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 팥죽 문화 >/구연식
<동짓날 시골 핕죽>
우리 민족은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샤머니즘 격인 의식이 대종을 이루었다.
의식주 해결은 농자천하지대본이 삶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농사 날씨를 좌우하는 태양계의 24절기에 맞춰 농사 월령을 정해 놓고, 씨 뿌림과 가꾸고 거두어들임을 했다. 동지는 겨울의 중심이며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 새봄을 대비하려는 농경민족 의식의 절기이며 작은 설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게 동지 팥죽은 우리 민족 세시풍속의 전통음식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오늘은 동짓날이다. 새벽부터 함박눈을 온종일 쉴 새 없이 퍼부어 휴일인데도 모든 사람을 꽁꽁 묶어 가두어 놓는다. 아마도 각자 집에서 차분히 동지 팥죽이나 쑤어 먹으라는 가 보다.
그 옛날 부모님은 밭에서 거두어들인 팥을 도리깨로 타작하여 햇볕에 불볕나게 말려 시렁에 보관하여 명절 음식 장만 때 긴요하게 썼다.
동짓날에는 찹쌀을 미리 물에 불려 절구에 곱게 빻아 찹쌀가루를 만들어 반죽한다. 온 가족이 빙 둘러앉아 새알심을 만들어 상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원래 새알심은 가족 나이 수만큼 만든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훨씬 많고 넉넉하게 만든다. 사랑방 큰 가마솥에는 많은 식구가 한 끼라도 더 늘여 먹기 위하여 풍덩하게 팥죽 물을 붓고 끓인다. 팥죽 물이 걸쭉해지면서 여기저기 큰 기포가 솟아나면 어머니는 새알심을 붓고 엉키지 않도록 주걱으로 여러 번 휘저은 후에 솥뚜껑을 닫고 센 김과 솥 물이 흘러내리면 팥죽 끓임을 마친다.
이렇게 만든 팥죽을 어머니는 뒤뜰 장독 위에 정갈하게 한 그릇 올려놓고, 앞마당 가운데도 깨끗한 짚풀을 깔고 한 그릇을 올려놓으며 가족의 무병장수와 만복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바가지에 붉은 팥죽 물을 넉넉히 담아서 청솔 개비로 풍덩 적셔 온 집 밖 벽과 골목 담벼락까지 뿌리면서 악귀를 내쫓는 액땜의식을 했다.
옛날부터 붉은색은 벽사의 의미로 곡식 중에서 팥이 유일하여 혼례식 때 하객들은 신랑·신부에게 붉은 통팥을 한 줌씩 던져 잡귀를 물리치는 의식도 있었다. 동짓날 팥죽도 같은 의미의 내용으로 본다.
그 옛날 함박눈을 흠뻑 뒤집어쓴 송이버섯 초가지붕 위로 고물고물 올라가는 팥죽 쑤는 정답던 굴뚝 연기도 사라졌다. 집 모퉁이 들어서면 담벼락에 부적처럼 뿌려졌던 팥죽 얼룩도 이제는 비바람에 씻기어 흔적도 없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다. 세시 풍속의 민족문화는 까탈스러운 과학의 증명 이전에 민족끼리 이어질 수 있었던 삼 줄 같은 질긴 인연의 민족 얼이었다.
비단 옷감은 하찮은 실오라기 한 올 한 올이 날줄과 씨줄로 엮어져서 금상첨화를 만들어낸다.
위대한 민족은 통치가의 권모술수가 아니라, 민족의 혼이 함축된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실개천에서 대하를 이루어 국운을 상징하는 강물로 흐른다.
국가 천년대계는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의 정치학이 아니라, 민족문화를 강조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를 믿고 싶다. 타고르는 우리 민족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칭송하지 않았던가?
나는 위대한 민족문화 학자는 아니지만, 먼지투성이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생각으로는 남들 보기엔 하찮은 민족문화라 할지라도 훼손되고 사라지는 것이 나의 살점처럼 애처롭다.
내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 온 지가 13년째이다. 그런데 해마다 동짓날이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고 넉넉한 큰 그릇에 새알심도 적당히 넣어 걸쭉한 팥죽을 보온도 잘되고 예쁘게 포장하여, 담은 팥죽을 아파트 출입문 손잡이에 걸어놓고 간다. 처음에는 잘못된 택배로 알고, 시간 되면 잘못 배달된 택배를 가져갈 거라고 했는데, 아파트 옆집에서 몇 년째 보내주고 있다. 더구나 나의 생일이 동지 전·후 이어서 때로는 생일 선물로 착각할 때도 있었다.
그 시절 어머니가 끓여주던 팥죽 맛은 아니어도 우리보다 젊은 세대여서 옛 맛에 새로운 맛을 더한 감칠맛이어서 더없이 고맙고 맛이 있다.
아파트 북쪽 창을 열면 고향 미륵산과 용화산이 언제나 어깨를 맞대고 바라본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그리울 때면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의 두 젖가슴 같아 여기까지 젖 내음이 난다. 때로는 어머니와 아버지로 착각하여 괴로우면 달래주는 것 같고, 즐거우면 축하해 주는 것 같아 나에는 시골집 안방에 걸려있는 부모님 흑백초상화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도 이웃이 보낸 동짓날 팥죽 새알심을 젓가락으로 콕 찍어 떨어지는 팥물은 입으로 받아먹으면서 새알심이 먹기 아까워서 들고만 서 있다. 북쪽 창문을 열고 함박눈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다가 없어지는 미륵산과 용화산을 바라보며 그 옛날 팥죽 끓이는 고향마을 어머니 품에 잠겨 본다. (2024.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