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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있는 글과 문학

그 섬에 가면 양 미 경

작성자이상목|작성시간26.06.05|조회수25 목록 댓글 0

그 섬에 가면

 

양 미 경

 

 

 차라리 섬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복잡한 인연과 갈등을 훨훨 털고 세상만사와 아득히 멀어진 그런 섬이고 싶다.

실타래 같은 인연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나는 무작정 차를 몰고 나섰다. 내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섬에 살다가 그대로 섬이 된 옛사람의 유적이 있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남해안의 명물로 자리 잡은 초양대교와 늑도대교를 지나서 앵강만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물빛이 너무 맑고 푸르렀다. 눈길을 들어 수평선을 향하니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다. 푸른 물결에 저 홀로 떠 있는 섬들은 고독해 보였고 슬퍼 보였다.

 

 옛날,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정객들은 대부분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들에겐 언젠가는 돌아갈 육지가 있다는 것이 하루하루를 견디는 희망이었을 터. 그때의 육지란 권력의 땅이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숨 쉬는 곳이었을 것이다. 저곳에서 그들은 부귀영화를 잊지 못해 괴로워했을까? 아니면 인간사 부질없음을 깨닫고 해탈했을까?

 

 얼마나 달렸을까. 목적지의 푯말이 보인다. 백련마을이다. 두어 개의 횟집과 텃밭을 낀 집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 해안으로 낚싯배들이 오고 나가는데 마을 바로 앞에 작은 섬 하나가 떠 있다.

노를 많이 생산하여 노도라고 불렸다는 그 섬엔 열서 너 채의 집이 무료하게 엎드려 있다. 저곳이 바로, 삼백여 년 전 서포 김만중 선생이 삼 년 동안 가극안치 되었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서포만필≫과 어머니께 바치는 ≪구운몽≫을 집필했다 한다.

 

 ≪구운몽≫의 배경이 된 짙푸른 앵강만은 전설을 안은 채 묵묵히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여덟 선녀를 거느리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희롱하던 길고 긴 한 생이 사실은 젊은 스님의 일장춘몽이었다는.

서포 선생은 이 앵강만 푸른 파도 위에 삶이란 일장춘몽임을, 사람이란 파도에 떠밀리는 섬처럼 고독한 존재에 불과한 것임을 실어 보냈으리라.

 

 이곳 사람들은 그를 ‘묵고노자 할배’로 불렀다 한다. 선생이 손수 파놓은 옹달샘의 물을 마시고 솔잎피죽으로 근근이 연명하면서도 당최 일이라곤 안해서 그런 별칭이 붙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당신 한 입 부양하는데 무슨 대단한 노동이 필요했겠는가. 수평선을 바라보는‘묵고노자 할배’의 눈빛은 푸른 바다를 닮지 않았을까. 인간사의 온갖 질곡과 신산고초의 거대한 파도가 한낱 물거품 되어 부서질 때 비로소 가질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을 것이다.

 

 백련마을에서 통통배를 타고 노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해안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절경이었다. 선착장의 간이 도크에서는 나이든 부부가 2톤 남짓한 배를 손보고 있을 뿐, 시간도 바람도 정지된 듯했다.

선착장에 내려 먼저‘김만중 유허비’를 보고 언덕 위의 집터와 허묘를 찾아 나섰다. 바다와 파도소리를 등에 지고 언덕을 오르다보니 폐교가 하나 있다. 아이들이 뛰놀던 운동장에는 잡초와 풀들이 자랐고 응석을 받아주던 놀이기구들은 제멋대로 나뒹굴었다.

 한쪽 나사가 빠져 삐거덕거리는 그네를 몇 번 흔들어보고는 그곳을 나왔다. 등 뒤에서 꼬마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섬에 머무는 두 시간 동안 이상하게도 아이들을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 대다수의 집들은 빈집인 채로 을씨년스럽다.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보니 계단이 나왔고, 그 너머 키 큰 잡초를 헤집고 들어가 보니 집터와 묏자리인 듯한 공터가 있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의 말대로 인생이란 봄날에 꾸었던 한낱 꿈인 것일까. 서포는 일찍이 진사에 합격했고 병조판서를 거쳐 두 번이나 대제학까지 지냈지만, 당파의 희생양이 되어 외로운 섬 노도에서 병사하시고 말았다.

 

 내려오는 길에 그제야 사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낮은 담 너머로 노인 두 분이 나를 멀끔히 쳐다보고 계셨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들은 나를 구경할 만큼 신기했던 모양이다. 퇴락한 섬에 하릴없이 중년의 도시 여자 하나가 왔다는 것이, 아마 나를 묵고노자 아지매쯤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문득 일장춘몽은 인생에만 해당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십여 년 전만 해도 이 섬엔 사람들로 활기가 넘쳤을 것이다. 저녁이 되면 동구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부르는 엄마의 소리도 있었고, 대문 안에서는 아이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도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사라 진지 오래. 섬을 지키는 저 노인들마저 사라지고 나면 이 섬은 적막의 땅이 되고 말 텐데….

 

 그러면 섬도 따라서 죽는 것 아닐까? 아니, 사람을 다 떠나보내고 나면 섬은 그때 비로소 참다운 섬이 되는 게 아닐까. 인간의 욕망이 사라진 땅, 오직 물새와 들꽃과 바람만으로 가득한 땅, 그게 섬의 본연의 모습이 아닐는지.

 

 가벼운 마음으로 백련마을로 돌아왔다. 차에 앉았다. 시동을 걸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누구에게 걸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면 어떠랴, 어차피 독백인 것을.

 '지금은 안개 속,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안개란 해가 떠오르면 걷히는 것이며, 안개가 짙은 날은 쾌청한 날의 징조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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