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포기(抛棄)할 수 없는 항전(抗戰)
1940년 5월 10일,
마침내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侵攻)했습니다.
개전(開戰)을 결정(決定)했던 히틀러가 정작 직전(直前)까지 무려 9차례나 작전(作戰)을 연기(延期)했을 만큼 독일에게 프랑스는 두려운 상대(相對)였습니다.
그 누구보다 프랑스에 대한 복수심(復讐心)이 컸던 독일 군부(軍部)가 개전을 반대(反對)했을 정도였습니다.
불과 20년 전에 있었던 제1차 대전에서 4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싸웠지만 패(敗)했기에 독일의 이러한 신중(愼重)한 태도(態度)는 당연(唐捐)했습니다.
↑프랑스를 침공 중인 독일 기갑부대
그런데 모두의 예상(豫想)을 깨고 불과(不過) 6주(週) 만에 프랑스를 완벽(完璧)하게 굴복(屈伏)시켰습니다.
이 놀라운 결과(決科)로 말미암아 전쟁사(戰爭史)에는 독일이 이룬 전격전(電擊戰)에 대한 찬사(讚辭)가 가득(稼得)합니다.
한마디로 전쟁(戰爭)의 신기원(新紀元)이 열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聯合軍)의 한심함이 승패(勝敗)를 결정(決定)지은 가장 중요(重要)한 요소(要所)였습니다.
일단 전력(戰力)이 앞섰을 뿐만 아니라 방어(防禦)에 임하는 형국(形局)이었기에 전략적(戰略的)으로 우세(優勢)한 위치(位置)였음에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敗)했기 때문입니다.
↑격파된 프랑스군 전차 잔해
패전 직전(敗戰直前)에 떠밀리다시피 정권(政權)을 넘겨 받고 독일과 종전 협상(終戰協商)에 나선 페탱(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 1856년 4월 24일~1951년 7월 23일)의 비시정부(Vichy France)는 강화조약(講和條約)이 체결(締結)된 직후에 영국과의 동맹(同盟)을 파기(破棄)하고 중립(中立)을 선언(宣言)했습니다.
말이 중립이지 새로운 프랑스가 독일의 괴뢰국(傀儡國)임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904년 영불협상(英佛協商)을 맺으며 한 배에 올라탔고 제1차 대전 당시에 엄청난 피(血)를 함께 흘렸던 세계 최강(世界最强)의 동맹이 37년 만에 와해(瓦解)되었습니다.
↑기본을 망각하면서 프랑스는 불과 6주 만에 굴복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상태에서 이기기를 바란다는 것은 만용(曼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독일보다 강한 전력을 보유(保有)한 연합국이 어이없게 패한 것은 이처럼 기본(基本)을 무시(無視)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사(戰史)에는 독일의 독창적(獨創的)인 전략(戰略)으로 놀라운 결과(決科)가 나온 것으로 설명(說明)하지만 기본도 지키지 않았던 연합군의 무능(無能)이 더 큰 이유(理由)였습니다.
그래서 1940년 5월에 있었던 프랑스 전역(全域)은 두고두고 역사(歷史)의 교훈(敎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1940년 10월 24일 히틀러와 만나는 페탱
이제부터 영국은 홀로 싸워야 했습니다.
30여 만의 대륙 원정군(大陸遠征軍)이 프랑스 패망(敗亡) 직전에 본토(本土)로 도주(逃走)하는데 성공(成功)했으나 됭케르크(Dunkirk) 해안가(海岸街)에 대부분 장비(裝備)를 내팽개치고 왔기에 전력(戰力)이 심각(心覺)히 손상(損傷)된 상황(狀況)이었습니다.
사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대륙원정군이 영국 본토의 유일(有一)한 지상군 전력(地上軍戰力)이었으므로 방위(防衛)를 맨손으로 해야 할 위기(危機)였습니다.
독일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지 최대한(最大限) 전력을 확충(擴充)해야 했습니다.
↑됭케르크 해안가에 유기된 영국군 장비들
우려(憂慮)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본토에 대한 독일의 대대적(大大的)인 공습(攻襲)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대전에서 연합국(聯合國)이 승리(勝利)하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役割)을 담당(擔當)했으나 당시에 미국은 중립(中立)이었고 소련은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은 독일의 동맹(同盟)이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와중(渦中)에도 불구(不久)하고 유일(有一)하게 영국 편에서 붙어서 싸우는 존재(存在)는 드골(Charles André Joseph Marie de Gaulle, 1890년 11월 22일~1970년 11월 9일)이 이끄는 자유(自由)프랑스였습니다.
↑자유프랑스군을 시찰하는 드골
↑영국 런던에 망명한 자유프랑스를 이끈 드골
영국은 드골을 수반(首班)으로 런던에 성립(成立)된 망명 정부인 자유프랑스를 합법 정부(合法政府)로 인정(認定)했던 반면(反面) 제2차 대전에 참전 전(參戰前)까지 미국은 자유프랑스를 일종(一種)의 무장 단체(武裝團體)로 취급(取扱)하고 비시 정권을 합법 정부로 인정 하는듯한 태도(態度)를 견지(見至)했을 만큼 나름대로 외교력(外交力)도 살아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表面的)인 모습에도 불구(不久)하고 비시 정부는 프랑스의 자주(自主)를 수호(守護)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거창(巨創)한 명칭(名稱)과 달리 단지 소수(小數)의 망명객 단체(亡命客團體)에 불과해서 군사적(軍事的)으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처칠은 이들을 망명 정부(亡命政府)로 인정(認定)했으나 대등(對等)한 대화 상대(對話相對)로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반면 당시 비시정부는 모두가 꼭두각시로 보았음에도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가 승인(承認)했을 만큼 국제적(國際的)인 위상(位相)이 컸습니다.
상당한 무력(武力)까지 보유(保有)했는데 해군(海軍)의 수상전력(水上戰力)은 오히려 독일보다 강(强)했습니다.
↑처칠은 드골을 대등한 상대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일은 프랑스의 변심(變心)에 대한 일말(一抹)의 의심(疑心)을 거두지 않고 만일을 대비(對備)해 비시정부가 관리(管理)하는 프랑스 남부 지역(南部地域)을 점령(占領)하기 위한 아틸라 작전[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1940년 휴전협정(休戰協定) 후 수립(樹立)된 비시 프랑스의 통치지역(統治地域)까지 점령]하려던 계획(計劃), 안톤 작전[나치 독일은 비시 프랑스가 배신(背信)할 경우 강제(强制)로 합병(合倂)한다는 아틸라 작전]처럼 별도(別到)의 군사 계획(軍事計劃)을 수립(樹立)해 놓았습니다.
비록 독일에게 패(敗)했어도 프랑스는 전 세계에 많은 식민지(植民地)를 경영(經營)하던 제국주의 국가(帝國主義國家)였습니다.
때문에 본토(本土)에서 총성(銃聲)이 그친 것과 별개(別個)로 식민지들이 비시정부를 지지(支持)하고 따를 것인지는 미지수(未知數)였습니다.
↑비시 프랑스 정부의 통치 지역
프랑스 남부 및 본토와 가까운 알제리(Algeria)와 모로코(Moroco)를 직접 관할(直接管轄)하던 비시 프랑스는 이들 지역에 대한 행정력(行政力), 경찰력(警察力)은 물론 군사력(軍事力)까지 보유하였고 대외적(對外的)으로는 절대 중립(絶對中立)이라고 천명(闡明)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독일의 간섭(干涉)과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아무리 그렇다고 비시 프랑스가 영원히 충성(忠誠)을 다할 것이라고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페탱을 수반으로 하여 정부를 수립하고 국기 게양식을 하는 모습
때문에 독일은 이미 정전(停戰) 당시에 비시 프랑스에 대한 침공(侵攻)계획을 수립하여 두고 있었고 상황 발생시(狀況發生時) 즉각 실행(實行)에 옮기도록 만반(萬般)의 준비(準備)를 완료(完了)한 상태였습니다.
구체적(具體的)으로 독일이 단독(單獨)으로 작전을 펼치는 '아틸라작전(Operation Attila)'과 다른 추축국(樞軸國)을 끌어들여 비시 프랑스를 침공하는 '안톤작전(Case Anton)' 등이 있었습니다.
↑독일은 비시정부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때 드골이 세(勢)를 늘리고자 적극적(積極的)으로 식민지 설득(植民地說得)에 나섰습니다.
이에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赤道 Africa) 현 차드(Chad), 가봉(gabonaise), 콩고(Congo)공화국, 카메룬 (Cameroon) 등이 자유프랑스 편에 섰습니다.
비시정부 입장(立場)에서는 엄연(奄然)히 반역(反逆)이었으나 현실적(現實的)으로 본토(本土)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을 통제(統制)할 수 있는 방법(方法)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히틀러는 심기(心氣)가 불편(不便)했고 페탱은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가 항복(降伏)한 직후(直後)인 7월 3일, 커다란 사건(事件)이 벌어졌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