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아티스트
호상근
재현된 그림으로 만나는 리얼 라이프
"저는 당신에게 약간의 요구를 합니다. TV나 인터넷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닌 실제 세계에서 보았던 것, 적어도 여기까지 오며 보았던 풍경 중 자신에게 생경하게 다가오는 사물이라든지, 사람이라든지, 건물이라든지… 하여튼 간 그런 본 것들을 ‘되도록’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감탄을 일으킬 정도로 잘 그리진 못하지만, ‘되도록’ 꼼꼼히 당신의 이야기를 그려서 편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호상근 작가의 홈페이지에 적힌 문구다.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작가들과 같이 '내가 화폭에 담아낸 세계를 관람하라'는 것이 아닌, 관객이 적극적으로 그림의 내용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른바 [호상근 재현소(HOSANGUN REPRODUCTION OFFICE)]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귀를 기울여 타인의 이야기를 들은 작가는 여기에 자신의 시각을 살짝 덧대 작은 엽서 크기의 세계를 하나 완성해 낸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 세계들이 한데 모이면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을 거울처럼 비춘다.
작가 호상근은 이렇게 자신의 눈이 본 세상과 타인의 눈이 바라본 세상을 적절히 버무려 지나치게 포장되지도 않고 과도하게 폄하되지도 않은 각양각색 '리얼 라이프(Real Life)'를 조명한다. 그리고 그의 오감이 관찰해 재현한 그림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임이 분명한데도 우리에게는 마치 새로운 풍경처럼 다가온다.
![[호상근 재현소((HOSANGUN REPRODUCTION OFFICE)], 이름만으로도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건가요?](https://img1.daumcdn.net/relay/cafe/R400x0/?fname=https%3A%2F%2Fncc-phinf.pstatic.net%2F20150828_9%2F144072552170207f2i_PNG%2Fq01.png)
이런 스타일의 그림을 그린 건 일상을 기록하면서부터였어요. 집은 용인이고, 작업실은 을지로이다 보니까 오가는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꽤 길었거든요. 그 시간에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해 두려고 그린 거죠.
그러다가 문득 이건 단지 내가 보는 세상이고, 내 역사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세상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 거예요.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닐 테니까, 그리고 똑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있어서 그 세상은 미묘하게든 엄청나게든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서로의 시선에 담긴 세상을 그려가다 보면 어느 정도의 평균점이랄까요, 균형이 맞는 세상이 그려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마침 ‘꿀풀’이라는 전시공간에서 전시 제의가 왔고, 그때 옆에 남는 공간에서 어떤 것이든 해도 좋다 하기에 그 공간에 오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그걸 다시 재현해서 보내주는 프로젝트를 하게 된 거죠.

맞아요. 외로워서이기도 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아무래도 작업실 안에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거든요. 고립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다 보니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도 듣고 타인의 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어요.
단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저는 회화 전공이고 친구들도 대부분 같은 전공자거든요, 그런데 가끔 건축이나 문과 전공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정말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이 느껴져요. 똑같은 사람을 보고도 다르게 느낄 수 있고, 같은 현상을 보고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되죠. 자기가 살아온 환경이 생각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각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재미도 물론 있고, 저 스스로 견문이 넓어지는 느낌도 있죠. 그렇게 들은 이야기들을 재현해 그리면서 한 번 더 지금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호상근 재현소(HOSANGUN REPRODUCTION OFFICE)]입니다.

길을 다니다 보면 세상에 정말 다양한 시선이 있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독특하다 느낀 경우도 많고요. 저는 찻길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마네킹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인 생김새를 인식하는 얼굴 모양이 어쩌면 이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적도 있었어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주차금지(No Parking)] 작품 시리즈의 경우엔 각각의 자리 주인이 만든 다양한 모양의 주차금지 조형물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그리기 시작했어요. 유심히 살펴보니 어떤 이는 고깔 모양 물체를 갖다 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화분을 갖다 놓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의자에 '주차금지'를 써 붙여서 갖다 놓기도 하더라고요. 또 어떤 이들은 타이어에 돌을 얹어 놓기도 하고요. 그런 것만 봐도 참 세상 사람들 생각하는 거나 표현하는 게 다양하단 생각을 해요. 그런 부분에서 전 아름다움과 존경을 느끼기도 하고요.

우선 제가 본 것, 제가 느낀 것을 그릴 땐 다녀와서 그냥 기억나는 대로 그려요. 하지만 [호상근 재현소(HOSANGUN REPRODUCTION OFFICE)]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좀 다르죠. 우선 이야기를 들어요. 들으면서 바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메모를 하죠. 메모를 최대한 상세하게 하고, 중간중간 질문도 던지고 해서 사연의 상세한 상황을 기록해두죠. 거기에 제 생각도 섞이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돌아와서 나중에 그림을 그려요. 라디오 작업도 비슷해요. 물론 일주일 안에 하나를 완성해야 한다는 점과 또 제가 궁금한 게 있어도 더 물어보지 못하고 사연을 바탕으로 인터넷으로 당시 상황이나 유행하던 인테리어, 패션 등의 자료를 찾아서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는 차이가 있지만요.

그렇죠. 한데 막 작정하고 나가서 목표물을 사냥하듯 찾아 그리진 않아요. 머릿속에 남은 잔상 때문에 유독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있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집에서 ‘내셔널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채널에 나온 수컷 사자의 화려한 갈기를 보다가 작업실로 출발했어요. 그러면 그 잔상이 나도 모르게 머리에 남았던지 괜히 지나가던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입은 동네 할아버지가 눈에 띄곤 하는 거죠. 아니면 화려한 건물일 수도 있고.

아무래도 재현을 하는 거니까 '디테일'을 살리는 거겠죠. 그래서 사연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최대한 질문을 많이 해요. 가전제품이라면 브랜드는 무엇이었는지 하는 것까지 파악해서 그 브랜드 디자인을 잘 표현해 그리죠. [차이는 중(Braking Of Relationship)]이라는 작품의 경우엔 사랑하던 남자에게 차인 여자의 사연이었어요. 평소엔 그렇게 우유부단하던 남자가 냉정하고 단호하게 이별을 말하더래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상황을 그려야 하니까 배경이 어땠는지, 소파는 무슨 색이었고, 그런 것들을 세세하게 이야기하도록 유도하죠. 굉장히 재미있게 작업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깝다기보단 아쉽죠. 보내주기 위해 작업한 거지만, 원본이 제게 없다는 건 항상 아쉽다는 생각을 해요. 스캔 해서 남겨두긴 하지만 원본과는 좀 다르죠.

재현 외에도 다른 작업을 많이 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당분간은 재현도 계속할 거예요.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게 보이고, 한편으론 견문이 넓어지는 느낌도 들고,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그 상황은 과거의 어느 순간이니까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는 기분도 들거든요. 세상의 틈을 바라볼 줄 아는 여지가 더 많아진 기분이에요. 굳이 숫자로 표현한다면 과거엔 1만큼 볼 수 있었던 걸 10만큼 보는 기분?
그리고 이런 재현의 결과물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 생각도 있어요. 전에 제 기록의 결과물로 『구석진 풍경』이라는 책을 출판했었거든요. 이번엔 글 쓰는 분과 협업해서 호상근 재현소에서 그렸던 그림과 그림에 대한 글을 함께 실어볼 생각이에요. 글 쓰는 분은 어떤 배경 설명도 듣지 않은 채 그림만 보고 이야기를 쓰는 거죠. 상황과 맞을 수도 있지만, 엄청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요. 어차피 살아가면서 자신의 시각대로 오해하며 사는 세상인데, 오해로 가득한 책도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글 김희정 / 문화예술기자
추천의 변
일상은 바쁘고 지루하기만 한 걸까? 세상의 속도를 숨 가쁘게 쫓다 보면 자신만의 페이스를 잃기 마련이다. 최근 아날로그 감성이 유난히 그리운 것도 자신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면 소소하지만 재미난 풍경이 가득하다. 호상근은 자신의 기억을 혹은 타인의 기억을 호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냥 스치고 지나갈 법한 평범한 기억 속에서 매력적인 장면을 건져 올린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능력도 탁월하다. 알고 보면 주차금지 화분은 대단한 물건이며,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도 자신만의 삶의 노하우를 축적한 엄청난 고수들이다. 때로는 앞뒤 맥락을 몰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장면이지만 오해가 만들어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가는 저마다의 생존방식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성실하게 재현한다. 그리고 그가 수집한 장면들은 전시가 끝나면 다시 이야기의 주인을 찾아간다. 이제는 한 사람의 구석진 기억이 아니다. 시시콜콜하지만 특별한 모두의 풍경이다.
추천인 이슬비 / 헬로!아티스트 작가선정위원
작가소개
호상근
한성대학교 미술학사 회화 심화전공을 졸업했으며 2012년 동 대학원 회화과 서양화를 수료했다. 2012년 대안공간 꿀풀에서 개인전 [내가 본 것, 네가 본 것: 호상근 재현소(Things I've seen, Things you've seen: HOSANGUN REPRODUCTION OFFICE)]을 열었다. 2012년 『구석진 풍경』이라는 책을 출판, 2013년 아트인 컬쳐 신진작가 육성 발굴 프로그램인 '동방의 요괴'에 선정 되었다.
![호상근, [교통정리 외국청년(Young Foreign Guy Directing Traffic)], 2012년](https://ncc-phinf.pstatic.net/20150828_186/144072612592336TTw_JPEG/2.jpg)
![호상근, [주차금지(No Parking)], 2012년](https://ncc-phinf.pstatic.net/20150828_268/1440726082764z2brF_JPEG/3.jpg)
![호상근, [강렬한 할아버지(Intense Grandfather)], 2015년](https://ncc-phinf.pstatic.net/20150828_82/1440726329596DA9pn_JPEG/4.jpg)
![호상근, [부드럽게 침범 (Smoothly Intrude)], 2011년](https://ncc-phinf.pstatic.net/20150828_172/1440726301786eN7VV_JPEG/5.jpg)
![호상근, [불타는 밥(Fire Rice)], 2014년](https://ncc-phinf.pstatic.net/20150828_236/1440726472026ETKpX_JPEG/6.jpg)
![호상근, [차이는 중(Breaking of Relationship)], 2014년](https://ncc-phinf.pstatic.net/20150828_138/1440726455968TO2Rw_JPEG/7.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