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韓國戰爭) 초반에 국군(國軍)은 북괴군(北傀軍)이 남침전면(全面南侵)에 내세운 T-34 전차(戰車)에 호되게 당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 자료(資料)에서 묘사(妙思)된 것처럼 전혀 모르던 무기(武器)가 갑자기 등장(登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군은 전차가 어떤 무기인지 그리고 북괴군이 보유(保有)하고 있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949년 10월에 대항용(對抗用)으로 3개 대대 분의 M26 전차 193대를 지원(支援)해 달라고 미국 군사고문단(軍事顧問團)에 요청(要請)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전쟁 초기에 북괴군의 T-34에 호되게 당했습니다
미국은 '한반도 지형(韓半島地形)은 전차 운용(戰車運用)에 부적합(不適合)하고 북한군이 보유한 전차도 그리 많은 양(量)이 아니다'며 지원을 거부(拒否)했는데, 배후(背後)에서 남침을 지원한 소련도 사실 같은 입장(立場)이었습니다.
그들도 미국과 같은 이유로 500대를 지원해달라는 북한의 요청(要請)을 거부하고 242대만 공급(供給)했습니다.( 관련글 참조 ) 우리가 한 대도 없었기에 상대적(相對的)으로 많다고 느낄 뿐이지 사실 전면전(全面戰)을 치루기에는 부족(不足)한 수량(數量)이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격파된 북괴군 T-34
물론 수량이 적어도 집단화(集團化)해서 돌파(突破)의 핵(核)으로 삼으면 효과(效果)를 극대화(極大化)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북괴군은 그럴만한 역량(力量)이 없었습니다.
전차는 보병(步兵)의 지원을 받아야 제대로 효과(效果)를 발휘(發揮)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러려면 보병이 전차와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즉, 충분(充分)한 이동 수단(移動手段)이 필요(必要)한데, 북괴군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전차가 대부분 보병의 걸음 속도(速度)에 맞춰서 움직여야 했고 그만큼 애를 먹었습니다.
↑M4 전차와 함께 이동 중인 M2 하프트랙
그런데 장비(裝備)가 많은 UN군이 북진(北進)에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작성(作成)된 지도(地圖)에 표시(表示)된 도로(道路)는 대부분 소로(小路)거나 오솔길이어서 차량(車輛)이 통과(通過)하기 어려웠습니다.
일일이 길을 개척(開拓)하고 나가야 해서 굳이 전차와의 협조(協助) 여부를 떠나 쉽게 병력(兵力)을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이 필요(必要)했습니다.
사실 이는 한국전쟁을 통해 처음 깨달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전차가 탄생(誕生)한 직후(直後)부터 논의(論意)되던 사항(事項)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유니버설 캐리어를 타고 격파된 T-34 옆을 지나는 영국군
제2차 대전 중에는 하프트랙이나 트럭 등이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반도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어느덧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지구상의 어디에서도 싸울 수 있어야 했습니다.
다양한 지형을 고려하면 계속 하프트랙이나 트럭을 사용하기는 무리였습니다.
오히려 이런 고민은 미국보다 지상군의 역할이 컸던 소련이 더 했기에 이미 새로운 수단의 개발에 나선 상태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사용된 영국군의 경장갑차(輕裝甲車).
일단 외형(外形)은 APC를 연상(聯想)케하지만,
크기가 작고 병력 수송(兵力輸送)뿐 아니라 여러가지 다양(多樣)한 목적(目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소형다목적 궤도 장갑차량 (小形多目的軌道裝甲車輛)으로 보는 게 옳다.
M3 하프트랙이나 Sd.Kfz. 251 등의 인원수송용 하프트랙 장갑차와 같은 목적의 차량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장갑을 두르고 궤도를 단 지프에 가까운 장비였다.
APC처럼 병력수송을 포함해 정찰(偵察)이나 야포 견인(野砲牽引) 등의 다양한 임무(任務)에 투입(投入)되었다.
↑미국이 최초로 제식화한 APC인 M75
그렇게 탄생(誕生)해서 오늘날 전차와 더불어 기갑부대(機甲部隊)의 중추(中樞)를 담당하는 무기가 APC(병력수송장갑차)입니다.
미국은 제2차 대전 종전 직전(終戰直前)에 M18 구축전차 차체(驅逐戰車車體)를 기반(基盤)으로 24명의 보병(步兵)이 탑승 가능(搭乘可能)한 완전 밀폐 구조(完全密閉構造)의 T16을 제작(製作)했으나 너무 무겁고 크다며 채택(採擇)이 불발(不發)된 상태였습니다.
바로 그때 한국전쟁의 결과가 채찍으로 작용(作用)하면서 이를 후속(後屬)할 T18의 개발(開發)이 시작되었습니다.
↑T16은 너무 크고 무거워 채택이 불발되었습니다
완전 밀폐 구조는 승계(乘戒)하되 크기를 줄여 3명의 승무원(乘務員) 외에 14명의 병력이 탑승할 수 있었고 마운트에 방어용 기관총(防禦用機關銃)을 장착(裝着)했습니다.
1952년 T18E1이 완성되어 각종 실험(實驗)을 거쳐 M75라는 제식명(制式名)으로 양산(量産)에 들어갔고 곧바로 한반도(韓半島)에 투입(投入)되었습니다.
그런데 본격적(本格的)으로 배치(配置)가 시작된 1953년에 이르러 한국전쟁은 현재의 휴전선(休戰線) 일대에서 현지(現地)를 사수(死守)하는 고지전(高地戰)으로 바뀐 상태(狀態)였습니다.
↑M75은 생산량도 많지 않고 활동 기간도 짧았지만 후속 APC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정작 의도(意圖)대로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무게가 20톤 가까이되어 하천(下川)이 많은 한반도에서 도하(渡河) 문제 등의 약점(弱點)이 드러나며 1954년 후속작(後屬作)인 M59가 등장하자 1,729대를 끝으로 제작(製作)이 종료(終了)되었습니다.
하지만 M75의 구조(構造)나 개념(槪念)은 베스트셀러인 M113을 거쳐 오늘날 미군의 주역 IFV인 M2 브래들리까지 이어질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비록 생애는 짧았지만, 서방 APC의 기본(基本)을 완성(完成)한 기념작(記念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처] 미국 APC의 아버지*|작성자 augu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