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스토리】육명심 [陸明心] - 소통하는 사진작가

작성자한결이|작성시간19.11.28|조회수577 목록 댓글 0

인생스토리

육명심

소통하는 사진작가




[ ]

출생 193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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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살아있다는 사실이에요.”

 

그에게 사진이란 일이 아닌 삶이며 소통의 도구다. 눈이 아닌 가슴으로 담아낸 그의 사진 속에는 따뜻함이 가득하다. 남들과 똑같은 것을 꿈꾸기보다는 언제나 창의적이고 색다른 것을 창조하려고 했던 사람, 시인이 될 뻔했던 사진작가 육명심. 그가 말하는 소통의 미학을 들어보자.


네, 한 편의 소설이나 다름없었죠. 제 이름이 밝을 명()에 마음 심()자인데, 이 이름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어요. 나중에 수덕사의 방장이셨던 원단스님께 법명을 지어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이미 좋은 이름이 있는데 법명이 왜 필요하냐고 하시더군요. 사실 저희 아버지께서 스님이셨어요. 아버지는 어릴 때 어디 가서 사주나 관상을 보면 일찍 세상을 뜰 운명이란 얘기를 많이 들었대요. 그래서 주변에서 절에 들어가야 한다고 권유하니까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속리산 암자에 사미승(: 십계()를 받고 구족계()를 받기 위하여 수행하고 있는 어린 남자 승려)으로 맡겨지셨답니다. 그렇게 암자에 계시다가 이십 대에 머리 깎고 스님이 되신 거죠.

그런 스님을 아버지로 두게 된 것은 집안 사정, 즉 대를 잇기 위해서였어요. 아버님은 삼형제 중 막내였는데 제일 큰 형님은 딸 하나 낳고 스물 여섯에 폐결핵으로 돌아가셨고, 둘째 형도 딸 하나만 낳으셨다고 해요. 상황이 그러니까 집안에서 대가 끊어지게 될까 봐 절에 계셨던 아버지를 다시 부른 거예요. 저희 어머니께서는 씨받이로 오셨고요. 그렇게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만나셨고,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게 접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몇 달 사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대요.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이부자리를 개려고 봤더니 요 밑에 쪽지가 하나 있더랍니다. 만약에 아이를 낳거든 아들이든 딸이든 밝을 명()자, 마음 심()자를 써서 ‘명심()’으로 지어달라고요. 제 이름이 그렇게 지어졌어요.

그 이후 제가 일곱 살 때 절에서 통지가 왔어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요. 아버지가 쓰시던 목탁과 회중시계, 대추나무로 만든 표주박, 이렇게 세 가지 유품을 보내왔더군요. 저는 아버지 얼굴을 본 적도 없었지만 그때 절에서 보내준 유품들에서나마 아버지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어요. 이런 출생의 배경,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제 이야기지만 정말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공부를 잘 못했어요. 뒤에서 등수를 세는 게 더 빠를 정도였죠. 잘해 봐야 30등을 왔다 갔다 했어요. 그렇지만 이상하게 저는 시험운이 좋은 편이었어요.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학교에 들어갔어요. 그 당시 사범학교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6년제 학교로, 지방의 수재들이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았던 제가 시험을 잘 봐서 사범학교에 들어가게 된 거죠. 사범학교 졸업 후에는 연세대학교 영문학과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범학교는 초등학교 선생을 육성하는 양성소이기 때문에 영어, 수학은 별로 안 가르쳤어요. 그런데 제가 실력 있는 학생들만 갈 수 있는 연세대학교에, 그것도 영문학과에 들어간 거예요. 그렇게 공부를 못하던 제가 말이죠.

여기엔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이 한몫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어머니는 제가 초등학교에서 사범학교 들어갈 때도 새벽마다 장독대 위에 정화수를 떠놓고 적어도 1년 이상 빌었을 겁니다. 제가 사범학교를 나와 연세대학교 시험 칠 적에도 그러셨어요. 어머니의 정성 어린 기도 덕분에 제가 어려운 관문들을 통과해오지 않았나 싶어요.

육명심 작가는 시와 연극,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적 재주를 가졌지만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 세계를 표현해 냈다. 결혼 후에 뒤늦게 사진을 시작했지만 평소 가진 예술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영어 원서, 일본어 원서 등 사진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서 혼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진 세계가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에 대한 관심, 특히 문학에 대한 관심 덕분이었다.

언젠가 어떤 잡지에서 저를 인터뷰 했는데 ‘시인이 될 뻔한 사진가’라고 제목을 아주 잘 붙였더군요. 사실 저는 시인이 될 뻔한 사진가일 뿐만 아니라 배우가 될 뻔한 사진가이기도 합니다. 배우이자 연출가이셨던 이해랑 선생님은 저에게 연극할 사람이 무슨 사진을 하냐고 하셨고, 또 시인 서정주 선생은 시 쓸 사람이 무슨 사진을 찍느냐고 그러셨죠.

사실 저는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분야 전반에 관심이 많았어요. 음악만 빼놓고요. 특히 그 중에서도 문학에 대한 관심이 제일 컸죠. 사범학교 1학년 때 우연히 대전 시립도서관에서 [청록집]이라는 시집을 봤어요.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박목월()•조지훈()•박두진() 3인의 시집이었죠. 그걸 보고 얼마나 황홀하던지……. 그때 박목월 선생의 시가 얼마나 감명 깊었던지 모두 다 외웠어요. 그때부터 시()에 쭉 빠져 살았죠. 사범학교 6년 내내 시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읽었어요. 그때 가지고 있던 그 관심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거죠. 요즘도 가방에 시집을 갖고 다니며 지하철로 이동할 때는 늘 읽어요. 가끔 시인들을 만나면 저보고 어떻게 자기들보다 시를 더 많이 아느냐고 물어요. 그러나 저는 시를 안다고 하기보다는 읽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죠. 사진가로서 제 감성의 원천은 아무래도 시 읽기가 아닌가 싶어요. 지금까지 이 나이 먹도록 감성의 샘이 솟아나는 비결이 시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1964년, 결혼하고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가 서른 셋이었죠. 아내가 결혼할 때 카메라를 가지고 왔어요. 제 아내는 중학교 때부터 사진을 찍었는데, 소풍가면 친구들 사진도 찍어주고 아버지께 필름 현상까지 배울 정도로 사진을 아주 잘했습니다. 신혼여행 갔을 때 그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고 거기서 카메라 조작법을 배웠죠. 사진의 기초를 아내에게서 배운 거죠. 그게 제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입니다. 저의 제일 첫 번째 사진 선생은 아내인 셈이죠.

제 장점을 하나 말하자면 겁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누군가를 상대해야 한다면, 시원찮은 수십 명을 만나는 것보다 가장 센 사람을 일대일로 만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좀 엉뚱한 생각이었죠.

사진계에 발을 들이고서도 가장 실력 있는 사람들만 찾아갔죠. 사진을 배우기 위해 실력자들을 찾아 다녔는데 다 기초적인 것, 똑같은 것밖에는 가르쳐 주질 않더라고요. 약 3개월 찾아 다니다가 더 이상 찾아갈 필요를 못 느꼈어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저 혼자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지요. 마침 영문과를 나왔으니 원서도 읽을 줄 알았고 평소 예술에 대한 관심도 많았으니 영어 원서, 일본어 원서 등 사진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모아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사진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사진을 시작한 지 6년 만에 서라벌 예술대학의 교수가 되었어요. 그 때 마침 서라벌 예술대학이 2년제에서 4년제로 승격을 한 시점이어서 예술에 대해 좀 더 본격적으로 가르쳐야 했는데, 사진에 대해 강의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거죠. 어느 날 서라벌 예술대학 관계자가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사진사() 이론 강의를 부탁하더군요. 사진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 거예요. 사진계의 최고라는 어른들을 찾아갔다가 석 달 만에 독학하기로 마음먹었고 결국 사진학과 교수까지 된 것이죠. 대학 교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사실 공모전에서 큰상을 탄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상을 많이 받은 편에 속하죠. 저는 남들이 하는 방식은 피했거든요. 그 당시 사람들이 제 사진을 좋게 봐줬던 이유도 뭔가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가장 좋은 실례가 처음 사진을 시작하고 반년 만에 전국 촬영대회에 나갔을 때입니다. 저는 캐논네트라는 조그만 카메라를 들고 나갔는데, 명품카메라를 들고 온 사람들도 많았고 모델들도 많더군요. 처음에는 남들 찍는 거 흉내 내면서 몇 컷 눌렀어요. 그러다가 서너 컷 누르고 멈췄어요. ‘아차!’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잠시 멈추고 남들은 어떻게 찍는지를 관찰했죠. 보통 다른 사람들 같으면 남들이 어떻게 찍는지 보면서 배우려고 할 텐데 저는 오히려 반대였어요. 잘 관찰해서 남들과 똑같이 안 찍으려고 했으니까요. 그것이 카메라를 잡은 지 만 6년 만에 아마추어였던 제가 대학 강단에 서게 된 비결이기도 해요. 아무튼 그 대회에서 남이 안 찍는 식으로 스스로 연출한 사진을 세 작품 출품했는데, 두 점이 입선하고 한 점이 가작을 했어요. 집에서 깜짝 놀라더군요. 그 다음에 ‘동아 국제사진살롱’이라는 대회에 나가서 독일 사람이 금상을 받고 제가 은상을 받았어요. 그 작품도 아주 특이한 사진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남들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제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담아낸 것이 인정을 받은 거죠.

육 작가는 1960년대부터 어울리던 예술가들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해 10여 년간 150여 명의 예술가들의 사진을 찍어 [예술가의 초상]이란 작품집을 냈다. 그는 예술가 시리즈를 찍으면서 사람들을 만나 소통하는 법을 배웠고, 내면의 열등감을 치유했다. 사진은 미당 서정주 시인.

육명심 작가가 찍은 천상병 시인의 사진.

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상대방이 가슴을 열지 않으면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판소리계에 군계일학()일 정도로 창을 아주 잘하는 남자 명창이 계셨어요. 그분을 찍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는데 마음의 문을 안 여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찍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음의 문을 안 열어서 오히려 사진의 효과가 좋았던 분도 있어요.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김기영이라는 영화감독은 굉장히 개성이 강한 분이었어요.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은 데다가 인상 또한 무서운 편이었고 눈도 엄청나게 컸죠. 그런데 오히려 그런 분이었기 때문에 사진을 성공적으로 찍을 수 있었어요. 제가 사진을 찍으러 갔더니 빨리 찍으라고 재촉하시더군요. 저는 일부러 늑장을 부렸어요. 그분이 화가 나야 좋은 사진이 나올 것 같았거든요. 결국 그분은 제 태도에 화를 내셨고, 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담아내서 성공한 사진이 됐어요. 화가 난 표정이 오히려 그 양반다웠던 거죠.

제일 쉽고 빠르게 작업했던 분은 중광스님이에요. 30분도 안 걸려 찍었는데 예술가 초상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서로가 통했기 때문이죠. 그분이 처음에 저를 보고 직업이 뭐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사진도 찍지만 교사라고 말씀 드렸죠. 몇 년이나 했냐고 물어보시기에 적어도 몇 십 년 했다고 답했더니 “제자가 많겠네?”라고 물으시더군요. “제자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의아해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나를 잡아먹는 놈이 내 제자인데 그런 학생이 없었다”고 했더니 “자네, 법문을 하고 있구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거기서부터 우리가 서로 통한 거죠. 그때 마음의 문을 활짝 여셨어요. 그리고는 저를 거리의 포장마차로 데려가셨어요. 그 포장마차에서 한 컷 찍은 게 유명한 사진이 된 거죠.

서로 대화가 통하는 게 소통이에요.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불교계에서는 성철스님이 제일 만나기 어려운 분이었어요. 삼천 배를 안 하면 만날 수 없는 분이셨죠. 1981년 1월 7일로 기억하는데, 성철 스님을 직접 찾아가서 단독으로 만났습니다. 제가 좀 엉뚱한 기질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용기도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철스님과도 10분 만에 대화로 통했어요. 만나 뵈었더니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으시더라고요. 저를 보시자마자 “사진은 뭐 하러 찍을라카나?”라고 물으세요. 그래서 제가 뭐라 한 줄 아십니까? “스님, 만약 부처님 살아 생전에 사진술이 발명됐더라면 세상의 부처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했더니 저를 보시고는 씩 웃으시더군요.

‘예술가 시리즈’는 처음부터 계획하고 본격적으로 찍으려 했던 건 아니었어요. 제가 대학 시절부터 문학도 하고, 연극도 하고, 다양한 예술적인 취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분들하고 어울렸는데 그분들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이 시리즈가 됐죠. 그게 제가 만 40살이 되던 1972년입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150여 명을 찍었어요.

그런데 이게 저의 인생을 전반과 후반으로 완전히 바꿔 놓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내면의 열등감으로 무슨 일이든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을 자주 만나서 사진을 찍다 보니 누구를 만나도 소통이 되더군요.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제 안에 잠재돼 있던 무언가가 그런 기회를 통해서 드러나지 않았나 싶어요. 말하자면 ‘예술적인 직관력’ 같은 거죠. 그렇게 소통하는 방법에 익숙해지고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과 만나다 보니까 자신감이 점점 생기기 시작했어요. 소외감이나 열등감도 저도 모르게 저절로 극복이 됐고요. 예술가 시리즈가 저를 안팎으로 구원한 거죠.

육 작가는 피사체와 마음이 통해야 사진을 찍는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소통이 이루어진 이후 사진에 영상을 담는 그는, 굿판 가운데서도 무당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러한 그의 작업 방식은 촬영 현장에서 이벤트가 됐고, 그의 작품들은 명작이 됐다.

사진은 소통이자 만남이죠.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사진을 찍을 때는 소통을 먼저 해야 한다고 가르쳐요. 요새 한참 성추행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운데 제가 제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많이 해요. '너희들 사진 찍는 게 성추행과 똑같다'고요. 눈에 욕심의 불을 잔뜩 켜고 무조건 좋은 사진을 찍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거든요. 그 욕심의 불을 꺼야 합니다. 이건 학생들에게만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라 제 자신도 늘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서로 소통을 먼저 해야 돼요. 그런데 성추행에는 소통이 없잖습니까? 일방적인 욕심으로 덮쳐버리는 거죠. 보통 사진 찍는 행위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제가 찍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사진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물어봐요. 어떻게 하면 서로가 소통이 잘 되느냐고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말해주죠. 욕심이나 정욕의 불을 켜고 보기 전에 대상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고……. 꽃을 찍을 때도 “아, 아름답구나”하면서 일방적으로 덮치면 안 돼요. 가슴으로부터 감동을 먼저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감동에 대해 반응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자연히 사진에 그 마음이 그대로 배어납니다. 바로 거기에 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건 여러 번을 물어도 저는 항상 같은 대답입니다. 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건 소통이에요. 그래서 예술가들을 찍을 때도 단번에 가서 찍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몇 번은 만난 후, 서로 마음으로 소통이 되었을 때, 그리고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찍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같이 작업을 하고 난 뒤에도 깊고 오랜 인연을 맺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장승 시리즈 이후 육 작가는 우리나라의 평범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5년간 사진을 찍었다. 시골 장터에서 만나는 노인, 촌부, 노동자, 무당에 이르기까지. 그 연작 사진의 이름이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백민(白民)]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사진사()와 작가론을 가르쳤는데, 사진에 관한 외국의 최신 정보와 대표적인 작가들의 동향이 주요 내용이었죠. 그런 제가 어떻게 고리타분한 우리 옛 것을 찍겠습니까? 외국에서 유행하는 현대적인 것을 찍는 게 상식적인 거죠. 그런데 저는 시골의 농부들이나 무당, 스님, 또는 장승 같은 우리 것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현대물은 이미 외국에서 다 찍었는데 그걸 똑같이 찍는다면 그들의 아류밖에 안 되는 거고 흉내 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육명심의 카드’를 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려면 우리 것을 담는 수밖에 없었고요.

그때가 1978년 무렵이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속도가 한창 상승곡선을 타고 올라갈 때였습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들판이 아파트 촌이 되고, 논바닥이 공장으로 바뀌었어요. 초가집이 없어지고 몇 백 년 된 나무가 사라져 순식간에 마을이 변해버리는 시기였죠. 가만 보니 이러다가는 영영 우리 문화재가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없어져 가는 우리 것을 사진으로라도 남겨놓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게 큰 죄를 저지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어요. 그래서 ‘우리 것 3부작’을 찍은 거예요. 무려 18년 동안을 찍었어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장승을 7년 찍었고, 백민을 5년 찍었고, 제주도에서 모래찜질하는 모습들도 찍었죠.

육 작가는 사진 작업을 위해 이동할 때 승용차를 타지 않는다. 그에게는 지금도 자가용 승용차가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주로 걸어 다녔다. 장승을 찍기 위해 전국을 다닐 때도 시외버스와 시골 버스를 이용했는데, 땀을 흘리지 않고 사진만 찍는 것이 장승에게 미안해서였다. 땀 흘리고 발바닥도 부르트면서 도착한 뒤에 “저, 왔습니다.” 인사하면 서로가 마음도 편하고 소통이 됐단다.

사진 찍을 때에 자동차를 안 탈 뿐 아니라 우리 집엔 아예 차를 들이지 않았어요. 제 아내가 초등학교 교장으로 일할 때였는데 학교에서 나온 교장 전용차를 타고 왔더군요. 그래서 제가 안 타는 게 좋겠다고 말했죠. 지금도 충분히 편하게 살고 있는데 더 이상 편해지면 큰일 난다고요. 아파트에 살면서 뜨거운 물도 맘껏 쓰고 엘리베이터로 편하게 다니니 옛날에 비해서 얼마나 편하게 살고 있습니까? 사람이 편할 때가 가장 위기란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니 조금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좋겠다고요. 그래서 아내가 자가용을 탄 건 채 한 달도 안됐을 거예요. 그리고는 대중교통을 이용했어요.

저 자신도 그렇지만 학생들에게도 ‘편할 때가 위기’라는 이야기를 자주 해요. 아마 다들 아는 내용일 거예요. 뜨거운 물에 실험용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놀라서 후딱 뛰쳐 나와요. 그렇지만 개구리를 찬물에 집어넣고 서서히 불을 지피면 개구리가 처음에는 차갑다가 조금씩 따뜻해지니까 기분이 좋아서 온몸을 편안히 두고 있게 되죠. 그렇게 점점 물의 온도가 올라가면 결국 익어서 죽어요. 이렇게 편안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걸 학생들에게 자주 강조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저의 신조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안타고 다녀요. 걸어 다니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걸어 다니는 이유는 또 있어요. 제가 장승을 찍고 다닐 때였는데 그때도 대중교통을 이용했어요. 한번은 사진에 관심 있던 어느 학부형이 차로 모셔다 드릴 테니 사진 찍으러 함께 가자고 하셔서 그분의 차를 타고 이동하게 됐어요.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접점인 함양에 장승이 하나 있었는데, 아침에 출발해서 사진을 찍고 점심을 먹고는 바로 올라왔어요. 다른 때 같으면 하룻밤 자고 왔을 텐데 그날은 제대로 된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었어요. 장승한테 미안해서 도저히 찍히지가 않더라고요. 가난하고 고생하는 사람을 찍겠다고 자가용 타고 편히 가서 찰카닥 찍고 오면 그분께 미안하잖아요. 그런 기분이었어요. 그 후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걸어 다녀요. 멀리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요. 고속버스 타고 전주에 가서 거기서부터 좀 더 들어가려면 마을버스 타요. 그리고는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고요. 땀 흘리고 발바닥도 부르트면서 도착한 뒤에 “저, 왔습니다.” 인사하면 서로가 마음도 편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바라는 것 없어요. 학생들에게도 사진 찍을 때 의미나 목적을 내세우지 말라고 가르쳐요. 그건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의미나 목적을 내세우다 보면 딱딱해지고 소통이 제대로 안 돼요. 마음으로 찍고 반응만 하는 거죠. 스스로 좋아서 찍으면 남들도 그 사진을 볼 때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거기다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밥 먹을 때 이건 알칼리성이고, 저건 지방질이고, 단백질이니 뭐니 따지고 먹지 않잖아요? 맛있으니까 먹는 거죠.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저절로 목마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을 마시게 되고요. 제가 학생들에게 이런 농담도 해요. 여러분들은 부모님이 서로 사랑해서 태어난 거지 “연안 이씨 몇 대손을 창조하기 위해서 당신과 내가 사랑합시다”라고 해서 태어났느냐고요. 그럼 학생들이 웃어요. 사진도 제가 좋으면 남도 좋고, 제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면 다른 사람들도 제 사진을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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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삶이 무엇인가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진 않더군요. 이렇게 생각하면 이런 거 같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런 거 같아서 말이죠. 저는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문제를 중학교 때부터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살아지니까 사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살아있다는 사실이에요. 인생이란 무엇인가? 백날 물어도 답은 없어요.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모든 것은 '살아있는 나'에서 시작을 해요. 그래서 ‘왜 사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 고민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엄청난 차이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인생에 정해진 답은 없어요.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게 답인 거예요. 인생이란 그걸 물어나가는 과정일 뿐이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혜를 얻게 되고 깊이 있는 사고를 하도록 만들어집니다.

육명심 작가는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현상을 위기가 아닌 기회라고 생각한다. 사진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프로 작가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저는 이제야말로 사진의 르네상스가 왔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한글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그래도 시인이 있고, 소설가가 다 있잖아요. 한글을 안다고 해서 모두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오히려 한글을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독자들이 많으니까 시인이나 소설가들에겐 그만큼 더 활동 무대가 넓어지는 거죠.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줄 알기 때문에 그만큼 사진의 커뮤니케이션 영역이 확장된 거예요. 그 대신에 전문가들은 아마추어보다 사진을 훨씬 더 잘 찍어야 해요. 아마추어랑 비슷하면 프로페셔널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사진가들의 옥석()이 가려지고 더 훌륭한 사진가들은 심화된 자기 세계로 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봐요. 사진가로서 어떻게 하면 영상언어가 문자언어만큼 심오한 정신세계를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이건 제가 늘 가지고 있는 과제이자, 문자언어에 느끼는 열등감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문자언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월등하게 앞섰지만, 요즘은 영상언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훨씬 더 많아졌고 이제는 영상언어에 의해 의식구조까지도 달라져 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은 문자언어보다는 영상언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을 더 많이 하고 있어요. 요즘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다 보니 실제의 산()보다도 이미지로 된 산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거죠.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무얼 하는지는 몰라도 오히려 몇 백리 몇 천리 밖에 있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을 많이 갖게 되는 시대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굉장히 폭이 넓어졌고 커뮤니케이션의 심도가 깊어졌다고 봅니다. 앞으로 일정 기간의 과도기가 지나고 나면 영상으로 인한 새로운 문화가 이룩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요.

현대인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주 많지만, 그 중에서도 자연에 관한 부분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은 하나의 생명이고 이 생명은 자연 그 자체예요. 기계하고는 엄연히 다르죠. 그리고 자연은 곧 생명이에요.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인간은 자연인데 자연을 떠나는 데서 오는 문제가 많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태풍이 왔는데 그걸 보고 있자니 전부가 다 자연에서 오는 문제들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태풍이 오면 인간은 자연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자연의 소산이고 자연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인간이 자연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있어요. 문명의 발달도 자연을 떠나지 않을 만큼만 적당히 병행해서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인간도 하나의 자연임을, 한 포기의 풀이나 한 개의 돌멩이나 또는 날아가는 새와 똑같은 자연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감정을 속이지 말고 항상 가슴을 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가슴의 느낌을 따라서 반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슴만큼 정직한 게 없거든요. 머리는 영리해서 자꾸 꾀를 부리려고 해요. 그러나 가슴은 자신을 못 숨깁니다. 가슴이 느끼는 대로, 가슴이 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거짓말을 안 하게 됩니다.

덧붙여서 하고 싶은 말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즘 사람들에게서 빠진 게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신집중(concentration)이죠. 무언가에 대해서 열중하는 게 필요해요.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력, 삼매(: 잡념을 떠나서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라고 하죠. 학생들이 무언가에 열중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집중해서 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적인 경험이 필요한 거예요. 특별히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미리 허락해주셨다고 믿는데, 그것은 남녀의 사랑입니다.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 저절로 삼매경()에 빠지게 되어 있어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사랑하는 사람 생각 때문에 행복해지는 거죠. 그런데 그건 사랑뿐만이 아니에요. 뭐든지 한 가지에 골똘하게 빠지면 거기서 행복이 와요.

우리 어머니는 매우 가난한 삶을 사셨는데 저를 대학교 공부까지 시키려고 엄청난 고생을 하셨어요. 제가 졸업하고 나서 월급을 타다 드렸더니 몇 달 지나고 그러시더군요. “명심아. 난 옛날만큼 재미가 없다. 네 등록금 내려고 콩을 볶듯 애간장을 태울 때가 더 그리워. 지금은 오히려 재미가 없어.”라고요. 물론 지난 이야기니까 그렇겠죠. 그러나 사람이 무언가에 열중하는 것, 삼매경에 빠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거예요.

제가 지난 여름에 새로 책을 한 권 내려고 원고지에 글을 썼어요. 여름 내내 200매 정도를 썼어요. 지난 여름이 얼마나 더웠습니까? 저희 가족들이 더위에 녹초가 되어서는 저에게 괜찮으냐고 묻더군요. 그런데 저는 글을 쓰는 동안 그 엄청난 더위를 전혀 모르고 지냈어요. 글쓰기에 열중하다 보니까 더위를 느끼지 못한 거죠. 다른 게 행복이 아니에요. 무언가에 열중해서 다른 사소한 것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죠? 그 순간이 행복한 거예요.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깊이 빠지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그곳으로 몰아넣는 것이 정신적으로 더욱 성장하게 하고 자기 삶을 창조해 나가는 길이에요. 결과적으로는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고요. 이것은 제 체험을 통해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터뷰이 소개

육명심
1933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서른 셋의 나이에 처음 카메라를 만져보았으나,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다양한 관심으로 사진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남들을 따라 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사진을 찍기 위해 노력했다.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며, 사람이든 사물이든 피사체와의 진심 어린 소통을 통해 가장 진실된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애썼고,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것들과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작품 주제가 되었다. 가슴의 소리를 따라 자기 감정을 속이지 않는 것이 작품활동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나’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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