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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솔향길

[철학칼럼][주성중]의 희망을 향해가는 절망의 기록들(03)

작성자gottama|작성시간07.03.15|조회수19 목록 댓글 0

희망을 향해가는 절망의 기록들

 

 

3

여기서 다시 한 번 이 글의 한계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 글을 쓰는 취지는 결코 특정종교나 경전들을 주제넘게 해석한다거나 그 의미를 섣불리

규정하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일들은 이미 내 개인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일일뿐만 아니라 보다 전문적인 관점에서

정교하고 주의 깊게 행해져야 할 일들이다.

다만 이 글이 의도하는 바는 극히 제한된 측면에서일망정,

종교가 갖는 사회적 의미에 한 발 다가가 본다는 데 국한되고 있을 뿐이다.

 


 이제까지 언급되었던 자연.사회과학상의 보편성은 상대적 절대성 가운데서 찾아졌다.

자연과학에서는 상대적 법칙에 따르는 현상과의 정합성이 그랬고,

사회과학에서는 사회행태를 통해 나타난 결과를 유효화시키는 법리해석이 그랬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람의 법칙과 행위를 뛰어넘는 초월적 인식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절대적 상대성 가운데 있게되는 것이 아닐까?

 


 키에르케고르는 '반복(反復)'에서 욥기를 언급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욥의) 시련이라는 범주는 윤리적인 것도, 심미적인 것도, 그렇다고 교의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는 전적으로 초월적인 것입니다......

이 범주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과 순수한 대립관계를 유지하게 합니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초월적인 관계는 사회적 보편성을 벗어남으로써

'그 어떤 제삼자의 설명으로써는 결코 만족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나로부터

제삼자에게 설명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키에르케고르가 '공포와 전율'에서도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듯,

'신과 (사람 사이에서 보이는) 순수한 개인적 대립관계'란 아직 새벽잠에 빠져 있는

어린 아들 이삭을 나귀에 태운 채 묵묵히 모리아 산을 향하던 아브라함처럼,

신의 잔치 - 그 내밀한 향연에 이 세상사람 그 누구도 아닌,

혼자만의 초대였으며 부응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신과 아브라함 간의 초월적 관계는 상대적 존재자의 위치에서,

이미 그 상대성을 뛰어넘는 단독자(單獨者)로써 절대에의 참여가 되며, 현실을 통해서도

아들 이삭과 부인 사라까지를 포함하여 제삼자와의 관계 속에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유대신의 초대가 일찍이 한 개인뿐만이 아니라 전(全) 인류를 통하여 동시에

실현된 것이라면 그것은 인류의 낙원추방 이전으로의 온전한 복귀를

의미하는 일대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영역에서 한 개인에게만 국한됐던 초월적인 관계는

어떻게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다시 말해 '반복'에서 보이는, 욥을 향하는 키에르케고르의 끝없는 외경은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또 우리는 욥이 몸소 겪었어야만 했던 그 지극히 고통스러웠던 사건을 어떻게

오늘 욥에 대한 유대신의 각별한 은총과 은혜 가운데서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이 같은 의문은 앞서 언급했던 샤먼의 주관적 체험인 엑스터시가 어떻게 집단화된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가 하는 의문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무는 춤으로 강신하는 자'라, 샤먼에게 춤은 접신을 위한 개인적인 수단이었다.

엑스터시 상태에서 샤먼이 보이는 신명은 이런 개인적 수단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함께

신뢰기반을 형성한다.

제례 또는 굿에 참례한 사람들은 그가 집단 내에서 특수한 기능을 갖고 행하는

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공수는 이미 샤먼 자신에게 되돌려지고 있는 명제가 아니다.

그 자신의 개인성을 넘어서는 사회적 명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샤먼의 공수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느냐는 사회구성원 전체의 문제가 된다.

 


 물활론(物活論) 또는 생기론(生氣論)에 바탕을 둔 애니미즘은 정령이나 영혼과 같이 현세에

작용하고 있는 초월적인 힘을 구체적인 자연물 가운데 대상화시킴으로써 상징체계를

벗어나 시공적 한계 속에 머물게 된다.

 애니미즘이 개개인의 관념가운데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게 된 자연,

초자연에 대한 외경과 아울러 유한에 대립되고 있는 무한을 향하는 최초의 인식과 동경이었다면,

토테미즘은 집단의식을 통한 사회적 의미에 보다 밀접하게 결합되고 있다.

토템은 거기서 부족의 수호신이자 상징, 좀 더 세련된 사회적 형태로써는 훌륭한

가문의 문장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통상 문학상의 상징이 알레고리 가운데 있게 된다면,

종교상의 상징은 의미형상(意味形象)으로 나타난다.

샤머니즘에서 샤먼의 사회적 기능은  최초의 형상에서 의미로 전화했다.

이에 반해 상징은 의미를 다시 형상으로 전이시켜 의미의 총체성을 형상을 통해 시각적으로

함축해 내고자 하는 것이다.

형상에서 의미,

의미에서 다시 상징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단순히 춤추는 사람으로써의

무의 한계를 넘어서, 명실상부 땅과 하늘을 잇는 사람으로서 무의 위상과 역할을 자리 매김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샤먼이 행하는 공감주술을 통해 보자면,

최초의 형태요소에 주술적 의미를 부여하여 다시 형태 가운데 환원시키는 반복과정으로 귀결된다.

이 거듭되는 과정은 사회적 의미와 결합하여 종교적 외연을 확대한다.

 


 이와 같은 상징을 통해 나타나는 기능적 측면은 원시종교에서 드러나고 있는 시공적 한계를 손쉽게

확장해 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전쟁이나 사냥처럼 위험에 노출되고 있는 전사에게는

그의 안위를 위해 샤먼이 직접 동행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부적이 대신 따라가게 된다.

 또 한편 여기에 따르게 되는 부정적인 측면은 상징 자체가 사물화(私物化)된 종교대상이 되면서

오히려 풍부한 종교적 의미를 스스로 제약하는 가운데 수많은 종교상의 금기(taboo)들을

양산해 내며 급기야 상징조작과 갖가지 이설을 통하여 유사, 사이비화 해 가는 경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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