끌어들였던 기 모예(Guy Mollet)같은 사람도 그것을 볼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상황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선언하면서도 모예는 그 자신의 취해야 할 행위에 관해서는 어떠한 어려운 결단도 내리지 않았다. 그의 사회당 우파는 불신받아았고 그들의 영향은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모예는 그의 오랜 프랑스 정치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모든 진지한 관찰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눈앞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포착할 수 있었다. 오직 프랑스 공산당을 이끌고 있는 저 정치적 근시안들만이 여전히 그들앞에 벌어지는 상황은 혁명이 아니라고 읊조리고 있었다.

프랑스 경제는 멈취버렸다. 소수의 노동자들이 하나 혹은 두 개의 공장에서 그들의 통재하에 생산을 재개하는 실험을 했지만, 대체로 전 산업과 사회에는 평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주식거래소와 프랑스 은행은 한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재무성에서 고위관리들을 관리할 위원회를 만들었었다. 그러나 5월의 마지막 날들에 이 전선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거의 없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렇게 논평했다. ‘격화되는 소동속에서 권력은 침묵하고 있다’, ‘고용주들의 조직은 조용하다. 그리고 그들의 사원들도 마찬가지다!’

5월 29일까지 노동자계급의 모든 중요 부대들이 어떠한 거래에도 반대함을 선언했었다. 북부의 광부들, 르노의 노동자들, 시트로엥의 노동자들, 비행기 제조 노동자, 베를리에의 화물차, 로디아세따(Rhodiaceta)의 섬유, 오를리와 르 부르제(Le Bourget)의 공항 노동자들이 그들이었다. 많은 제안들은 그르넬에서 동의된 바를 넘어서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렇게 선언한 것이다. 브르따뉴(Brittany)에서는 중소기업들의 새로운 파업이 발생한다. 깽(Caen)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에 의해 차단되었다. 자본주의를 구하자는 대중적 합의를 호소하느 시도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필사적인 수단들마져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이브닝 스텐다드지는 ‘총파업은 종결될 것이라는 신호를 전혀 보내지 않고 있으며, 점점 더 반란에 가까워지고 공공연히 정치적 성격을 띤다’고 논평했다. 점거된 공장의 수백 행동위원회들은 ‘민중의 정부’를 요구하고 있다.

5월 29일 아침에 내각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골, 이 국가의 화신은 짐을 쌌다. 그날 아침에 그는 신임 주미 대사, 사르쟝 슈리베(Sargent Shriver)에게 ‘미래를 위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소. 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는 신속히 헬리콥터로 파리를 벗어났다. 떠나기전에 그는 한 고위관리에게 정치적 유언장이 들어있는 금고의 열쇠를 건네줬다고 한다. 그는 꼴롱베(Colombey)의 고향집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말그대로 지면에서 땅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후의 시간에도 그는 권력에 도전해야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노동조직의 지도자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지를 계산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어떻게 그들을 패배시키는 데 필요한 힘을 불러모을 수 있었겠는가?

‘프랑스에는 실제로 유효한 정부가 없다.’고 이브닝 스텐다드지가 발표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그들 조직이 주도권을 장악하기를 기다린다. 상황은 1848년의 프랑스 혁명기간과 유사하게 되었는데, 그때를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파리에서조차도 프롤레타리아 대중자신은 승리이후 아직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절대적인 암흑속에서 알지 못했다. 그러나 본능적이고, 자연발생적이었으며, 억누를 수 없는 운동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혁명이 성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서문)


위원회들을 단결시키고 권력을 장악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강령이었다. 1968년 6월의 밀리탄트의 한 글이 그것을 설명한다.


모든 상점, 공장, 모든 직장에서 노동자들의 평의회는 자연스럽게 지배적인 조직이 되어야 한다. 지방적 수준에서 성취된 것이 지역권으로 나아가고 전국적 수준에서는 조직된 분파들이 그들의 의지와 요구가 집행될 수 있는 모든 임금노동자들을 얼싸안을 때까지 끌어들여야 할 것이다. 그 대중의 의회는 국회에서의 사기꾼들의 가짜 민주주의와는 반대되는 진짜 민주주의를 이룬다. 노동자들, 농민들, 중간계급의 요구를 받아 안음으로써 그것은 그들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으며, 철저한 변혁에 대한 공감된 요구,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요구를 느낄 것이다. 일단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 평의회는 모든 공직을 선출하고 소환에 응하도록 할 것이며, 투쟁의 도구로부터 대중 스스로의 운영과 통제의 기관으로 변할 것이다. 자본가계급이 교활하게도 이해하는 것처럼,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노동자계급이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사이를 이간하는 유일한 것은 대중조직의 지도자들이다.


공산당 고위층들은 정확하게도 위원회들이 서로 단결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여왔다. 거기에는 전국협력위원회, 노동자 중앙 평의회같은 것은 없었고, 노동자들은 각기 고립된채로 남아 있었다.

모든 권력의 지렛대를 양손에 쥐고 있는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그린 이브닝스텐다드(5월 31일자)는 ‘그러나 그들은 권력을 장악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이코노미스트의 파리특파원은 같은 날 기사에 이렇게 썼다. ‘바로 이 순간에 파리의 결정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누가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그러나 공산당은 그후에도 ‘결코 한 순간도 권력의 공백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날 밤에 오십만이 꽤 넘는 노동자들이 CGT의 깃발아래 파리에서 시위를 하였다. 플래카드들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제 6공화국: 그것은 바로 우리다!’, ‘민중의 정부’. 지하철 노동자들은 특별한 메시지를 남겼다. ‘드골-지하로!’ 영국 공산당 기관지 모닝스타는 프랑스 공산당이 ‘현재의 위기기간 내내, 체계적이고 일치단결하여 드골정권을 민중 정부로 대체하기 위해 싸워왔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랬다면, 왜 장군과 그의 체제가 즉시 타도되지 않았단 말인가? 그것은 말이 귀찮은 파리 한 마리를 쓸어내는 것처럼 쉬웠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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