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스토리】윤명로 [尹明老] -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화가

작성자한결이|작성시간19.12.16|조회수1,238 목록 댓글 0

인생스토리

윤명로

동양과 서양을 넘나드는 화가




[ ]

출생 193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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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무덤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이자 창조의 근원입니다.”

 

자연을 벗삼아 숨은 매력을 그려내는 화가 윤명로. 그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감동을 이끌어내며 자신의 숨결에 붓을 맡기는 무위의 미학을 터득해왔다. <벽>, <룰러>, <균열>, <얼레짓> 시리즈와 <겸재예찬>으로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그림 세계를 보여준 그의 미술 인생을 들여다보자.


화가 윤명로 인터뷰 영상

1936년 정읍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는 나라가 없었지요. 세 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함경북도 길주에서 살다가 평안북도 박천에서 광복을 맞이했어요. 해방이 되자 남북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라가 두 동강이 났지요. 당시 아버지께서는 운모 공장에 다니셨는데, 이념의 거대한 장벽을 넘어 북에서 남으로 내려 왔을 때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어요. 그때 제가 아주 좋아했던 가죽 구두 한 켤레가 있었는데, 그걸 가슴에 품고 황해도 신막에서 개성까지 걸었던 기억이 나요. 왜 지금도 그 구두가 생각이나는지, 아무것도 없이 내려왔기 때문에 살아기가 정말 힘들었던 시절이었지요.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6ㆍ25가 터졌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들이 많았어요. 저희 집 뒷산에 있던 큰 밤나무 앞에 분뇨를 담아두는 웅덩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거기에 동네 아저씨들이 죽은 채로 처박혀 있는 거예요. 이른바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의 짓이었지요. 어린 나이에 그걸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세상이 붉게 바뀌니 또 이렇게 비참한 꼴을 보는구나.’ 어제까지 이웃이였던 동네 아저씨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밭에 심은 배추며 고추 등을 하나하나 세기도 했어요. 인민을 위한 국가의 재산이기 때문에 개인 소유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죠.

동족상쟁의 비극이 정전으로 끝나자자마자 동네에서 또 난리가 났습니다. 그동안 박해 받았던 사람들이 보복을 하기 시작했거든요.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친구들이 똑같이 죽어나갔어요. 정말 비극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나라 없이 태어난 세대들이 나라를 되찾고 나니까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다니요. 이념이 무엇이지, 그것이 제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해요.

윤 화백은 중고등학교 때에도 그림을 잘 그려 미술반장을 맡아 운영하고 후배들을 지도했다. 마땅한 모델을 구할 수 없었던 때문에 여동생들을 모델로 삼아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사진은 윤 화백과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

피난살이 때문에 1년 동안 공백이 있었어요. 다시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다른 친구들보다 제가 한 살 더 나이가 많았지요. 그때도 지금처럼 환경미화 시간이 있었는데, 담임 선생께서 4대 성인의 사진들을 들고오셔서는 환경미화에 쓰겠다고 크게 모사해 보라는 거예요.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로 기억되는데, 어쨌던 아주 잘 그렸다고 각 반 교실에 들고 다니면서 자랑을 하셨어요. 한동안 학교가 떠들썩했지요. 초등학교 5학년때였던 것 같아요. 불행히도 그때 그린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도 그림 앞에서 사유하고 고뇌하는 빌미가 되었는지 몰라요.

되돌아보면 초등학교 때 받은 칭찬이 동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부터 주위에서도 그림 잘 그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여동생들을 모델로 삼아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는데, 모델 서달라고 귀찮게 하더니 결국 화가가 되었다는 말을 지금도 하고는 합니다. 그런 걸 보면 어떤 동기가 있었다기보다도 저 스스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나 싶어요.

중ㆍ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미술반 반장을 맡아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제가 다녔던 학교가 사범학교였는데, 교생실습을 하고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대학 진학보다 넌지시 취직을 원하셨지요. 만약 대학을 간다면 의과대학이나 법과대학 아니면 사범대학을 가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겠다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미술대학에 지원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느 길이 옳았는지 모르겠지만 후회는 없어요.

우리 것은 전통문제, 지역성, 민족의 유산과도 관계가 있어요. 제가 존경했던 수화() 김환기(, 1913~1974) 선생을 미국에서 만났을 때 “여보게, 우리 것이 세계화가 되려면 지역성이 보편성을 띄어야 하네.”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때 지역성이란 동서 문화의 충돌에서 일어나는 특수성으로 보았고, 보편성이란 소통이라는 상호주의적인 독창성으로 이해하고 있었어요. 바로 그런 점에서 지역성이 보편성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특별히 의식적으로 우리 것을 만들겠다거나 그리겠다는 마음을 가진 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나는 한국인이고 이 땅에 녹아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 것을 의식하거나 강조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스페인이 자랑하는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 ) 역시 일찍이 ‘예술은 보편성을 지닌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윤명로, <회화 M.10(Painting M.10)>. 1963년, Silver painting, plaster and oil on linen, 162x132 cm.

사실 저는 대학에서는 회화과를 졸업했습니다. 당시에는 2학년 때까지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 없이 배우다가 3학년부터 전공을 선택하도록 교과 과정이 짜여 있었어요. 매우 진보적인 교육 과정이었는데, 훗날 동양화과와 서양화과로 분리되었어요. 저는 지금도 동양화와 서양화가 회화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지금도 이른바 서양화를 하면서도 먹 냄새를 즐길 수 있는 것은 회화과를 다닌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2004년에 파리에서 개인전을 할 때 어떤 비평가가 “당신 그림은 어디에서 왔고, 당신은 어디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까?”라고 묻기에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그리고 있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림은 그림일 뿐이에요. 그림이면 됐지 서양화가가 따로 있고 동양화가 따로 분류되어 있는 우리 현실이 얼마나 퇴영적인지,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말로는 세계화, 국제화를 외치면서 제도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보면 지금도 동/서양화를 따로 분류해서 진열하고 있어요.

요즈음은 전통성, 현대성, 지역성, 세계화 등 여러 문제들이 엉켜 있지만, ‘미디어아트’라는 새로운 분야가 확장되면서부터 우리가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흔히들 요즈음 그림은 죽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나 미술사를 보면 그림이 죽었던 시기에 새로운 주의나 주장이 탄생하곤 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요. 위대한 화가들은 위기를 늘 새로운 예술의 창조를 위한 토양으로 삼았지요. 그러나 그림이란 태생적으로 그리기에요. 이 그리기를 벗어나면 붓을 놓아야 합니다. 저는 픽셀(fixcel)이나 미디어(media)가 그림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작위적이기보다는 숨결이나 자연에 붓을 맡기고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합니다.

윤 화백은 대학교 3학년 때 국전에서 <벽B>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받으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벽B>는 사르트르의 소설 [벽]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 그린 작품이었다.

대학 재학 중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했어요. 재학생도 국전에 작품을 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던 시기였죠. 기성 화가들도 특선을 하려면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재학생 때 받은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화단의 주목을 받았죠. 그게<벽B>라는 작품이었는데, 어두침침하게 그림자 진 고뇌에 찬 얼굴들을 그린 습작이었어요.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벽]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사형수가 주인공이었지요. 크게 감동을 받아서 그린 작품이었어요. 절망과 부조리의 극한 상황을 휴머니즘이라고 했지요. 구상적이고 형태가 있는 작품을 그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 국전의 경향은 미인도나 꽃, 풍경 그림들이 지배적이었고 대통령상, 문교부장관상 등 예술이 서열화되어 있었습니다. 세계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데 꽃이나 미인도를 그리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반()국전 운동을 위한 ‘1960년 미술가협회’를 결성했습니다. 사실 그때 미술대학 졸업생들의 유일한 등용문이 국전이었고, 거기서 입선이라도 해야 취직이 가능했던 시기라서 그걸 거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국전에서 특선을 했지만 윤 화백은 국전의 수상 등급으로 작품을 서열화하는 당시의 미술계 풍토에 불만이었다. 그래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모여 반(反)국전운동을 하려고 ‘1960년 미술가협회’를 만든다.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윤 화백이다.

‘1960년, 60년 미술가협회’는 영국대사관 입구에 있는 덕수궁 돌담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야외 전시를 열었어요. 60년 미술가협회전은 우리나라의 현대미술사에서 아주 주목할 만한 전환점을 만들었던 그런 운동으로 회자되고 있지요.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국전 심사위원이었던 분들이 심사를 마치고 창립전에 오셔서는 방명록에 격려의 서명을 해주고 가셨어요. 김환기, 유영국, 박수근, 장욱진, 김병기, 최순우 박물관장 등 당대의 거장들과 이구열, 김창렬, 박서보, 방근택, 정상화 씨 등이었지요. 스스로 미술가라고 자칭하면서 만든 이 시기의 작품들을 저는 ‘원형의 시대’라고 불러요. <벽>,<문신>,<석기시대>,<원죄> 등은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해서 제작한 작품들입니다. 1963년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 출품했던 ‘회화 M10’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리움삼성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지요.

제가 이화여고에 있을 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미국 로드아일랜드대학 교수였던 판화가 아이켄버그(Frith Eichenberg) 교수가 학교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실크스크린 판화에 몰두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1968년 선배 동료들과 함께 한국현대판화협회를 창설하고 판화의 대중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때였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리도그래프(lithograph, 석판화) , 에칭(etching, 동판화), 실크 스크린(silk screen) 등 여러 가지 판화 기법들이 방법론적으로 뒤떨어진 상태여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판화의 새로운 기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공교롭게도 아이켄버그 교수가 록펠러 재단에 저를 추천해주었어요. 왕복 여비와 체재비를 일 년 동안 지원해주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지요. 그 기회를 바탕으로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뉴욕프랫대학이 운영했던 뉴욕 프랫 그래픽 센터(New York Pratt Graphic Center)에서 판화의 제작 과정을 이수하게 되었습니다. 크랙(crack)이라는 기법도 그때 배운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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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로, <자 Ⅴ-VXVII(ruler Ⅴ-VXVII)>. 1974년, Acrylic and mixed media on linen, 130x130cm.

윤명로, <균열 76-421(Crack 76-421)>. 1976년, Acrylic and mixed media on linen, 129.8x96.5cm.

<룰러> 시리즈를 하게 됩니다. 룰러(ruler)는 영어로 ‘통치자’ 혹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약속이고 하나의 규범이거든요. 그런데 귀국하고 보니 이 규범이 사라지고 온갖 비리와 권력의 남용으로 최소한의 약속마저도 붕괴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자’를 녹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해서 권력의 붕괴를 상징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사변적()인 사고에 빠져 작품을 했던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념의 문제만을 강조하다보니까 그림이 쇠약하고 허망한 모습으로 바뀌더러구요. 때로는 의미가 없는 그림도 허망해 보이지만, 의미를 너무 강조해도 허망해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념적이고 주제를 가진 작품을 하기보다는 순수한 현상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직접적이고 표현적인 행위를 배제한 채, 물질의 우연성에 의존하여 최소한의 흔적만을 남겼지요. 그때 처음으로 추상과 만났어요. 그리고 ‘무엇을 그릴까’보다 ‘어떻게 그릴까’라는 생각에 빠져들던 시기였지요.

이후 80년대 들어와서 무작위로 화폭 위에 선을 그어대며 그 흔적들을<얼레짓>이라고 불렀어요. ‘얼레’란 연실을 감고 푸는 기구의 이름이예요. 거기에 ‘짓’이라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을 붙여 얼레짓이라 했지요. 이를테면 연을 날리는 창공을 하나의 화폭이라고 가정하다면, 연줄을 감고 푸는 짓거리에 의해서 그 창공에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들의 변화가 나타나듯이, 작품 또한 작가의 생각이나 정신을 감고 푸는 짓거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으로 화폭을 비우고 채워나갔지요.

1991년 대형 개인전을 앞두고서는 부강에서 토끼를 사육했던 텅 빈 창고를 빌려 작업을 했어요. 처음으로 높고 넓은 작업장을 만났지요. 나는 이시기의 작품들을 <익명의 땅>이라고 했어요. 자아가 통제받지 않는 익명성이란 얼마나 자유로웠는지...... 이때 처음으로 화폭 속에서 공간의 깊이를 보았어요. 가없는 공간 속에서 모처럼 무한을 숨쉬면서 세로 3미터 33센티에 가로가 10미터가 넘는 대형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작업실에서 넘쳐나는 안료들과 뒤범벅이 되어 대형 화폭과 씨름하면서 탄생한 <익명의 땅 91630>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2002년 정년을 다하고 교육 현장을 떠나자 갑자기 우리 것이 보였어요. 그래서 은퇴한 뒤에 한 개인전에서 쓴 주제가 ‘겸재예찬’이었지요. 저는 미래의 기억들을 위해 늘 열려 있는 상태로 자리잡고 있는 표상들 가운데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겸재() 정선(, 1676~1759) 의 ‘인왕재색도’를 좋아합니다. 겸재예찬 연작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분별없이 우리의 것을 잃어가고 있는 세대들을 위한 화두였지요. 사실 수 세기 동안 관념적인 산수를 답습했던 화론들을 해체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석채나 수묵 대신에 철분을 사용했지요. 쇳가루는 안료가 아니라 입자여서 다시 고쳐 그릴 수 없는 묘한 김장감이 뒤따르는 재료였어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저 스스로는 이 시기의 변화를 보편성을 향한 하나의 변혁으로 보고 있습니다.

윤명로, <겸재예찬 M.120(Homage to Gyeomjae M.120)>. 2000년, Acrylic, iron powder and binder on cotton, 218x291cm.

현재 중국 미술계의 유명한 평론가이기도 한 중국국가미술관의 판디안() 관장이 서울에 왔다가 저희 작품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제 작품을 보고는 중국 미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당신도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중국을 포함한 동양 문화권이 서양 문화의 충격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제가 그것을 헤쳐나가는 것 같다는 거예요. 기회가 되면 중국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2010년에 초대전을 가졌습니다. 제 작품 세계를 해외에서 다시 심도 있게 들여다 볼 수 있고 평가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요.

때마침 제가 중국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을때 옆방에서 중국 중앙미술학원 국화과() 전ㆍ현직 교수들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어요.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동양화를 중국은 ‘국화’라고 부르지요. 제백석(, 1860~1957), 서비홍(,1894~1953), 이가염(), 가우복() 같은 거장의 작품을 비롯해서, 당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던 하나의 행운이였지요. 거의 모두가 전통적이고 구상적인 작품들이거나 이념적인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관객들은 환호하고 있었어요. 문득 지원자가 없어 문을 닫고 있는 우리나라 동양화의 현실이 타산지석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되었건 전시회를 관람하러 왔던 많은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적극적이었어요. 개관 첫날에 절판이 된 제 도록을 구하려고 늦게까지 기다리는 관객들이 많았었지요. 정서적으로는 제 작품이 추상인데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중국 미술관은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제 작품 두 점을 구입, 소장했습니다.

전시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학예사가 진열 후에 작품 옆에 작품표를 붙여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관람객이 무엇을 그린 그림이냐고 귀찮게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사실 여러 작가들이 모여서 전시를 할 때는 분류상 작품표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개인전인 경우에는 붙여도 그만이고 붙이지 않아도 그만이지요. 개인전의 큰 주제가 ‘윤명로 회화전’이었고, 내 경우에는 그림 하단 측면에 작품 제목도 있고 서명도 있었서 될 수 있으면 개인전 때는 작품표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작품표란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정보이지만, 때로는 작품표가 너무 강조되면 오히려 시각적으로 작품 감상에 장애가 되는 때도 있어요. 만약 작품 옆에 ‘산’이나 ‘장미’라는 작품표를 붙인다면 관객들은 산이나 장미만을 연상하고 작품을 지나쳐 버리지요. 나는 산이나 장미를 그린 것도 아닌데 제목 때문에 잘못 받아들여지는 것이 싫었어요. 그래서인지 똑같은 그림인데도 관객 중에는 산수로 보거나 누드로 보는 경우도 있어요. 관람객의 폭 넓은 상상력을 작가가 제목으로 제한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전 도록이나 그룹전에 작품을 낼 때는 제목을 붙여요. 아예 안 붙이는 건 아닙니다. 한때 표제가 작품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아예 무제라고 한 작품들도 있었지요.

윤 화백은 그림은 화가의 사상이나 정신을 평면화하는 작업이라고 본다. 사진은 90년대 <얼레짓> 시리즈를 그리던 중 찍었다. ‘얼레짓’은 연을 날릴 때 연줄을 감고 푸는 행위에 의해 연의 형태가 변하는 것처럼 작품 또한 작가의 생각, 정신,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림의 역사가 굉장히 길잖아요.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보존되고 있는 경우도 많지요. 음악이나 문학에 비해서 그림은 오랜 기간 동안 그 흔적이 남아 있어요. 또한 그 흔적이 많은 비평가들에게 여러 가지로 재해석되고,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내기도 하지요.

작가이자 평론가였던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는 뒤늦게 그림의 본질은 평면성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일찍이 평면을 ‘회사후소()’라고 했어요.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로,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연후에 가능하다는 뜻이지요. 즉, 바탕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거죠. 여기서 바탕이란 정신세계를 의미합니다. 작가의 품격이나 정신성, 도덕성 등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런 바탕 위에서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림만을 일컬어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평면성이 회화에서도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회화에서 평면성을 고집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여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제가 산을 그렸다고 합시다. 그럼 관객들은 “산을 잘 그렸네. 잘 그린 산이네.” 그 정도의 감상을 하겠죠? 제목을 붙이면 보는 사람이 그 제목에 빠져서 그 이상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추상화는 보이지 않는 것이 참 많습니다. 바람은 불지만 보이지 않고, 향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잖아요. 저는 이런 것들을 그리고 싶거든요. 서양 문화는 개구리를 보면 개구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먼저 해부를 하려고 하는데, 동양권은 연꽃을 연상하지요. 추상의 정의가 수없이 많지, 저는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는 세계의 시각화를 추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미술에서는 수화() 김환기 선생과 비디오 아티스트였던 백남준 씨를 꼽고 싶어요. 특히 백남준 씨는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 진행형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젊은 작가들에게 큰 역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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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로 화백 작업실의 도구들. 그는 작업을 할 때면 욕심이나 목적을 앞세우기보다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많았죠. 왜 없었겠어요. 그런데 저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여러 번 체험했어요. 그림이라는 세계는 명예나 돈을 앞세우면 한 발짝도 앞서 갈 수가 없는 세계입니다. 돈이나 명예 때문에 타락한 그림들을 우리 주위에서 수없이 보고 있어요. 명예나 욕심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의식하지 않고 몰두하고 있습니다.

우선 육체적으로 건강해야겠지만,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은 제 체질인 것 같아요. 그리고 체질은 곧 정체성을 말하는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창조적 역량 그대로가 혼연일치()를 이루면서 정신성과 회화성, 그리고 창조성을 가졌을 때 좋은 그림이 나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저의 창작 에너지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서 나온다고 봐요.

윤 화백의 평창동 자택은 잡지에 여러 차례 소개되고 건축가 김수근 선생도 격찬한 유명한 집이다. 집터에 있던 몇 백 년 된 소나무를 살리기 위해 설계를 바꿔 ᄆ자로 짓고 가운데에 중정(中庭)을 만들었다.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자연 속에서 만물을 보며 이를 그림으로 그려내는 윤 화백의 작품 세계가 집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37년이 되었네요. 우연히 여기가 개발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건축가 나상기 씨가 이 동네를 소개하며 땅값도 싸고 하니까 이쪽으로 와서 이웃하며 살자고 하셨어요. 그때는 교통도 불편하고 물도 잘 나오지 않아서 머뭇머뭇했는데, 지금 저 창밖에 보이는 노송들이 너무나 아름답지 않아요? 저 소나무는 150년 가까이 된 것 같아요. 조용하고 공기도 맑고요. 그래서 마음먹고 여기에 터를 잡은 거예요.

집 설계를 친구에게 맡겼는데 소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돋워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서 집을 짓자고 그래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집은 헐었다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소나무를 베어내고 다시 보려면 150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중정() 개념으로 설계를 바꾸고, 소나무에게 저 공간을 양보했지요. 결국 지금까지 이렇게 함께 살고 있습니다.

작품 제작에는 절대적이죠. 화가들의 소망 중에 하나는 넓은 작업실입니다. 저는 다행히 살림집과 작업실이 붙어 있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고 있어요. 무엇보다 시간이 절약됩니다. 그리고 보시는 것처럼 북한산 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도심에서 볼 수 없는 사계절을 만끽하고 있지요.

자연은 말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자연과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자연 속에서 사람도 보고 꽃도 보고 새도 보거든요. 그래서 제 그림이 풍경화처럼 보이는지도 몰라요. 산수화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저는 사실 산수화를 그린 것도 아니고 풍경을 그린것도 아니거든요.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저 솔잎 하나가 얼마나 많고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요. 들어오시다가 보셨겠지만 저희 집 현관에 매심사()라는 현판 하나 걸려 있습니다. 추사()의 글씨인데 친구 우현()이 새겨준 거예요. '매화 같은 마음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저희 집 앞에 큰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봄이 되고 마지막 눈이 내릴 때 매화가 꼭 피어요. 설중매(), 그 은은한 향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작업실에서 선 윤 화백. 그가 작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호흡이다. 호흡이 잘 맞으면 단시간에 끝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획 하나 긋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화폭 앞에서 호흡이 잘 맞으면 하루 만에 작품이 끝날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호흡이 안 맞으면 아주 질척거리지요. 즉, 작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호흡은 결국 생명이나 다름없어요. 호흡이 잘 맞아 떨어지면 의도한 대로 작품이 잘 되고, 호흡이 하나 덜컥 걸리면 밤새도록 혼자 앉아 있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획 하나 긋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울 때도 있어요.

전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저는 우선 문화유산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우리에게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빛나는 유산들이 많거든요. 저는 그런 유산들이 우리의 무덤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창조적인 근원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해방 이후 한동안 ‘짚신이 별수 있나 아니면 엽전이 별수 있나’라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비웃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우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자랑해도 지니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겸재예찬’이라는 화두를 던저 본 것도 그런 어려운 시대를 헤쳐왔던 아픔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겸재를 모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진보적인 생각을 본받고 싶었거든요. 중국의 관념적 산수()가 아닌, 우리의 진경을 통해서 겸재는 우리에게 ‘우리 그림’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준 최초의 한국 화가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다변화되고 다양화된 시대에 있어서는 꼭 알아두어야 할 위대한 존재가 아닌가 싶어요.

요즘 젊은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 캔버스가 잘 팔리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현대미술은 첨단 미디어를 동원하고 수많은 이미지를 쏟아내지만, 그 가운데서 ‘예술’의 창조적 정신은 매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는 본디 모방을 허락 받지 못하고 태어난 고독한 존재들이에요. 피카소는 일찍이"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위에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참 많지요. 그래서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우리 문화유산을 한번이라도 되돌아 보았으면 해요. 저는 해외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 꼭 국립박물관을 가 보곤 합니다.

50년 동안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우리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찾으려 힘쓰고, 예술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 윤명로 화백.

2005년 가나아트갤러리에서 겸재예찬 시리즈로 전시회를 열 때였어요. 전시 다음날 새벽에 전화가 걸려오는 거예요. 영안실이 어디냐고 묻더랍니다. 집사람이 전화를 받고는 깜짝 놀라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냐고 했더니, 신문에서 부음을 봤는데 윤명로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급히 아침에 조간신문을 보니까 저와 동명이인이었던 서울대 철학과 윤명로 교수의 부음이더군요. 그 기사가 나간 뒤 ‘윤명로가 자식들 장가 시집도 못 보내고 갔다’, ‘대작을 하느라고 과로한 탓에 죽었다’, ‘작품 값이 뛰겠다’라는 반응들이 나왔어요. 제가 죽은 다음에 나타난 저에 대한 평가였지요.

다음 날 전람회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기분이 이상했어요. 산도 그대로고 나무도 그대로고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저만 죽은 거예요. 그동안 무심하게 봐왔던 세상이 달라 보였어요. 그 후로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있지요.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스승 그리고 좋은 작가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이 소개

윤명로
193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진학해 대학 3학년 때 국전에서 특선을 받아 단숨에 화단을 주목을 받았으나, 국전의 수상 등급에 따라 작품을 서열화하는 미술계의 풍토에 문제제기를 하고 반()국전운동에 참여했다. 10년에 한 번씩 작품 세계의 변화를 거치며 끊임없이 예술의 본질, 회화의 본질에 대해 탐구해왔다. 전통적 재료로부터의 해방, 판화예술과 회화의 결합, 우리의 전통에 대한 탐구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마음으로 듣고 보이는 것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회화의 평면성과 작가의 정신세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는 오늘도 자신의 숨결에 붓을 맡기는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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