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간기[戰間期, Interwar period,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20년 동안의 과도기(過渡期)를 말하는 단어]에 있었던 시행착오(試行錯誤)
1928년 마침내 소련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T 계열(系列) 전차의 시작인 T-18 개발(開發)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10년 전인 제1차 대전 당시에 프랑스가 만든 FT를 그대로 복제(復除)하다시피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뒤늦게 도전(挑戰)에 나섰지만 이후 소련은 영국, 미국 등에서 도입(導入)한 기술(技術)을 바탕으로 다양(多樣)한 전차를 만들어냈습니다.
덕분에 1930년대에 와서는 주변국(周邊國)과 비교(比較)할 때 소련군의 전차 전력(戰力)은 그다지 뒤지지 않았습니다.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T-18, T-34, T-54, 그리고 T-14 아르마타(Armata). 러시아 전차의 발전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FT 전차를 카피한 소련의 T-18 전차
그러나 무기(武器)의 성능(性能)은 실전(實戰)을 경험(經驗)하지 않고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1936년 발발(勃發)한 스페인 내전(內戰)은 좋은 기회(期會)가 되었습니다.
소련은 인민전선(人民戰線)을 대대적으로 후원(後援)했는데, 281대의 T-26과 50대의 BT-5도 지원(支援)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실전 결과는 실망(失望)스러웠습니다.
공격력(攻擊力), 방어력(防禦力) 모두 혹독(酷毒)한 평가(評價)를 받았습니다.
이는 T-35를 대체(代替)할 차기 중(重)전차 개발에 커다란 영향(影向)을 끼쳤습니다.
↑T-35 중전차는 성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61대로 생산을 종료했습니다
기존 45mm 전차포(戰車砲)로 프랑스, 영국의 중(重)전차나 독일이 개발 중인 3호, 4호 전차를 격파(擊破)하기 어렵다고 분석(分析)되었습니다.
참호선 돌파(塹壕線突破)라는 중전차 고유(固有)의 임무(任務)는 물론 향후 기갑전(機甲戰)까지 대비(對備)하려면 화력(火力)을 강화(强化)해야 했습니다.
이에 1938년부터 M1914/15 대공포(對空砲)를 기반(基盤)으로 76.2mm 전차포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BT-5 후속작(後續作)으로 개발 중이던 차기 중형(中型)전차인 T-34에도 탑재(搭載)가 결정(決定)되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군에 공급된 BT-5
↑76mm 전차포를 탑재한 T-34 초기형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방어력(防禦力)이었습니다.
소련 전차는 장갑(裝甲)이 빈약(貧弱)해서 쉽게 격파(擊破)당하고는 했습니다.
중전차는 중장갑이 기본(基本)이어도 이런 전훈(戰勳) 때문에 신예(新銳) 전차는 장갑을 더욱 두껍게 설계(設計)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격력과 방어력이 늘어나면 구조적(構造的)으로 전차가 커지고 그만큼 무게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강력한 엔진이 있으면 기동력(機動力)의 저하(低下)를 막을 수 있지만,
당시 기술력(技術力)으로는 한계(限界)가 많았습니다.
↑키로프 공장에서 제작한 55톤 다포탑 중전차인 SMK 프로토타입
이런 난제(難題) 하에서 1939년 신예 중전차 프로토타입(prototype, 원래의 형태 또는 전형적인 예, 기초 또는 표준) 키로프(Kirov)공장(工場, 설계국(設計局)의 SMK와 보리시비크(Voroshilov) 공장의 T-100이 탄생(誕生)했습니다.
양측 모두 동일한 토션 바 서스펜션(Torsion Bar Suspension), 광폭(廣幅) 트랙, 용접(鎔接) 및 주조 구조(鑄造構造)여서 외형(外形)이 그다지 차이가 없었습니다.
이는 GABTU(Главное автобронетанковое управление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 : ГАБТУ)노농적군 기갑기계화총국)의 개념(槪念) 연구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들 시제작(試製作)의 가장 큰 특징(特徵)은 여러 방향으로 동시 전투가 가능한 다포탑(多砲搭) 구조라는 점입니다.
↑개발 실패로 끝난 독일의 다포탑 전차인 노이바우파초이크(Newly Built Vehicle)
1930년대는 여전히 전차(戰車)의 구조(構造)나 역할(役割)에 대해 개념 정립(槪念定立)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時期)여서 다양한 형태(形態)의 전차가 존재(存在)했고 실험 목적(實驗目的)으로 개발(開發)되기도 했습니다.
다포탑(多砲搭)도 그러한 결과물(決科物) 중 하나입니다.
양측 공히 전장(全長)이 9m 정도의 거대(巨大)한 차체(車體)에 45mm 부포탑(副砲塔)과 76.2mm 주(主)포탑을 일렬(一列)로 장착(裝着)한 구조였습니다.
중장갑(重裝甲)인 데다가 크기도 커서 무게가 55톤이 넘었고 승무원들도 7~8명이 필요했습니다.
↑KV 전차의 개발을 주도한 요시프 코틴
그런데 키로프의 SKB-2 설계국 수석(設計局首席) 엔지니어인 코틴(Josef Kotin, 1908년 3월 23일~1979년 10월 21일)은 GABTU가 제시(提示)한 다포탑 구조가 전차의 크기만 늘릴 뿐이지 전투에 효과적(效果的)이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부포탑을 제거(除去)하고 전차의 길이를 축소(縮小)한 대신 전면 장갑(全面裝甲)을 더욱 강화(强化)한 개선안(改選案)을 당국에 제시했습니다.
그렇게해서 코틴의 시제작(試製作)은 SMK, T-100과 치열한 경쟁(競爭)을 벌였는데,
11월 30일 소련의 침공으로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실전(實戰) 테스트를 벌였습니다.
↑76mm F-32 전차포를 장착한 KV-1 전차
SMK은 투입 직후 핀란드군이 축성(築城)한 함정에 돈좌(頓挫)되었습니다.
너무 덩치가 커서 자력 탈출(自力脫出)은커녕 구난(救難)도 불가능(不可能)해 현장에서 파괴(破壞)시켰습니다. 때문에 같은 구조의 T-100은 투입(投入)이 유보(留保)되었습니다.
반면 코틴의 시제작은 손쉽게 진지 점령에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양산형(量産形)으로 코틴의 제안(除案)이 채택(採擇)되었고 당시 소련의 국방상(國防相)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 1881년 1월 23일~1969년 12월 2일)의 이름을 따서 KV 전차(이하 KV)로 명명(命名)되었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