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스토리】신달자 [愼達子] - 여성 시(詩)를 개척한 대표시인

작성자한결이|작성시간20.01.13|조회수490 목록 댓글 0

인생스토리

신달자

여성 시()를 개척한 대표시인




[ ]

출생 194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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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없다면 문학도 없습니다. 삶의 모든 곳에 어두운 곳이건, 빛이 있는 곳이건, 눈물이 있는 곳이건, 기쁨이 있는 곳이건 그 현장이 전부 시가 되는 거죠.”

 

1964년 '발', '처음 목소리'로 문단에 등단한 뒤 시와 장편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고 있는 시인 신달자. 우리 문학에서 여성 시의 영역을 개척하고 대표해 온 작가로 평가 받는 그는 대한민국문학상, 시와시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예를 모두 누렸고, 2012년에는 문화예술 발전의 공을 인정받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런 화려함 뒤에는 쉽지 않은 고통이 함께했지만 그런 삶의 고뇌를 여성적 감성으로 표현하면서 여성 시를 개척했다. 50년 이상 시와 함께 숨쉬고 살아온 신달자 시인의 인생을 마주해 보자.


신달자 인터뷰 영상
나는 누구일까라는 물음 앞에, 엄마는 자신이 살지 못했던 삶을 딸을 통해 살리라 꿈꾸셨어요. 저는 그렇게 억척스러운 엄마의 모습이 싫었지만 제가 엄마가 된 후에야 알게 되었어요, 엄마도 여자였다는 걸요.선생님의 유년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떠한 배경에서 성장하셨나요?

1남6녀 중 다섯째 딸로 태어난 신달자 선생은, 딸들을 통해 못다한 꿈을 이루고자 했던 어머니의 뒷바라지 덕분에 일찍부터 부산에서 공부하며 문학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자택 정원에서.

저는 1남6녀 가운데 다섯째 딸이에요. 제 어머니는 열다섯의 나이에 종갓집 며느리로 시집와 ‘아들 셋을 낳아야 한다’는 특명을 받고 결혼생활을 시작하셨어요. 하지만 일찍 잃은 아이를 포함해서 일곱 번째 아이인 저를 낳기까지 아들 소식이 없자,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며느리로 매운 시집살이를 해야 했어요.

아버지는 저를 낳았을 때 굉장히 실망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사월초파일에 저를 낳았지만 출생신고도 하지 않다가 군청에서 연말에 독촉하니까 12월25일에 출생한 것으로 신고를 했어요. 다행히도 제 바로 밑이 남동생이었어요. 어머니에게도 탈출구가 생긴 거죠.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여자로 아버지와 결혼했는데, 어머니에게 동서가 한 명 있었어요. 숙모님은 공부도 좀 하신 분이었고, 어머니와 반대로 아들을 7명 낳고 딸을 하나 낳았어요. 그 시절에는 아들, 딸이 굉장한 사건이었잖아요.

그러다보니 숙모를 보며 좀 약이 오르셨달까요. 어머니는 이제 아들을 낳아서 의무를 다 했으니, 그때부터 딸들을 통해 본인이 살지 못했던 삶을 실현하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딸들을 공부시키는 데 신경을 많이 쓰셨고, 저한테도 기대가 크셨죠.

어머니의 영향력이 남달랐을 듯합니다.

어머니가 강조하셨던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 너는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라. 왜냐하면, 동서가 학력이 높으니까 어머님은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거예요. 두 번째, 내가 살아보니 여자도 돈을 벌어야겠더라. 돈도 벌어라. 그리고 세 번째는 그래도 여자는 행복해야 한다. 행복한 여자가 되어라. 이 세 가지를 굉장히 강조하셨죠. 그래서 저를 고등학교 때부터 부산으로 전학을 보내셨어요.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때부터인가요?

글을 쓰게 된 데는 아버지 영향이 컸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한 아버지였지만 사무실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장은 사춘기 딸에게 큰 충격이었다. 건강, 돈,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던 아버지의 일기장 속에는 외로움에 눈물 흘리는 연약한 40대 남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부산에 가서 처음으로 바다를 보게 됐어요. 바다를 보며 문학적인 소양을 기르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경남백일장에서 장원을 했고, 그 계기로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죠.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제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는 성공한 사업가로 늘 근사한 모습이었는데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문학적 감수성을 가진 분이었던 것 같아요. 중학생 때 아버지 일기장을 몰래 보게 됐는데 ‘외롭다, 울고 싶다’는 표현이 많아 당혹스러운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 눈에 비친 아버지는 돈도 많고 건강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분이었어요. 그런 아버지의 일기장에 ‘오늘도 나는 외로웠다. 날개가 있다면 멀리 날아가고 싶다’는 표현들이 많더라고요. 그 일기장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아버지는 감성적인 사람이었고 나약하고 연약한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제가 부산에 내려가서 공부를 하게 되자 아버지께서 저보고 편지를 써서 일주일에 한 통씩 보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 용돈을 올려주겠다고요. 저는 용돈을 올려 받기 위해서 아버지께 편지를 썼죠.

그런데 ‘아버님전상서’로 시작하는 옛날식 편지를 썼더니 마음에 안 든다며 용돈을 못 올려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서점에 가서 명언집을 구했죠. 파스칼, 톨스토이 같은 명언집이 있잖아요., 그런 명언을 짜깁기 해서 편지를 보내니까 아버지께서 ‘우리 딸이 이렇게 편지를 잘 쓴다’며 너무 감동을 받으신 거예요. 덕분에 용돈을 많이 받았죠.

그렇게 글쓰기에 재미를 느끼게 됐고, 경상남도 백일장 대회에서 시 부문 일등상을 받으면서 숙명여대 국문학과에 입학하게 됐어요.

대학생활은 어떠셨나요.

대학교에 입학하고 본격적으로 시인의 꿈을 키웠어요. 그때 숙명여대에 김남조 시인이 교수로 계셨는데 참 우아하고 아름다우셨어요. 선생님께 반해서 시에 대한 열정이 더 커졌죠. 선생님께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시를 향한 같은 마음이 있으니 또 그만큼 아껴주셨어요. 그때 인연이 평생 이어졌어요. 처음은 선생님과 제자로 만났지만 이후로도 엄마와 딸처럼, 가끔은 친구처럼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어서 계속 만나뵐 수 있다는 게 참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리고 박목월 선생님, 서정주 선생님의 특강도 많이 들었어요. 특히 박목월 선생님은 그때 인연으로 나중에 저를 시로 다시 이끌어주셨는데 제가 지금도 시를 쓸 수 있게 해주신 은인이죠.

문학을 잠시 멀리하게 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시인협회 세미나를 마치고 시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가운데 남성이 시인 박목월 선생, 왼쪽이 신달자 선생이다.

결혼을 하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대학원 과정 중에 어머니의 실망을 뒤로 하고 일찍 결혼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나서는 좀 생기가 없었어요. 제가 밤마다 서랍을 열어서 뭔가를 찾는데 남편이 뭘 찾느냐고 물으면 뭔지는 몰라요. 그런데 자꾸 다니면서 서랍을 열었어요. 무엇을 찾는지 모르지만 매일 밤 집안의 모든 서랍장을 열고 닫으며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종로를 나갔는데, 우연히 박목월 선생님을 만났어요. 숙명여대 국문과 문학의 밤에 여러 번 오셨기 때문에 저를 잘 알고 계셨지요. 선생님께서는 YMCA에 주례가 있어서 종로에 나오신 길이었는데 저에게 ‘요즘도 글을 쓰느냐’는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에 문득 제가 찾던 것이 이것인가보다 싶었어요. 매일 뭘 찾는지도 모르고 몽유병 환자처럼 그러고 있었는데 그게 글이었던 거죠. 그런데 선생님은 제 몰골을 보시곤 제대로 못살고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채셨나 봐요. 선생님께서 일요일마다 집으로 와서 공부를 해서 다시 시인이 되면 어떻겠냐고 그러셨어요. 정말 은인이시죠. 그렇게 박목월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1972년도 현대문학에 재등단을 했어요. 그래서 1973년도에 첫 시집 출판기념회를 한 거예요. 그렇다고 왕성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닌데 그러다가 남편이 혈압으로 쓰러졌고 다시 중단하게 됐죠.

힘든 시기에 선생님께 힘을 준 존재는 무엇인가요 .

남편이 쓰러져 누워있고,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고통스러웠던 시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신달자 선생을 지탱해 준 건 엄마를 바라보는 세 딸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빛이었다. 두 딸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

남편이 쓰러졌을 때가 제가 서른다섯, 막내 딸이 두 살일 때예요. 정말 막막했죠.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저 혼자의 몸이었다면 자유로웠겠죠. 굶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제 일곱 살, 여섯 살 그리고 두 살 된 아이들이 옆에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었죠. 그때 아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저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제가 기댄 다른 한 가지는 문학이에요. ‘꼭 다시 글을 쓰리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시를 써서 다시 태어나야지. 지금 나는 죽어있지만 반드시 부활할 거야’ 그런 꿈을 많이 꾸었어요.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이 없었으면 절대 그 삶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했을 거에요.

그리고 저를 믿어줬던 어머니가 계시죠. 누구도 제가 교수가 되고, 시인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때도 `그래도 마 니는 될 기다`라고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주셨던 어머니가 제가 가장 불행할 때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달자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불쌍하더라’라고 말씀하고 떠나셨는데, 내가 지금 죽으면 가장 불쌍한 모습으로 어머니를 만날 텐데 여기서 그만둘 순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죠. 그리고 종교도 큰 힘이 되어주었고요.

다시 돌아간 학교 생활은 어떠셨나요?

그 당시 저는 이부자리를 제대로 깔고 잠을 자 본 적이 없어요. 시간이 나고 일자리만 있으면 돈을 벌러 나갔고, 집으로 돌아오면 시어머니와 남편 간호를 하고 아이들을 챙겼죠. 그리고 나면 해가 저물어요. 집안 일을 다 한 후에야 비로소 책상 앞에 앉았어요. 늦은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 책상에 엎드려서 잠들곤 했죠. 그렇게 노력을 하니 저에게도 행운이 오더라고요. 대학원 시험을 본 뒤에 기업의 사보를 담당하는 부서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어요. 그 원고를 쓰다가 비로소 제대로 된 작품을 쓰게 됐어요.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불행은 절대로 혼자 오지 않아요. 반드시 행운이 따라 옵니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지금도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에요.어머니께서 선생님의 성공을 보셨다면 무척 기뻐하셨을 것 같습니다.

한 번도 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린 적이 없고, 딸이 불행에 처한 순간 돌아가신 어머니가 늘 눈에 밟혔던 신달자 선생. 그는 「백치애인」으로 받은 인세를 들고 어머니 묘에 찾아 갔다. 처음으로 번 돈을 어머니 무덤에 가서 땅에 묻고 온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마음의 위로를 받을 것 같았다. 신달자 선생과 그의 어머니.

어머니 돌아가시고 제가 다시 글을 쓰게 됐을 때 1988년에 낸 ‘백치애인’이라는 수필집이 베스트셀러가 됐어요. 인세를 수표로 받았는데 제법 많았습니다. 그렇게 큰 액수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몸이 떨리더라고요. 돈을 잡고 있는데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어머니였어요. ‘아, 이거 우리 엄마 주고 싶다.’ 그 길로 바로 택시를 타고 어머니 묘에 찾아가서 무덤 앞에 돈을 묻고 왔어요. 1990년에 낸 ‘물위를 걷는 여자’ 인세를 받은 후에도 그랬고. 박사학위를 받을 때도 그랬고요. 그렇게 해야만 마음의 위로를 받을 것 같았어요.

저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에야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됐어요. ‘아, 나에게 일방적으로 잘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이것 좀 먹어라, 이거 먹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다는 걸요.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엄마도 여자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지요. 제가 어머니한테 모질게 대한 적도 있고, 또 제가 너무 힘들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를 주제로 한 글도 쓰게 되고요.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신다면요.

엄마와 딸은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많이 싸우는 사이에요. 원래 사랑하는 사이는 아픈 거잖아요. 저도 딸과 굉장히 많이 싸웠어요. 엄마는 딸을 자기 자신으로 보기 때문에 조금만 빗나가면 야단치고 간섭하고 모진 소리도 하죠. 저와 제 어머니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자신이 살지 못했던 삶을 딸을 통해 살리라 꿈꾸셨고, 저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고요.

등단은 일찍 하셨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다소 늦어지셨습니다. 그 이래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등 시인으로서의 영예를 얻게 되셨는데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어떠신지요.

40대부터 사람들에게 알려지고는 있었지만 시인으로는 젊은 시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어요. 시인으로서 열심히 하기도 했고요. 37세에 처음 낸 수필집<다시 부는 바람>은 그 당시 3판을 찍었으니 좋은 성적이었구요, 그 책에 <백치애인>이 실려있어 큰 사랑을 받았지요. 오히려 삶이 흔들리면서 손가락이 휘어지도록 글을 썼으니 스스로 글농부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글은 영예의 대상이기보다 저를 추락과 함정으로부터 구원해준 대상입니다.

시를 쓰면서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치셨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어떤 부분을 가장 강조하시나요?

남을 흉내내지 말라고 해요. 시에 자기 삶의 본령에서 우러난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요즘 문학잡지에 발표되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좀 비슷비슷한 구석이 있어요. 마치 암호와 기호로 숨겨 놓은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래서 보물찾기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숨겨진 것을 왜 찾아야 하는지 그런 즐거움을 주지 않는 글은 비슷비슷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진실되게, 최선을 다해서 작품에 집중하라고 당부하죠.

삶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삶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문학은 제게 항상 긴장감을 줍니다. 죽는 날까지 새로운 것을 탐구하게 하는 존재죠. 그런 긴장이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어줍니다.

50년 넘게 시를 써온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가요?

시의 매력은 결코 다가설 수가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가도 또 벽이고 아무리 가도 또 벽이고 그래서 제가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어요. 시는 질투 많은 애인이라고. 그리고 시는 제 숨결이다. 숨결은 멎어선 안 되는 것이죠. 응급환자의 숨결이 아니라 고르고 건강해서 다른 이들에게 고요하게 다가갈 수 있고, 살아 있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숨결이 저에겐 시예요.

요즘도 시를 쓸 때 고민하게 되시나요?

그럼요. 제게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건 삶과 문학이에요. 학교도 정년을 했고 자녀들도 다 키웠으니 인생은 이 정도면 됐는데 문학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오늘과 내일이 같아서야 되겠나 싶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이죠. 긴장이라든지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는 그동안 항상 있어왔어요. 그리고 이제 저한테 남은 숙제는 죽을 때까지 천착할 수 있는 문학의 목표를 세우는 거예요. 그간 해온 문학을 리모델링 하는 거죠.

가장 좋아하는 시를 말씀해 주신다면요.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하며 새로운 문학을 정립하겠다는 신달자 시인. 죽는 날까지 자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문학을 만난 것은 큰 축복이라고 얘기한다.

박목월 선생님의 ‘나그네’라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짧은 시에서 삶의 아름다움과 슬픔이 함께 드러나는 것도 좋지만 제겐 다른 이유가 있어요. 제가 1970년에 선생님께 시를 배우면서 여쭤본 적이 있어요. “선생님 대표작이 ‘나그네’지요?”라고요. 교과서에도 실렸던 시니 왜 안 그렇겠어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철 모르던 학생을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죠. “오늘 밤에 쓰는 시가 나의 대표작이란다.”

그 말씀이 제가 50년 간 시를 쓰면서 교본으로 삼은 말씀이에요. 시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가 그래야 한다는 걸 알려주신 거예요. 제가 죽는 날까지 문학을 리모델링하겠다는 것도 그런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많이 사랑하고 많이 나누고 사람을 좋아했던 사람.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요.


인터뷰이 소개

신달자
1943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했다. 숙명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신달자 시인은 1964년 '발', '처음 목소리'로 문단에 등단한 뒤 시와 장편소설, 수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섬세하고 감성을 울리는 작품을 통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시집 '종이'를 비롯해 수필집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소설 '물 위를 걷는 여자' 등이 있으며, 최근 열세 번째 시집 '살 흐르다'를 발표하는 등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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